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모는 무형문화재 전수자

입력 2016.10.23 (22:46) 수정 2016.10.24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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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여러분은 문화재, 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십니까?

숭례문이나 첨성대 같은 유서깊은 유형문화재뿐만 아니라 판소리나 탈춤 같은 전통 예술도 무형 문화재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 무형문화재 보유자는 개인으로선 최고의 명예인데, 이걸 이어받을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외면받는 무형문화재, 그 속사정을 들여다 봤습니다.

<리포트>

택시 운전기사 오수용씨가 운행 준비를 서두릅니다.

저녁부터 새벽 4시까지 이어지는 근무.

저녁은 늘 차고지 근처 식당에서 해결합니다.

혼자 먹는 한 끼, 식사는 채 10분이 안돼 끝납니다.

<인터뷰> 오수용 : "택시를 하다 보니까, 시간 싸움 아닙니까? 그래서 빨리 먹고, 일을 또 해야 손님을 태우고 매상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오 씨가 택시 운전을 시작한 건 지난해 4월무렵입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정착한 일입니다.

<인터뷰> 오수용 : "백화점 관련 유통도 해보고, 뭐 직업을 한 17,18번 정도는 바꿔본 것 같아요. 자잘하게 하루도 해본 것 있고, 일주일 해본 것도 있고... 이력서를 쓰기가 창피한 부분이 좀 있죠. 너무 많이 직업을 바꾸다 보니까."

스무번 가까이 직업을 바꾼 끝에 밤에만 일하는 택시운전사가 된 이유는 뭘까요?

<인터뷰> 오수용 : "아무래도 춤을 추다 보까 이게 쩌다보니 문제들이 생기고, 창피한 얘기지만 그냥 권고사직도 당해보고 많이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까..."

오수용씨는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15호, '북청사자놀음'을 전승하는 무형문화재 이수자입니다.

30년 넘게 춤꾼으로 살았지만, 수입이 들쭉날쭉한 무대만으론 생계를 꾸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선선한 가을바람 가르며 흥겨운 우리 가락이 울려퍼집니다.

춤을 출때마다 흔들리는 북슬북슬한 털, 익살스런 표정의 사자 두마리가 등장해 한바탕 춤사위를 풀어놓습니다.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 일대에서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했던 놀이입니다.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어도 실제로 공연을 접해본 사람들은 많지 않죠?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인터뷰> 베른하드 리델(관객) : "진짜 즐거웠어요. 재미있게 봤어요."

<인터뷰> 이혜전 : "재미있었고요, 오랫만에 민속공연 보니까 너무 흥미로웠고, 애들한테도 좋은 경험이었던 같아요."

혼신을 다 한 무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사자탈'의 주인공, 오수용씨도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인터뷰> 오수용('북청사자놀음' 이수자) : "며칠전 무릎 인대를, 오른쪽 무릎 인대를 다쳐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진통제 먹고 살짝 약기운이 올라온 시점에 공연에 들어갔는데, 미흡했지만 잘 끝나서 다행이다 생각하고 만족합니다."

힘들게 무형문화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전승자의 90% 이상은 오 씨같은 이수자입니다.

3년 이상 전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정하는데, 전체의 63%는 생업과 전승 활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입니다.

무형문화재 보유자에게는 매달 130만 원에서 170만 원 정도의 전승 지원비가 지원됩니다.

하지만,전체 전승자의 90%에 달하는 이수자들은 전승 지원금 지급 대상이 아닙니다.

정부가 공연과 전승 교육 지원같은 사업을 하고는 있지만, 지원을 받는 대상자는 전체의 2퍼센트 안팎에 불과합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서울 인사동 거리.

곳곳에 전통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우리 멋과 전통을 잘 살린 작품은 드뭅니다.

<녹취> 기념품점 상인(음성변조) : "다 수입이예요. 뭐 중국것도 있고, 미얀마 것도 있고 그래요."

