[단독] “동족 학살·독립군 체포”…간도참변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발굴
입력 2021.03.01 (21:18)
수정 2021.03.02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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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금부터는 KBS가 최초로 발굴해 취재한 내용,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의 거대한 동력은 한반도를 넘었습니다.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그리고 이듬해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전으로 이어집니다.
일제는 곧바로 보복에 나섭니다.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바로 '간도참변'입니다.
KBS가 발굴한 이 문서, 오늘(1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재간도일본총영사가 결재했다고 표기돼 있습니다.
학살의 현장, 간도참변에 동참했던 한국인 경찰관들의 공적을 적은 일본 외무성 문서입니다.
일제에는 충실한 경찰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겐 동포를 붙잡고 살해하는 데 가담한 반역자들이었습니다.
KBS는 이 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참상을 돌아보는 한편, 경찰의 '친일 청산' 작업은 어디까지 왔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홍진아 기자입니다.
[리포트]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그 보복으로 독립군을 말살하겠다는 명목으로 간도 지역 한인 마을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독립신문에 기술된 간도참변 희생자 규모는 3천 명이 넘습니다.
[신주백/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 “어린이부터 노약자까지 남성은 모두 다 한곳에 모아서 학살하는 형태를 취했고요. 총알이 아까워서 칼이나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KBS는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이 적힌 일본 외무성 문서를 최초 발굴했습니다.
일제가 이들에게 상훈을 주기 위해 작성한 600쪽 분량의 문서인데, 꼭 백 년 전인 1921년 3월 1일 결재됐다고 나옵니다.
“순사 박양운, 무장 독립군 7명을 붙잡은 공로가 크다.”
“순사 허린, 어두운 밤과 혹한을 무릅쓰고 13시간에 걸쳐 소탕 작전에 동참해 다수를 체포했다. 공적이 지대하다.”
이들이 체포한 한국인 가운데는 훗날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들도 확인됩니다.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강 선생.
1920년 11월 간도참변 당시 일본 경찰에 피살됐습니다.
한국인 순사 김학원은 김강 선생 체포에 공적이 현저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마을에 침입해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합니다.
“순사 백원장, 무봉촌, 의봉촌 등 각 부락의 초토에 종사했다.”
“순사 박원식, 장암촌 부근에서 소탕하는 동안 한국인 조사, 가택 수색에 용감히 행동한 공적이 인정된다.”
독립군이 숨겨놓은 무기를 수색해 압수하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었습니다.
“엄청나게 쌓인 눈을 치우고, 지하로 60센티미터를 파내 마침내 보병총 35자루를 발견해 압수했다. 나정섭 순사가 열심히 찾은 결과다.”
“임기홍. 왕복 3킬로미터를 밤낮 가리지 않고 달려 독립운동에 사용된 말 한 마리를 노획해 왔다.”
[김광만/KBS 객원연구원 : “(간도참변에 참가한) 조선인 경찰들에 대한 업적을 현장에 있었던 부대장, 토벌 대장들이 공적서를 써주고 그것을 다시 간도 총영사관이 취합한 다음에 그걸 외무성에 보고를 한 거예요.”]
공적서에는 이들이 종로서, 용산서, 동대문서, 청주서 등 전국 각지 경찰서에서 차출됐다고 나와 있습니다.
[김주용/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 “간도대학살 때 군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경찰이 참여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했고요.”]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증보판’ 발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KBS가 발굴한 이들의 이름을 올리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 “독립운동가 체포, 탄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고요. 적지 않은 수가 친일인명사전 개정 증보판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간도참변 당시 체포된 것으로 기록된 한국인도 17명이나 확인됐습니다.
이 가운데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건 4명에 불과합니다.
KBS는 이번에 발굴한 자료를 보훈처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KBS 뉴스 홍진아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 배정철/영상편집:차정남/자료:영화 ‘봉오동 전투’
[단독] ‘민족 반역’ 대가로 상 받고 진급…경찰 ‘친일 역사’ 청산했나?
[앵커]
KBS 취재진은 이번 발굴 자료에 등장하는 경찰관들의 이후 행적도 추적해봤습니다.
