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역풍 맞은 北 외신 선전전

입력 2016.05.14 (07:58) 수정 2016.05.1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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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집안잔치로 치러진 이번 7차 당 대회에는 주요국의 외빈 대신 외신기자들이 대거 초청을 받았는데요,

결론은 역시나 였습니다. 특히 도를 넘어선 언론 통제로 곳곳에서 갈등을 빚더니, 끝내는 BBC기자 추방이라는 파국을 맞기도 했는데요,

<클로즈업 북한>, 오늘은 오히려 역풍만 초래한 북한 당국의 외신 선전전, 그 과정에서 민낯만 드러낸 북한 당 대회 취재 현장으로 안내합니다.

<리포트>

북한의 7차 당 대회를 사흘 앞둔 지난 3일 평양 국제공항,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북한에 단체 입국했다.

36년 만에 열리는 당 대회 취재를 위해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아 전 세계에서 모여든 외신 기자들이다.

<녹취> 나흐라 아예드(캐나다 CBC 기자) : “이 나라는 수많은 헤드라인을 만들어 내지만 이렇게 많은 외국 기자들에게 방북을 허용하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이건 우리에게도 특별한 경우입니다."

지난해 새로 단장된 공항 면세점엔 고급 수입 위스키가 진열돼 있고... 외국산 TV를 나르는 모습도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다.

다음 날 아침, 기자들이 당 대회를 이틀 앞둔 평양의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취재에 나섰다.

이른 아침부터 붉은 기와 꽃술을 들고 행진 연습을 하는 학생과 주민들...

<녹취> 평양 시민 : “당 대회를 축하해서, 경축한다고 꽃다발을 이렇게 들고 다닌단 말입니다.“

곳곳에 내걸린 경축 포스터 등 막바지 행사 준비가 한창인 평양 거리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그러나 이후 북한 당국이 취재진을 데리고 간 곳은 평양 외곽의 협동농장,

지난해 6월 김정은이 직접 찾을 정도로 북한이 모범 농장으로 선전하는 채소 재배 농장이다.

<녹취> 정용심(장천 협동농장 지배인) : "우리는 평양시민들한테 다 공급해주고 연간에 (자기 몫의) 70%를 줍니다. 국가계획을 하면 50%를 떼준다 말입니다."

다음날에도 취재진은 북한 당국의 안내에 따라 당 대회와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곳을 둘러봐야했다.

<녹취> 평양 시민 : “여기 들어와 산 지 2년 됐는데 얼마나 좋고 편한지 모릅니다.”

지난해 조성된 미래과학자 거리의 신축 아파트와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하나같이 외부 손님이 오면 북한 당국이 체제선전을 위해 반드시 데려가는 단골 견학 코스다.

드디어, 당 대회 개막일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설렘 속에 하나 둘 호텔 로비에 모여든 외신 기자들.

<녹취> 일본 NHK : “취재진들이 호텔 로비에 모여 있습니다.”

차량을 나눠 타고 비 오는 평양 거리를 지나... 당 대회가 열리는 4.25 문화회관을 향한다.

하지만 당 대회 취재를 위해 입국한 외신기자들은 정작 한 명도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행사장을 불과 200미터 앞두고 더 이상의 접근이 불허됐고, 기자들은 길 건너에서 상황을 지켜봐야했다.

<녹취> 일본 NHK : “취재진에겐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회장 건물 외관을 촬영하는 것만 허용됐습니다.

기자들은 대회가 열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실망과 허탈감 속에 현장 상황을 전했다.

<녹취> 윌 리플리(미국 CNN 기자) : “여기가 우리가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곳입니다. 100명이 넘는 외신 기자들이 7차 당 대회를 위해 초청됐지만 우리는 행사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나마도 촬영 한 시간 뒤, 기자들은 현장에서 모두 철수해야 했다.

오후 들어 북한 당국은 아예 기자단을 외곽으로 빼돌렸다.

영문도 모른 채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평양의 전선제조공장,

공장 곳곳에는 외국산 원자재들이 수북이 쌓여 있고...공장 관계자는 대북 제재 쯤은 끄떡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녹취> 김석남(평양 326 전선공장 공장장) : “언제 수출할 새가 없습니다. 국내 수요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이어진 견학 코스는 축구교실과 미용실 물놀이장,

기자단은 정작 당 대회에 대한 취재는 물론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그저 북한 당국이 짜놓은 일정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끌려 다녔다.

<녹취> 테리 모렌(미국 ABC기자) : “우리가 뭘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적지도 모른 채 그냥 버스에 끼여서 타곤 합니다.”

