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줌인] “애국가 바꾸시겠습니까?”…안익태, ‘친나치’ 논란

입력 2019.01.21 (21:31) 수정 2019.01.2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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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뉴스 줌인 시간입니다. 정윤섭 기자 나왔습니다.

정 기자, 시작해볼까요?

[기자]

화면 보실까요?

"애국가를 바꾸시겠습니까?" 질문이 좀 센가요?

[앵커]

며칠 전부터 관련 기사가 좀 있었습니다. 작곡가 때문이죠?

[기자]

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에 대한 논란 때문인데요, 실제로 이런 여론조사가 있었고 최근에 반대 의견이 더 많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안익태 선생의 친일 문제는 많이 알려졌었는데 친나치 행위까지 했다, 이런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앵커]

친나치까지 나왔다는 건데 친일 행적은 사실 좀 오래된 얘기 아닌가요?

[기자]

안익태의 친일 행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영상을 보시고 다시 이 설명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942년 만주국 1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 장면인데요,

안익태 선생이 직접 지휘를 하고 있고요,

이 때 연주된 음악이 본인이 직접 작곡한 <만주 환상곡>이라는 교향곡이었습니다.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직접 연주한 적이 있다는 기록도 있고요.

에키타이 안, 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앵커]

지금 저 영상에 나왔던 지휘자가 안익태 선생인거죠? 그런데 친나치 주장은 좀 낯선데요?

[기자]

네, 이 주장은 최근에 발간된 <안익태 케이스> 라는 책에서 나왔습니다.

저자는 이해영 한신대 교수인데, 이해영 교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친나치 행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안익태가 베를린에 2년 반 동안 살면서 지냈던 집이 에하라 고이치라는 일본인의 집이었는데, 그가 일본 첩보망의 독일 총책이었다는 거고, 이 내용이 CIA기록에 남아 있다는 겁니다.

이 교수가 두번째로 주목한 게 안익태를 후원한 단체입니다.

안익태를 후원한 단체는 독일협회, 독일-일본 협회라는 곳인데 이게 바로 나치 외곽 조직이었다는 겁니다.

[앵커]

당시에 말이죠? 좀 충격적인 얘기네요?

[기자]

네, 정운현 국무총리 비서실장이 자신의 SNS에 글을 하나 올렸는데 애국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서방선진국이라면 진작 폐기됐을 것이다, 이런 글을 남기면서 논쟁을 가열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반발 여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굳이 애국가를 바꿔야 하느냐 친일과 친나치의 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작곡가의 행위와 작품은 별개다, 친나치 행위가 명백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이런 주장들이 반발로 나오고 있습니다.

[앵커]

결론이 쉽지 않은 논쟁인데요.

다음 소식은요?

[기자]

네 화면 좀 보실까요?

어제(20일)가 용산참사 10년이 되는 날이었죠,

당시 강경 진압에 관여한 주요 경찰조직들을 간략하게 표현해봤는데요.

6명이 희생되고, 철거민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렀는데, 사실상 경찰은 아무런 책임을 지는 모습이 없었잖습니까?

그래서 당시에 누가 어디에 있었고, 이후엔 어떤 길을 걸었나 간략하게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앵커]

어떻게 되었나요?

[기자]

우선 작은 글씨로 된 것을 말로 설명드리면 먼저 특공대장은 박삼복, 용산서장은 백동산 씨였습니다.

당시 백동산 서장은 특공대 투입을 건의한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 윗선 3명을 보겠습니다.

당시 서울시경 기동단 단장 신두호 씨입니다.

현장 지휘 책임자였죠, 이후 승진해서 서울시경 차장을 거쳐서 몇년 전엔 인천지방경찰청 청장까지 지냈습니다.

[앵커]

승승장구한 건가요?

[기자]

그야말로 승승장구한 거죠. 그 위로 또 올라가 보겠습니다.

김수정 당시 서울경찰청 차장입니다.

특공대 투입을 직접 발표한 인물, 구체적인 명령은 하지 않았다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는데, 중앙경찰학교 교장을 거쳐서 울산지방경찰청 청장도 했었습니다.

[앵커]

그래도 가장 핵심적 인물은 최종 결정권자 김석기죠?

[기자]

그렇죠. 계속 논란이 되고 있죠.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입니다.

참사 직후 경찰청장으로까지 내정됐지만 스스로 낙마했고 그 뒤 오사카 총영사를 갑니다.

이때 보은 인사 논란이 일었고, 돌아와선 한국공항공사 사장도 하고, 20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됐습니다.

김의원은 오늘(21일) 기자회견까지 열었는데요,

용산참사란 말 대신 화재사고라고 하면서 지금도 같은 상황이라면 같은 결정을 할거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앵커]

이렇게까지 당당하면 좀 더 깊이 있게 진상규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정 기자, 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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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줌인] “애국가 바꾸시겠습니까?”…안익태, ‘친나치’ 논란
    • 입력 2019-01-21 21:36:07
    • 수정2019-01-21 22: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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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뉴스 줌인 시간입니다. 정윤섭 기자 나왔습니다.

