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前 대우그룹 회장 별세…그가 남기고 간 것들

입력 2019.12.10 (08:08) 수정 2019.12.10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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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어제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향년 83세입니다.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김 전 회장이 대중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공식 행사는 지난해 3월 열린 '대우 창업 51주년 기념식' 입니다.

이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입원과 통원 치료를 반복해 왔습니다.

1년 넘는 투병 끝에 어젯밤 11시50분, 연명 치료는 하지 않겠다는 김 전 회장 평소 뜻에 따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김 전 회장은 지금까지도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립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이었습니다.

한성실업 김용순 회장은 20대 청년 김우중을 향해 "머리가 매우 비상했다 크게 되면 말할 수 없이 크게 되고 안 그러면 감옥 들어갈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샐러리맨에서 기업인 김우중으로의 변신은, 그의 나이 만 30세 때인 1967년입니다.

그가 창업한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기업가로서의 삶은 개척과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중동의 사막, 아프리카의 정글, 유라시아의 대평원을 누비며 다녔습니다.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리면서 동남아시아에서는 '타이거 킴'으로 불렸습니다.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몽골제국의 징기즈칸에 비유해 '킴기즈칸’으로 호칭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1년 중 해외 출장 239일, 이동거리 50만㎞의 기록, 자본금 500만 원짜리 기업을 국내 2위와 세계 500위권 그룹의 반열에 올려놓기까지 30년간 딸 결혼식과 아들 장례식 이틀만 쉬었다는 얘기는 전설처럼 회자됩니다.

[김우중/대우그룹 전 회장/1984년 : "우리 근로자들은 한 달에 2번 밖에 안 놀아요. 여러분 들으면 나를 비난할 지 모르겠지만 (한 달에) 4일 있는 일요일도 못 논다 이거야."]

1993년 그가 던진 화두 '세계 경영'은 김 전 회장의 생각과 비전을 하나로 압축한 단어였습니다.

20세기 말 대우그룹의 이념이자 모토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글로벌’이란 말이 상식처럼 통하지만, 26년 전인 1993년은 달랐습니다.

국제화·세계화라는 말이 혼용돼며 낯설게 들리던 시대였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펴 낸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지금도 회자되는 역대급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이같은 김 전 회장 '세계 경영'의 본거지는 1977년 서울역 앞에 완공된 대우빌딩입니다.

지하2층, 지상 23층 규모의 대우빌딩은 한 기업의 위상을 넘어 70·80년대 한국 고도성장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청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이유로 청와대쪽 창문이 봉쇄됐고, 옥상에는 방공포가 설치돼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다는 비화도 있습니다.

작가 신경숙은 자전적 소설을 통해 전북 정읍에서 갓 상경한 날, "그날 새벽에 봤던 대우빌딩을 잊지 못한다.… 거대한 짐승이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다.”고 회고했습니다.

대우빌딩의 위용은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대우그룹이 좌초되면서 함께 무너졌습니다.

김우중 당시 회장이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붕괴가 빨라졌습니다

외환위기 직후 김 회장은 "원-달러 환율이 치솟았으니 돌멩이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라며 정부 지원을 요청했지만 강봉균 당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거절했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이 펴낸 ‘코리안 미러클’에서 강봉균은 “나는 대우그룹이 무너진 것이 (김우중 회장의) 1인 경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드러난 대우그룹의 분식회계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외환 위기의 막다른 골목에서 드러난 분식회계 규모는 무려 41조 원에 달했고, 김 전 회장은 장부 조작 10조 원 등의 낙인이 찍혀 이후 해외를 외롭게 떠돌았습니다.

대우그룹이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이들이 착잡했던 건 분식 회계와 부도로 나라에 커다란 우환을 가져다 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등 비빌 곳도 변변치 않았던 국내 기초학문분야에 선뜻 지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대우 재단의 앞날에 대한 걱정 또한 컸던 탓이었습니다.

"나는 버는 재주는 있으나 쓰는 재주는 없으니, 도움이 되는 곳에 써 달라" 1980년 김 전 회장이 기초학술진흥사업에 써달라며 대우재단에 2백억 원을 내놓으면서 했던 말입니다.

[김우중/전 대우그룹 회장/'김우중과의 대화' 출판 간담회 당시 : "저는 평생동안 항상 앞만 보고 성취를 향해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것이 국가가 미래 세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김 전 회장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차근차근 이익을 따지는 장사꾼이라기보다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개척자’란 평가에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김우중 전 회장의 영결식은 오는 12일 아주대병원에서 열립니다.

