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투자에 목마르다

입력 2013.01.07 (06:14) 수정 2013.01.07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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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0년대 말, 서울 역삼동, 삼성동으로 이어지는 강남 테헤란로는 한국의 실리콘밸리, '테헤란밸리'라고 불리며 장밋빛 희망이 넘실거렸습니다.

<인터뷰> 이진석(대표/메타마이닝(주)) : "저도 좀 놀라웠던 게 그냥 몇 가지 제안서도 안 받아보고 막 투자하는 그런 타입이었으니까요. 지금이랑 분위기가 완전 다르죠."

유행처럼 번진 엔젤투자, 스톡옵션 같은 단어들의 중심에는 바로 '벤처'가 있었습니다.

<인터뷰> 김기완(박사/한국개발연구원) : "98년도에 벤처 제도가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된 이후에 초기는 IT 중심으로 해서 굉장히 많은 투자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2000년을 지나면서 세계적인 닷컴 버블 붕괴로 테헤란로의 황금기는 일순간에 무너졌고, 벤처산업은 긴 겨울잠에 접어들었습니다.

기업 마케팅 관련 인터넷 서비스 개발이 한창인 한 대학 벤처창업동아리.

네다섯 명의 학생들이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창업을 꿈꾸며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인터뷰> 최영남(서강대 벤처창업동아리) :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서도, 한두 차례 정도는 기업의 M&A를 경험해본다든가 주식상장을 시켜본다거나…."

취업난을 창업으로 이겨내고자 하는 대학 벤처 창업자들이 늘면서 지난해 중소기업청이 지원한 대학 벤처 동아리만도 700여 곳에 이릅니다.

급감하던 벤처 기업의 수가 2003년을 기점으로 빠르게 증가하면서 최근에는 '제2의 벤처 붐'이란 말까지 조심스레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이른바 '엔젤'들이 사라지고, 정부의 지원정책도 겉돌면서 기술력 있는 벤처들 마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양적 증가에 비해 성공한 벤처기업을 찾기 힘든 벤처산업의 실태를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아침 최저기온 영하 14도, 겨울 날씨가 매섭습니다. 문 열고 들어가는 소리

실내라고는 해도 바깥 온도와 별반 다르지 않고, 싱크대에는 두꺼운 얼음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인터뷰>김창수 대표(가명) "여기는 지인 공장에 조그만 구석입니다. 여기 굉장히 춥습니다. 지금도 추우시죠? 여기에서 그냥 어쩔 수 없이 회사를 연명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김 대표는 이곳에서 서버 운영이 필요없는 무료 문자, 무료 통화 기술과 새로운 스마트 기기를 연구, 개발하며 또다시 벤처기업인으로서의 재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지난 2005년 동영상 무선 전송 모듈 개발을 시작으로 각종 특허를 출원해 온 김 대표는, 몇 해 전 발명특허대전 은상까지 수상했지만, 지금은 그저 신용불량잡니다.

<인터뷰> 김창수(대표/가명) : "기술보증기금에 자금을 요청했는데, 대출이죠. 제가 원하는 것이 예를 들면 100이라 그러면 100의 1/5도 안 되는 그런 금액을 받다 보니, 결국 수익을 낼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고 수익이 안 되다 보니…."

김 대표는 자금만 충분했으면 회사가 극한 상황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투자기관의 적극적인 투자를 아쉬워했습니다.

<인터뷰> 김창수(대표/가명) : "기술이 있다 싶으면, (대출을)조금 주긴 줘야 하거든요. 그래서 생색내기식으로 조금 줍니다. 그것들이 벤처기업이나 이런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기술 가진 사람들한테 죽음의 늪에 빠지는 그런 결과가 되는 거죠."

대학에서 운영하고 있는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한 벤처기업들도 사정은 마찬가집니다.

친환경 불연 건축내장재를 개발한 이 업체는 건축물의 기본 골조 위에 바로 부착할 수 있는 단열 내장재와 다양한 형태로 변형할 수 있는 수용성 목재 원료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승광(대표/유비아이(주)) : "공사기간도 단축되고 경비 절감되고, 건강에도 좋고, 병원 같은 데, 냄새 나는 데도 하면 탈취가 다 되니까. 공기가 항상 맑은 공기, 실내 공기를 청정시킬 수 있죠. 이런 건 실험 성적서에 다 나와 있습니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까지, 지난 8년간의 노력은 신용등급 8등급이라는 딱지와 임대료 독촉 고지서로 돌아왔습니다.

