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北 무용계 변화의 바람 불까

입력 2012.05.1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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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북한 내부를 심층 분석해보는 <클로즈업 북한>입니다.

초대형 공연에 집단주의와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공연양식을 고수해 왔던 북한 무용계가, 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60년대 숙청했던 월북 무용가 최승희를 복권하는가 하면 탭댄스와 같은 서양 무용도 도입하고 있는데요.

북한 무용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까요?

<클로즈업 북한>에서 자세히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지난 1월 15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북한군 예술단의 음악무용 종합공연이 열렸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한 달 만에 열린 이 공연에서 북한군 예술단은 3편의 무용 공연을 선보였다.

강성대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자는 내용의 무용 공연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합창에 맞춰 빠르고 정확한 동작의 군무가 눈길을 끌었다.

‘타프춤’으로 소개된 무용 공연에서는 군복을 입은 무용수들이 현란한 발동작으로 탭댄스를 췄다.

최고 지도자를 찬양하고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내용은 과거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춤의 동작과 구성은 뮤지컬을 보는 것처럼 서구식 무대 공연을 떠올리게 했다.

<인터뷰> 박영정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 "최근에 북한의 어떤 예술단들이 대중 예술단에서 하는 공연들을 보면 타푸춤이라 그래서 탭댄스를 북한식으로 재구성한 그런 공연이 상당히 많이 유행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으로 봐서는 이제 북한 무용의 입장에서는 그동안에 너무 단선적으로 발전해 왔던 것을 적극적으로 바깥의 외부의 무용 스타일이랄까. 이런 것을 수용하면서 북한식으로 재구성해나가는 그렇게 해서 뭔가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북한 무용계는 해방 직후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46년 무용가 최승희가 남편 안막과 함께 월북하면서 북한 무용계는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국가 건설 초기 민족 예술을 부흥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김일성은 최승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최승희는 평양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최승희식 춤’을 북한 무용계에 널리 보급했다.

<인터뷰> 김영순 (최승희 제자 /2003년 탈북) : "47년도 보살춤과 장고춤 이런 최승희 춤을 많이 봤어요. 해방 전부터. 그렇기 때문에 최승희 선생에 대한 말하자면 나도 커서 훌륭한 무용수가 되겠다는... 북한의 최승희 제자 이렇게 하게 되면 수없이 많거든요. 그래서 정말 강천옥, 강옥채, 정순희, 태정난, 한성숙..."

6.25 전쟁 이후에도 북한 무용계에서 최승희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이 시기 최승희는 심청전, 사도성 이야기 등 우리의 전설이나 설화를 소재로 한 무용극을 주로 선보였다.

<인터뷰> 김채원(통일미래사회연구소 박사) : "60년대 이후로 사회주의를 부르짖기 시작하죠. 연안파가 숙청도 되고 이러면서 이제 서서희 북한에서 사회주의 예술을 내세우기 시작을 합니다. 60년대 넘어오면서부터는 독무보다는 집단적인 성격의 작품들이 많이 창작이 됩니다."

내용적으로는 공산주의 사상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무용극이 점차 북한 무용계의 주류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형식적으로는 5명 이상의 무용수가 투입되는 군무 중심의 공연이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말, 북한 무용계는 또 한 번의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김일성 주석이 아들 김정일을 노동당 선전선동부 과장에 임명한 것이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김정일은 북한 예술 분야 전반에 이른바 ‘주체 예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인터뷰> 김채원(통일미래사회연구소 박사) : "60년대 말, 김정일이 대두가 되죠, 정치 무대에. 대두되면서 주체예술을 부르짖기 시작을 합니다. 김정일을 필두로 한 무용예술론이나 이런 것들이 내세워지면서 주체예술로써의 4대혁명무용, 음악무용서사시, 음악무용시극, 다양한 형태의 음악과 무용이 하나가 돼서 여러 가지의 대형 무용극, 무용작품들이 선을 보이게 되죠."

