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특집] 항일 유적이 사라진다

입력 2011.08.15 (10:59) 수정 2011.08.1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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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7일.

시대의 지성이자 영원한 광복군으로 불렸던 김준엽 선생이 타계했습니다.

향년 91세.

일제 강점기 때 학병으로 징집된 뒤 탈출한 독립투사.

군사 독재에 맞서 대학 총장직에서 물러난 시대의 스승.

수차례 고위 공직을 마다하고 평생을 학문에만 힘쓴 절개와 지조.

고 김준엽 선생의 일생이었습니다.

한때 광복군 지대장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기도 했던 선생은 일제의 학도병 징집됐지만 천신만고끝에 탈출한 뒤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파란만장한 일생의 서막을 엽니다.

<인터뷰> 故 김준엽 선생 : "한국 사람이니까 독립군에 합류해서 독립군의 일원으로 싸우고 싶단 말이에요. 광복군에 참여해야 겠다.."

그 당시 선생의 행적은 지난 87년 펴낸 자서전 <장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녹취> "하루빨리 탈출하여 우리 독립군이나 중국군에 참가하여 원수에 총부리를 돌리고 칼로 무찔러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선생은 광복군으로 중국 시안과 푸양 등지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국내 침투를 준비하던 중 해방을 맞았습니다.

선생뿐만 아니라 당시 수많은 항일 독립 투사들은 중국 등지로 옮겨가 독립 투쟁을 벌였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도 난징, 창사. 광저우,포산,류저우, 치장을 거쳐 충칭까지 5천길로미터에 이르는 대장정을 벌였습니다.

<인터뷰> 황유복(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장) : "대한민국의 국가 탄생을 위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가면서 싸웠는데 이 사실을 후손들이 모른다면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이 어느 국가 사람들인지조차 모르는 것고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일 항전의 깃발을 올렸던 중국의 대일 항전 전초 기지들은 광복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어떤 모습일까?

취재파일 4321이 중국내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 활약지를 중심으로 항일 유적지를 찾아 봤습니다.

중국 서북부에 위치해 있는 시안.

중일 전쟁 당시 최전선인 화북 지방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던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시안이 항일 독립 운동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지난 1939년 11월.

항일무장단체이자 훗날 한국광복군의 전신인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충칭에서 시안으로 옮겨오면서 부텁니다.

당시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과 큰 아들 김인은 공작대원들을 자랑스럽게 떠나보냅니다.

시안 중심가.

취재팀은 공작대 본부 건물을 찾아가 봤지만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습니다.

지난 2002년 우리 독립기념관의 국외 항일 유적지 실태 조사 당시 이곳엔 법원이 들어서 있는 걸로 확인됐지만 지금은 텅 비었습니다.

<인터뷰> 현지인 할아버지 : "1년전인 지난해 (법원도) 북2환로로 이전해 갔습니다"

공작대가 여기서 항일 투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어떠한 표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지인들도 이곳이 항일무장독립투쟁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인터뷰> 현지인 할아버지 : "표지판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공작대가 이곳에 주둔하고 나서 1년뒤.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역시 시안으로 옮겨 왔습니다.

시안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임시정부가 총사령부를 이 곳으로 옮긴 것입니다.

본래 목조 건물 2층이었던 총사령부 건물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습니다.

지난 95년, 도심 재개발이 이루어 지면서 건물이 헐려 지금은 그 자리에 백화점과 호텔이 들어섰습니다.

지난 2000년대 초만하더라도 총사령부 옆 건물들은 옛 모습들을 갖추고 있어 보존 필요성이 제기 됐지만 아무런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현지 할아버지 : "이 건물은 대부분 10여년전에 새로 지은 것들입니다."

지난 39년,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이전해 오는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 준비를 위해 이곳에 군사 특파단을 보냈습니다.

당시 임정 군무부장인 조성환을 단장으로 한 특파단은 이근처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와 상가들이 들어섰을 뿐 옛 흔적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당시 군사 특파단을 지웠했던 중국 국민당 기관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만 현지 주민의 증언으로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현지 주민 : "과거 국민단의 당정 기관이 있던 곳입니까? 구체적으로 기관 이름은 모르겠지만 그런 기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취재팀은 당시 광복군의 자취를 찾아보기 위해 시안 외곽부터 살펴봤습니다.

지난 1940년 9월.

충칭에서 결성된 광복군은 초기엔 모두 1,2,3,5 등 4개 지대로 구성됐고 그후 조선의용대를 편입했습니다.

광복군 제 2지대는 이곳에서 당시 중국에 파견됐던 미국 전략사무국, CIA의 전신인 OSS대원들과 국내 상륙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인터뷰> 석근영(前 OSS대원) : "우리 CIA 전신이 우리 광복군하고 합세를 해 가지고 말이죠..라디오 송신 수신 암호해독. 그리고 사격훈련. 또 수류탄 투척. TNT 폭파 같은 이런게 훈련이란 말이죠."

1942년 당시 제 2지대가 주둔했던 곳을 어렵게 찾았지만 이미 오래전 곡식을 쌓아두는 창고로 변했습니다.

이곳에서 광복군 2지대 대원들이 찍은 한장의 빛바랜 사진만이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할 뿐입니다.

<인터뷰> 현지인 : "이곳에 작은 기념비라도 세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릅니다. (중국) 정부에다 물어 보세요) "

당시 2지대 대장이었던 이범석 장군의 관사도 여기서 불과 200여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오래전에 헐 려 지금은 빈터만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곳 주민들은 당시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하던 조선인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루펑주(동네 노인) : "여기 살았어요. 이 근처인데 지금은 다 철거됐습니다."

근처,광복군 2지대 대원들의 숙소는 미타고사라는 중국 사찰로 둔갑했고 훈련장은 벽돌을 만드는 공장터로 변했습니다.

광복군과 관련한 어떠한 흔적도 찾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인터뷰> 리우바오시우(사찰관리인) : "우리 마을에 아흔이 가까운 할어버지가 계셨는데 그분이 말씀하시길 당시 한국군의 베이스 캠프가 이곳(사찰)에 있었고 훈련장은 저쪽(벽돌 공장)에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OSS 대원중 생존해 있는 몇몇 사람들은 몇해전 당시 자신들이 활동했던 곳을 찼았지만 폐허로 변한 현장만 확인했습니다.

