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따라잡기] 실미도 기간병, “우리도 피해자”

입력 2005.11.07 (08:52) 수정 2005.11.07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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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실미도 하면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모았는데요, 이 실미도가 요즘 시끄럽습니다.
당시 북파공작원들을 훈련시켰던 현역 기간병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보상금 소송을 낸 것입니다.

유족들은 국가의 명령으로 북파공작원들을 훈련시켰다가 오히려 이들로부터 살해를 당한만큼 기간병들에 대해서도 정당한 평가와 함께 보상도 뒤따라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최영철 기자와 알아 보겠습니다. 최영철 기자, 자세한 소식 전해 주시죠.

<리포트>

네. 지난해 12월 제정된 관계법에 따라 당시 실미도에서 북파 공작 특수훈련을 받았던 부대원들은 보상 절차를 밟게 될 전망입니다. 반면에 당시 훈련병들에게 사살됐던 기간병들의 유족들은 보상금 신청이 반려됐는데요, 유족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지난 3일, 반려 취소 청구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제출한 상탭니다. 유족들의 억울한 심경들, 그리고 과연 어떠한 점 때문에 이들이 보상에서 제외된 것인지, 취재해봤습니다.

71년 8월 23일 새벽 조용한 섬 실미도. 북파공작 훈련을 받던 일명 684 특수부대원들이 극적인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끔찍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같은 부대에 있던 기간병 24명 가운데 18명이 훈련병들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인터뷰> 백동호 (실미도 저자): “훈련병만 국가에서 버린 게 아니라 그곳에서 근무를 서는 기간병 역시 국가에서 너희 죽거나 말거나 우린 알 바 아니라고 근무하라고 하고 근무 시킨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국가에서 죽인 거나 마찬가집니다”

30년이 넘게 묻혀왔던 이 실미도 사건은 참여정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하나씩 베일을 벗고 있는데요. 하지만 당시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은 아직도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안모씨 (당시 기간병 유가족):“저희들이 유족이고 국가유공자이지만 사실 유족이라는 자체, 원호대상자라는 것도 창피합니다. 사회 나가서 내 동생 때문에 국가유공자 됐다는 것 자체도 창피해요. 왜 우리가 국가 위해 목숨까지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체를 숨겨야 하냐 이거죠”

실미도 사건 때 기간병이던 안인기씨를 잃은 형과 어머니. 아들의 묘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어머니 이학렬씨의 마음은 그저 안쓰럽기만 합니다. 아들이 숨진 지 벌써 35년째. 한결같은 마음으로 안씨의 묘를 보살피고 있지만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하고 억울할 뿐입니다

<인터뷰> 이학렬(당시 기간병 유족): “인정 많고 씩씩한 인기야. 보고픈 얼굴을 다시 볼 길이 없구나. 하나님 앞에 가서 만나자”

안씨 유족들은 실미도 희생자, 특히 당시 기간병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인터뷰> 안모씨(당시 기간병 유가족): “영화라든지 그런데 나오는 거 보면 기간병들이 나쁜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는 것에 대해선 정말 울분을 터뜨릴 수밖에 없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유족 문제를 거론하면서..”

사흘 전은 이씨의 여든 다섯 번째 생일이었는데요. 이맘때만 되면 숨진 아들이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생각에 이씨는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인터뷰> 이학렬(당시 기간병 유가족): “벌써 말이야 24살에 죽어서 벌써 삼십년이 다 돼 가는데도. 그냥..이렇게 공군 이 모자 이렇게 쓴 것만 봐도..우리 아들도 저런 거 쓰고 다니는데..그래요”

과거사 진상조사 분위기를 타고 지난해 말에는 특수임무수행자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실미도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기간병들은 검토 대상에서조차 제외됐습니다.

보상 관련 법규에는 ‘군 첩보 부대에 소속돼 특수임무를 했거나 이와 관련한 교육을 받은 사람’에 한해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인터뷰> 김정길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심의위원회 민원과장): “거기 계셨던 분들에 보상하게 되면 그 1948년부터 1994년도까지 또 그 사람들과 유사한 임무를 수행하셨던 분들도 다 보상을 해드려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보상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서는 보상을 해드릴 수 없는 상황이고..”

하지만 당시 희생된 기간병들의 유족들은 형평성 문제를 들어 반발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이들 유족 열명은 특수임무 수행자 보상심의위원회 측을 상대로 보상금 반려 취소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인터뷰> 송인만 (소송 담당 변호사): “기간병을 살해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국가고 기간병을 살해한 자는 훈련병이 되는데 그 훈련병은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뤄지고 기간병은 기간병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정의와 형평에 어긋난다는 것이죠”

실미도 사건 당시 기간병으로 복무하다 총상을 입었던 양동수씨. 양씨는 실미도 사건의 진상이 알려진 바와 너무나도 다르다며 기간병들의 억울한 심정을 대변했습니다.

