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스페셜] 임시정부 27년의 궤적

입력 2019.04.13 (22:04) 수정 2019.04.13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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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그제는 우리 임시정부가 만들어져 독립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임정 100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었는데요.

중국 상하이에서 시작해 항저우, 광저우, 충칭까지 장장 27년 동안 임정 요인들은 중국 대륙을 옮겨 다니며 독립투쟁을 이어갔습니다.

1940년에는 우리 국군의 모태, 광복군을 출범시켜, '서울 진격 작전'을 준비하기도 했었죠.

망명정부 27년, 고난의 유랑길을 안양봉 특파원이 돌아봤습니다.

[리포트]

백 년 전 모습을 간직한 상하이 와이탄, 1919년 3.1 운동의 거센 함성은 독립운동가들을 당시 열강들의 외교 각축장 상하이로 불러 들입니다.

그리고 백년 전 4월 11일, 상하이에 우리 임시정부가 들어섭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공화 정부.

함께 자리한 초대 국무원 요인들입니다.

앞줄은 신익희, 안창호, 현순 선생입니다.

뚫어질듯 앞을 응시한 안창호 선생의 눈매에서 독립의 열망이 느껴집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우리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알린 쾌거 였습니다.

그해 12월 19일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사형을 집행합니다.

[김구 선생 '백범일지' : "최후의 식사를 같이했다.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추격을 피해 거점을 저장성 항저우로 옮깁니다.

이 곳에서 임정은 체계적인 무장 투쟁을 벌일 수 있는 군사 역량을 양성합니다.

[최춘봉/중국 항저우 사범대학 교수 : "나중에 이분들이 조선의용대, 광복군이 성립된 다음에 기간원이 됩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구 선생은 부득이 항저우 밖 지아싱으로 몸을 피합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의 항일 투쟁 큰 그림은 이곳에서 완성됩니다.

[수메이좬/김구 선생 피난처 안내인 : "어떻게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해서 함께 항일 투쟁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여기에서 많은 강령 서류를 작성했고, 한국 임시정부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김구 선생 독립운동 활동에 가장 큰 위기는 1938년 찾아옵니다.

동포가 쏜 흉탄을 맞은 김구 선생은 이 병원에 실려옵니다.

총알이 가슴 한 복판에 꽃혔지만 특유의 체력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집니다.

[김구 선생 '백범일지' : "입원 수속도 할 필요 없다, 네 시간이 되어도 살아 있어 그때야 치료를 시작했다."]

이후 광저우, 다시 류저우로 긴 망명 투쟁을 이어간 임시 정부는 마침내 충칭에서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지난달 복원 공사를 마친 중국 충칭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입니다.

전시실 설치가 끝나면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됩니다.

1940년 9월 17일, 우리 국군의 모태 한국광복군이 첫 깃발을 올립니다.

사무친 표정의 김구 주석, 오른쪽 옆은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입니다.

광복군은 1942년 김원봉 선생의 조선의용대가 결합하고 탈영한 일제 학도병들까지 몰려들면서 45년엔 병력이 천 명을 넘어섭니다.

최근 발굴된 친필편지에서 김원봉 선생은 광복군에 편입된 이후, 중국 인사들은 물론, 만주와 한국에 까지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고 당시 광복군의 위상을 평가합니다.

[김득중/국사편찬위원회 박사 : "조선의용대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군사적인 영향, 인적인 부분, 이런 것들이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군사적 영향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죠."]

이제 남은 건 일제가 강탈한 우리 땅을 우리 힘으로 되찾는 겁니다.

미군 전략정보처, OSS가 든든한 동지로 나섭니다.

산길을 따라 20여 분 올라가자, 깍아지른 벼랑이 나타납니다.

한국광복군은 미군 OSS의 도움을 받아 이 암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훈련을 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중국군 400명 보다 우리 광복군 7명이 더 낫다는 미군 지휘관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서울 진격 작전회의는 1945년 8월 7일 열렸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김구 주석과 도노반 소장의 얼굴에 비장함이 묻어 납니다.

광복군 지휘부와 미군 OSS 장교들은 "두 나라의 힘 있는 합작이 실현되는 날, 이 사진의 역사적 가치를 볼 수 있을 것" 이라며 서울 진격 작전 실행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레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집니다.

광복의 기쁨보다 황망함이 얼마나 더 컸던지 김구 선생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김구 선생 '백범일지' : "아! 왜적이 항복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참전을 준비한 것도 다 허사다."]

환국을 앞두고 충칭 임시정부에서 마지막으로 찍은 정부 요인들의 기념 사진.

그토록 기다렸던 광복이지만, 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뿔뿔이 귀국합니다.

무장 해제 상태로 입국한 광복군도 1946년 6월 해산했습니다.