그리고 밤 10시 반,

북한 TV가 긴급 편성한 녹화 방송을 보고나서야 당 대회 개막 기사를 송고했다.

<녹취> 윌 리플리(미국 CNN기자) : “우리는 북한에 노동당 대회를 취재하라고 직접 와서 목격하라고 초청받아 평양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보에 접근하는 게 똑같이 제한적입니다.”

외신 기자들의 엉뚱한 현장 견학은 당 대회 이틀째에도 계속됐다.

이번엔 신형 전동차가 보급된 평양 지하철역과 북한 최대의 산부인과인 평양산원이다.

<녹취> 김은주(평양 시민) :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를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키우니까 앞으로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은 생각입니다.“

당 대회 사흘째인 지난 8일 아침 양각도 호텔,

호텔 로비에 집결하라는 북한 당국의 통보에 따라 기자들이 다시 하나 둘 모여든다.

<녹취> 윌 리플리(CNN기자) : “오늘은 노동당 대회 3일째인데 우리는 이렇게 호텔에서 나와 주차장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취재진들이 오늘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평양 시내를 달려 버스가 도착한 곳은 당 대회장 인근의 인민문화궁전.

드디어 당 대회 행사나 북한 고위 인사의 기자회견을 취재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으로 기자단이 술렁인다.

하지만 십여 분 뒤 북한 관계자는 호텔로 다시 돌아가라는 황당한 메시지를 통보한다.

<녹취> 윌 리플리(미국 CNN 기자) : "무슨 일이죠? (프로그램이 바뀌었어요.) 프로그램이 바뀌었다고요?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 (호텔로 다시 돌아가서 점심을 먹고 쉽니다.)"

당 대회가 사흘째를 넘어가고 있지만 취재진은 이날도 북한 TV의 녹화방송을 보고나서야 당 대회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행사 기간 내내 이어진 무책임하고 황당한 취재 안내,

여기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곳곳에서 마찰도 빚어졌다.

외신기자가 휴대전화로 김일성의 사진을 찍자 안내원이 이를 가로막는 상황..

<녹취> 북한 안내원 : "멋지시죠? 어떻게 생각해요? (내 생각에...) 안 돼요! 손가락 말고 손바닥으로 가리키세요. (뭐라고요?) 이분은 우리 지도자십니다. 위대한 지도자십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물러서세요. 나한테 줘요"

고압적인 자세로 이미 찍은 사진을 삭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녹취> 북한 안내원 :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요”

북한을 방문해 세 차례 취재한 경험이 있는 일본 NHK 기자의 설명이다.

<녹취> 이케하타 쇼헤이(NHK 서울지국장) : “동상이 있으면 이렇게 한다든가 이렇게 재미있게 하는 건 안 된다.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 그림이나 사진 그런 건 얼굴 반만 찍으면 안 된다. 그런 여러 가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엄격한 통제가 있어요...”

당 대회 폐막을 목전에 둔 지난 9일 저녁 시간,

<녹취> 윌 리플리(미국 CNN 기자) : “이제 대회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36년만에 처음으로 열린 노동당 대회의 폐막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굳게 닫혔던 행사장 문이 열리고 외신 기자들이 처음으로 당 대회장 내부로 들어간다.

<녹취> 김영남(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선거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수길 동지..."

북한 당국이 돌연 외신 기자들 30여 명만을 골라 당 대회 취재를 허가한 것이다.

김정은의 당 위원장 추대 상황을 본 것도 잠시.

취재진은 불과 10분 만에 쫓기듯 다시 행사장 밖으로 밀려 났다.

<녹취> “기자들은 매우 화가 나있어요..”

북한 당국의 자의적 기준에 따라 이뤄진 당 대회장 취재 허가, 초청받지 못한 100명이 넘는 기자들이 항의를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북한 당국의 언론 통제와 안내원들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도 감춰진 이면을 파헤치려는 기자들의 노력은 계속됐다.

당 대회 직전 노벨상 수상자와 동행해 방북한 BBC의 루퍼트 윙필드 헤이스 기자.

<녹취> 루퍼트 윙필드 헤이스(영국 BBC 기자) : "이 모습이 북한의 진실한 삶을 대변한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곳은 평양일 뿐입니다. 평양은 북한이 아닙니다. 평양은 거품입니다.“

북한당국의 안내 속에서도 체제선전의 모순점을 날카롭게 꼬집는 폭로 보도를 쏟아냈다.

