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도 미스터리

입력 2017.02.26 (22:56) 수정 2017.02.27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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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화가 천경자는 개성 넘치는 화풍으로 한국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지만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작가 본인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측은 진품이라고 반박하는 이례적인 상황.

20년 넘게 유족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공방이 이어진 가운데 최근엔 검찰과 프랑스 감정단까지 가세했습니다.

더욱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미인도 위작 논란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관람객들이 접근할 수 없는 지하로 내려가자 두꺼운 철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만여 점 가까운 작품이 보관돼 있는 미술관의 핵심, 수장고 입구입니다.

바로 이곳에 미인도가 보관돼 있습니다.

<녹취> 미술관 관계자 : "(미인도는 어디에 있는건가요?) 여기 (진열장)랙 중에 하나에 걸려서 보관돼 있습니다. 처음왔을 때 이전을 해가지고 포장돼 있는 걸 해포(포장을 다시 품)를 해서 랙에 바로 걸어놓은 겁니다."

어렵게 수장고 안까지는 들어왔지만 미술관 측은 미인도에 대한 촬영은 끝끝내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1977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미인도는 천 작가의 다른 그림과는 달리 1991년이 돼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곧바로 위작 논란이 일면서 전시장을 떠나 수장고로 다시 돌아갔고 그 후 일절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미인도가 다시 세상에 등장한 건 25년이 지난 지난해 12월!

검찰에서였습니다.

위작인 미인도를 진품이라고 해 천 작가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유족이 고소 고발한 사건과 관련해 수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인터뷰> 노승권(서울중앙지방검찰청 1차장검사) : "서울중앙지검은 미인도는 진품인 것으로 결론을 냈고..."

그렇다면 검찰이 진품으로 판단한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미술품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때 중요한 근거는 작품의 유통 경로.

작가의 손을 언제 떠났고, 어느 소장자를 거쳤는지가 분명히 밝혀지면 일단 진품이라고 보는 겁니다.

검찰은 천 작가의 손에서 미인도가 떠난 시점을 1977년이라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배용원(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6부장검사) : "77년경에 천 화백이 오 모 씨, 당시 모 정부기관 대구분실장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림 두 점을 제공했고..."

천 작가의 그림을 많이 전시했던 임경식 전 화랑협회장 역시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임경(전 한국화랑협회장) : "내가 천 선생님하고 그분 인사를 시켰어요. 그게 나는 다에요. 그게 다인데 그 후에 서울을 또 오니까 천 선생님이 나보고 하는 말이 임 사장, 그 왜 오씨 그 사람을 괜히 나한테 인사시켜가지고 나한테 자꾸 작품달라고 졸라서 귀찮아 죽겠다 이러더라고요."

오 씨는 이어 천 작가에게서 받은 미인도를 당시 상사이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게 선물했다는 게 검찰 발표 내용입니다.

<인터뷰> 배용원(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6부장검사) : "이번 수사과정을 통해서 오모 씨의 처가 김 모 부장의 처에게 그림을 선물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후 10.26 사건을 거치면서 김재규는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고, 이 과정에서 미인도 역시 계엄사령부와 문화공보부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넘어가게 됐다는 겁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김재규의 재산 헌납 증서입니다.

귀금속과 고급시계 등이 줄줄이 적혀 있는 가운데 천경자 미인도 그림이 포함돼 있습니다.

1980년 3월 5일자로 당시 계엄사 합수단과 재무부 직원 등이 무사히 인계 인수했다고 증명하는 서명도 보입니다.

2달 뒤인 1980년 5월 3일, 국립현대미술관이 문화공보부에 발송한 서륩니다.

미인도 등 김재규의 헌납 재산을 무사히 인수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재산 목록 27번째에 미인도 그림이 있고 가격도 30만 원으로 당시 시가와 비슷하게 반영돼 있습니다.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핵심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똑같은 그림인데도 다양한 파장의 빛을 번갈아 쏘자 그림의 형태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미인도에 적용을 했더니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던 숨겨진 밑그림이 나타납니다.

<인터뷰> 강태이(국랍과학수사연구원 디지털분석과 연구관) : "아래에서 빛을 주고 저쪽에서 필터를 주면 이제 아래쪽에 있는 것까지 다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일반광에서 안 보이던 이런 선들이 보이게 되는 거죠."