<인터뷰> 김유길(전 OSS대원) : "우리 있던 데를 그저 찾긴 찾았는데 다 달라요. 알지도 못해요, 그저 여기 였다 그러는거지. 인생무상,인생이라는게 다 그런거죠, 세월이 가면 다 그런거요."

중국내 항일 유적지를 더 알아보기 위해 시안에서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옌안을 찾았습니다.

중국 산시성 북부에 자리잡은 옌안은 항일 독립 운동 당시 조선독립동맹과 그 산하의 항일 무력 단체인 조선 의용군의 항일 투쟁 근거지 였습니다.

한국사에서 그들은 옌안파로 불리웁니다.

옌안파는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가 정치 활동을 펼쳤으나 숙청 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녹취> 김원봉 : "옌안에서 이들은 산중턱에 동굴을 파서 살았습니다. 동굴은 삶의 터전인 동시에 항일 투쟁 근거지였습니다."

취재팀이 어렵게 찾은 동굴은 10여개 안팎으로 기찻길 옆 산중턱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벽면이 다 떨어져 나가고 동굴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현지 주민들은 조선 군인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동굴을 파고 생활했던 당시 상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할머니 : "항일 전쟁 당시 조선 부대가 이곳에 주둔 했나요? (바로 이곳입니다.)"

그나마 지난 2000년대 중반 옌안시에서 조선 의용군의 항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표지석만이 먼지를 뒤집어 쓴체
그들의 한많은 세월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5개월여 머물다 다시 인근 나가평 지역으로 이동해 군사 간부 양성 학교를 세우고 역시 동굴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군사 양성 학교가 있던 곳은 이미 시장통으로 변했습니다.

학교 터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석 하나가 세워져 있을 뿐이고 그나마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쓰레기 더미 속에 방치돼 있습니다.

<인터뷰> 시장 상인 : "조선인과 관련된 무슨 학교가 있었던 곳이 아닙니까? (다른 지방에서 와서 잘 모르겠습니다)

조선 군인들이 기거했던 동굴엔 현재 현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터뷰> 현지 할머니 : "옌안엔 당시로선 드물게 조선인들과 함께 반전 운동을 벌였던 일본인들의 자취도 남아 있습니다."

지난 1940년대, 조선인들과 연대를 맺고 침략 전쟁을 반대하고 나섰던 일본인들의 학교가 그것입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만 보존 상태는 조선인들의 그것과 확연히 다릅니다.

중국 정부에서 만든 표지석이 학교터 진입로 앞에 세워져 있고 산기슭에 위치한 학교 터는 깨끗하게 정돈돼 있습니다.

주민들은 일본인들이 이곳을 찾아 관련 기관에 기부를 하고 협조를 받아 터를 잘 보존하고 있으며 수시로 참배도 한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리쉐닝(중국인 할머니) : "(학교) 건물 6개가 있었는데 철거하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일본인들도 자주 옵니까?) 자주 옵니다."

항일 전쟁을 치렀던 동시대의 두 나라 사람들이 살았지만 60여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흔적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인터뷰> 전태동(중국 시안 총영사) : "문화 대혁명, 농촌의 개혁 개방, 서부 대개발 세가지 요인이 쭉 진행돼 많이 개발되면서 이런 유적지가 많이 산실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항일 독립 투사들이 가장 많이 활동했던 중국 지역은 크게 동북과 북부, 남부 지역으로 크게 나뉩니다.

동북 지역은 지린성 등을 비롯한 동북 삼성을 말하며, 이 지역은 무장항일세력들의 활동지역이었습니다.

북부 지역은 앞서 살펴본 시안과 옌안 지역을 중심으로 베이징 지역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한국 광복군과 사회주의 계열이었던 조선의용군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남부 지역은 어떨까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최초 수립된 상하이를 비롯해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충칭, 그리고 푸양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와 광복군들이 활발히 대일 항전을 치렀던 곳이다.

취재팀은 다시 시안에서 남동쪽으로 1500여킬로미터 중국 남부의 작은도시 푸양을 찾았습니다.

이곳에서 세무공무원인 중국인 리홍씨를 만났습니다.

리홍씨의 아버지인 리빙영씨는 지난 1944년 당시 이곳에서 조선 광복군의 간부들을 교육시킨 교관이었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故 김준엽 선생과 지난 75년 의문의 추락사로 타계한 장준하 선생 등 50여명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리홍씨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푸양에 있는 항일 유적지 보존을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자신의 집에 태극기와 한국 기념품들을 진열해 놓을 정도로 한국 사랑이 특별합니다.

<인터뷰> 리홍씨 : "아버지께서 생전에 이일(한중간의 우호관계)을 저한테 계속 이어가라 하셨습니다. 좋은 관계를 만들어 놓았으니 계속 이어가라는 말씀이시죠 "

광복군이 훈련 받았던 군관학교는 지금은 중학교로 변했습니다.

학교 건물들은 해방 이후 들어섰거나 지난 2000년대 초 새로 완공된 것들이어서 광복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수 없습니다.

<인터뷰> 리홍씨 : "간부 훈련단은 이곳에 집을 지었는데 과거에는 기와집이 아닌 초가집이었습니다."

더구나 광복군 훈련반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긴 하지만 엉뚱하게도 학교에서 2킬리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쇠사슬로 굳게 잠긴 철재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천으로 덮여진 기념비가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2003년 6월 그나마 중국 정부의 허락을 어렵게 받아 한중합작회사 부지에 세운 것입니다.

<인터뷰> 리홍씨 : "우리는 가장 좋은 위치인 바로 저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싶습니다."

이곳 푸양은 광복군 제3지대 주둔지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지난 1945년, 6월 푸양에 있는 인민 극장에서 광복군 3지대는 결성식을 열었고 '탈출기'란 제목의 민족 해방 관련 연극도 올렸습니다.

<인터뷰> 동네 주민 : "원래는 공연을 하고 회의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정부에서 회의를 하곤 했었는데 97년에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곳도 몇해 전 나이트 클럽이 됐다가 지금은 유흥 주점으로 변했습니다.