간도참변의 공적을 인정받아 일제의 상훈을 받거나, 진급한 기록이 여러 건 확인됐습니다.
독립군을 잡던 경찰은 해방 이후에도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등 '친일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럼, 이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경찰은 친일의 역사를 얼마나 반성하고 청산해왔는지 계속해서 송락규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KBS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 48명의 행적을 추적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상훈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으로만 9명입니다.
순사 백창돈, 충북 청주경찰서로 돌아왔다가 1930년 제천경찰서로 옮긴 게 확인됩니다.
퇴직 뒤 연금도 수령했다고 나옵니다.
경부보 최태욱.
간도참변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1926년 경부보에서 경부로 한 계급 승급했습니다.
[김민철/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하는 경우는 조금 특수한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20년대에 조선인 경부가 도에 한 명 정도거든요.”]
KBS는 이들의 행적을 추가로 확인하기 위해 경찰청에 질의서를 보냈습니다.
경찰은 인사관리시스템상 연관성이 있는 걸로 보이는 인물이 검색되지 않는다며, 인사기록이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도 경찰이 확보하지 못한 기록들이 확인됩니다.
중부경찰서 소속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한 순사 장국환.
취재진은 해방 후인 1952년 정부가 발간한 대한민국 직원록에서 경기도 경찰 간부로 재직한 동일한 이름을 찾았지만, 정작 경찰 인사기록엔 빠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초대 경찰청장 격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청사에 세웠습니다.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밝히는 차원이었습니다.
[민갑룡/2018년 당시 경찰청장 : “백범 선생님께서 남기신 애국안민의 신경찰이 되라는 가르침을 되새기고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2년이 지난 지금, 친일 잔재 청산은 얼마나 이뤄졌을까.
KBS가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 조사해 봤습니다.
역대 청장과 서장 중 70여 명이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인물인데 별다른 언급 없이 그대로 올라와 있습니다.
일부 경찰서 건물에는 친일 경찰의 사진이나 이름이 내걸려 있기도 합니다.
반면 경기도의 경우 지난해부터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은 약력에 친일 관련 기록을 병기하고 있습니다.
[김홍국/경기도 대변인 : “초상화를 뺀다거나 아예 삭제하는 그런 방식보다는 역사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초상화를 그대로 두고요. 거기에 친일 이력을 병기했습니다.”]
경찰은 2019년 역사기록 전담팀까지 꾸렸지만 독립운동 참가 경찰만 발굴했을 뿐, 친일의 역사에 대해선 내놓은 성과가 전무합니다.
이에 앞서 2005년에도 과거 반민족 행위를 기록하는 새로운 경찰 역사서를 발간하려 했지만, 지금까지도 진척이 없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자신의 성과를 내세우기에 급급하고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오, 독립에 대한 탄압, 민주에 대한 탄압, 반민특위 와해라고 하는 역사적 죄책에 대해서는 한 번도 철저한 반성이 없었고….”]
해방 후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도 대한민국 경찰이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공식 사과는 없습니다.
KBS 뉴스 송락규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그래픽:최창준
지금부터는 KBS가 최초로 발굴해 취재한 내용,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의 거대한 동력은 한반도를 넘었습니다.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그리고 이듬해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전으로 이어집니다.
일제는 곧바로 보복에 나섭니다.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바로 '간도참변'입니다.
KBS가 발굴한 이 문서, 오늘(1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재간도일본총영사가 결재했다고 표기돼 있습니다.
학살의 현장, 간도참변에 동참했던 한국인 경찰관들의 공적을 적은 일본 외무성 문서입니다.
일제에는 충실한 경찰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겐 동포를 붙잡고 살해하는 데 가담한 반역자들이었습니다.
KBS는 이 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참상을 돌아보는 한편, 경찰의 '친일 청산' 작업은 어디까지 왔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홍진아 기자입니다.
[리포트]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그 보복으로 독립군을 말살하겠다는 명목으로 간도 지역 한인 마을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독립신문에 기술된 간도참변 희생자 규모는 3천 명이 넘습니다.