70년대 들어 북한은 무용 작품에서 사상성과 혁명성을 더욱 강조했다.

그리고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음악과 연극, 무용을 결합한 종합예술 형태의 공연을 탄생시켰다.

《피바다》, 《꽃파는 처녀》로 대표되는 5대 혁명 가극과 《조국의 진달래》 등 4대 명작 무용 등 북한이 자랑하는 대형 무용공연들은 모두 이 시기에 창작된 작품이다.

그리고 북한 무용의 기틀을 닦았던 최승희가 1967년 숙청된 이후 전통춤에 기반 했던 민속춤은 한동안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무용 공연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실제로 1987년 《행복의 노래》공연에는 5천 여 명이, 2년 후 1989년 공연된 《축전의 노래》에서는 7만 여 명이 동원됐다.

북한은 중요한 기념일마다 대규모의 인원이 참여한 예술 무용을 선보였는데, 이는 북한의 집단주의를 강조하려는 의도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인터뷰> 김채원(통일미래사회연구소 박사) : "주체예술을 부각시키면서 아무래도 집단성을 강조하는 그런 사회주의 국가다 보니까 예술에 있어서도 조금 더 확장되고, 조금 더 많은 인원이 이렇게 우리는 일치단결해서 한마음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 원수를 찬양한다라는 그런 표현을 내세우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지난달 16일 저녁. 수 만 명의 군중이 평양 김일성 광장을 가득 메웠다.

<녹취> 조선중앙TV (지난달 16일) : "김일성 동지 탄생 100돌 경축 청년 학생들의 야회 “내 나라는 영원한 태양의 나라”를 시작하겠습니다."

축포와 함께 공연이 시작되고, 중앙에 마련된 무대에서 합창단과 풍물패의 공연이 펼쳐졌다.

그리고 무대를 둘러싼 주민들이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주민들은 20여 일 동안 연습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똑같은 동작을 정확하게 추는 데는 북한의 자모식 무용 표기법이 큰 역할을 했다.

자모식 무용 표기법은 1987년 북한에서 개발된 것으로 일종의 ‘무용 악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뷰> 김영순 (최승희 제자 /2003년 탈북) : "무용 표기법 연구소가 북한에 있는데 그것이 우창섭이라는 사람이 소장을 했습니다. 무용 표기법은 악보와 같이 발동작을 오선지에다가 딱딱 이렇게 그어서 해놓은 것이거든요. 그래서 영원히 보존할 수 있고 보존물로써 할 수 있고 또 그걸 보면 창작을 할 수 있고 이런데서 아주 유리하다고 봅니다."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듯 오선 위에 춤의 동작부터 움직이는 방향까지 모든 정보를 기호로 적어 놓는다.

북한은 이 방법을 과학적이며 실용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녹취> 조선중앙TV (1999년 11월 30일) : "그럼 춤동작을 보지 않고 표기만 보고도 춤을 정확히 출 수 있는가요?
전문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더 말할 것이 없고 유치원 어린이들까지도 과제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표기를 본 즉시 춤춥니다."

<인터뷰> 김채원 (통일미래사회연구소 박사) : "그것을 남김으로 인해서 다른 지역에서도 그걸 보면 그대로, 서울에서 춘 춤이 저 부산에서도 그대로 춰질 수 있는... 사람에 의해서 전해지다 보면 아무래도 변질의 요소가 많은데 표기법으로 인해서 그런 요소들은 많이 없어지게 됐죠. "

지난해 11월 평양 대극장에서 창작 무용극 ‘사도성 이야기’의 막이 올랐다.

왜적과 맞서는 백성들의 투쟁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공연은 최승희가 안무한 작품이다.

지난해 북한은 탄생 100 주년을 맞은 최승희를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다.

최승희의 업적을 실은 책을 출판하는가 하면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최승희의 묘소에 헌화하는 장면이 방송되기도 했다.