친절한 뉴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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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우중 前 대우그룹 회장 별세…그가 남기고 간 것들
    • 입력 2019-12-10 08:10:53
    • 수정2019-12-10 08:5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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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어제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향년 83세입니다.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김 전 회장이 대중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공식 행사는 지난해 3월 열린 '대우 창업 51주년 기념식' 입니다.

이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입원과 통원 치료를 반복해 왔습니다.

1년 넘는 투병 끝에 어젯밤 11시50분, 연명 치료는 하지 않겠다는 김 전 회장 평소 뜻에 따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김 전 회장은 지금까지도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립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은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이었습니다.

한성실업 김용순 회장은 20대 청년 김우중을 향해 "머리가 매우 비상했다 크게 되면 말할 수 없이 크게 되고 안 그러면 감옥 들어갈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샐러리맨에서 기업인 김우중으로의 변신은, 그의 나이 만 30세 때인 1967년입니다.

그가 창업한 대우(大宇)는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를 따서 만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기업가로서의 삶은 개척과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중동의 사막, 아프리카의 정글, 유라시아의 대평원을 누비며 다녔습니다.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를 알리면서 동남아시아에서는 '타이거 킴'으로 불렸습니다.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몽골제국의 징기즈칸에 비유해 '킴기즈칸’으로 호칭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1년 중 해외 출장 239일, 이동거리 50만㎞의 기록, 자본금 500만 원짜리 기업을 국내 2위와 세계 500위권 그룹의 반열에 올려놓기까지 30년간 딸 결혼식과 아들 장례식 이틀만 쉬었다는 얘기는 전설처럼 회자됩니다.

[김우중/대우그룹 전 회장/1984년 : "우리 근로자들은 한 달에 2번 밖에 안 놀아요. 여러분 들으면 나를 비난할 지 모르겠지만 (한 달에) 4일 있는 일요일도 못 논다 이거야."]

1993년 그가 던진 화두 '세계 경영'은 김 전 회장의 생각과 비전을 하나로 압축한 단어였습니다.

20세기 말 대우그룹의 이념이자 모토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글로벌’이란 말이 상식처럼 통하지만, 26년 전인 1993년은 달랐습니다.

국제화·세계화라는 말이 혼용돼며 낯설게 들리던 시대였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펴 낸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지금도 회자되는 역대급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이같은 김 전 회장 '세계 경영'의 본거지는 1977년 서울역 앞에 완공된 대우빌딩입니다.

지하2층, 지상 23층 규모의 대우빌딩은 한 기업의 위상을 넘어 70·80년대 한국 고도성장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청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이유로 청와대쪽 창문이 봉쇄됐고, 옥상에는 방공포가 설치돼 민간인 출입이 통제됐다는 비화도 있습니다.

작가 신경숙은 자전적 소설을 통해 전북 정읍에서 갓 상경한 날, "그날 새벽에 봤던 대우빌딩을 잊지 못한다.… 거대한 짐승이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다.”고 회고했습니다.

대우빌딩의 위용은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대우그룹이 좌초되면서 함께 무너졌습니다.

김우중 당시 회장이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붕괴가 빨라졌습니다

외환위기 직후 김 회장은 "원-달러 환율이 치솟았으니 돌멩이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라며 정부 지원을 요청했지만 강봉균 당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거절했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이 펴낸 ‘코리안 미러클’에서 강봉균은 “나는 대우그룹이 무너진 것이 (김우중 회장의) 1인 경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드러난 대우그룹의 분식회계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외환 위기의 막다른 골목에서 드러난 분식회계 규모는 무려 41조 원에 달했고, 김 전 회장은 장부 조작 10조 원 등의 낙인이 찍혀 이후 해외를 외롭게 떠돌았습니다.

대우그룹이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이들이 착잡했던 건 분식 회계와 부도로 나라에 커다란 우환을 가져다 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등 비빌 곳도 변변치 않았던 국내 기초학문분야에 선뜻 지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대우 재단의 앞날에 대한 걱정 또한 컸던 탓이었습니다.

"나는 버는 재주는 있으나 쓰는 재주는 없으니, 도움이 되는 곳에 써 달라" 1980년 김 전 회장이 기초학술진흥사업에 써달라며 대우재단에 2백억 원을 내놓으면서 했던 말입니다.

[김우중/전 대우그룹 회장/'김우중과의 대화' 출판 간담회 당시 : "저는 평생동안 항상 앞만 보고 성취를 향해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것이 국가가 미래 세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김 전 회장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차근차근 이익을 따지는 장사꾼이라기보다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는 ‘개척자’란 평가에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김우중 전 회장의 영결식은 오는 12일 아주대병원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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