또 일부 기자들은 북한의 통제와 감시를 피해 SNS를 활용해 북한의 실상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녹취> 애나 파이필드(미국 워싱턴 포스트 기자) : “여기는 평양 시내에 있는 양각도 호텔입니다. 우리 기자들은 이곳을 알카트라즈 감옥이라고 부릅니다.“

권총과 소총 등 온갖 무기로 채워진 어린이 시력검사표와 1970년대에 썼음직하다는 낡은 전화기와 소파의 사진,

북한 당국이 기자들에게 30유로를 받고 기자 완장을 강매했다는 사실도 SNS를 통해 폭로됐다.

외신기자들의 잇단 폭로 기사가 큰 반향을 일으키는 가운데 북한 당국이 급기야 BBC 취재진을 추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녹취> 오룡일(북한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 "우리 공화국의 법질서를 위반하고 문화 풍습을 비난하는 등 언로인으로서의 직분에 맞지 않게 우리나라 현실을 왜곡 날조하여 모략을 일관된 보도를 하였다."

김정은을 뚱뚱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물로 묘사하는 등 특히 김정은 관련 기사를 문제 삼았을 거란 추정이다.

<녹취> 존 서드워스(BBC 기자) : "단순히 보도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기자를 구금하고 추방하는 것이 정당한가요?"

당 대회가 끝나고 각국으로 돌아간 외신기자들은 실망과 분노로 가득 찬 후일담을 쏟아냈다.

북한의 노동당 대회는 하나의 서커스였다.

북한 사회는 부조리함과 정신이상의 경계에 있는 것 같다.

모든 게 무대 위 트루먼쇼 같다는 조롱이 이어졌다.

그리고 국제 언론단체와 인권단체들은 BBC기자의 추방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북한의 언론 자유 보장을 촉구하고 나섰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김정은 정권이 언론을, 해외 언론을 이용한 이미지 정치를 활용을 하고 있지만 그 반면에 북한 체제, 김정은 체제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고 있고요. 또 하나는 그 100여명, 혹은 많은 북한을 취재하는 언론인들이 취재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북한 주민들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북한 당 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방북했던 외신기자들의 기대는 실망과 분노가 됐고, 오히려 북한의 허구를 폭로하는 역풍이 됐다.

정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외신을 대거 초청해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려던 북한 당국의 선전 선동전략이 한계에 봉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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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5-14 08:33:36
    • 수정2016-05-14 0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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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잔치로 치러진 이번 7차 당 대회에는 주요국의 외빈 대신 외신기자들이 대거 초청을 받았는데요,

결론은 역시나 였습니다. 특히 도를 넘어선 언론 통제로 곳곳에서 갈등을 빚더니, 끝내는 BBC기자 추방이라는 파국을 맞기도 했는데요,

<클로즈업 북한>, 오늘은 오히려 역풍만 초래한 북한 당국의 외신 선전전, 그 과정에서 민낯만 드러낸 북한 당 대회 취재 현장으로 안내합니다.

<리포트>

북한의 7차 당 대회를 사흘 앞둔 지난 3일 평양 국제공항,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북한에 단체 입국했다.

36년 만에 열리는 당 대회 취재를 위해 북한 당국의 허가를 받아 전 세계에서 모여든 외신 기자들이다.

<녹취> 나흐라 아예드(캐나다 CBC 기자) : “이 나라는 수많은 헤드라인을 만들어 내지만 이렇게 많은 외국 기자들에게 방북을 허용하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이건 우리에게도 특별한 경우입니다."

지난해 새로 단장된 공항 면세점엔 고급 수입 위스키가 진열돼 있고... 외국산 TV를 나르는 모습도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다.

다음 날 아침, 기자들이 당 대회를 이틀 앞둔 평양의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취재에 나섰다.

이른 아침부터 붉은 기와 꽃술을 들고 행진 연습을 하는 학생과 주민들...

<녹취> 평양 시민 : “당 대회를 축하해서, 경축한다고 꽃다발을 이렇게 들고 다닌단 말입니다.“

곳곳에 내걸린 경축 포스터 등 막바지 행사 준비가 한창인 평양 거리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그러나 이후 북한 당국이 취재진을 데리고 간 곳은 평양 외곽의 협동농장,

지난해 6월 김정은이 직접 찾을 정도로 북한이 모범 농장으로 선전하는 채소 재배 농장이다.

<녹취> 정용심(장천 협동농장 지배인) : "우리는 평양시민들한테 다 공급해주고 연간에 (자기 몫의) 70%를 줍니다. 국가계획을 하면 50%를 떼준다 말입니다."