40여 년 전 숙청됐던 최승희가 다시 북한의 최고 무용가로 부활한 것은 김정일의 지시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터뷰> 박영정(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 "2003년에 애국열사릉에 최승희가 다시 안치되면서 정식 복권이 확인되었고요. 어떤 민족 문화 유산의 관점에서 최승희의 무용의 자산 이런 것들을 김정일 위원장 입장에서 다시 평가하는 그런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이제 복권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겠습니다."

최승희의 복권 외에도 북한 무용계에는 또 다른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지난 2009년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속해 있던 무용 부문이 분리돼 무용대학으로 승격됐고, 발레무용단이 설립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하지만 북한 무용은 여전히 독자적인 예술보다는 체제 선전의 도구로써의 역할이 더 큰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북한 당국은 일반 주민들보다도 예술인들의 사상 검증을 더 엄격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뷰> 김영순 (최승희 제자 /2003년 탈북) : "북한에서 다 모든 평범한 사람들은 다 주 당 생활 총화를 하거든요. 예술인들은 2일 당 생활 총화를 합니다. 가장 건전해야 당의 지도 이념을 이끌고 나가는데 선구자적, 선동자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데 중심이 모티브가 박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고 아시면 될 것 같아요."

또 폐쇄적인 북한 사회 분위기도 북한 무용 발전의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이다.