[신주백/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 “어린이부터 노약자까지 남성은 모두 다 한곳에 모아서 학살하는 형태를 취했고요. 총알이 아까워서 칼이나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KBS는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이 적힌 일본 외무성 문서를 최초 발굴했습니다.
일제가 이들에게 상훈을 주기 위해 작성한 600쪽 분량의 문서인데, 꼭 백 년 전인 1921년 3월 1일 결재됐다고 나옵니다.
“순사 박양운, 무장 독립군 7명을 붙잡은 공로가 크다.”
“순사 허린, 어두운 밤과 혹한을 무릅쓰고 13시간에 걸쳐 소탕 작전에 동참해 다수를 체포했다. 공적이 지대하다.”
이들이 체포한 한국인 가운데는 훗날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들도 확인됩니다.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강 선생.
1920년 11월 간도참변 당시 일본 경찰에 피살됐습니다.
한국인 순사 김학원은 김강 선생 체포에 공적이 현저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마을에 침입해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합니다.
“순사 백원장, 무봉촌, 의봉촌 등 각 부락의 초토에 종사했다.”
“순사 박원식, 장암촌 부근에서 소탕하는 동안 한국인 조사, 가택 수색에 용감히 행동한 공적이 인정된다.”
독립군이 숨겨놓은 무기를 수색해 압수하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었습니다.
“엄청나게 쌓인 눈을 치우고, 지하로 60센티미터를 파내 마침내 보병총 35자루를 발견해 압수했다. 나정섭 순사가 열심히 찾은 결과다.”
“임기홍. 왕복 3킬로미터를 밤낮 가리지 않고 달려 독립운동에 사용된 말 한 마리를 노획해 왔다.”
[김광만/KBS 객원연구원 : “(간도참변에 참가한) 조선인 경찰들에 대한 업적을 현장에 있었던 부대장, 토벌 대장들이 공적서를 써주고 그것을 다시 간도 총영사관이 취합한 다음에 그걸 외무성에 보고를 한 거예요.”]
공적서에는 이들이 종로서, 용산서, 동대문서, 청주서 등 전국 각지 경찰서에서 차출됐다고 나와 있습니다.
[김주용/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 “간도대학살 때 군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경찰이 참여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했고요.”]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증보판’ 발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KBS가 발굴한 이들의 이름을 올리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 “독립운동가 체포, 탄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고요. 적지 않은 수가 친일인명사전 개정 증보판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간도참변 당시 체포된 것으로 기록된 한국인도 17명이나 확인됐습니다.
이 가운데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건 4명에 불과합니다.
KBS는 이번에 발굴한 자료를 보훈처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KBS 뉴스 홍진아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 배정철/영상편집:차정남/자료:영화 ‘봉오동 전투’
[단독] ‘민족 반역’ 대가로 상 받고 진급…경찰 ‘친일 역사’ 청산했나?
[앵커]
KBS 취재진은 이번 발굴 자료에 등장하는 경찰관들의 이후 행적도 추적해봤습니다.
간도참변의 공적을 인정받아 일제의 상훈을 받거나, 진급한 기록이 여러 건 확인됐습니다.
독립군을 잡던 경찰은 해방 이후에도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등 '친일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럼, 이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경찰은 친일의 역사를 얼마나 반성하고 청산해왔는지 계속해서 송락규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KBS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 48명의 행적을 추적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상훈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으로만 9명입니다.
순사 백창돈, 충북 청주경찰서로 돌아왔다가 1930년 제천경찰서로 옮긴 게 확인됩니다.
퇴직 뒤 연금도 수령했다고 나옵니다.
경부보 최태욱.
간도참변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1926년 경부보에서 경부로 한 계급 승급했습니다.
[김민철/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하는 경우는 조금 특수한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20년대에 조선인 경부가 도에 한 명 정도거든요.”]
KBS는 이들의 행적을 추가로 확인하기 위해 경찰청에 질의서를 보냈습니다.
경찰은 인사관리시스템상 연관성이 있는 걸로 보이는 인물이 검색되지 않는다며, 인사기록이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도 경찰이 확보하지 못한 기록들이 확인됩니다.