기술력은 인정받았지만, 제품 생산을 위한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김승광(대표) : "우리가 이제 기술보증기금이나 중진공이나 이런데 자금 신청을 하게 되면 기술력이나 이런 시장성, 향후 발전 가능성을 일단 접어두고, 지금 현재 대표이사의 신용이라든가, 법인 신용이라든가, 이런 걸 우선시하니까 자금 받을 길이 힘들어요."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직원마저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김 사장은 이 안타까운 현실에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토로합니다.

<인터뷰> 김승광(대표/유비아이(주)) : "지금은 아, 괜히 손을 댔다. 정말 7,8년 동안 어디 한 번 놀러 가지도 못하고 여기만 매달려서 보낸 세월이 사실 조금 아쉽더라고…."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는 또 다른 업체.

첨단 소재를 생산해 이미 대기업에 납품을 하고 있지만, 자금 마련은 역시 벽에 부딪혔습니다.

자체 공장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녹취> 업체 기술고문 :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기술보증기금에 있는 분들은 사고방식이 그냥 제조업은 무조건 공장이 있어야 한다. 고답적인 사고방식이 그게 한계인 것 같습니다."

정부의 벤처 지원 정책으로 지난 2009년에만 20조 원 이상이 벤처기업들에게 지원됐는데, 왜 기술력 있는 업체들이 자금난을 겪고 있을까.

앞서 소개한 업체들은 우리나라의 기준에서는 벤처기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의 벤처기업은 특별법으로 정의돼 있습니다.

<인터뷰> 이민화(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 "벤처의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해서 압축성장을 위해서 만든 제도가 바로 전 세계 최초의 벤처기업특별법입니다."

특별법에는 벤처기업을 벤처투자회사로부터 투자받은 벤처투자기업과 기업부설연구소를 보유한 연구개발기업, 그리고 기술보증기금과 중소기업진흥공단으로부터 보증이나 대출을 받은 기술평가보증기업, 기술평가대출기업 등으로 구분합니다.

지난 2010년 당시 벤처 기업은 2만 4천여 개로 2003년에 비해 3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이렇게 증가한 배경에는 금융기관에서 대출만 받으면 벤처 기업으로 인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김기완(박사/한국개발연구원) : "최근에 특히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벤처기업이 급증한 건 벤처투자기업이나 연구개발기업보다는 기술평가보증 또는 대출을 받는 기업들이 굉장히 크게 늘어난 그런 것들에 기인한 바가 크고…."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벤처 인증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술력을 평가해 벤처를 인증해 주는 것이 아니라, 국책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이나 보증만 받으면 무조건 벤처로 인정해주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민화(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 "보증을 위한 심사에서는 이 회사가 혁신 지향적인가를 따지는 게 아니고 망할 거냐, 안 망할 거냐 하는 이걸 보게 되죠. 현재 인증 제도가 잘못돼 있다는 게 그래서 잘못돼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지난해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09년부터 3년간 기술보증기금이 예비검토단계에서 보증을 거절한 4,846건 가운데, 909건이 특허 등을 보유한 기술력 있는 기업들이었고, 이들의 보증 거절 사유 중 78% 이상이 기술 외적인 이유였습니다.

특허 보유 기업인 A 주식회사에 대해 예비검토를 하면서 등급 미달 및 신용도가 취약하다는 사유로 접수조차 하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2011.3.31 기술보증기금)

<인터뷰> 이진석(대표/메타마이닝(주)) : "재무제표라든가 이런 걸 봅니다. 근데 투자를 많이 하다 보면 재무제표가 나빠질 수도 있거든요. 그건 당연합니다. 뭐 그런 기업들은 다 제외 대상이 되는 거니까. 벤처가, 벤처가 아니라는 거죠."

벤처인증기업을 확인하는 홈페이지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신규업체가 공시됩니다.

지난달 벤처인증을 받은 경기도의 한 제조공장.

공시내용 중 특허 등의 기술력 지표는 제롭니다.

같은 날 벤처 인증을 받은 업체 가운데에는 고춧가루 생산업체와 브래지어 제조업체 등도 포함돼 있습니다.

모두 벤처인증과 함께 8천만 원 이상, 많게는 2억 원까지 저금리로 대출을 받았습니다.