다음날에도 취재진은 북한 당국의 안내에 따라 당 대회와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곳을 둘러봐야했다.

<녹취> 평양 시민 : “여기 들어와 산 지 2년 됐는데 얼마나 좋고 편한지 모릅니다.”

지난해 조성된 미래과학자 거리의 신축 아파트와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하나같이 외부 손님이 오면 북한 당국이 체제선전을 위해 반드시 데려가는 단골 견학 코스다.

드디어, 당 대회 개막일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설렘 속에 하나 둘 호텔 로비에 모여든 외신 기자들.

<녹취> 일본 NHK : “취재진들이 호텔 로비에 모여 있습니다.”

차량을 나눠 타고 비 오는 평양 거리를 지나... 당 대회가 열리는 4.25 문화회관을 향한다.

하지만 당 대회 취재를 위해 입국한 외신기자들은 정작 한 명도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행사장을 불과 200미터 앞두고 더 이상의 접근이 불허됐고, 기자들은 길 건너에서 상황을 지켜봐야했다.

<녹취> 일본 NHK : “취재진에겐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회장 건물 외관을 촬영하는 것만 허용됐습니다.

기자들은 대회가 열렸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실망과 허탈감 속에 현장 상황을 전했다.

<녹취> 윌 리플리(미국 CNN 기자) : “여기가 우리가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곳입니다. 100명이 넘는 외신 기자들이 7차 당 대회를 위해 초청됐지만 우리는 행사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나마도 촬영 한 시간 뒤, 기자들은 현장에서 모두 철수해야 했다.

오후 들어 북한 당국은 아예 기자단을 외곽으로 빼돌렸다.

영문도 모른 채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평양의 전선제조공장,

공장 곳곳에는 외국산 원자재들이 수북이 쌓여 있고...공장 관계자는 대북 제재 쯤은 끄떡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녹취> 김석남(평양 326 전선공장 공장장) : “언제 수출할 새가 없습니다. 국내 수요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이어진 견학 코스는 축구교실과 미용실 물놀이장,

기자단은 정작 당 대회에 대한 취재는 물론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그저 북한 당국이 짜놓은 일정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끌려 다녔다.

<녹취> 테리 모렌(미국 ABC기자) : “우리가 뭘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적지도 모른 채 그냥 버스에 끼여서 타곤 합니다.”

그리고 밤 10시 반,

북한 TV가 긴급 편성한 녹화 방송을 보고나서야 당 대회 개막 기사를 송고했다.

<녹취> 윌 리플리(미국 CNN기자) : “우리는 북한에 노동당 대회를 취재하라고 직접 와서 목격하라고 초청받아 평양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보에 접근하는 게 똑같이 제한적입니다.”

외신 기자들의 엉뚱한 현장 견학은 당 대회 이틀째에도 계속됐다.

이번엔 신형 전동차가 보급된 평양 지하철역과 북한 최대의 산부인과인 평양산원이다.

<녹취> 김은주(평양 시민) :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를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키우니까 앞으로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은 생각입니다.“

당 대회 사흘째인 지난 8일 아침 양각도 호텔,

호텔 로비에 집결하라는 북한 당국의 통보에 따라 기자들이 다시 하나 둘 모여든다.

<녹취> 윌 리플리(CNN기자) : “오늘은 노동당 대회 3일째인데 우리는 이렇게 호텔에서 나와 주차장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취재진들이 오늘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평양 시내를 달려 버스가 도착한 곳은 당 대회장 인근의 인민문화궁전.

드디어 당 대회 행사나 북한 고위 인사의 기자회견을 취재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으로 기자단이 술렁인다.

하지만 십여 분 뒤 북한 관계자는 호텔로 다시 돌아가라는 황당한 메시지를 통보한다.

<녹취> 윌 리플리(미국 CNN 기자) : "무슨 일이죠? (프로그램이 바뀌었어요.) 프로그램이 바뀌었다고요?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 (호텔로 다시 돌아가서 점심을 먹고 쉽니다.)"

당 대회가 사흘째를 넘어가고 있지만 취재진은 이날도 북한 TV의 녹화방송을 보고나서야 당 대회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행사 기간 내내 이어진 무책임하고 황당한 취재 안내,

여기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곳곳에서 마찰도 빚어졌다.

외신기자가 휴대전화로 김일성의 사진을 찍자 안내원이 이를 가로막는 상황..