중부경찰서 소속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한 순사 장국환.
취재진은 해방 후인 1952년 정부가 발간한 대한민국 직원록에서 경기도 경찰 간부로 재직한 동일한 이름을 찾았지만, 정작 경찰 인사기록엔 빠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초대 경찰청장 격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청사에 세웠습니다.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밝히는 차원이었습니다.
[민갑룡/2018년 당시 경찰청장 : “백범 선생님께서 남기신 애국안민의 신경찰이 되라는 가르침을 되새기고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2년이 지난 지금, 친일 잔재 청산은 얼마나 이뤄졌을까.
KBS가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 조사해 봤습니다.
역대 청장과 서장 중 70여 명이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인물인데 별다른 언급 없이 그대로 올라와 있습니다.
일부 경찰서 건물에는 친일 경찰의 사진이나 이름이 내걸려 있기도 합니다.
반면 경기도의 경우 지난해부터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은 약력에 친일 관련 기록을 병기하고 있습니다.
[김홍국/경기도 대변인 : “초상화를 뺀다거나 아예 삭제하는 그런 방식보다는 역사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초상화를 그대로 두고요. 거기에 친일 이력을 병기했습니다.”]
경찰은 2019년 역사기록 전담팀까지 꾸렸지만 독립운동 참가 경찰만 발굴했을 뿐, 친일의 역사에 대해선 내놓은 성과가 전무합니다.
이에 앞서 2005년에도 과거 반민족 행위를 기록하는 새로운 경찰 역사서를 발간하려 했지만, 지금까지도 진척이 없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자신의 성과를 내세우기에 급급하고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오, 독립에 대한 탄압, 민주에 대한 탄압, 반민특위 와해라고 하는 역사적 죄책에 대해서는 한 번도 철저한 반성이 없었고….”]
해방 후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도 대한민국 경찰이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공식 사과는 없습니다.
KBS 뉴스 송락규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그래픽:최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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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독] “동족 학살·독립군 체포”…간도참변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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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03-01 21:18:11
- 수정2021-03-02 00:52:29
[앵커]
지금부터는 KBS가 최초로 발굴해 취재한 내용,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의 거대한 동력은 한반도를 넘었습니다.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그리고 이듬해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전으로 이어집니다.
일제는 곧바로 보복에 나섭니다.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바로 '간도참변'입니다.
KBS가 발굴한 이 문서, 오늘(1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재간도일본총영사가 결재했다고 표기돼 있습니다.
학살의 현장, 간도참변에 동참했던 한국인 경찰관들의 공적을 적은 일본 외무성 문서입니다.
일제에는 충실한 경찰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겐 동포를 붙잡고 살해하는 데 가담한 반역자들이었습니다.
KBS는 이 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참상을 돌아보는 한편, 경찰의 '친일 청산' 작업은 어디까지 왔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홍진아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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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그 보복으로 독립군을 말살하겠다는 명목으로 간도 지역 한인 마을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독립신문에 기술된 간도참변 희생자 규모는 3천 명이 넘습니다.
[신주백/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 “어린이부터 노약자까지 남성은 모두 다 한곳에 모아서 학살하는 형태를 취했고요. 총알이 아까워서 칼이나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KBS는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이 적힌 일본 외무성 문서를 최초 발굴했습니다.
일제가 이들에게 상훈을 주기 위해 작성한 600쪽 분량의 문서인데, 꼭 백 년 전인 1921년 3월 1일 결재됐다고 나옵니다.
“순사 박양운, 무장 독립군 7명을 붙잡은 공로가 크다.”
“순사 허린, 어두운 밤과 혹한을 무릅쓰고 13시간에 걸쳐 소탕 작전에 동참해 다수를 체포했다. 공적이 지대하다.”
이들이 체포한 한국인 가운데는 훗날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들도 확인됩니다.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강 선생.
1920년 11월 간도참변 당시 일본 경찰에 피살됐습니다.
한국인 순사 김학원은 김강 선생 체포에 공적이 현저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마을에 침입해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합니다.