장인들의 작품은 찾는 사람이 적어서, 파는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녹취> 기념품점 상인(음성변조) : "아무래도 가격이 '0'이 하나 더 붙으니까 쉬운 금액은 아니잖아요. 많이 팔리면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많이 (취급)하는데, 그렇게 시장성이 좋지는 않으니까..."

전통 문화의 명맥을 잇는 사람도, 그걸 소비하는 사람도 빠르게 줄고 있는겁니다.

<인터뷰> 임장혁(중앙대 민속학과 교수) :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데 그것이 유통이 될까요? 작품이 일반인한테 보급이 되어야지 좋은 작품을 만들고 하기 때문에 전승자가 없다는 것은 뭐냐면 그들이 생업으로 했을 때 생활하기 어렵다는 면이 있거든요."

그냥 집이라고 하기엔 독특해 보입니다.

거실에는 바느질로 만든 작품들이 구석구석 전시돼 있습니다.

방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 만든 프랑스 인형으로 장식했습니다.

모두 이귀숙씨가 직접 만든 것들입니다.

<녹취> "이거 다 꾸미는데 26년동안 거의 매일 바느질을 했다고 보시면 돼요."

손으로 한 땀 한땀 바느질을 해 옷을 짓는 무형문화재 '누비장' 이수자이기도 한 이 씨는 3년 전 이 카페 갤러리를 열었습니다.

카페 한켠은 누비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장겸 작업실로 꾸몄습니다.

요즘은 12월 열 첫 전시회 준비로 바쁩니다.

박재된 '그들만의 문화'에서 벗어나야 전통이 계승될 수 있다는 절박함, 고민 끝에 찾은 해답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인터뷰> 이귀숙(무형문화재 '누비장' 이수자) : "우리 전통의 손누비도 많은 사람들이 와야 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어우러져서 제 공간을 와서 구경하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 공간을 만들었어요."

바다와 접한 전남 강진군 칠량면의 작은 마을.

일흔 여섯살의 정윤석 선생은 한때 '옹기쟁이'들로 북쩍이던 마을과 옹기를 실어나르던 항구의 분주함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인터뷰> 정윤석(무형문화재 '옹기장' 보유자) : "옛날에는 옹기마을로 옹기에만 의존하고 살았어요. 시골이면서도 다 농촌같지 않게 농사도 덜 짓고 그렇게 했는데, 플라스틱 제품이 나온 이후로부터 옹기를 덜 쓰더라구요."

플라스틱에 밀려 옹기가 사양산업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이 마을을 떠날때도 혼자 남아 명맥을 이어왔는데요.

우리 그릇의 가치를 묵묵히 지켜온 늙은 옹기 장인은 2010년 뒤늦게 국가지정 문화재가 됐습니다.

<인터뷰> 정윤석(무형문화재 '옹기장' 보유자) : "연구개발을 해서 후손들 물려는 못 줄망정 나마저 안하면 그 맥이 끊어져버리잖아. 누가 이거 지금 나 안하고 있으면 옹기 하려고 하겠어요?"

평생을 바쳐 이룬 장인의 경지.

하지만 한동안 이걸 이어받을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 정윤석(무형문화재 '옹기장' 보유자) : "옹기를 배우려고 안하더라구요. 남도 얼마든지 가르쳐주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며칠간 하다가 그냥 가버려요."

무형문화재가 되려면 전수장학생과 이수자, 전수교육조교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짧아도 10년이 넘게 걸리는 수련 기간을 버텨낼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훈련 기간 동안 겪는 경제적 어려움은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인터뷰> 김동식(무형문화재 '선자장' 보유자) : "배워보겠다는 학생도 있었어요. 있는데, 그 애들은 뭐라고 하냐면, 와서 한 달에 월급 얼마나 주려냐, 일주일에 뭐 매주마다다 쉬게 해주냐, 이런걸 따지면서 얘기를 하더라고."

'살아있는 문화재'인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전승자는 모두 6천여 명입니다.