<녹취> 북한 안내원 : "멋지시죠? 어떻게 생각해요? (내 생각에...) 안 돼요! 손가락 말고 손바닥으로 가리키세요. (뭐라고요?) 이분은 우리 지도자십니다. 위대한 지도자십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물러서세요. 나한테 줘요"

고압적인 자세로 이미 찍은 사진을 삭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녹취> 북한 안내원 :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요”

북한을 방문해 세 차례 취재한 경험이 있는 일본 NHK 기자의 설명이다.

<녹취> 이케하타 쇼헤이(NHK 서울지국장) : “동상이 있으면 이렇게 한다든가 이렇게 재미있게 하는 건 안 된다.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 그림이나 사진 그런 건 얼굴 반만 찍으면 안 된다. 그런 여러 가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엄격한 통제가 있어요...”

당 대회 폐막을 목전에 둔 지난 9일 저녁 시간,

<녹취> 윌 리플리(미국 CNN 기자) : “이제 대회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36년만에 처음으로 열린 노동당 대회의 폐막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굳게 닫혔던 행사장 문이 열리고 외신 기자들이 처음으로 당 대회장 내부로 들어간다.

<녹취> 김영남(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선거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수길 동지..."

북한 당국이 돌연 외신 기자들 30여 명만을 골라 당 대회 취재를 허가한 것이다.

김정은의 당 위원장 추대 상황을 본 것도 잠시.

취재진은 불과 10분 만에 쫓기듯 다시 행사장 밖으로 밀려 났다.

<녹취> “기자들은 매우 화가 나있어요..”

북한 당국의 자의적 기준에 따라 이뤄진 당 대회장 취재 허가, 초청받지 못한 100명이 넘는 기자들이 항의를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북한 당국의 언론 통제와 안내원들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도 감춰진 이면을 파헤치려는 기자들의 노력은 계속됐다.

당 대회 직전 노벨상 수상자와 동행해 방북한 BBC의 루퍼트 윙필드 헤이스 기자.

<녹취> 루퍼트 윙필드 헤이스(영국 BBC 기자) : "이 모습이 북한의 진실한 삶을 대변한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곳은 평양일 뿐입니다. 평양은 북한이 아닙니다. 평양은 거품입니다.“

북한당국의 안내 속에서도 체제선전의 모순점을 날카롭게 꼬집는 폭로 보도를 쏟아냈다.

또 일부 기자들은 북한의 통제와 감시를 피해 SNS를 활용해 북한의 실상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녹취> 애나 파이필드(미국 워싱턴 포스트 기자) : “여기는 평양 시내에 있는 양각도 호텔입니다. 우리 기자들은 이곳을 알카트라즈 감옥이라고 부릅니다.“

권총과 소총 등 온갖 무기로 채워진 어린이 시력검사표와 1970년대에 썼음직하다는 낡은 전화기와 소파의 사진,

북한 당국이 기자들에게 30유로를 받고 기자 완장을 강매했다는 사실도 SNS를 통해 폭로됐다.

외신기자들의 잇단 폭로 기사가 큰 반향을 일으키는 가운데 북한 당국이 급기야 BBC 취재진을 추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녹취> 오룡일(북한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 "우리 공화국의 법질서를 위반하고 문화 풍습을 비난하는 등 언로인으로서의 직분에 맞지 않게 우리나라 현실을 왜곡 날조하여 모략을 일관된 보도를 하였다."

김정은을 뚱뚱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물로 묘사하는 등 특히 김정은 관련 기사를 문제 삼았을 거란 추정이다.

<녹취> 존 서드워스(BBC 기자) : "단순히 보도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기자를 구금하고 추방하는 것이 정당한가요?"

당 대회가 끝나고 각국으로 돌아간 외신기자들은 실망과 분노로 가득 찬 후일담을 쏟아냈다.

북한의 노동당 대회는 하나의 서커스였다.

북한 사회는 부조리함과 정신이상의 경계에 있는 것 같다.

모든 게 무대 위 트루먼쇼 같다는 조롱이 이어졌다.

그리고 국제 언론단체와 인권단체들은 BBC기자의 추방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북한의 언론 자유 보장을 촉구하고 나섰다.

<인터뷰> 조한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김정은 정권이 언론을, 해외 언론을 이용한 이미지 정치를 활용을 하고 있지만 그 반면에 북한 체제, 김정은 체제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고 있고요. 또 하나는 그 100여명, 혹은 많은 북한을 취재하는 언론인들이 취재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북한 주민들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북한 당 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방북했던 외신기자들의 기대는 실망과 분노가 됐고, 오히려 북한의 허구를 폭로하는 역풍이 됐다.

정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외신을 대거 초청해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려던 북한 당국의 선전 선동전략이 한계에 봉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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