검찰은 밑그림 그대로가 아니라 과감한 수정과 수많은 덧칠을 통해 다른 형태로 작품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천 작가만의 독특한 기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1976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차녀스케치'가 미인도 밑그림의 원형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인터뷰> 배용원(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6부장검사) : "보시는 스케치가 1976년에 천 화백이 차녀를 모델로 스케치한 처녀 스케치인데 이게 2016년에 최초로 공개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 구도와 세부묘사에 있어서 상당히 아주 고도로 유사합니다."

깊고 선명한 색감을 내기 위해 즐겨 사용한 석채, 즉 돌가루가 미인도에서도 잘 표현돼 있다는 점도 고려됐습니다.

<인터뷰> 강태이(국랍과학수사연구원 디지털분석과 연구관) : "천경자 화백 전작과 유사한 특징이 많이 관찰되지만 위작하고는 차이점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3214) 저희가 할 수 있는 기법은 다했다고 보시면 돼요."

그러나 천경자 화백의 유가족들은 검찰 수사 결과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인터뷰> 배금자(유가족측 변호사) : "검찰의 결론이 얼마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취소시키기 위해서 항고에 이르렀습니다. 미인도는 결코 진품이 아닙니다."

유족들은 무엇보다 생전 천 작가 본인이 위작이 분명하다는 입장을 일관되고 명확하게 주장해왔다고 반박했습니다.

<인터뷰> 임경식(전 화랑협회회장) : "작가가 이거는 맞다 아니다 그러면 그걸로서 끝나는거에요. 그 작품의 진위문제 종결자는 화가 본인이에요."

위작 논란이 불거진 당시 천 작가가 KBS와 가진 인터뷰 영상입니다.

형태와 완성도 등의 수준이 떨어진다며 확실히 가짜라고 말했습니다.

<인터뷰> 천경자(1991년 8월) : "모든게 하여튼 막 봐서 제가 엉성한 그림이에요. 그래서 제가 좀 악을 쓰다시피해서 가짜다 그러고 악을 썼어요."

작품은 작가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인지 아닌지는 금방 알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인터뷰> 故 천경자(1991년 8월) : "이게 자기 분신이고 자기 자식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그정도로 그림하고 밀착돼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에요. 저 그림...."

유가족들도 미인도라는 그림은 집에서 전혀 본 기억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녹취> 김정희(천경자 화가 차녀) : "77년이면 제가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집에 어머니랑 같이 살고 있었고,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 그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유가족의 의뢰를 받은 프랑스 민간 업체의 감정 결과 또한 위작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지난해 9월, 서울의 한 화랑. 꽁꽁 묶인 보자기를 조심스레 풀자 미인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감정 방식은 미인도를 포함한 모두 10개의 작품을 특수 촬영 장비를 통해 각각 1650개의 단층으로 쪼갠 뒤 작품끼리 서로 비교 분석하는 방식입니다.

그림에는 작가 특유의 버릇이나 습관이 공통적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 착안, 미인도에서도 그 공통점이 있는지 찾아보겠다는 겁니다.

<인터뷰> 장 페니코 (프랑스 감정업체 대표) : "저희는 K5라고 부르는 미인도를 완벽하게 천경자 화백의 진품이라고 여겨지는 77년도부터 85년대까지의 다른 9개의 작품들과 비교 분석하였습니다."

분석 방법의 통계학적 실효성을 놓고 논란이 일긴 했지만, 프랑스 감정단은 일단 미인도가 진품에 속할 가능성은 0.00002%, 사실상 위작이라고 결론냈습니다.

<인터뷰> 장 페니코 (프랑스 감정업체 대표) : "작품들에 대한 비교와 확실한 검증으로 모든 전문가들과 어떠한 주관성도 배제한 이 검증은 천경자 화백이 말한 대로 자신의 작품이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이 프랑스 민간업체의 감정 결과를 참고해 진품이라고 결론냈지만, 수사 결과 발표 이후 프랑스 업체가 다시 반반에 나선 겁니다.

검찰 수사가 발표됐지만 위작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겁니다.

취재 과정에서 입수한 천경자 작가와 국립현대미술관측 관계자가 나눈 공식 면담 내용이 담긴 문서입니다.