“순사 백원장, 무봉촌, 의봉촌 등 각 부락의 초토에 종사했다.”
“순사 박원식, 장암촌 부근에서 소탕하는 동안 한국인 조사, 가택 수색에 용감히 행동한 공적이 인정된다.”
독립군이 숨겨놓은 무기를 수색해 압수하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었습니다.
“엄청나게 쌓인 눈을 치우고, 지하로 60센티미터를 파내 마침내 보병총 35자루를 발견해 압수했다. 나정섭 순사가 열심히 찾은 결과다.”
“임기홍. 왕복 3킬로미터를 밤낮 가리지 않고 달려 독립운동에 사용된 말 한 마리를 노획해 왔다.”
[김광만/KBS 객원연구원 : “(간도참변에 참가한) 조선인 경찰들에 대한 업적을 현장에 있었던 부대장, 토벌 대장들이 공적서를 써주고 그것을 다시 간도 총영사관이 취합한 다음에 그걸 외무성에 보고를 한 거예요.”]
공적서에는 이들이 종로서, 용산서, 동대문서, 청주서 등 전국 각지 경찰서에서 차출됐다고 나와 있습니다.
[김주용/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 “간도대학살 때 군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경찰이 참여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했고요.”]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증보판’ 발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KBS가 발굴한 이들의 이름을 올리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 “독립운동가 체포, 탄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고요. 적지 않은 수가 친일인명사전 개정 증보판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간도참변 당시 체포된 것으로 기록된 한국인도 17명이나 확인됐습니다.
이 가운데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건 4명에 불과합니다.
KBS는 이번에 발굴한 자료를 보훈처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KBS 뉴스 홍진아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 배정철/영상편집:차정남/자료:영화 ‘봉오동 전투’
[단독] ‘민족 반역’ 대가로 상 받고 진급…경찰 ‘친일 역사’ 청산했나?
[앵커]
KBS 취재진은 이번 발굴 자료에 등장하는 경찰관들의 이후 행적도 추적해봤습니다.
간도참변의 공적을 인정받아 일제의 상훈을 받거나, 진급한 기록이 여러 건 확인됐습니다.
독립군을 잡던 경찰은 해방 이후에도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등 '친일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럼, 이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경찰은 친일의 역사를 얼마나 반성하고 청산해왔는지 계속해서 송락규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KBS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 48명의 행적을 추적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상훈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으로만 9명입니다.
순사 백창돈, 충북 청주경찰서로 돌아왔다가 1930년 제천경찰서로 옮긴 게 확인됩니다.
퇴직 뒤 연금도 수령했다고 나옵니다.
경부보 최태욱.
간도참변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1926년 경부보에서 경부로 한 계급 승급했습니다.
[김민철/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하는 경우는 조금 특수한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20년대에 조선인 경부가 도에 한 명 정도거든요.”]
KBS는 이들의 행적을 추가로 확인하기 위해 경찰청에 질의서를 보냈습니다.
경찰은 인사관리시스템상 연관성이 있는 걸로 보이는 인물이 검색되지 않는다며, 인사기록이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도 경찰이 확보하지 못한 기록들이 확인됩니다.
중부경찰서 소속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한 순사 장국환.
취재진은 해방 후인 1952년 정부가 발간한 대한민국 직원록에서 경기도 경찰 간부로 재직한 동일한 이름을 찾았지만, 정작 경찰 인사기록엔 빠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초대 경찰청장 격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청사에 세웠습니다.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밝히는 차원이었습니다.
[민갑룡/2018년 당시 경찰청장 : “백범 선생님께서 남기신 애국안민의 신경찰이 되라는 가르침을 되새기고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2년이 지난 지금, 친일 잔재 청산은 얼마나 이뤄졌을까.
KBS가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 조사해 봤습니다.
역대 청장과 서장 중 70여 명이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인물인데 별다른 언급 없이 그대로 올라와 있습니다.
일부 경찰서 건물에는 친일 경찰의 사진이나 이름이 내걸려 있기도 합니다.
