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송산리 6호분 축조자는 중국인”

입력 2008.12.29 (07:30) 수정 2008.12.2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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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리 고분군 현지 기념관에 전시 중인 6호분 모형 단면도.현실로 통하는 무덤길을 별도로 마련한 전형적인 중국식 전축분(벽돌무덤)으로 현실 네 멱면에는 사신도를 그렸다. [사진=연합뉴스]


전형적인 중국식 무덤 양식인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으로서, 웅진도읍기 백제왕릉임이 확실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제6호분은 양(梁)나라에서 파견한 기술자의 총감독 아래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중국 베이징대 고고학과 박사로 남조(南朝)시대 고분 전공인 조윤재 고려대 고고환경연구소 연구원은 1920년대 공주고보(현재의 공주고) 한문교사로 재직한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1970)이 송산리 6호분을 무단도굴하는 과정에서 수습한 벽돌에 적힌 글자들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 같은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조 박사는 한국호서고고학회 기관지로 최근 발간된 '호서고고학' 19집에 기고한 '공주 송산리 6호분 명문전(銘文塼) 판독에 대한 관견(管見)'이란 논문에서 종래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라고 판독하고 "양나라 관아에서 쓰는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해석해 온 벽돌 명문을 새롭게 해석했다.
즉, 그에 의하면 기존에 '瓦'로 판독한 글자는 '以'(이)로 읽어야 하며, '官'이라는 글자도 '宣'(선)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판독에 따른다면 문제의 벽돌 명문은 '梁宣以爲師矣'가 되고, 그 의미는 "양나라 사람인 선(宣)을 스승으로 삼았다"가 되며, 이는 결국 "양나라 사람인 선이 분묘의 축조를 감제(監制.감독)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조 박사는 이를 통해 "(송산리 6호분의) 고분 축조 책임자의 국적과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한 셈이다"고 평가했다.
이런 판독은 송산리 6호분과 봉분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거의 똑같은 벽돌무덤으로 1971년 기적적으로 발견되고 발굴된 무령왕릉(송산리 7호분)의 축조 책임자 또한 중국 양나라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연결될 수 있어 주목된다.
백제사에서 전형적인 중국식 묘제(墓制)인 전축분은 웅진시대에, 그것도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에서만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그것을 과연 백제 자체 기술로 축조했는지, 아니면 중국 기술자를 초청해 만들었는지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한국학계에서는 대체로 중국 기술을 주체적으로 수입한 백제인이 축조한 것으로 보지만, 중국이나 일본 학계에서는 중국 기술자 파견설을 지지하는 견해가 많다.
조 박사의 주장은 송산리 6호분 전돌 명문에 대해 기존과는 전혀 다른 판독을 시도한 결과라는 점에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충남대 고고학과 박순발 교수는 "조 박사 주장이 타당하다면, 양(梁)을 비롯한 중국 남조와 백제의 교류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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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주 송산리 6호분 축조자는 중국인”
    • 입력 2008-12-29 07:30:51
    • 수정2008-12-29 10:52:29
    연합뉴스
▲ 공산리 고분군 현지 기념관에 전시 중인 6호분 모형 단면도.현실로 통하는 무덤길을 별도로 마련한 전형적인 중국식 전축분(벽돌무덤)으로 현실 네 멱면에는 사신도를 그렸다. [사진=연합뉴스]
전형적인 중국식 무덤 양식인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으로서, 웅진도읍기 백제왕릉임이 확실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제6호분은 양(梁)나라에서 파견한 기술자의 총감독 아래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중국 베이징대 고고학과 박사로 남조(南朝)시대 고분 전공인 조윤재 고려대 고고환경연구소 연구원은 1920년대 공주고보(현재의 공주고) 한문교사로 재직한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1970)이 송산리 6호분을 무단도굴하는 과정에서 수습한 벽돌에 적힌 글자들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 같은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조 박사는 한국호서고고학회 기관지로 최근 발간된 '호서고고학' 19집에 기고한 '공주 송산리 6호분 명문전(銘文塼) 판독에 대한 관견(管見)'이란 논문에서 종래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라고 판독하고 "양나라 관아에서 쓰는 기와를 모범으로 삼았다"고 해석해 온 벽돌 명문을 새롭게 해석했다. 즉, 그에 의하면 기존에 '瓦'로 판독한 글자는 '以'(이)로 읽어야 하며, '官'이라는 글자도 '宣'(선)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판독에 따른다면 문제의 벽돌 명문은 '梁宣以爲師矣'가 되고, 그 의미는 "양나라 사람인 선(宣)을 스승으로 삼았다"가 되며, 이는 결국 "양나라 사람인 선이 분묘의 축조를 감제(監制.감독)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조 박사는 이를 통해 "(송산리 6호분의) 고분 축조 책임자의 국적과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한 셈이다"고 평가했다. 이런 판독은 송산리 6호분과 봉분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거의 똑같은 벽돌무덤으로 1971년 기적적으로 발견되고 발굴된 무령왕릉(송산리 7호분)의 축조 책임자 또한 중국 양나라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연결될 수 있어 주목된다. 백제사에서 전형적인 중국식 묘제(墓制)인 전축분은 웅진시대에, 그것도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에서만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그것을 과연 백제 자체 기술로 축조했는지, 아니면 중국 기술자를 초청해 만들었는지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한국학계에서는 대체로 중국 기술을 주체적으로 수입한 백제인이 축조한 것으로 보지만, 중국이나 일본 학계에서는 중국 기술자 파견설을 지지하는 견해가 많다. 조 박사의 주장은 송산리 6호분 전돌 명문에 대해 기존과는 전혀 다른 판독을 시도한 결과라는 점에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충남대 고고학과 박순발 교수는 "조 박사 주장이 타당하다면, 양(梁)을 비롯한 중국 남조와 백제의 교류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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