이가운데 최고의 영예인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보유자는 134개 종목에 170여 명입니다.

하지만, 보유자가 없는 종목이 26개, 전수받을 조교가 없는 종목도 33개에 달할 정도로 우리 전통 문화 유산은 전승에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발에 탈을 쓴 광대와 재담꾼이 함께 펼치는 독특한 형식의 공연, 발탈.

국가 긴급 보호대상으로 지정된 무형문화제인데, 올해 공연은 다섯차례 뿐입니다.

여든 셋의 무형문화재 조영숙 선생의 마지막 바람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발탈'의 재미를 알리는 겁니다.

가장 절박한 건 무대입니다.

<인터뷰> 조영숙(무형문화재 '발탈'보유자) : "체계적으로 얘네(이수자들)를 무대에 세워줘야 돼요. 다른 건 없어요. 조그만 무대라도 무대를 만들어서 얘네들을 무대에서 이걸 활성화를 시켜줘야 이놈들도 신나서 하지..."

함께 북청사자놀음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보존회'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공연이 없어도 매 주 같은 시간, 한 자리에 모여 연습에 연습을 되풀이합니다.

<인터뷰> 이경난('북청사자놀음' 보존회장) : "매주 나와서 그 시간에 항상 연습을 하면서 기량을 높이고, 더 연마해서 좋은 것을 해야 되니까..."

오늘은 연습실 한 켠에 꼬마 손님들이 보입니다.

학예회 때 탈춤 공연을 해보겠다고 합니다.

<인터뷰> 윤동호(초등학교 교사) : "아이들은 K-pop이라든지 흥겨운 치어리딩을 좋아하는데, '탈춤' 하면 굉장히 우울해했거든요. 그런데 한 2주정도 연습을 하고 있는데 하면서 아이들이 굉장히 흥겨워 하고..."

이 어린이들에게 우리 전통 예술과 기술의 가치를 전달해주는 건, 인간문화재나 무형문화재 전수자들만의 몫은 아닐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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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택시 모는 무형문화재 전수자
    • 입력 2016-10-23 22:59:26
    • 수정2016-10-24 00: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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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여러분은 문화재, 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십니까?

숭례문이나 첨성대 같은 유서깊은 유형문화재뿐만 아니라 판소리나 탈춤 같은 전통 예술도 무형 문화재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 무형문화재 보유자는 개인으로선 최고의 명예인데, 이걸 이어받을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외면받는 무형문화재, 그 속사정을 들여다 봤습니다.

<리포트>

택시 운전기사 오수용씨가 운행 준비를 서두릅니다.

저녁부터 새벽 4시까지 이어지는 근무.

저녁은 늘 차고지 근처 식당에서 해결합니다.

혼자 먹는 한 끼, 식사는 채 10분이 안돼 끝납니다.

<인터뷰> 오수용 : "택시를 하다 보니까, 시간 싸움 아닙니까? 그래서 빨리 먹고, 일을 또 해야 손님을 태우고 매상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오 씨가 택시 운전을 시작한 건 지난해 4월무렵입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정착한 일입니다.

<인터뷰> 오수용 : "백화점 관련 유통도 해보고, 뭐 직업을 한 17,18번 정도는 바꿔본 것 같아요. 자잘하게 하루도 해본 것 있고, 일주일 해본 것도 있고... 이력서를 쓰기가 창피한 부분이 좀 있죠. 너무 많이 직업을 바꾸다 보니까."

스무번 가까이 직업을 바꾼 끝에 밤에만 일하는 택시운전사가 된 이유는 뭘까요?

<인터뷰> 오수용 : "아무래도 춤을 추다 보까 이게 쩌다보니 문제들이 생기고, 창피한 얘기지만 그냥 권고사직도 당해보고 많이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까..."

오수용씨는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15호, '북청사자놀음'을 전승하는 무형문화재 이수자입니다.

30년 넘게 춤꾼으로 살았지만, 수입이 들쭉날쭉한 무대만으론 생계를 꾸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선선한 가을바람 가르며 흥겨운 우리 가락이 울려퍼집니다.