중국에서 안양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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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스페셜] 임시정부 27년의 궤적
    • 입력 2019-04-13 22:34:42
    • 수정2019-04-13 22:5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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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그제는 우리 임시정부가 만들어져 독립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임정 100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었는데요.

중국 상하이에서 시작해 항저우, 광저우, 충칭까지 장장 27년 동안 임정 요인들은 중국 대륙을 옮겨 다니며 독립투쟁을 이어갔습니다.

1940년에는 우리 국군의 모태, 광복군을 출범시켜, '서울 진격 작전'을 준비하기도 했었죠.

망명정부 27년, 고난의 유랑길을 안양봉 특파원이 돌아봤습니다.

[리포트]

백 년 전 모습을 간직한 상하이 와이탄, 1919년 3.1 운동의 거센 함성은 독립운동가들을 당시 열강들의 외교 각축장 상하이로 불러 들입니다.

그리고 백년 전 4월 11일, 상하이에 우리 임시정부가 들어섭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공화 정부.

함께 자리한 초대 국무원 요인들입니다.

앞줄은 신익희, 안창호, 현순 선생입니다.

뚫어질듯 앞을 응시한 안창호 선생의 눈매에서 독립의 열망이 느껴집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우리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알린 쾌거 였습니다.

그해 12월 19일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사형을 집행합니다.

[김구 선생 '백범일지' : "최후의 식사를 같이했다.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추격을 피해 거점을 저장성 항저우로 옮깁니다.

이 곳에서 임정은 체계적인 무장 투쟁을 벌일 수 있는 군사 역량을 양성합니다.

[최춘봉/중국 항저우 사범대학 교수 : "나중에 이분들이 조선의용대, 광복군이 성립된 다음에 기간원이 됩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구 선생은 부득이 항저우 밖 지아싱으로 몸을 피합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의 항일 투쟁 큰 그림은 이곳에서 완성됩니다.

[수메이좬/김구 선생 피난처 안내인 : "어떻게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해서 함께 항일 투쟁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여기에서 많은 강령 서류를 작성했고, 한국 임시정부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김구 선생 독립운동 활동에 가장 큰 위기는 1938년 찾아옵니다.

동포가 쏜 흉탄을 맞은 김구 선생은 이 병원에 실려옵니다.

총알이 가슴 한 복판에 꽃혔지만 특유의 체력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집니다.

[김구 선생 '백범일지' : "입원 수속도 할 필요 없다, 네 시간이 되어도 살아 있어 그때야 치료를 시작했다."]

이후 광저우, 다시 류저우로 긴 망명 투쟁을 이어간 임시 정부는 마침내 충칭에서 전성기를 맞이 합니다.

지난달 복원 공사를 마친 중국 충칭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입니다.

전시실 설치가 끝나면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됩니다.

1940년 9월 17일, 우리 국군의 모태 한국광복군이 첫 깃발을 올립니다.

사무친 표정의 김구 주석, 오른쪽 옆은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입니다.

광복군은 1942년 김원봉 선생의 조선의용대가 결합하고 탈영한 일제 학도병들까지 몰려들면서 45년엔 병력이 천 명을 넘어섭니다.

최근 발굴된 친필편지에서 김원봉 선생은 광복군에 편입된 이후, 중국 인사들은 물론, 만주와 한국에 까지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고 당시 광복군의 위상을 평가합니다.

[김득중/국사편찬위원회 박사 : "조선의용대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군사적인 영향, 인적인 부분, 이런 것들이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군사적 영향이 매우 높아졌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죠."]

이제 남은 건 일제가 강탈한 우리 땅을 우리 힘으로 되찾는 겁니다.

미군 전략정보처, OSS가 든든한 동지로 나섭니다.

산길을 따라 20여 분 올라가자, 깍아지른 벼랑이 나타납니다.

한국광복군은 미군 OSS의 도움을 받아 이 암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훈련을 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중국군 400명 보다 우리 광복군 7명이 더 낫다는 미군 지휘관의 말을 듣고 매우 기뻤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서울 진격 작전회의는 1945년 8월 7일 열렸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김구 주석과 도노반 소장의 얼굴에 비장함이 묻어 납니다.

광복군 지휘부와 미군 OSS 장교들은 "두 나라의 힘 있는 합작이 실현되는 날, 이 사진의 역사적 가치를 볼 수 있을 것" 이라며 서울 진격 작전 실행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레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집니다.

광복의 기쁨보다 황망함이 얼마나 더 컸던지 김구 선생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김구 선생 '백범일지' : "아! 왜적이 항복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참전을 준비한 것도 다 허사다."]

환국을 앞두고 충칭 임시정부에서 마지막으로 찍은 정부 요인들의 기념 사진.

그토록 기다렸던 광복이지만, 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뿔뿔이 귀국합니다.

무장 해제 상태로 입국한 광복군도 1946년 6월 해산했습니다.

중국에서 안양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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