완전히 개축을 한 것이 아니라 입구만 손을 댔기 때문에 군데 군데 예전 모습들이 남아 있습니다.

먼 이국 땅에서 조국 독립을 꿈꾸며 투쟁의 깃발을 올렸던 광복군의 기지가 밤에는 이처럼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화려한 유흥 주점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녹취> 유흥주점 종업원 : "(여긴 주점입니까?) 아래층은 술마시고 여긴 KTV (가라오케) 입니다. (아가씨도 나옵니까?) 가능합니다"

푸양에서 북서쪽으로 1000킬로미터 떨어진 충칭.

지난 1940년,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가 있던 곳입니다.

임정은 이곳에서 광복군 창설과 임시 의정원 개원,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제정 등 항일 운동에서 굵직 굵직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취태팀은 우선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를 찾았습니다.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모두 4번 청사를 옮겼으나 첫번째와 두번째 청사는 일본의 폭격으로 파괴됐습니다.

해방을 맞은 임정요인들이 모여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은 돌 계단 앞은 그 시절의 감동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 합니다.

마지막 청사엔 김구 선생 등 임시 정부 요인들의 사진들과 각종 자료가 깨끗이 진열돼 있습니다.

지난 1995년.

국내 독립기념관과 충칭시가 복원 협정을 맺고 개관했습니다.

이후 독립 기념관에서 건물들 다시 고치고 전시 내용을 수정,보완해 오고 있습니다.

<인터뷰> 장미영(한국 관람객/서울 방배동) : "여기까지 임시정부가 너무 많이 옮겨 다니고 너무 핍박을 많이 당하니까. 와닿아요."

그러나 세번째 청사는 사정이 완전히 다릅니다.

다 쓰러져 가는 목조건물에 현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터뷰> 현지 주민 할머니 : "지금은 3가구만 살고 있고 모두 이사갔습니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 하권을 저술하기도 했던 이곳은 금방이라도 건물이 무너질 듯 낡고 오래 됐습니다.

다만 청사 앞에 세워진 비석만이 이곳이 임시 정부 청사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독립 기념관측은 중국 정부와 건물 보존 및 복원 방안을 놓고 협의 하고 있지만 언제 허물어 질지 모른 상황속에서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입니다.

취재팀은 김구 선생의 주치의이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낸 유진동 선생의 막내 아들 유수동씨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들을수 있었습니다.

유진동 선생은 지난 2007년 8월, 독립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지난 1957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어머니,형,동생 등 7명이 북한으로 넘어갔지만 북한 당국의 핍박은 심했습니다.

결국, 지난 63년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도 못한 채 유수동씨는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탈출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형제들은 일찍 사망하거나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등 모진 세월을 겪어야 했습니다.

백범일지에 적힌 아버지에 대한 부분을 읽어내려가는 유씨의 목소리에 회한이 묻어 납니다.

유류씨는 당시 충칭에 조성돼 있던 한인촌에 취재팀을 안내 했습니다.

한인촌이 있던 이곳은 지난 1940년,8월, 지장에서 충칭으로 옮겨온 임시 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 그리고 광복군 산하 일본의 보충대인 토교대 대원들이 거하던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철강 공장이 들어서 있고 한인촌이 있던 곳은 폐허로 변했습니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집한 채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이마저도 철거돼 사라져 버렸습니다.

구석에 방치돼 있는 비석 하나만이 이곳이 한인들의 옛 거주지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당시 임시 정부는 삼일 유치원을 개원해 미래의 독립 투사들을 길러 냈습니다.

암울했던 시대였지만 희망만은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충칭시 외곽에 있는 한 공동묘집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먼 이국 땅에서 쓸쓸히 눈을 감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김구 선생의 가족들이 잠들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수 없습니다.

주변은 쓰레기 처리장과 담배 공장 창고로 변했으며 그나마 가파른 지역에 위치해 있는 터라 빗물에 토사가 깎여 나가
흉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봉분으로 추정되는 흙 무덤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일 뿐이였습니다.

<인터뷰> 현지 주민 : "묘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 살기 시작한지 5년정도 밖에 안됐습니다."

유해 발굴과 이장이 시급하지만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터뷰> 류수동 선생 : "1994년 김신 선생(김국 선생의 둘째아들)과 같이 왔었습니다. 김신 선생이 이곳이 당시의 공동 묘지였다고 말해줬습니다. 그 당시 봄이었는데 한국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조선 의용대 본부가 있던 이곳은 김구 선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를 비롯해 한국인이 거주했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몇해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 정부의 물자관리국이 있던 이곳에 기와집이 보존돼 있었지만 지금은 물자관리국도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아파트 공사가 한창입니다.

기와집들도 모두 철거돼 옛 조선인들의 흔적이라곤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녹취> 건설 공사 현장 인부

충칭 중심가에 있는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 건물.

광복군 총사령부는 시안으로 옮겨가기 한달전인 지난 1940년 9월 17일 이곳에서 창립식을 가졌으며 본격적인 항일 독립 투쟁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몇해 전 중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변했다가 지금은 음식점도 폐쇄되고 새로운 상가 조성을 위한
공사가 한창 입니다.

<인터뷰> 공사 인부 : "(이곳이 상점입니까? 식당입니까?) 모릅니다. 사장님이 안계셔서 모릅니다."

옛 건물 일부가 남아 있지만 중국 정부가 빈민촌인 이곳에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 건물 역시 언제 헐릴지 모릅니다.

<인터뷰> 주변 주민 : "(이 일대를 모두 철거한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아마 그럴거에요, 철거한다고 하더라고요. 저쪽입니다.


<인터뷰>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 관장 : "현재 충칭이 보존할수 있는 항일전쟁 주요 유적지는 아직도 4백곳이나 됩니다. 현재 충칭의 경제 발전 상황과 경제력으로 이를 모두 보호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충칭시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여러차례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묵묵 부답입니다.

<전화 인터뷰> 충칭시 공무원 : "그런 취재는 외사업무 관리부처에 먼저 연락을 하셔서 그곳을 통해 오셔야 하는데 시간이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야경 등 중국 경제 성장의 상징인 상하이.