벤처인증을 받게 되면 법인세와 소득세 감면, 사업용 재산에 대해 취득세 면제 등 다양한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일부 재무 설계사들은 중소기업들을 찾아가 권유하기도 합니다.

<녹취> 기업 재무 설계사(음성대역) : "기술보증에서 8천만 원 이상을 대출받게 되면 벤처인증을 쉽게 받을 수 있거든요. 대출을 실행을 해야지만 인증을 받게 되는 구조로 돼 있다 보니까 불필요하더라도 일단 8천만 원 이상이 대출이 실행됩니다."

기술보증기금 측 입장은 다릅니다.

자금 회수에 대한 안전성이 중요한 데다가, 자신들은 기술력 평가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녹취> 박춘주(부부장/기술보증기금 보증운영부) : "저희가 보증취급할 때 사실상 회수 가능성을 보는 것은 은행에서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다만 기술력이 있고 그 기술력이 시장성이 있는지, 시장성과 사업성이 충분하다고 인정이 되면 저희들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벤처지원 정책이 융자와 보증에서 투자 위주로 변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인터뷰> 이민화(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 "융자하고 투자는 완전히 다릅니다. 융자는 그 회사가 잘 돼도 이자밖에 못 받습니다. 투자는 잘 되면 내가 투자한 것의 수십 배를 벌 수가 있죠. 그래서 10개를 투자했는데, 두 군데서 성공하면 나머지 여덟 군데 날려버린 걸 다 회복하고도 더 많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