반면 경기도의 경우 지난해부터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은 약력에 친일 관련 기록을 병기하고 있습니다.
[김홍국/경기도 대변인 : “초상화를 뺀다거나 아예 삭제하는 그런 방식보다는 역사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초상화를 그대로 두고요. 거기에 친일 이력을 병기했습니다.”]
경찰은 2019년 역사기록 전담팀까지 꾸렸지만 독립운동 참가 경찰만 발굴했을 뿐, 친일의 역사에 대해선 내놓은 성과가 전무합니다.
이에 앞서 2005년에도 과거 반민족 행위를 기록하는 새로운 경찰 역사서를 발간하려 했지만, 지금까지도 진척이 없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자신의 성과를 내세우기에 급급하고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오, 독립에 대한 탄압, 민주에 대한 탄압, 반민특위 와해라고 하는 역사적 죄책에 대해서는 한 번도 철저한 반성이 없었고….”]
해방 후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도 대한민국 경찰이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공식 사과는 없습니다.
KBS 뉴스 송락규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그래픽:최창준
지금부터는 KBS가 최초로 발굴해 취재한 내용,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의 거대한 동력은 한반도를 넘었습니다.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그리고 이듬해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전으로 이어집니다.
일제는 곧바로 보복에 나섭니다.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바로 '간도참변'입니다.
KBS가 발굴한 이 문서, 오늘(1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재간도일본총영사가 결재했다고 표기돼 있습니다.
학살의 현장, 간도참변에 동참했던 한국인 경찰관들의 공적을 적은 일본 외무성 문서입니다.
일제에는 충실한 경찰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겐 동포를 붙잡고 살해하는 데 가담한 반역자들이었습니다.
KBS는 이 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참상을 돌아보는 한편, 경찰의 '친일 청산' 작업은 어디까지 왔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홍진아 기자입니다.
[리포트]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그 보복으로 독립군을 말살하겠다는 명목으로 간도 지역 한인 마을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독립신문에 기술된 간도참변 희생자 규모는 3천 명이 넘습니다.
[신주백/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 “어린이부터 노약자까지 남성은 모두 다 한곳에 모아서 학살하는 형태를 취했고요. 총알이 아까워서 칼이나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KBS는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이 적힌 일본 외무성 문서를 최초 발굴했습니다.
일제가 이들에게 상훈을 주기 위해 작성한 600쪽 분량의 문서인데, 꼭 백 년 전인 1921년 3월 1일 결재됐다고 나옵니다.
“순사 박양운, 무장 독립군 7명을 붙잡은 공로가 크다.”
“순사 허린, 어두운 밤과 혹한을 무릅쓰고 13시간에 걸쳐 소탕 작전에 동참해 다수를 체포했다. 공적이 지대하다.”
이들이 체포한 한국인 가운데는 훗날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들도 확인됩니다.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강 선생.
1920년 11월 간도참변 당시 일본 경찰에 피살됐습니다.
한국인 순사 김학원은 김강 선생 체포에 공적이 현저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마을에 침입해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합니다.
“순사 백원장, 무봉촌, 의봉촌 등 각 부락의 초토에 종사했다.”
“순사 박원식, 장암촌 부근에서 소탕하는 동안 한국인 조사, 가택 수색에 용감히 행동한 공적이 인정된다.”
독립군이 숨겨놓은 무기를 수색해 압수하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었습니다.
“엄청나게 쌓인 눈을 치우고, 지하로 60센티미터를 파내 마침내 보병총 35자루를 발견해 압수했다. 나정섭 순사가 열심히 찾은 결과다.”
“임기홍. 왕복 3킬로미터를 밤낮 가리지 않고 달려 독립운동에 사용된 말 한 마리를 노획해 왔다.”
[김광만/KBS 객원연구원 : “(간도참변에 참가한) 조선인 경찰들에 대한 업적을 현장에 있었던 부대장, 토벌 대장들이 공적서를 써주고 그것을 다시 간도 총영사관이 취합한 다음에 그걸 외무성에 보고를 한 거예요.”]