하루가 다르게 대형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상하이는 지난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부터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했던 곳입니다.

상하이 중심지에 최초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3년,복원이 끝난 이후 개,보수 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에 폭탄을 설치해 당시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장에 투척합니다.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가 숨지고 30여명의 일본 주요 인사들이 다치는 등 당시로서는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사건입니다.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와 만나 비밀 회의를 가졌던 '흥륭다원' 이란 찻집은 언제부터인가 상점으로 사용돼다 지금은 현대식 오피스텔과 호텔이 들어서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인들의 기억에도 잊혀진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녹취> 현지인

상해 임시 정부 건물 주변에서 김구 선생이 지난 1922년부터 24년까지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아내인 최준례 여사.

그리고 두아들인 김인, 김신과 함께 단란한 한 때를 보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찻집과 레스토랑로 변해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질 않습니다.

<인터뷰> 현지인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이 살던 곳에 관해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들어본적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 지역은 못찾겠지요?) 예"

김구 선생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둘째 아들 '신'을 얻은 기쁨과 함께 폐렴으로 고생한 아내가 35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는 슬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지난 1933년,3월 당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백정기,원심창, 이강훈은 '육삼정' 이라는 상하이 시내 고급 요리점에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와 육군 대장 '아라키 사디오' 등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거사 정보가 사전에 유출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맙니다.

이들은 현장에서 잡혀 무기 징역과 15년 형을 선고 받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육삼정은 지난 1943년 화재로 소실됐으며 이후, 일대에는 각종 음식점이 들어서 있었으나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거사 장소가 어디였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인터뷰> 현지인 : "(이곳이 한국독립운동 기지였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선 전세계가 항일 투쟁의 전선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선 유례가 없을 정도로 중국,러시아 일본,미주,유럽등 세계 곳곳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애국지사들의 혼이 배어있는 유적지만 전세계 788곳.

중국이 398곳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미주 156곳, 러시아 100곳. 일본이 53곳, 동남아가 44곳, 유럽이 19곳, 중앙아시아가 13곳, 그리고 몽골이 5곳입니다.

유적지는 많지만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원형을 잃어버린 곳이 상당숩니다.

<인터뷰>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 전 세계 곳곳에 가서 어느 곳이나 조선의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려고 했고 조선의 독립을 위한 운동 근거지, 독립운동근거지로서 존재했던 것입니다."

중국이 항일 독립 운동사에서 중요한 거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적지가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원인은 소수 민족의 역사가 부각되길 원하지 않는 중국 정부의 입장과 빠른 경제 개발 과정에서 대부분의 유적지가 파괴됐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황유복(교수/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장) : "과거 한국 임시정부 소속의 상하이 충칭 등 대도시에서 그들이 사무실로 사용했던 건물들은 도시 개발과정에서 보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중국 정부가 관광 수입 확대 차원에서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유적지는 적극적으로 복원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 방치해 놓은 것도 큰 이유가 됩니다.

<인터뷰> 장세윤(연구위원/동북아 역사재단) : "한국인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과 함께 현지인, 또는 현지 정부,현지 지방자체단체 또는 학교 이런데서 좀 협력이 잘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좀 어렵습니다."

그 무엇보다 후손들의 관심 부족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00년대초에 들어서야 해외 유적지에 대한 조사를 본격적으로 해오고 있지만 때 늦은 감이 없질 않습니다.

<인터뷰> 김주용(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 연구소 연구위원) : "지금 남아 있는 건물에 대해선 집중적으로 우리가 선택과 집중이라는 차원에서 선별해서 중국 각 지방정부, 또는 미국 정부,또는 유럽에 있다면 유럽 각 지역에 걸맞게 그쪽 지역의 지방 정부와 협의해서 최선의 방법을 도출하려고 그렇게 메뉴얼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안홍순(광복회 부회장) : "우리 조상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서 이렇게 애 썼는데 이제는 국가 경제도 많이 성장이 되어 있으니까 국가적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관리 보전 대대로 투자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취재팀은 베이징 인근에서 운암 김성숙 선생의 후손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두건,두련 형제는 운암 김성숙 선생이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할 당시 태어났습니다.

해방 직후 이들은 12살, 2살,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가 조국으로 돌아간 이후 한번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중국에 남겨진 이들은 적막했지만 오히려 어머니가 독립 운동가 아내로서 꼿꼿한 모습을 보이며 용기를 붇돋아 줬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두건 : "어머니는 아버지의 정치적 동반자, 정신적 동반자로서 항상 그 위치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운암 김성숙은 상해임시정부 내무차장과 국무위원을 지낸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독립 운동가 였습니다.

승려로서,, 정치가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항일 운동에 전생을 바쳤지만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다 사후 10년이 지난 지난 1982년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습니다.

독립 운동가를 아버지로 둔 자식들로서 중국인으로 살아 간다는 것이 힘들 때가 많았지만 아버지가 물려준 독립 정신이
버팀목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두련 : "한국인의 혈통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한민족은 굴복을 모르는 민족이요, 함부로 고개를 숙이고 쉽게 망하는 민족이 아닙니다."

유적지 뿐만 아니라 항일 운동을 했지만 뒤늦게 평가 받거나 평가 작업이 소홀해 남모른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현실입니다.

<인터뷰> 찐따천(중국 사회과학원 연구원) : "중국에서 활약한 남북한 의사들이 잘 연구되고 있지 않거나 잘 알려져 있지도 않습니다. 이는 역사의 결함입니다. 정당을 초월해, 정치적 입장과 편견을 넘어서서 민족의 공통된 역사를 마주해야 미래를 향한 훌륭한 기초를 닦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일이면 경술국치 101년에, 광복 66주년 !

항일 독립 운동 선열의 피땀으로 조국을 되찾긴 했지만 여전히 남북으로 갈라져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영토에 대한 야욕은 여전합니다.

먼 이국 땅에서 외롭고 힘들게 싸워온 독립 투사들.