<인터뷰> 양동수(당시 생존 기간병): “똑같이 했습니다. 모든 걸 똑같이 했어요. 오히려 다른 게 있었다면 밤에 섬 경비를 세 군데서 우리 기간병들만 하루 두 시간씩 밤에 교대로 경비 섰어요. 훈련병들 그냥 재웠습니다. 위험부담은 우리가 더한 것으로 생각하면 되요”

유족들의 보상요구와 명예회복 노력은 사실 오래 전 부터 계속적으로 진행돼 왔는데요. 고 김용택씨의 동생인 김인택씨는 이러한 유족들의 노력이 정권의 탄압을 받아 수차례 좌절됐다고 주장합니다.

<인터뷰> 김인택(당시 기간병 유가족): “지금 같으면 군에서 자식 잃었다면 부모들이 상당히 강하게 항의하잖아요. 그 당시는 말하자면 유신정권시대에는 그게 통하지 않았죠. 그것(항의)을 하면 바로 가는데.. 정부에서 얼마 위로금 나가니 무마하고 더 이상 입 벌리지 말고 조용히 있어 그걸로 끝이었어요”

형이 어떤 부대에서 어떻게 복무하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는 김씨. 김씨는 형이 죽고 나서야 실미도에서 힘들게 군 생활을 보낸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인택(당시 기간병 유가족): “집에 계신 부모님에게도 그런 데에서 군대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안 했어요. 그런데 이 사건 난 뒤에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실미도에 대해 자세하게 들었던 이야기를 발설 못하고..”

정보요원의 감시와 협박 속에서 김씨 가족은 과거를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데요. 결국 어머님은 화병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셨고, 외국에 있던 누나 역시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고 김종화 중사의 동생인 김종오씨. 김씨 역시 형의 죽음으로 인해 이어진 가족의 불행했던 시절을 아직도 가슴속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종오 (당시 기간병 유가족): “술을 전혀 못하시던 분이 아들 죽은 이후로 술을 마시고, 그 후 술로 인해 병들어서 돌아가셨고, 어머니 역시 가슴에 한이 맺혀서 이 가슴에 엄청난 덩어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 속병으로 어머니 돌아가셨어요”

김씨는 형과 가족들이 겪었던 아픔을 생각하면서 다시는 이러한 고통이 대물림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종오(당시 기간병 유가족): “억울하게 희생되고 죽은 사람들의 명예회복과 명예회복이라는 것이 말로만 되겠느냐.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서 온 가족이 겪은 그 고통을 아무리 많은 물질로 보상한다고 해도 보상이 안 되는 거예요”