공적서에는 이들이 종로서, 용산서, 동대문서, 청주서 등 전국 각지 경찰서에서 차출됐다고 나와 있습니다.
[김주용/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 “간도대학살 때 군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경찰이 참여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했고요.”]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증보판’ 발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KBS가 발굴한 이들의 이름을 올리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 “독립운동가 체포, 탄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고요. 적지 않은 수가 친일인명사전 개정 증보판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간도참변 당시 체포된 것으로 기록된 한국인도 17명이나 확인됐습니다.
이 가운데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건 4명에 불과합니다.
KBS는 이번에 발굴한 자료를 보훈처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KBS 뉴스 홍진아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 배정철/영상편집:차정남/자료:영화 ‘봉오동 전투’
[단독] ‘민족 반역’ 대가로 상 받고 진급…경찰 ‘친일 역사’ 청산했나?
[앵커]
KBS 취재진은 이번 발굴 자료에 등장하는 경찰관들의 이후 행적도 추적해봤습니다.
간도참변의 공적을 인정받아 일제의 상훈을 받거나, 진급한 기록이 여러 건 확인됐습니다.
독립군을 잡던 경찰은 해방 이후에도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등 '친일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럼, 이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경찰은 친일의 역사를 얼마나 반성하고 청산해왔는지 계속해서 송락규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KBS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 48명의 행적을 추적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상훈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으로만 9명입니다.
순사 백창돈, 충북 청주경찰서로 돌아왔다가 1930년 제천경찰서로 옮긴 게 확인됩니다.
퇴직 뒤 연금도 수령했다고 나옵니다.
경부보 최태욱.
간도참변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1926년 경부보에서 경부로 한 계급 승급했습니다.
[김민철/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하는 경우는 조금 특수한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20년대에 조선인 경부가 도에 한 명 정도거든요.”]
KBS는 이들의 행적을 추가로 확인하기 위해 경찰청에 질의서를 보냈습니다.
경찰은 인사관리시스템상 연관성이 있는 걸로 보이는 인물이 검색되지 않는다며, 인사기록이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도 경찰이 확보하지 못한 기록들이 확인됩니다.
중부경찰서 소속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한 순사 장국환.
취재진은 해방 후인 1952년 정부가 발간한 대한민국 직원록에서 경기도 경찰 간부로 재직한 동일한 이름을 찾았지만, 정작 경찰 인사기록엔 빠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초대 경찰청장 격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청사에 세웠습니다.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밝히는 차원이었습니다.
[민갑룡/2018년 당시 경찰청장 : “백범 선생님께서 남기신 애국안민의 신경찰이 되라는 가르침을 되새기고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2년이 지난 지금, 친일 잔재 청산은 얼마나 이뤄졌을까.
KBS가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 조사해 봤습니다.
역대 청장과 서장 중 70여 명이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인물인데 별다른 언급 없이 그대로 올라와 있습니다.
일부 경찰서 건물에는 친일 경찰의 사진이나 이름이 내걸려 있기도 합니다.
반면 경기도의 경우 지난해부터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은 약력에 친일 관련 기록을 병기하고 있습니다.
[김홍국/경기도 대변인 : “초상화를 뺀다거나 아예 삭제하는 그런 방식보다는 역사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초상화를 그대로 두고요. 거기에 친일 이력을 병기했습니다.”]
경찰은 2019년 역사기록 전담팀까지 꾸렸지만 독립운동 참가 경찰만 발굴했을 뿐, 친일의 역사에 대해선 내놓은 성과가 전무합니다.
이에 앞서 2005년에도 과거 반민족 행위를 기록하는 새로운 경찰 역사서를 발간하려 했지만, 지금까지도 진척이 없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자신의 성과를 내세우기에 급급하고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오, 독립에 대한 탄압, 민주에 대한 탄압, 반민특위 와해라고 하는 역사적 죄책에 대해서는 한 번도 철저한 반성이 없었고….”]
해방 후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도 대한민국 경찰이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공식 사과는 없습니다.
KBS 뉴스 송락규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그래픽:최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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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아 기자 gina@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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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락규 기자 rockyou@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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