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이 가쁜 숨결처럼 스며있는 항일 유적지를 제대로 보존하고 또 기념하는 일은 나라를 굳건하게 지키려는 다짐이자 선열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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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절 특집] 항일 유적이 사라진다
    • 입력 2011-08-15 10:59:53
    • 수정2011-08-15 11:11:07
    취재파일K
지난 6월 7일. 시대의 지성이자 영원한 광복군으로 불렸던 김준엽 선생이 타계했습니다. 향년 91세. 일제 강점기 때 학병으로 징집된 뒤 탈출한 독립투사. 군사 독재에 맞서 대학 총장직에서 물러난 시대의 스승. 수차례 고위 공직을 마다하고 평생을 학문에만 힘쓴 절개와 지조. 고 김준엽 선생의 일생이었습니다. 한때 광복군 지대장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기도 했던 선생은 일제의 학도병 징집됐지만 천신만고끝에 탈출한 뒤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파란만장한 일생의 서막을 엽니다. <인터뷰> 故 김준엽 선생 : "한국 사람이니까 독립군에 합류해서 독립군의 일원으로 싸우고 싶단 말이에요. 광복군에 참여해야 겠다.." 그 당시 선생의 행적은 지난 87년 펴낸 자서전 <장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녹취> "하루빨리 탈출하여 우리 독립군이나 중국군에 참가하여 원수에 총부리를 돌리고 칼로 무찔러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선생은 광복군으로 중국 시안과 푸양 등지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국내 침투를 준비하던 중 해방을 맞았습니다. 선생뿐만 아니라 당시 수많은 항일 독립 투사들은 중국 등지로 옮겨가 독립 투쟁을 벌였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도 난징, 창사. 광저우,포산,류저우, 치장을 거쳐 충칭까지 5천길로미터에 이르는 대장정을 벌였습니다. <인터뷰> 황유복(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장) : "대한민국의 국가 탄생을 위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가면서 싸웠는데 이 사실을 후손들이 모른다면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이 어느 국가 사람들인지조차 모르는 것고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일 항전의 깃발을 올렸던 중국의 대일 항전 전초 기지들은 광복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어떤 모습일까? 취재파일 4321이 중국내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 활약지를 중심으로 항일 유적지를 찾아 봤습니다. 중국 서북부에 위치해 있는 시안. 중일 전쟁 당시 최전선인 화북 지방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던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시안이 항일 독립 운동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지난 1939년 11월. 항일무장단체이자 훗날 한국광복군의 전신인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충칭에서 시안으로 옮겨오면서 부텁니다. 당시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과 큰 아들 김인은 공작대원들을 자랑스럽게 떠나보냅니다. 시안 중심가. 취재팀은 공작대 본부 건물을 찾아가 봤지만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습니다. 지난 2002년 우리 독립기념관의 국외 항일 유적지 실태 조사 당시 이곳엔 법원이 들어서 있는 걸로 확인됐지만 지금은 텅 비었습니다. <인터뷰> 현지인 할아버지 : "1년전인 지난해 (법원도) 북2환로로 이전해 갔습니다" 공작대가 여기서 항일 투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어떠한 표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지인들도 이곳이 항일무장독립투쟁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인터뷰> 현지인 할아버지 : "표지판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공작대가 이곳에 주둔하고 나서 1년뒤.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역시 시안으로 옮겨 왔습니다. 시안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임시정부가 총사령부를 이 곳으로 옮긴 것입니다. 본래 목조 건물 2층이었던 총사령부 건물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습니다. 지난 95년, 도심 재개발이 이루어 지면서 건물이 헐려 지금은 그 자리에 백화점과 호텔이 들어섰습니다. 지난 2000년대 초만하더라도 총사령부 옆 건물들은 옛 모습들을 갖추고 있어 보존 필요성이 제기 됐지만 아무런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현지 할아버지 : "이 건물은 대부분 10여년전에 새로 지은 것들입니다." 지난 39년,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이전해 오는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 준비를 위해 이곳에 군사 특파단을 보냈습니다. 당시 임정 군무부장인 조성환을 단장으로 한 특파단은 이근처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와 상가들이 들어섰을 뿐 옛 흔적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당시 군사 특파단을 지웠했던 중국 국민당 기관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만 현지 주민의 증언으로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인터뷰> 현지 주민 : "과거 국민단의 당정 기관이 있던 곳입니까? 구체적으로 기관 이름은 모르겠지만 그런 기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취재팀은 당시 광복군의 자취를 찾아보기 위해 시안 외곽부터 살펴봤습니다. 지난 1940년 9월. 충칭에서 결성된 광복군은 초기엔 모두 1,2,3,5 등 4개 지대로 구성됐고 그후 조선의용대를 편입했습니다. 광복군 제 2지대는 이곳에서 당시 중국에 파견됐던 미국 전략사무국, CIA의 전신인 OSS대원들과 국내 상륙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인터뷰> 석근영(前 OSS대원) : "우리 CIA 전신이 우리 광복군하고 합세를 해 가지고 말이죠..라디오 송신 수신 암호해독. 그리고 사격훈련. 또 수류탄 투척. TNT 폭파 같은 이런게 훈련이란 말이죠." 1942년 당시 제 2지대가 주둔했던 곳을 어렵게 찾았지만 이미 오래전 곡식을 쌓아두는 창고로 변했습니다. 이곳에서 광복군 2지대 대원들이 찍은 한장의 빛바랜 사진만이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할 뿐입니다. <인터뷰> 현지인 : "이곳에 작은 기념비라도 세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릅니다. (중국) 정부에다 물어 보세요) " 당시 2지대 대장이었던 이범석 장군의 관사도 여기서 불과 200여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오래전에 헐 려 지금은 빈터만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곳 주민들은 당시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하던 조선인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루펑주(동네 노인) : "여기 살았어요. 이 근처인데 지금은 다 철거됐습니다." 근처,광복군 2지대 대원들의 숙소는 미타고사라는 중국 사찰로 둔갑했고 훈련장은 벽돌을 만드는 공장터로 변했습니다. 광복군과 관련한 어떠한 흔적도 찾기란 불가능했습니다. <인터뷰> 리우바오시우(사찰관리인) : "우리 마을에 아흔이 가까운 할어버지가 계셨는데 그분이 말씀하시길 당시 한국군의 베이스 캠프가 이곳(사찰)에 있었고 훈련장은 저쪽(벽돌 공장)에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OSS 대원중 생존해 있는 몇몇 사람들은 몇해전 당시 자신들이 활동했던 곳을 찼았지만 폐허로 변한 현장만 확인했습니다. <인터뷰> 김유길(전 OSS대원) : "우리 있던 데를 그저 찾긴 찾았는데 다 달라요. 