창업 투자가인 '엔젤'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인터뷰> 박병형(소셜벤처포럼 회장) : "지금 저희가 필요한 것이 뭣이냐 하면 정말 장기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그런 환경, 즉 엔젤투자자들이 투자를 하게 되면 정부에서 어떤 세제혜택이라든가 여러 가지 어떤 정책을 주면 엔젤투자자들도 돈을 장기적으로 넣을 수가 있는 것이거든요."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창업에 나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력 있는 기업이 쓰러지고, 서류상 벤처기업의 수만 늘어가는 지금과 같은 벤처 정책이 계속된다면, 벤처의 꿈은 또 한 번 쓰라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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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벤처, 투자에 목마르다
    • 입력 2013-01-07 06:14:29
    • 수정2013-01-07 09:25:18
    취재파일K
지난 1990년대 말, 서울 역삼동, 삼성동으로 이어지는 강남 테헤란로는 한국의 실리콘밸리, '테헤란밸리'라고 불리며 장밋빛 희망이 넘실거렸습니다. <인터뷰> 이진석(대표/메타마이닝(주)) : "저도 좀 놀라웠던 게 그냥 몇 가지 제안서도 안 받아보고 막 투자하는 그런 타입이었으니까요. 지금이랑 분위기가 완전 다르죠." 유행처럼 번진 엔젤투자, 스톡옵션 같은 단어들의 중심에는 바로 '벤처'가 있었습니다. <인터뷰> 김기완(박사/한국개발연구원) : "98년도에 벤처 제도가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된 이후에 초기는 IT 중심으로 해서 굉장히 많은 투자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2000년을 지나면서 세계적인 닷컴 버블 붕괴로 테헤란로의 황금기는 일순간에 무너졌고, 벤처산업은 긴 겨울잠에 접어들었습니다. 기업 마케팅 관련 인터넷 서비스 개발이 한창인 한 대학 벤처창업동아리. 네다섯 명의 학생들이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창업을 꿈꾸며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인터뷰> 최영남(서강대 벤처창업동아리) :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서도, 한두 차례 정도는 기업의 M&A를 경험해본다든가 주식상장을 시켜본다거나…." 취업난을 창업으로 이겨내고자 하는 대학 벤처 창업자들이 늘면서 지난해 중소기업청이 지원한 대학 벤처 동아리만도 700여 곳에 이릅니다. 급감하던 벤처 기업의 수가 2003년을 기점으로 빠르게 증가하면서 최근에는 '제2의 벤처 붐'이란 말까지 조심스레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이른바 '엔젤'들이 사라지고, 정부의 지원정책도 겉돌면서 기술력 있는 벤처들 마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양적 증가에 비해 성공한 벤처기업을 찾기 힘든 벤처산업의 실태를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아침 최저기온 영하 14도, 겨울 날씨가 매섭습니다. 문 열고 들어가는 소리 실내라고는 해도 바깥 온도와 별반 다르지 않고, 싱크대에는 두꺼운 얼음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인터뷰>김창수 대표(가명) "여기는 지인 공장에 조그만 구석입니다. 여기 굉장히 춥습니다. 지금도 추우시죠? 여기에서 그냥 어쩔 수 없이 회사를 연명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김 대표는 이곳에서 서버 운영이 필요없는 무료 문자, 무료 통화 기술과 새로운 스마트 기기를 연구, 개발하며 또다시 벤처기업인으로서의 재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지난 2005년 동영상 무선 전송 모듈 개발을 시작으로 각종 특허를 출원해 온 김 대표는, 몇 해 전 발명특허대전 은상까지 수상했지만, 지금은 그저 신용불량잡니다. <인터뷰> 김창수(대표/가명) : "기술보증기금에 자금을 요청했는데, 대출이죠. 제가 원하는 것이 예를 들면 100이라 그러면 100의 1/5도 안 되는 그런 금액을 받다 보니, 결국 수익을 낼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고 수익이 안 되다 보니…." 김 대표는 자금만 충분했으면 회사가 극한 상황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투자기관의 적극적인 투자를 아쉬워했습니다. <인터뷰> 김창수(대표/가명) : "기술이 있다 싶으면, (대출을)조금 주긴 줘야 하거든요. 그래서 생색내기식으로 조금 줍니다. 그것들이 벤처기업이나 이런 사업을 새로 시작하는 기술 가진 사람들한테 죽음의 늪에 빠지는 그런 결과가 되는 거죠." 대학에서 운영하고 있는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한 벤처기업들도 사정은 마찬가집니다. 친환경 불연 건축내장재를 개발한 이 업체는 건축물의 기본 골조 위에 바로 부착할 수 있는 단열 내장재와 다양한 형태로 변형할 수 있는 수용성 목재 원료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승광(대표/유비아이(주)) : "공사기간도 단축되고 경비 절감되고, 건강에도 좋고, 병원 같은 데, 냄새 나는 데도 하면 탈취가 다 되니까. 공기가 항상 맑은 공기, 실내 공기를 청정시킬 수 있죠. 이런 건 실험 성적서에 다 나와 있습니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까지, 지난 8년간의 노력은 신용등급 8등급이라는 딱지와 임대료 독촉 고지서로 돌아왔습니다. 기술력은 인정받았지만, 제품 생산을 위한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김승광(대표) : "우리가 이제 기술보증기금이나 중진공이나 이런데 자금 신청을 하게 되면 기술력이나 이런 시장성, 향후 발전 가능성을 일단 접어두고, 지금 현재 대표이사의 신용이라든가, 법인 신용이라든가, 이런 걸 우선시하니까 자금 받을 길이 힘들어요."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직원마저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김 사장은 이 안타까운 현실에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토로합니다. <인터뷰> 김승광(대표/유비아이(주)) : "지금은 아, 괜히 손을 댔다. 정말 7,8년 동안 어디 한 번 놀러 가지도 못하고 여기만 매달려서 보낸 세월이 사실 조금 아쉽더라고…."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는 또 다른 업체. 