"이 자리에서 내 작품이라고 말하기를 원하는가? 현재로서는 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음"

"전문가의 감정과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진위를 가리겠음."

"진품으로 확인되었을 경우, 나는 어떻게 되는가?"

"미술관으로서는 진위를 밝힐 수밖에 없음. 이점 양해 바람."

26년 전 대화지만 지금의 진위 공방과 다른 점은 조금도 없습니다.

당장 국가기관이나 해외 감정기관에 맡겨 진위 문제를 손쉽게 풀어보려는 안이한 생각이 문제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터뷰> 최광진(미술평론가) : "지금의 상황에서는 진품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위작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거에요. 지금 상황에서는...그럴 경우에는 작가의 말을 들어주든지 아니면 판정불가라고 해놓고 전문가들이 논의를 하게 하든지 이렇게 돼야 상식인거죠."

국립현대미술관측도 위작 논란 이후 미인도를 일절 공개하지 않아 구설을 자초했습니다.

전면 공개 뒤 다양한 관점의 연구들이 진행됐다면 이런 식의 논란은 피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인터뷰> 최병식(경희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 저는 의미가 있다고 보거든요. 그렇게 되면 미술인들이 많이 가고 일반인들도 많이 갈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해서 공공의 장으로 만들어 내야 되는데..."

결국 작품과 작가에 대한 학문적 논의라는 정공법을 택할 때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유가족들도 사회적 공론장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현숙(미술사학연구회 회장) : "작가와 전문가들이 그동안 대립했던 것을 한 차원 떠났으면 좋겠어요. 학문하는 사람들이 그걸 떠나서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자유, 또 맞다고 얘기할 수 있는 학문적 엄정성에 입각한 결론을 낸다면...."

천경자 작가는 평생 자신의 작품 목록에 미인도를 넣지 않았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현재 미인도를 작가 미상 작품으로 분류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림은 있지만 그린 사람은 없는 기묘한 상황.

해묵은 위작 스캔들에 대해 이제 우리 미술계가 어떤 지혜로운 해결책을 내놓을지 지켜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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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인도 미스터리
    • 입력 2017-02-26 23:09:04
    • 수정2017-02-27 01:19:56
    취재파일K
<오프닝>

화가 천경자는 개성 넘치는 화풍으로 한국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지만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작가 본인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측은 진품이라고 반박하는 이례적인 상황.

20년 넘게 유족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공방이 이어진 가운데 최근엔 검찰과 프랑스 감정단까지 가세했습니다.

더욱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미인도 위작 논란을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관람객들이 접근할 수 없는 지하로 내려가자 두꺼운 철문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만여 점 가까운 작품이 보관돼 있는 미술관의 핵심, 수장고 입구입니다.

바로 이곳에 미인도가 보관돼 있습니다.

<녹취> 미술관 관계자 : "(미인도는 어디에 있는건가요?) 여기 (진열장)랙 중에 하나에 걸려서 보관돼 있습니다. 처음왔을 때 이전을 해가지고 포장돼 있는 걸 해포(포장을 다시 품)를 해서 랙에 바로 걸어놓은 겁니다."

어렵게 수장고 안까지는 들어왔지만 미술관 측은 미인도에 대한 촬영은 끝끝내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1977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미인도는 천 작가의 다른 그림과는 달리 1991년이 돼서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곧바로 위작 논란이 일면서 전시장을 떠나 수장고로 다시 돌아갔고 그 후 일절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미인도가 다시 세상에 등장한 건 25년이 지난 지난해 12월!

검찰에서였습니다.

위작인 미인도를 진품이라고 해 천 작가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유족이 고소 고발한 사건과 관련해 수사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인터뷰> 노승권(서울중앙지방검찰청 1차장검사) : "서울중앙지검은 미인도는 진품인 것으로 결론을 냈고..."

그렇다면 검찰이 진품으로 판단한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미술품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때 중요한 근거는 작품의 유통 경로.

작가의 손을 언제 떠났고, 어느 소장자를 거쳤는지가 분명히 밝혀지면 일단 진품이라고 보는 겁니다.

검찰은 천 작가의 손에서 미인도가 떠난 시점을 1977년이라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배용원(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6부장검사) : "77년경에 천 화백이 오 모 씨, 당시 모 정부기관 대구분실장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림 두 점을 제공했고..."