알지도 못해요, 그저 여기 였다 그러는거지. 인생무상,인생이라는게 다 그런거죠, 세월이 가면 다 그런거요." 중국내 항일 유적지를 더 알아보기 위해 시안에서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옌안을 찾았습니다. 중국 산시성 북부에 자리잡은 옌안은 항일 독립 운동 당시 조선독립동맹과 그 산하의 항일 무력 단체인 조선 의용군의 항일 투쟁 근거지 였습니다. 한국사에서 그들은 옌안파로 불리웁니다. 옌안파는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가 정치 활동을 펼쳤으나 숙청 당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녹취> 김원봉 : "옌안에서 이들은 산중턱에 동굴을 파서 살았습니다. 동굴은 삶의 터전인 동시에 항일 투쟁 근거지였습니다." 취재팀이 어렵게 찾은 동굴은 10여개 안팎으로 기찻길 옆 산중턱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벽면이 다 떨어져 나가고 동굴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현지 주민들은 조선 군인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동굴을 파고 생활했던 당시 상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할머니 : "항일 전쟁 당시 조선 부대가 이곳에 주둔 했나요? (바로 이곳입니다.)" 그나마 지난 2000년대 중반 옌안시에서 조선 의용군의 항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표지석만이 먼지를 뒤집어 쓴체 그들의 한많은 세월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5개월여 머물다 다시 인근 나가평 지역으로 이동해 군사 간부 양성 학교를 세우고 역시 동굴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군사 양성 학교가 있던 곳은 이미 시장통으로 변했습니다. 학교 터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석 하나가 세워져 있을 뿐이고 그나마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쓰레기 더미 속에 방치돼 있습니다. <인터뷰> 시장 상인 : "조선인과 관련된 무슨 학교가 있었던 곳이 아닙니까? (다른 지방에서 와서 잘 모르겠습니다) 조선 군인들이 기거했던 동굴엔 현재 현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터뷰> 현지 할머니 : "옌안엔 당시로선 드물게 조선인들과 함께 반전 운동을 벌였던 일본인들의 자취도 남아 있습니다." 지난 1940년대, 조선인들과 연대를 맺고 침략 전쟁을 반대하고 나섰던 일본인들의 학교가 그것입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지만 보존 상태는 조선인들의 그것과 확연히 다릅니다. 중국 정부에서 만든 표지석이 학교터 진입로 앞에 세워져 있고 산기슭에 위치한 학교 터는 깨끗하게 정돈돼 있습니다. 주민들은 일본인들이 이곳을 찾아 관련 기관에 기부를 하고 협조를 받아 터를 잘 보존하고 있으며 수시로 참배도 한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리쉐닝(중국인 할머니) : "(학교) 건물 6개가 있었는데 철거하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일본인들도 자주 옵니까?) 자주 옵니다." 항일 전쟁을 치렀던 동시대의 두 나라 사람들이 살았지만 60여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흔적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인터뷰> 전태동(중국 시안 총영사) : "문화 대혁명, 농촌의 개혁 개방, 서부 대개발 세가지 요인이 쭉 진행돼 많이 개발되면서 이런 유적지가 많이 산실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항일 독립 투사들이 가장 많이 활동했던 중국 지역은 크게 동북과 북부, 남부 지역으로 크게 나뉩니다. 동북 지역은 지린성 등을 비롯한 동북 삼성을 말하며, 이 지역은 무장항일세력들의 활동지역이었습니다. 북부 지역은 앞서 살펴본 시안과 옌안 지역을 중심으로 베이징 지역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한국 광복군과 사회주의 계열이었던 조선의용군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남부 지역은 어떨까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최초 수립된 상하이를 비롯해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충칭, 그리고 푸양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와 광복군들이 활발히 대일 항전을 치렀던 곳이다. 취재팀은 다시 시안에서 남동쪽으로 1500여킬로미터 중국 남부의 작은도시 푸양을 찾았습니다. 이곳에서 세무공무원인 중국인 리홍씨를 만났습니다. 리홍씨의 아버지인 리빙영씨는 지난 1944년 당시 이곳에서 조선 광복군의 간부들을 교육시킨 교관이었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故 김준엽 선생과 지난 75년 의문의 추락사로 타계한 장준하 선생 등 50여명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리홍씨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푸양에 있는 항일 유적지 보존을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자신의 집에 태극기와 한국 기념품들을 진열해 놓을 정도로 한국 사랑이 특별합니다. <인터뷰> 리홍씨 : "아버지께서 생전에 이일(한중간의 우호관계)을 저한테 계속 이어가라 하셨습니다. 좋은 관계를 만들어 놓았으니 계속 이어가라는 말씀이시죠 " 광복군이 훈련 받았던 군관학교는 지금은 중학교로 변했습니다. 학교 건물들은 해방 이후 들어섰거나 지난 2000년대 초 새로 완공된 것들이어서 광복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수 없습니다. <인터뷰> 리홍씨 : "간부 훈련단은 이곳에 집을 지었는데 과거에는 기와집이 아닌 초가집이었습니다." 더구나 광복군 훈련반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긴 하지만 엉뚱하게도 학교에서 2킬리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쇠사슬로 굳게 잠긴 철재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천으로 덮여진 기념비가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2003년 6월 그나마 중국 정부의 허락을 어렵게 받아 한중합작회사 부지에 세운 것입니다. <인터뷰> 리홍씨 : "우리는 가장 좋은 위치인 바로 저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싶습니다." 이곳 푸양은 광복군 제3지대 주둔지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지난 1945년, 6월 푸양에 있는 인민 극장에서 광복군 3지대는 결성식을 열었고 '탈출기'란 제목의 민족 해방 관련 연극도 올렸습니다. <인터뷰> 동네 주민 : "원래는 공연을 하고 회의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정부에서 회의를 하곤 했었는데 97년에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곳도 몇해 전 나이트 클럽이 됐다가 지금은 유흥 주점으로 변했습니다. 완전히 개축을 한 것이 아니라 입구만 손을 댔기 때문에 군데 군데 예전 모습들이 남아 있습니다. 먼 이국 땅에서 조국 독립을 꿈꾸며 투쟁의 깃발을 올렸던 광복군의 기지가 밤에는 이처럼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화려한 유흥 주점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녹취> 유흥주점 종업원 : "(여긴 주점입니까?) 아래층은 술마시고 여긴 KTV (가라오케) 입니다. (아가씨도 나옵니까?) 가능합니다" 푸양에서 북서쪽으로 1000킬로미터 떨어진 충칭. 지난 1940년,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가 있던 곳입니다. 임정은 이곳에서 광복군 창설과 임시 의정원 개원,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제정 등 항일 운동에서 굵직 굵직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취태팀은 우선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를 찾았습니다.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모두 4번 청사를 옮겼으나 첫번째와 두번째 청사는 일본의 폭격으로 파괴됐습니다. 