첨단 소재를 생산해 이미 대기업에 납품을 하고 있지만, 자금 마련은 역시 벽에 부딪혔습니다. 자체 공장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녹취> 업체 기술고문 :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기술보증기금에 있는 분들은 사고방식이 그냥 제조업은 무조건 공장이 있어야 한다. 고답적인 사고방식이 그게 한계인 것 같습니다." 정부의 벤처 지원 정책으로 지난 2009년에만 20조 원 이상이 벤처기업들에게 지원됐는데, 왜 기술력 있는 업체들이 자금난을 겪고 있을까. 앞서 소개한 업체들은 우리나라의 기준에서는 벤처기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의 벤처기업은 특별법으로 정의돼 있습니다. <인터뷰> 이민화(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 "벤처의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해서 압축성장을 위해서 만든 제도가 바로 전 세계 최초의 벤처기업특별법입니다." 특별법에는 벤처기업을 벤처투자회사로부터 투자받은 벤처투자기업과 기업부설연구소를 보유한 연구개발기업, 그리고 기술보증기금과 중소기업진흥공단으로부터 보증이나 대출을 받은 기술평가보증기업, 기술평가대출기업 등으로 구분합니다. 지난 2010년 당시 벤처 기업은 2만 4천여 개로 2003년에 비해 3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이렇게 증가한 배경에는 금융기관에서 대출만 받으면 벤처 기업으로 인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김기완(박사/한국개발연구원) : "최근에 특히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벤처기업이 급증한 건 벤처투자기업이나 연구개발기업보다는 기술평가보증 또는 대출을 받는 기업들이 굉장히 크게 늘어난 그런 것들에 기인한 바가 크고…."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벤처 인증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술력을 평가해 벤처를 인증해 주는 것이 아니라, 국책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이나 보증만 받으면 무조건 벤처로 인정해주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민화(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 "보증을 위한 심사에서는 이 회사가 혁신 지향적인가를 따지는 게 아니고 망할 거냐, 안 망할 거냐 하는 이걸 보게 되죠. 현재 인증 제도가 잘못돼 있다는 게 그래서 잘못돼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지난해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09년부터 3년간 기술보증기금이 예비검토단계에서 보증을 거절한 4,846건 가운데, 909건이 특허 등을 보유한 기술력 있는 기업들이었고, 이들의 보증 거절 사유 중 78% 이상이 기술 외적인 이유였습니다. 특허 보유 기업인 A 주식회사에 대해 예비검토를 하면서 등급 미달 및 신용도가 취약하다는 사유로 접수조차 하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2011.3.31 기술보증기금) <인터뷰> 이진석(대표/메타마이닝(주)) : "재무제표라든가 이런 걸 봅니다. 근데 투자를 많이 하다 보면 재무제표가 나빠질 수도 있거든요. 그건 당연합니다. 뭐 그런 기업들은 다 제외 대상이 되는 거니까. 벤처가, 벤처가 아니라는 거죠." 벤처인증기업을 확인하는 홈페이지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신규업체가 공시됩니다. 지난달 벤처인증을 받은 경기도의 한 제조공장. 공시내용 중 특허 등의 기술력 지표는 제롭니다. 같은 날 벤처 인증을 받은 업체 가운데에는 고춧가루 생산업체와 브래지어 제조업체 등도 포함돼 있습니다. 모두 벤처인증과 함께 8천만 원 이상, 많게는 2억 원까지 저금리로 대출을 받았습니다. 벤처인증을 받게 되면 법인세와 소득세 감면, 사업용 재산에 대해 취득세 면제 등 다양한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일부 재무 설계사들은 중소기업들을 찾아가 권유하기도 합니다. <녹취> 기업 재무 설계사(음성대역) : "기술보증에서 8천만 원 이상을 대출받게 되면 벤처인증을 쉽게 받을 수 있거든요. 대출을 실행을 해야지만 인증을 받게 되는 구조로 돼 있다 보니까 불필요하더라도 일단 8천만 원 이상이 대출이 실행됩니다." 기술보증기금 측 입장은 다릅니다. 자금 회수에 대한 안전성이 중요한 데다가, 자신들은 기술력 평가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녹취> 박춘주(부부장/기술보증기금 보증운영부) : "저희가 보증취급할 때 사실상 회수 가능성을 보는 것은 은행에서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다만 기술력이 있고 그 기술력이 시장성이 있는지, 시장성과 사업성이 충분하다고 인정이 되면 저희들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벤처지원 정책이 융자와 보증에서 투자 위주로 변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인터뷰> 이민화(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 "융자하고 투자는 완전히 다릅니다. 융자는 그 회사가 잘 돼도 이자밖에 못 받습니다. 투자는 잘 되면 내가 투자한 것의 수십 배를 벌 수가 있죠. 그래서 10개를 투자했는데, 두 군데서 성공하면 나머지 여덟 군데 날려버린 걸 다 회복하고도 더 많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 창업 투자가인 '엔젤'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인터뷰> 박병형(소셜벤처포럼 회장) : "지금 저희가 필요한 것이 뭣이냐 하면 정말 장기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그런 환경, 즉 엔젤투자자들이 투자를 하게 되면 정부에서 어떤 세제혜택이라든가 여러 가지 어떤 정책을 주면 엔젤투자자들도 돈을 장기적으로 넣을 수가 있는 것이거든요."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창업에 나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력 있는 기업이 쓰러지고, 서류상 벤처기업의 수만 늘어가는 지금과 같은 벤처 정책이 계속된다면, 벤처의 꿈은 또 한 번 쓰라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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