천 작가의 그림을 많이 전시했던 임경식 전 화랑협회장 역시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임경(전 한국화랑협회장) : "내가 천 선생님하고 그분 인사를 시켰어요. 그게 나는 다에요. 그게 다인데 그 후에 서울을 또 오니까 천 선생님이 나보고 하는 말이 임 사장, 그 왜 오씨 그 사람을 괜히 나한테 인사시켜가지고 나한테 자꾸 작품달라고 졸라서 귀찮아 죽겠다 이러더라고요."

오 씨는 이어 천 작가에게서 받은 미인도를 당시 상사이자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게 선물했다는 게 검찰 발표 내용입니다.

<인터뷰> 배용원(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6부장검사) : "이번 수사과정을 통해서 오모 씨의 처가 김 모 부장의 처에게 그림을 선물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후 10.26 사건을 거치면서 김재규는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했고, 이 과정에서 미인도 역시 계엄사령부와 문화공보부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넘어가게 됐다는 겁니다.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는 김재규의 재산 헌납 증서입니다.

귀금속과 고급시계 등이 줄줄이 적혀 있는 가운데 천경자 미인도 그림이 포함돼 있습니다.

1980년 3월 5일자로 당시 계엄사 합수단과 재무부 직원 등이 무사히 인계 인수했다고 증명하는 서명도 보입니다.

2달 뒤인 1980년 5월 3일, 국립현대미술관이 문화공보부에 발송한 서륩니다.

미인도 등 김재규의 헌납 재산을 무사히 인수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재산 목록 27번째에 미인도 그림이 있고 가격도 30만 원으로 당시 시가와 비슷하게 반영돼 있습니다.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핵심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똑같은 그림인데도 다양한 파장의 빛을 번갈아 쏘자 그림의 형태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미인도에 적용을 했더니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던 숨겨진 밑그림이 나타납니다.

<인터뷰> 강태이(국랍과학수사연구원 디지털분석과 연구관) : "아래에서 빛을 주고 저쪽에서 필터를 주면 이제 아래쪽에 있는 것까지 다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일반광에서 안 보이던 이런 선들이 보이게 되는 거죠."

검찰은 밑그림 그대로가 아니라 과감한 수정과 수많은 덧칠을 통해 다른 형태로 작품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 천 작가만의 독특한 기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1976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차녀스케치'가 미인도 밑그림의 원형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인터뷰> 배용원(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6부장검사) : "보시는 스케치가 1976년에 천 화백이 차녀를 모델로 스케치한 처녀 스케치인데 이게 2016년에 최초로 공개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 구도와 세부묘사에 있어서 상당히 아주 고도로 유사합니다."

깊고 선명한 색감을 내기 위해 즐겨 사용한 석채, 즉 돌가루가 미인도에서도 잘 표현돼 있다는 점도 고려됐습니다.

<인터뷰> 강태이(국랍과학수사연구원 디지털분석과 연구관) : "천경자 화백 전작과 유사한 특징이 많이 관찰되지만 위작하고는 차이점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3214) 저희가 할 수 있는 기법은 다했다고 보시면 돼요."

그러나 천경자 화백의 유가족들은 검찰 수사 결과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인터뷰> 배금자(유가족측 변호사) : "검찰의 결론이 얼마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취소시키기 위해서 항고에 이르렀습니다. 미인도는 결코 진품이 아닙니다."

유족들은 무엇보다 생전 천 작가 본인이 위작이 분명하다는 입장을 일관되고 명확하게 주장해왔다고 반박했습니다.

<인터뷰> 임경식(전 화랑협회회장) : "작가가 이거는 맞다 아니다 그러면 그걸로서 끝나는거에요. 그 작품의 진위문제 종결자는 화가 본인이에요."

위작 논란이 불거진 당시 천 작가가 KBS와 가진 인터뷰 영상입니다.

형태와 완성도 등의 수준이 떨어진다며 확실히 가짜라고 말했습니다.

<인터뷰> 천경자(1991년 8월) : "모든게 하여튼 막 봐서 제가 엉성한 그림이에요. 그래서 제가 좀 악을 쓰다시피해서 가짜다 그러고 악을 썼어요."