해방을 맞은 임정요인들이 모여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은 돌 계단 앞은 그 시절의 감동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 합니다. 마지막 청사엔 김구 선생 등 임시 정부 요인들의 사진들과 각종 자료가 깨끗이 진열돼 있습니다. 지난 1995년. 국내 독립기념관과 충칭시가 복원 협정을 맺고 개관했습니다. 이후 독립 기념관에서 건물들 다시 고치고 전시 내용을 수정,보완해 오고 있습니다. <인터뷰> 장미영(한국 관람객/서울 방배동) : "여기까지 임시정부가 너무 많이 옮겨 다니고 너무 핍박을 많이 당하니까. 와닿아요." 그러나 세번째 청사는 사정이 완전히 다릅니다. 다 쓰러져 가는 목조건물에 현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터뷰> 현지 주민 할머니 : "지금은 3가구만 살고 있고 모두 이사갔습니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 하권을 저술하기도 했던 이곳은 금방이라도 건물이 무너질 듯 낡고 오래 됐습니다. 다만 청사 앞에 세워진 비석만이 이곳이 임시 정부 청사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독립 기념관측은 중국 정부와 건물 보존 및 복원 방안을 놓고 협의 하고 있지만 언제 허물어 질지 모른 상황속에서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입니다. 취재팀은 김구 선생의 주치의이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낸 유진동 선생의 막내 아들 유수동씨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해 들을수 있었습니다. 유진동 선생은 지난 2007년 8월, 독립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지난 1957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어머니,형,동생 등 7명이 북한으로 넘어갔지만 북한 당국의 핍박은 심했습니다. 결국, 지난 63년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도 못한 채 유수동씨는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탈출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형제들은 일찍 사망하거나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등 모진 세월을 겪어야 했습니다. 백범일지에 적힌 아버지에 대한 부분을 읽어내려가는 유씨의 목소리에 회한이 묻어 납니다. 유류씨는 당시 충칭에 조성돼 있던 한인촌에 취재팀을 안내 했습니다. 한인촌이 있던 이곳은 지난 1940년,8월, 지장에서 충칭으로 옮겨온 임시 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 그리고 광복군 산하 일본의 보충대인 토교대 대원들이 거하던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철강 공장이 들어서 있고 한인촌이 있던 곳은 폐허로 변했습니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집한 채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이마저도 철거돼 사라져 버렸습니다. 구석에 방치돼 있는 비석 하나만이 이곳이 한인들의 옛 거주지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당시 임시 정부는 삼일 유치원을 개원해 미래의 독립 투사들을 길러 냈습니다. 암울했던 시대였지만 희망만은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충칭시 외곽에 있는 한 공동묘집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먼 이국 땅에서 쓸쓸히 눈을 감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김구 선생의 가족들이 잠들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수 없습니다. 주변은 쓰레기 처리장과 담배 공장 창고로 변했으며 그나마 가파른 지역에 위치해 있는 터라 빗물에 토사가 깎여 나가 흉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봉분으로 추정되는 흙 무덤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일 뿐이였습니다. <인터뷰> 현지 주민 : "묘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 살기 시작한지 5년정도 밖에 안됐습니다." 유해 발굴과 이장이 시급하지만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터뷰> 류수동 선생 : "1994년 김신 선생(김국 선생의 둘째아들)과 같이 왔었습니다. 김신 선생이 이곳이 당시의 공동 묘지였다고 말해줬습니다. 그 당시 봄이었는데 한국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조선 의용대 본부가 있던 이곳은 김구 선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를 비롯해 한국인이 거주했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몇해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 정부의 물자관리국이 있던 이곳에 기와집이 보존돼 있었지만 지금은 물자관리국도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아파트 공사가 한창입니다. 기와집들도 모두 철거돼 옛 조선인들의 흔적이라곤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녹취> 건설 공사 현장 인부 충칭 중심가에 있는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 건물. 광복군 총사령부는 시안으로 옮겨가기 한달전인 지난 1940년 9월 17일 이곳에서 창립식을 가졌으며 본격적인 항일 독립 투쟁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몇해 전 중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변했다가 지금은 음식점도 폐쇄되고 새로운 상가 조성을 위한 공사가 한창 입니다. <인터뷰> 공사 인부 : "(이곳이 상점입니까? 식당입니까?) 모릅니다. 사장님이 안계셔서 모릅니다." 옛 건물 일부가 남아 있지만 중국 정부가 빈민촌인 이곳에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 건물 역시 언제 헐릴지 모릅니다. <인터뷰> 주변 주민 : "(이 일대를 모두 철거한다고 하는데 맞습니까?) 아마 그럴거에요, 철거한다고 하더라고요. 저쪽입니다. <인터뷰>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 관장 : "현재 충칭이 보존할수 있는 항일전쟁 주요 유적지는 아직도 4백곳이나 됩니다. 현재 충칭의 경제 발전 상황과 경제력으로 이를 모두 보호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충칭시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여러차례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묵묵 부답입니다. <전화 인터뷰> 충칭시 공무원 : "그런 취재는 외사업무 관리부처에 먼저 연락을 하셔서 그곳을 통해 오셔야 하는데 시간이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야경 등 중국 경제 성장의 상징인 상하이. 하루가 다르게 대형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상하이는 지난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부터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했던 곳입니다. 상하이 중심지에 최초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3년,복원이 끝난 이후 개,보수 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에 폭탄을 설치해 당시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장에 투척합니다.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가 숨지고 30여명의 일본 주요 인사들이 다치는 등 당시로서는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사건입니다.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와 만나 비밀 회의를 가졌던 '흥륭다원' 이란 찻집은 언제부터인가 상점으로 사용돼다 지금은 현대식 오피스텔과 호텔이 들어서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인들의 기억에도 잊혀진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녹취> 현지인 상해 임시 정부 건물 주변에서 김구 선생이 지난 1922년부터 24년까지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아내인 최준례 여사. 