<인터뷰> 박영정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 "북한에서는 모든 활동이 어떤 국가의 지휘나 통제 아래서 이뤄지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적인 발전 이런 점들이 좀 근본적으로 어렵다는 점. 이런 게 이제 큰 문제가 있겠고요. 또 하나는 이제 1970년대 이후에 주체 예술의 모든 예술 방법이라든가 창작 과정이 역시 통제를 받고 있는 그런 상황이라서 새로운 어떤 스타일의 변화 이런 것들이 좀처럼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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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로즈업 북한] 北 무용계 변화의 바람 불까
    • 입력 2012-05-12 09: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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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북한 내부를 심층 분석해보는 <클로즈업 북한>입니다. 초대형 공연에 집단주의와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공연양식을 고수해 왔던 북한 무용계가, 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60년대 숙청했던 월북 무용가 최승희를 복권하는가 하면 탭댄스와 같은 서양 무용도 도입하고 있는데요. 북한 무용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까요? <클로즈업 북한>에서 자세히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지난 1월 15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북한군 예술단의 음악무용 종합공연이 열렸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한 달 만에 열린 이 공연에서 북한군 예술단은 3편의 무용 공연을 선보였다. 강성대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자는 내용의 무용 공연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합창에 맞춰 빠르고 정확한 동작의 군무가 눈길을 끌었다. ‘타프춤’으로 소개된 무용 공연에서는 군복을 입은 무용수들이 현란한 발동작으로 탭댄스를 췄다. 최고 지도자를 찬양하고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내용은 과거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춤의 동작과 구성은 뮤지컬을 보는 것처럼 서구식 무대 공연을 떠올리게 했다. <인터뷰> 박영정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 "최근에 북한의 어떤 예술단들이 대중 예술단에서 하는 공연들을 보면 타푸춤이라 그래서 탭댄스를 북한식으로 재구성한 그런 공연이 상당히 많이 유행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것으로 봐서는 이제 북한 무용의 입장에서는 그동안에 너무 단선적으로 발전해 왔던 것을 적극적으로 바깥의 외부의 무용 스타일이랄까. 이런 것을 수용하면서 북한식으로 재구성해나가는 그렇게 해서 뭔가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북한 무용계는 해방 직후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46년 무용가 최승희가 남편 안막과 함께 월북하면서 북한 무용계는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국가 건설 초기 민족 예술을 부흥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김일성은 최승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최승희는 평양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최승희식 춤’을 북한 무용계에 널리 보급했다. <인터뷰> 김영순 (최승희 제자 /2003년 탈북) : "47년도 보살춤과 장고춤 이런 최승희 춤을 많이 봤어요. 해방 전부터. 그렇기 때문에 최승희 선생에 대한 말하자면 나도 커서 훌륭한 무용수가 되겠다는... 북한의 최승희 제자 이렇게 하게 되면 수없이 많거든요. 그래서 정말 강천옥, 강옥채, 정순희, 태정난, 한성숙..." 6.25 전쟁 이후에도 북한 무용계에서 최승희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이 시기 최승희는 심청전, 사도성 이야기 등 우리의 전설이나 설화를 소재로 한 무용극을 주로 선보였다. <인터뷰> 김채원(통일미래사회연구소 박사) : "60년대 이후로 사회주의를 부르짖기 시작하죠. 연안파가 숙청도 되고 이러면서 이제 서서희 북한에서 사회주의 예술을 내세우기 시작을 합니다. 60년대 넘어오면서부터는 독무보다는 집단적인 성격의 작품들이 많이 창작이 됩니다." 내용적으로는 공산주의 사상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무용극이 점차 북한 무용계의 주류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형식적으로는 5명 이상의 무용수가 투입되는 군무 중심의 공연이 주류로 부상했다. 1960년대 말, 북한 무용계는 또 한 번의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다. 김일성 주석이 아들 김정일을 노동당 선전선동부 과장에 임명한 것이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김정일은 북한 예술 분야 전반에 이른바 ‘주체 예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인터뷰> 김채원(통일미래사회연구소 박사) : "60년대 말, 김정일이 대두가 되죠, 정치 무대에. 대두되면서 주체예술을 부르짖기 시작을 합니다. 김정일을 필두로 한 무용예술론이나 이런 것들이 내세워지면서 주체예술로써의 4대혁명무용, 음악무용서사시, 음악무용시극, 다양한 형태의 음악과 무용이 하나가 돼서 여러 가지의 대형 무용극, 무용작품들이 선을 보이게 되죠." 70년대 들어 북한은 무용 작품에서 사상성과 혁명성을 더욱 강조했다. 그리고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음악과 연극, 무용을 결합한 종합예술 형태의 공연을 탄생시켰다. 《피바다》, 《꽃파는 처녀》로 대표되는 5대 혁명 가극과 《조국의 진달래》 등 4대 명작 무용 등 북한이 자랑하는 대형 무용공연들은 모두 이 시기에 창작된 작품이다. 