정 기자, 시작해볼까요?

[기자]

화면 보실까요?

"애국가를 바꾸시겠습니까?" 질문이 좀 센가요?

[앵커]

며칠 전부터 관련 기사가 좀 있었습니다. 작곡가 때문이죠?

[기자]

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에 대한 논란 때문인데요, 실제로 이런 여론조사가 있었고 최근에 반대 의견이 더 많았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안익태 선생의 친일 문제는 많이 알려졌었는데 친나치 행위까지 했다, 이런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앵커]

친나치까지 나왔다는 건데 친일 행적은 사실 좀 오래된 얘기 아닌가요?

[기자]

안익태의 친일 행적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영상을 보시고 다시 이 설명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1942년 만주국 1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 장면인데요,

안익태 선생이 직접 지휘를 하고 있고요,

이 때 연주된 음악이 본인이 직접 작곡한 <만주 환상곡>이라는 교향곡이었습니다.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직접 연주한 적이 있다는 기록도 있고요.

에키타이 안, 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앵커]

지금 저 영상에 나왔던 지휘자가 안익태 선생인거죠? 그런데 친나치 주장은 좀 낯선데요?

[기자]

네, 이 주장은 최근에 발간된 <안익태 케이스> 라는 책에서 나왔습니다.

저자는 이해영 한신대 교수인데, 이해영 교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친나치 행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안익태가 베를린에 2년 반 동안 살면서 지냈던 집이 에하라 고이치라는 일본인의 집이었는데, 그가 일본 첩보망의 독일 총책이었다는 거고, 이 내용이 CIA기록에 남아 있다는 겁니다.

이 교수가 두번째로 주목한 게 안익태를 후원한 단체입니다.

안익태를 후원한 단체는 독일협회, 독일-일본 협회라는 곳인데 이게 바로 나치 외곽 조직이었다는 겁니다.

[앵커]

당시에 말이죠? 좀 충격적인 얘기네요?

[기자]

네, 정운현 국무총리 비서실장이 자신의 SNS에 글을 하나 올렸는데 애국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서방선진국이라면 진작 폐기됐을 것이다, 이런 글을 남기면서 논쟁을 가열시키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반발 여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굳이 애국가를 바꿔야 하느냐 친일과 친나치의 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작곡가의 행위와 작품은 별개다, 친나치 행위가 명백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이런 주장들이 반발로 나오고 있습니다.

[앵커]

결론이 쉽지 않은 논쟁인데요.

다음 소식은요?

[기자]

네 화면 좀 보실까요?

어제(20일)가 용산참사 10년이 되는 날이었죠,

당시 강경 진압에 관여한 주요 경찰조직들을 간략하게 표현해봤는데요.

6명이 희생되고, 철거민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렀는데, 사실상 경찰은 아무런 책임을 지는 모습이 없었잖습니까?

그래서 당시에 누가 어디에 있었고, 이후엔 어떤 길을 걸었나 간략하게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앵커]

어떻게 되었나요?

[기자]

우선 작은 글씨로 된 것을 말로 설명드리면 먼저 특공대장은 박삼복, 용산서장은 백동산 씨였습니다.

당시 백동산 서장은 특공대 투입을 건의한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 윗선 3명을 보겠습니다.

당시 서울시경 기동단 단장 신두호 씨입니다.

현장 지휘 책임자였죠, 이후 승진해서 서울시경 차장을 거쳐서 몇년 전엔 인천지방경찰청 청장까지 지냈습니다.

[앵커]

승승장구한 건가요?

[기자]

그야말로 승승장구한 거죠. 그 위로 또 올라가 보겠습니다.

김수정 당시 서울경찰청 차장입니다.

특공대 투입을 직접 발표한 인물, 구체적인 명령은 하지 않았다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는데, 중앙경찰학교 교장을 거쳐서 울산지방경찰청 청장도 했었습니다.

[앵커]

그래도 가장 핵심적 인물은 최종 결정권자 김석기죠?

[기자]

그렇죠. 계속 논란이 되고 있죠.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입니다.

참사 직후 경찰청장으로까지 내정됐지만 스스로 낙마했고 그 뒤 오사카 총영사를 갑니다.

이때 보은 인사 논란이 일었고, 돌아와선 한국공항공사 사장도 하고, 20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됐습니다.

김의원은 오늘(21일) 기자회견까지 열었는데요,

용산참사란 말 대신 화재사고라고 하면서 지금도 같은 상황이라면 같은 결정을 할거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앵커]

이렇게까지 당당하면 좀 더 깊이 있게 진상규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정 기자, 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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