춤을 출때마다 흔들리는 북슬북슬한 털, 익살스런 표정의 사자 두마리가 등장해 한바탕 춤사위를 풀어놓습니다.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 일대에서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했던 놀이입니다.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어도 실제로 공연을 접해본 사람들은 많지 않죠?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인터뷰> 베른하드 리델(관객) : "진짜 즐거웠어요. 재미있게 봤어요."

<인터뷰> 이혜전 : "재미있었고요, 오랫만에 민속공연 보니까 너무 흥미로웠고, 애들한테도 좋은 경험이었던 같아요."

혼신을 다 한 무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사자탈'의 주인공, 오수용씨도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인터뷰> 오수용('북청사자놀음' 이수자) : "며칠전 무릎 인대를, 오른쪽 무릎 인대를 다쳐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진통제 먹고 살짝 약기운이 올라온 시점에 공연에 들어갔는데, 미흡했지만 잘 끝나서 다행이다 생각하고 만족합니다."

힘들게 무형문화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전승자의 90% 이상은 오 씨같은 이수자입니다.

3년 이상 전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정하는데, 전체의 63%는 생업과 전승 활동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입니다.

무형문화재 보유자에게는 매달 130만 원에서 170만 원 정도의 전승 지원비가 지원됩니다.

하지만,전체 전승자의 90%에 달하는 이수자들은 전승 지원금 지급 대상이 아닙니다.

정부가 공연과 전승 교육 지원같은 사업을 하고는 있지만, 지원을 받는 대상자는 전체의 2퍼센트 안팎에 불과합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서울 인사동 거리.

곳곳에 전통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우리 멋과 전통을 잘 살린 작품은 드뭅니다.

<녹취> 기념품점 상인(음성변조) : "다 수입이예요. 뭐 중국것도 있고, 미얀마 것도 있고 그래요."

장인들의 작품은 찾는 사람이 적어서, 파는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녹취> 기념품점 상인(음성변조) : "아무래도 가격이 '0'이 하나 더 붙으니까 쉬운 금액은 아니잖아요. 많이 팔리면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많이 (취급)하는데, 그렇게 시장성이 좋지는 않으니까..."

전통 문화의 명맥을 잇는 사람도, 그걸 소비하는 사람도 빠르게 줄고 있는겁니다.

<인터뷰> 임장혁(중앙대 민속학과 교수) :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데 그것이 유통이 될까요? 작품이 일반인한테 보급이 되어야지 좋은 작품을 만들고 하기 때문에 전승자가 없다는 것은 뭐냐면 그들이 생업으로 했을 때 생활하기 어렵다는 면이 있거든요."

그냥 집이라고 하기엔 독특해 보입니다.

거실에는 바느질로 만든 작품들이 구석구석 전시돼 있습니다.

방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으로 만든 프랑스 인형으로 장식했습니다.

모두 이귀숙씨가 직접 만든 것들입니다.

<녹취> "이거 다 꾸미는데 26년동안 거의 매일 바느질을 했다고 보시면 돼요."

손으로 한 땀 한땀 바느질을 해 옷을 짓는 무형문화재 '누비장' 이수자이기도 한 이 씨는 3년 전 이 카페 갤러리를 열었습니다.

카페 한켠은 누비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장겸 작업실로 꾸몄습니다.

요즘은 12월 열 첫 전시회 준비로 바쁩니다.

박재된 '그들만의 문화'에서 벗어나야 전통이 계승될 수 있다는 절박함, 고민 끝에 찾은 해답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인터뷰> 이귀숙(무형문화재 '누비장' 이수자) : "우리 전통의 손누비도 많은 사람들이 와야 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어우러져서 제 공간을 와서 구경하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 공간을 만들었어요."

바다와 접한 전남 강진군 칠량면의 작은 마을.