그리고 두아들인 김인, 김신과 함께 단란한 한 때를 보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찻집과 레스토랑로 변해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질 않습니다. <인터뷰> 현지인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이 살던 곳에 관해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들어본적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 지역은 못찾겠지요?) 예" 김구 선생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둘째 아들 '신'을 얻은 기쁨과 함께 폐렴으로 고생한 아내가 35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는 슬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지난 1933년,3월 당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백정기,원심창, 이강훈은 '육삼정' 이라는 상하이 시내 고급 요리점에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와 육군 대장 '아라키 사디오' 등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거사 정보가 사전에 유출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맙니다. 이들은 현장에서 잡혀 무기 징역과 15년 형을 선고 받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육삼정은 지난 1943년 화재로 소실됐으며 이후, 일대에는 각종 음식점이 들어서 있었으나 재건축 바람이 불면서 거사 장소가 어디였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인터뷰> 현지인 : "(이곳이 한국독립운동 기지였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선 전세계가 항일 투쟁의 전선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선 유례가 없을 정도로 중국,러시아 일본,미주,유럽등 세계 곳곳에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애국지사들의 혼이 배어있는 유적지만 전세계 788곳. 중국이 398곳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미주 156곳, 러시아 100곳. 일본이 53곳, 동남아가 44곳, 유럽이 19곳, 중앙아시아가 13곳, 그리고 몽골이 5곳입니다. 유적지는 많지만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원형을 잃어버린 곳이 상당숩니다. <인터뷰>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 전 세계 곳곳에 가서 어느 곳이나 조선의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려고 했고 조선의 독립을 위한 운동 근거지, 독립운동근거지로서 존재했던 것입니다." 중국이 항일 독립 운동사에서 중요한 거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적지가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원인은 소수 민족의 역사가 부각되길 원하지 않는 중국 정부의 입장과 빠른 경제 개발 과정에서 대부분의 유적지가 파괴됐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황유복(교수/중앙민족대학 한국문화연구소장) : "과거 한국 임시정부 소속의 상하이 충칭 등 대도시에서 그들이 사무실로 사용했던 건물들은 도시 개발과정에서 보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중국 정부가 관광 수입 확대 차원에서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유적지는 적극적으로 복원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 방치해 놓은 것도 큰 이유가 됩니다. <인터뷰> 장세윤(연구위원/동북아 역사재단) : "한국인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과 함께 현지인, 또는 현지 정부,현지 지방자체단체 또는 학교 이런데서 좀 협력이 잘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좀 어렵습니다." 그 무엇보다 후손들의 관심 부족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00년대초에 들어서야 해외 유적지에 대한 조사를 본격적으로 해오고 있지만 때 늦은 감이 없질 않습니다. <인터뷰> 김주용(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 연구소 연구위원) : "지금 남아 있는 건물에 대해선 집중적으로 우리가 선택과 집중이라는 차원에서 선별해서 중국 각 지방정부, 또는 미국 정부,또는 유럽에 있다면 유럽 각 지역에 걸맞게 그쪽 지역의 지방 정부와 협의해서 최선의 방법을 도출하려고 그렇게 메뉴얼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안홍순(광복회 부회장) : "우리 조상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서 이렇게 애 썼는데 이제는 국가 경제도 많이 성장이 되어 있으니까 국가적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관리 보전 대대로 투자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취재팀은 베이징 인근에서 운암 김성숙 선생의 후손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두건,두련 형제는 운암 김성숙 선생이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할 당시 태어났습니다. 해방 직후 이들은 12살, 2살,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가 조국으로 돌아간 이후 한번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중국에 남겨진 이들은 적막했지만 오히려 어머니가 독립 운동가 아내로서 꼿꼿한 모습을 보이며 용기를 붇돋아 줬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두건 : "어머니는 아버지의 정치적 동반자, 정신적 동반자로서 항상 그 위치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운암 김성숙은 상해임시정부 내무차장과 국무위원을 지낸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독립 운동가 였습니다. 승려로서,, 정치가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항일 운동에 전생을 바쳤지만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다 사후 10년이 지난 지난 1982년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습니다. 독립 운동가를 아버지로 둔 자식들로서 중국인으로 살아 간다는 것이 힘들 때가 많았지만 아버지가 물려준 독립 정신이 버팀목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두련 : "한국인의 혈통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한민족은 굴복을 모르는 민족이요, 함부로 고개를 숙이고 쉽게 망하는 민족이 아닙니다." 유적지 뿐만 아니라 항일 운동을 했지만 뒤늦게 평가 받거나 평가 작업이 소홀해 남모른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현실입니다. <인터뷰> 찐따천(중국 사회과학원 연구원) : "중국에서 활약한 남북한 의사들이 잘 연구되고 있지 않거나 잘 알려져 있지도 않습니다. 이는 역사의 결함입니다. 정당을 초월해, 정치적 입장과 편견을 넘어서서 민족의 공통된 역사를 마주해야 미래를 향한 훌륭한 기초를 닦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일이면 경술국치 101년에, 광복 66주년 ! 항일 독립 운동 선열의 피땀으로 조국을 되찾긴 했지만 여전히 남북으로 갈라져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영토에 대한 야욕은 여전합니다. 먼 이국 땅에서 외롭고 힘들게 싸워온 독립 투사들. 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이 가쁜 숨결처럼 스며있는 항일 유적지를 제대로 보존하고 또 기념하는 일은 나라를 굳건하게 지키려는 다짐이자 선열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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