그리고 북한 무용의 기틀을 닦았던 최승희가 1967년 숙청된 이후 전통춤에 기반 했던 민속춤은 한동안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무용 공연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실제로 1987년 《행복의 노래》공연에는 5천 여 명이, 2년 후 1989년 공연된 《축전의 노래》에서는 7만 여 명이 동원됐다. 북한은 중요한 기념일마다 대규모의 인원이 참여한 예술 무용을 선보였는데, 이는 북한의 집단주의를 강조하려는 의도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인터뷰> 김채원(통일미래사회연구소 박사) : "주체예술을 부각시키면서 아무래도 집단성을 강조하는 그런 사회주의 국가다 보니까 예술에 있어서도 조금 더 확장되고, 조금 더 많은 인원이 이렇게 우리는 일치단결해서 한마음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 원수를 찬양한다라는 그런 표현을 내세우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지난달 16일 저녁. 수 만 명의 군중이 평양 김일성 광장을 가득 메웠다. <녹취> 조선중앙TV (지난달 16일) : "김일성 동지 탄생 100돌 경축 청년 학생들의 야회 “내 나라는 영원한 태양의 나라”를 시작하겠습니다." 축포와 함께 공연이 시작되고, 중앙에 마련된 무대에서 합창단과 풍물패의 공연이 펼쳐졌다. 그리고 무대를 둘러싼 주민들이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주민들은 20여 일 동안 연습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똑같은 동작을 정확하게 추는 데는 북한의 자모식 무용 표기법이 큰 역할을 했다. 자모식 무용 표기법은 1987년 북한에서 개발된 것으로 일종의 ‘무용 악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뷰> 김영순 (최승희 제자 /2003년 탈북) : "무용 표기법 연구소가 북한에 있는데 그것이 우창섭이라는 사람이 소장을 했습니다. 무용 표기법은 악보와 같이 발동작을 오선지에다가 딱딱 이렇게 그어서 해놓은 것이거든요. 그래서 영원히 보존할 수 있고 보존물로써 할 수 있고 또 그걸 보면 창작을 할 수 있고 이런데서 아주 유리하다고 봅니다."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듯 오선 위에 춤의 동작부터 움직이는 방향까지 모든 정보를 기호로 적어 놓는다. 북한은 이 방법을 과학적이며 실용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녹취> 조선중앙TV (1999년 11월 30일) : "그럼 춤동작을 보지 않고 표기만 보고도 춤을 정확히 출 수 있는가요? 전문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더 말할 것이 없고 유치원 어린이들까지도 과제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표기를 본 즉시 춤춥니다." <인터뷰> 김채원 (통일미래사회연구소 박사) : "그것을 남김으로 인해서 다른 지역에서도 그걸 보면 그대로, 서울에서 춘 춤이 저 부산에서도 그대로 춰질 수 있는... 사람에 의해서 전해지다 보면 아무래도 변질의 요소가 많은데 표기법으로 인해서 그런 요소들은 많이 없어지게 됐죠. " 지난해 11월 평양 대극장에서 창작 무용극 ‘사도성 이야기’의 막이 올랐다. 왜적과 맞서는 백성들의 투쟁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공연은 최승희가 안무한 작품이다. 지난해 북한은 탄생 100 주년을 맞은 최승희를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다. 최승희의 업적을 실은 책을 출판하는가 하면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최승희의 묘소에 헌화하는 장면이 방송되기도 했다. 40여 년 전 숙청됐던 최승희가 다시 북한의 최고 무용가로 부활한 것은 김정일의 지시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터뷰> 박영정(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 "2003년에 애국열사릉에 최승희가 다시 안치되면서 정식 복권이 확인되었고요. 어떤 민족 문화 유산의 관점에서 최승희의 무용의 자산 이런 것들을 김정일 위원장 입장에서 다시 평가하는 그런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이제 복권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겠습니다." 최승희의 복권 외에도 북한 무용계에는 또 다른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지난 2009년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속해 있던 무용 부문이 분리돼 무용대학으로 승격됐고, 발레무용단이 설립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하지만 북한 무용은 여전히 독자적인 예술보다는 체제 선전의 도구로써의 역할이 더 큰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북한 당국은 일반 주민들보다도 예술인들의 사상 검증을 더 엄격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뷰> 김영순 (최승희 제자 /2003년 탈북) : "북한에서 다 모든 평범한 사람들은 다 주 당 생활 총화를 하거든요. 예술인들은 2일 당 생활 총화를 합니다. 가장 건전해야 당의 지도 이념을 이끌고 나가는데 선구자적, 선동자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데 중심이 모티브가 박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고 아시면 될 것 같아요." 또 폐쇄적인 북한 사회 분위기도 북한 무용 발전의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이다. <인터뷰> 박영정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 "북한에서는 모든 활동이 어떤 국가의 지휘나 통제 아래서 이뤄지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적인 발전 이런 점들이 좀 근본적으로 어렵다는 점. 이런 게 이제 큰 문제가 있겠고요. 또 하나는 이제 1970년대 이후에 주체 예술의 모든 예술 방법이라든가 창작 과정이 역시 통제를 받고 있는 그런 상황이라서 새로운 어떤 스타일의 변화 이런 것들이 좀처럼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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