일흔 여섯살의 정윤석 선생은 한때 '옹기쟁이'들로 북쩍이던 마을과 옹기를 실어나르던 항구의 분주함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인터뷰> 정윤석(무형문화재 '옹기장' 보유자) : "옛날에는 옹기마을로 옹기에만 의존하고 살았어요. 시골이면서도 다 농촌같지 않게 농사도 덜 짓고 그렇게 했는데, 플라스틱 제품이 나온 이후로부터 옹기를 덜 쓰더라구요."

플라스틱에 밀려 옹기가 사양산업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이 마을을 떠날때도 혼자 남아 명맥을 이어왔는데요.

우리 그릇의 가치를 묵묵히 지켜온 늙은 옹기 장인은 2010년 뒤늦게 국가지정 문화재가 됐습니다.

<인터뷰> 정윤석(무형문화재 '옹기장' 보유자) : "연구개발을 해서 후손들 물려는 못 줄망정 나마저 안하면 그 맥이 끊어져버리잖아. 누가 이거 지금 나 안하고 있으면 옹기 하려고 하겠어요?"

평생을 바쳐 이룬 장인의 경지.

하지만 한동안 이걸 이어받을 사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인터뷰> 정윤석(무형문화재 '옹기장' 보유자) : "옹기를 배우려고 안하더라구요. 남도 얼마든지 가르쳐주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며칠간 하다가 그냥 가버려요."

무형문화재가 되려면 전수장학생과 이수자, 전수교육조교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짧아도 10년이 넘게 걸리는 수련 기간을 버텨낼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훈련 기간 동안 겪는 경제적 어려움은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인터뷰> 김동식(무형문화재 '선자장' 보유자) : "배워보겠다는 학생도 있었어요. 있는데, 그 애들은 뭐라고 하냐면, 와서 한 달에 월급 얼마나 주려냐, 일주일에 뭐 매주마다다 쉬게 해주냐, 이런걸 따지면서 얘기를 하더라고."

'살아있는 문화재'인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전승자는 모두 6천여 명입니다.

이가운데 최고의 영예인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보유자는 134개 종목에 170여 명입니다.

하지만, 보유자가 없는 종목이 26개, 전수받을 조교가 없는 종목도 33개에 달할 정도로 우리 전통 문화 유산은 전승에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발에 탈을 쓴 광대와 재담꾼이 함께 펼치는 독특한 형식의 공연, 발탈.

국가 긴급 보호대상으로 지정된 무형문화제인데, 올해 공연은 다섯차례 뿐입니다.

여든 셋의 무형문화재 조영숙 선생의 마지막 바람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발탈'의 재미를 알리는 겁니다.

가장 절박한 건 무대입니다.

<인터뷰> 조영숙(무형문화재 '발탈'보유자) : "체계적으로 얘네(이수자들)를 무대에 세워줘야 돼요. 다른 건 없어요. 조그만 무대라도 무대를 만들어서 얘네들을 무대에서 이걸 활성화를 시켜줘야 이놈들도 신나서 하지..."

함께 북청사자놀음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보존회'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공연이 없어도 매 주 같은 시간, 한 자리에 모여 연습에 연습을 되풀이합니다.

<인터뷰> 이경난('북청사자놀음' 보존회장) : "매주 나와서 그 시간에 항상 연습을 하면서 기량을 높이고, 더 연마해서 좋은 것을 해야 되니까..."

오늘은 연습실 한 켠에 꼬마 손님들이 보입니다.

학예회 때 탈춤 공연을 해보겠다고 합니다.

<인터뷰> 윤동호(초등학교 교사) : "아이들은 K-pop이라든지 흥겨운 치어리딩을 좋아하는데, '탈춤' 하면 굉장히 우울해했거든요. 그런데 한 2주정도 연습을 하고 있는데 하면서 아이들이 굉장히 흥겨워 하고..."

이 어린이들에게 우리 전통 예술과 기술의 가치를 전달해주는 건, 인간문화재나 무형문화재 전수자들만의 몫은 아닐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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