하지만 아직까지도 누구 하나 떳떳하게 나서서 실미도 사건에 대해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할텐데요. 보상과 명예회복을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형평성 논란 역시 진지하게 검토돼야 할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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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05-11-07 09: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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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실미도 하면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모았는데요, 이 실미도가 요즘 시끄럽습니다. 당시 북파공작원들을 훈련시켰던 현역 기간병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보상금 소송을 낸 것입니다. 유족들은 국가의 명령으로 북파공작원들을 훈련시켰다가 오히려 이들로부터 살해를 당한만큼 기간병들에 대해서도 정당한 평가와 함께 보상도 뒤따라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최영철 기자와 알아 보겠습니다. 최영철 기자, 자세한 소식 전해 주시죠. <리포트> 네. 지난해 12월 제정된 관계법에 따라 당시 실미도에서 북파 공작 특수훈련을 받았던 부대원들은 보상 절차를 밟게 될 전망입니다. 반면에 당시 훈련병들에게 사살됐던 기간병들의 유족들은 보상금 신청이 반려됐는데요, 유족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지난 3일, 반려 취소 청구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제출한 상탭니다. 유족들의 억울한 심경들, 그리고 과연 어떠한 점 때문에 이들이 보상에서 제외된 것인지, 취재해봤습니다. 71년 8월 23일 새벽 조용한 섬 실미도. 북파공작 훈련을 받던 일명 684 특수부대원들이 극적인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끔찍한 총격전이 벌어졌고 같은 부대에 있던 기간병 24명 가운데 18명이 훈련병들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인터뷰> 백동호 (실미도 저자): “훈련병만 국가에서 버린 게 아니라 그곳에서 근무를 서는 기간병 역시 국가에서 너희 죽거나 말거나 우린 알 바 아니라고 근무하라고 하고 근무 시킨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국가에서 죽인 거나 마찬가집니다” 30년이 넘게 묻혀왔던 이 실미도 사건은 참여정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하나씩 베일을 벗고 있는데요. 하지만 당시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은 아직도 가슴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안모씨 (당시 기간병 유가족):“저희들이 유족이고 국가유공자이지만 사실 유족이라는 자체, 원호대상자라는 것도 창피합니다. 사회 나가서 내 동생 때문에 국가유공자 됐다는 것 자체도 창피해요. 왜 우리가 국가 위해 목숨까지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체를 숨겨야 하냐 이거죠” 실미도 사건 때 기간병이던 안인기씨를 잃은 형과 어머니. 아들의 묘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어머니 이학렬씨의 마음은 그저 안쓰럽기만 합니다. 아들이 숨진 지 벌써 35년째. 한결같은 마음으로 안씨의 묘를 보살피고 있지만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하고 억울할 뿐입니다 <인터뷰> 이학렬(당시 기간병 유족): “인정 많고 씩씩한 인기야. 보고픈 얼굴을 다시 볼 길이 없구나. 하나님 앞에 가서 만나자” 안씨 유족들은 실미도 희생자, 특히 당시 기간병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인터뷰> 안모씨(당시 기간병 유가족): “영화라든지 그런데 나오는 거 보면 기간병들이 나쁜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는 것에 대해선 정말 울분을 터뜨릴 수밖에 없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유족 문제를 거론하면서..” 사흘 전은 이씨의 여든 다섯 번째 생일이었는데요. 이맘때만 되면 숨진 아들이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생각에 이씨는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인터뷰> 이학렬(당시 기간병 유가족): “벌써 말이야 24살에 죽어서 벌써 삼십년이 다 돼 가는데도. 그냥..이렇게 공군 이 모자 이렇게 쓴 것만 봐도..우리 아들도 저런 거 쓰고 다니는데..그래요” 과거사 진상조사 분위기를 타고 지난해 말에는 특수임무수행자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실미도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기간병들은 검토 대상에서조차 제외됐습니다. 보상 관련 법규에는 ‘군 첩보 부대에 소속돼 특수임무를 했거나 이와 관련한 교육을 받은 사람’에 한해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인터뷰> 김정길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심의위원회 민원과장): “거기 계셨던 분들에 보상하게 되면 그 1948년부터 1994년도까지 또 그 사람들과 유사한 임무를 수행하셨던 분들도 다 보상을 해드려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보상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서는 보상을 해드릴 수 없는 상황이고..” 하지만 당시 희생된 기간병들의 유족들은 형평성 문제를 들어 반발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이들 유족 열명은 특수임무 수행자 보상심의위원회 측을 상대로 보상금 반려 취소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인터뷰> 송인만 (소송 담당 변호사): “기간병을 살해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국가고 기간병을 살해한 자는 훈련병이 되는데 그 훈련병은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뤄지고 기간병은 기간병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정의와 형평에 어긋난다는 것이죠” 실미도 사건 당시 기간병으로 복무하다 총상을 입었던 양동수씨. 양씨는 실미도 사건의 진상이 알려진 바와 너무나도 다르다며 기간병들의 억울한 심정을 대변했습니다. <인터뷰> 양동수(당시 생존 기간병): “똑같이 했습니다. 모든 걸 똑같이 했어요. 오히려 다른 게 있었다면 밤에 섬 경비를 세 군데서 우리 기간병들만 하루 두 시간씩 밤에 교대로 경비 섰어요. 훈련병들 그냥 재웠습니다. 위험부담은 우리가 더한 것으로 생각하면 되요” 유족들의 보상요구와 명예회복 노력은 사실 오래 전 부터 계속적으로 진행돼 왔는데요. 고 김용택씨의 동생인 김인택씨는 이러한 유족들의 노력이 정권의 탄압을 받아 수차례 좌절됐다고 주장합니다. <인터뷰> 김인택(당시 기간병 유가족): “지금 같으면 군에서 자식 잃었다면 부모들이 상당히 강하게 항의하잖아요. 그 당시는 말하자면 유신정권시대에는 그게 통하지 않았죠. 그것(항의)을 하면 바로 가는데.. 정부에서 얼마 위로금 나가니 무마하고 더 이상 입 벌리지 말고 조용히 있어 그걸로 끝이었어요” 형이 어떤 부대에서 어떻게 복무하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는 김씨. 김씨는 형이 죽고 나서야 실미도에서 힘들게 군 생활을 보낸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인터뷰> 김인택(당시 기간병 유가족): “집에 계신 부모님에게도 그런 데에서 군대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안 했어요. 그런데 이 사건 난 뒤에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실미도에 대해 자세하게 들었던 이야기를 발설 못하고..” 정보요원의 감시와 협박 속에서 김씨 가족은 과거를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데요. 결국 어머님은 화병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셨고, 외국에 있던 누나 역시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고 김종화 중사의 동생인 김종오씨. 김씨 역시 형의 죽음으로 인해 이어진 가족의 불행했던 시절을 아직도 가슴속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종오 (당시 기간병 유가족): “술을 전혀 못하시던 분이 아들 죽은 이후로 술을 마시고, 그 후 술로 인해 병들어서 돌아가셨고, 어머니 역시 가슴에 한이 맺혀서 이 가슴에 엄청난 덩어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 속병으로 어머니 돌아가셨어요” 김씨는 형과 가족들이 겪었던 아픔을 생각하면서 다시는 이러한 고통이 대물림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종오(당시 기간병 유가족): “억울하게 희생되고 죽은 사람들의 명예회복과 명예회복이라는 것이 말로만 되겠느냐.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서 온 가족이 겪은 그 고통을 아무리 많은 물질로 보상한다고 해도 보상이 안 되는 거예요” 하지만 아직까지도 누구 하나 떳떳하게 나서서 실미도 사건에 대해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할텐데요. 보상과 명예회복을 둘러싸고 제기되고 있는 형평성 논란 역시 진지하게 검토돼야 할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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