작품은 작가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인지 아닌지는 금방 알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인터뷰> 故 천경자(1991년 8월) : "이게 자기 분신이고 자기 자식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그정도로 그림하고 밀착돼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에요. 저 그림...."

유가족들도 미인도라는 그림은 집에서 전혀 본 기억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녹취> 김정희(천경자 화가 차녀) : "77년이면 제가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집에 어머니랑 같이 살고 있었고,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 그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유가족의 의뢰를 받은 프랑스 민간 업체의 감정 결과 또한 위작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지난해 9월, 서울의 한 화랑. 꽁꽁 묶인 보자기를 조심스레 풀자 미인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감정 방식은 미인도를 포함한 모두 10개의 작품을 특수 촬영 장비를 통해 각각 1650개의 단층으로 쪼갠 뒤 작품끼리 서로 비교 분석하는 방식입니다.

그림에는 작가 특유의 버릇이나 습관이 공통적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 착안, 미인도에서도 그 공통점이 있는지 찾아보겠다는 겁니다.

<인터뷰> 장 페니코 (프랑스 감정업체 대표) : "저희는 K5라고 부르는 미인도를 완벽하게 천경자 화백의 진품이라고 여겨지는 77년도부터 85년대까지의 다른 9개의 작품들과 비교 분석하였습니다."

분석 방법의 통계학적 실효성을 놓고 논란이 일긴 했지만, 프랑스 감정단은 일단 미인도가 진품에 속할 가능성은 0.00002%, 사실상 위작이라고 결론냈습니다.

<인터뷰> 장 페니코 (프랑스 감정업체 대표) : "작품들에 대한 비교와 확실한 검증으로 모든 전문가들과 어떠한 주관성도 배제한 이 검증은 천경자 화백이 말한 대로 자신의 작품이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이 프랑스 민간업체의 감정 결과를 참고해 진품이라고 결론냈지만, 수사 결과 발표 이후 프랑스 업체가 다시 반반에 나선 겁니다.

검찰 수사가 발표됐지만 위작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겁니다.

취재 과정에서 입수한 천경자 작가와 국립현대미술관측 관계자가 나눈 공식 면담 내용이 담긴 문서입니다.

"이 자리에서 내 작품이라고 말하기를 원하는가? 현재로서는 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음"

"전문가의 감정과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진위를 가리겠음."

"진품으로 확인되었을 경우, 나는 어떻게 되는가?"

"미술관으로서는 진위를 밝힐 수밖에 없음. 이점 양해 바람."

26년 전 대화지만 지금의 진위 공방과 다른 점은 조금도 없습니다.

당장 국가기관이나 해외 감정기관에 맡겨 진위 문제를 손쉽게 풀어보려는 안이한 생각이 문제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인터뷰> 최광진(미술평론가) : "지금의 상황에서는 진품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위작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거에요. 지금 상황에서는...그럴 경우에는 작가의 말을 들어주든지 아니면 판정불가라고 해놓고 전문가들이 논의를 하게 하든지 이렇게 돼야 상식인거죠."

국립현대미술관측도 위작 논란 이후 미인도를 일절 공개하지 않아 구설을 자초했습니다.

전면 공개 뒤 다양한 관점의 연구들이 진행됐다면 이런 식의 논란은 피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인터뷰> 최병식(경희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 저는 의미가 있다고 보거든요. 그렇게 되면 미술인들이 많이 가고 일반인들도 많이 갈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해서 공공의 장으로 만들어 내야 되는데..."

결국 작품과 작가에 대한 학문적 논의라는 정공법을 택할 때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유가족들도 사회적 공론장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현숙(미술사학연구회 회장) : "작가와 전문가들이 그동안 대립했던 것을 한 차원 떠났으면 좋겠어요. 학문하는 사람들이 그걸 떠나서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자유, 또 맞다고 얘기할 수 있는 학문적 엄정성에 입각한 결론을 낸다면...."

천경자 작가는 평생 자신의 작품 목록에 미인도를 넣지 않았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현재 미인도를 작가 미상 작품으로 분류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림은 있지만 그린 사람은 없는 기묘한 상황.

해묵은 위작 스캔들에 대해 이제 우리 미술계가 어떤 지혜로운 해결책을 내놓을지 지켜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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