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포착] 국산차 1호 포니, 문화재로 등록

입력 2013.09.05 (08:44) 수정 2013.09.0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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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여러분, '문화재'라고 하면은 어떤 것들이 떠오르세요?

최 앵커는요?

저요? 글쎄요 뭐 고궁이나 사찰도 있겠고, 무형 문화재도 있잖아요.

그쵸 우리가 사는 지금하고는 그래도 꽤 시간적인 거리가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최근 등재된 것들은 그 거리가 확 좁혀졌습니다.

노태영 기자와 더 자세한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근현대 문화재... 우선 무엇무엇이죠?

<기자 멘트>

포니자동차, 그리고 흑백텔레비전은 아직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텐데요.

불과 몇십년 전까지 사용했던 이 물건들이 문화재로 지정이 됐습니다.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까지는 아직 아니지만 근현대 산업기술 발전을 잘 보여주고, 동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만큼
공식적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을 한 겁니다.

이제는 문화재 반열에 오른 추억의 물건들 만나보시죠.

<리포트>

경기도 여주.

나즈막한 언덕 밑에 짧게는 30년부터 길게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차들이 모여 있는데요.

그런데 이때!

저 멀리서 손살같이 달려오는 차가 한 대 있습니다.

바로 포니인데요.

1970년대 후반.

서울 종로 거리에 나온 자동차의 절반이 포니일 정도였는데요.

후속 모델만 2가지가 넘었습니다.

<인터뷰> 백중길(자동차 수집가) : “1975년에 생산됐으니까 30년 넘었네요. 지금으로 말하면 대박이지. 이렇게 잘 나왔느냐 하고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포니는 1975년부터 10년간 생산된 국내 첫 양산형 자동차입니다.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당시에는 포니 두 대면 서울 시내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고가였지만 그 인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인터뷰> 백중길(자동차 수집가) : “1970년대에 자동차를 소유했으면 지금으로 말하면 부자 축에 들어갔죠. 자동차 하나 가지고 있다 하면 그 집 부자구나, 이렇게 생각했으니까.”

마흔 살이 다되가는 포니지만 꾸준한 관리로 여전히 생생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요.

투박하면서도 큼직큼직한 인테리어에다 에어컨 없이 자연풍만으로 더위를 식혀야하고, 창문을 올리고 내릴 때에도 손으로 작동을 시켜야 하는 등 당시 자동차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출시된 지 10년 만에 단종되는 바람에 이제는 부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다행히 자동차 부품공장을 운영해 부품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터뷰> 백중길(자동차 수집가) : “종로 거리에도 그렇고 어디에도 그렇고 가다 보면 길가에 서 있는 차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러면 한쪽에다 세워놓고 밀고 가고 그 시절에는 꼭 그랬어요.”

포니는 이후 한국 자동차 산업의 발판이 됐는데요.

<인터뷰> 백중길(자동차 수집가) : “우리가 디자인해서 우리가 설계해서 만든 자동차, 포니1이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죠. 뿌듯하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관리하고 있어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타자기로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고급 기술이었는데요.

덕분에 젊은 여성들이 타자 기술을 익혀 문서를 작성하는 화이트칼라 직종으로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이대로(공병우 선생 제자) : “영어에 토익 이런 시험이 있듯이 상고생들 타자수에는 몇 타를 치느냐 하는 1급, 2급 이런 급수 시험이 있었어요. 급수 자격증이 있으면 취직이 잘됐죠.”

타자기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

1970년대부터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를 겪으면서 타자기가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는데요.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까지 타자기는 문서를 작성하는 시간을 단축하는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최초의 한글타자기였던 공병우 타자기는 안과의사였던 공병우 선생이 개발했는데요.

공 선생은 1930년대 후반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을 만나면서 한글의 기계화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후 몇 년간의 노력 끝에 훈민정음 창제원리를 그대로 반영해 만든 것이 바로 세벌식 타자기.

공병우 선생은 작고 직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한글 기계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이대로(공병우 선생 제자) : “최초의 한글 타자기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공병우 박사의 그 정신, 그 뜻을 살려야 되겠다, 이제 때가 오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손바닥만한 흑백TV지만 한 대만 있다면 저녁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잔치 분위기였던 시절!

요즘 세대는 모르는 다이얼식 19인치 흑백TV입니다.

<인터뷰> 박암종(근현대사디자인박물관장) : “이 TV 가격은요. 약 6만 원 정도 됐습니다. 그 당시 쌀 26가마 정도에 해당하니까 굉장히 고가의 상품에 해당합니다만 인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혼수 1순위였던 19인치 흑백TV는 최초로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진공관식 TV인데요.

버튼이 아닌 다이얼식에, 가구를 대신해 다리까지 달린 획기적인 디자인을 선보여 그야말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쉽게 볼 수 있었던 가전제품들!

최근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재조명을 받고 있는데요.

포니를 비롯해 흑백TV와 냉장고 등은 실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한국 자동차산업과 가전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문화재청이 등록 문화재로 지정했습니다.

<인터뷰> 박암종(근현대사디자인박물관장) : “우리나라가 가전 산업의 역사가 1959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면 벌써 60년 넘어가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중요한 자료로 삼아서 제대로 보관도 하고 거기에 담긴 정신과 의미도 생각을 해봐야죠.”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기술 발전에 밀려 사라졌던 물건들!

우리 근현대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 그 가치를 다시 인정받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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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제포착] 국산차 1호 포니, 문화재로 등록
    • 입력 2013-09-05 08:48:10
    • 수정2013-09-05 10:4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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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여러분, '문화재'라고 하면은 어떤 것들이 떠오르세요?

최 앵커는요?

저요? 글쎄요 뭐 고궁이나 사찰도 있겠고, 무형 문화재도 있잖아요.

그쵸 우리가 사는 지금하고는 그래도 꽤 시간적인 거리가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최근 등재된 것들은 그 거리가 확 좁혀졌습니다.

노태영 기자와 더 자세한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근현대 문화재... 우선 무엇무엇이죠?

<기자 멘트>

포니자동차, 그리고 흑백텔레비전은 아직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텐데요.

불과 몇십년 전까지 사용했던 이 물건들이 문화재로 지정이 됐습니다.

국보나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까지는 아직 아니지만 근현대 산업기술 발전을 잘 보여주고, 동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만큼
공식적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을 한 겁니다.

이제는 문화재 반열에 오른 추억의 물건들 만나보시죠.

<리포트>

경기도 여주.

나즈막한 언덕 밑에 짧게는 30년부터 길게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차들이 모여 있는데요.

그런데 이때!

저 멀리서 손살같이 달려오는 차가 한 대 있습니다.

바로 포니인데요.

1970년대 후반.

서울 종로 거리에 나온 자동차의 절반이 포니일 정도였는데요.

후속 모델만 2가지가 넘었습니다.

<인터뷰> 백중길(자동차 수집가) : “1975년에 생산됐으니까 30년 넘었네요. 지금으로 말하면 대박이지. 이렇게 잘 나왔느냐 하고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포니는 1975년부터 10년간 생산된 국내 첫 양산형 자동차입니다.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당시에는 포니 두 대면 서울 시내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고가였지만 그 인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인터뷰> 백중길(자동차 수집가) : “1970년대에 자동차를 소유했으면 지금으로 말하면 부자 축에 들어갔죠. 자동차 하나 가지고 있다 하면 그 집 부자구나, 이렇게 생각했으니까.”

마흔 살이 다되가는 포니지만 꾸준한 관리로 여전히 생생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요.

투박하면서도 큼직큼직한 인테리어에다 에어컨 없이 자연풍만으로 더위를 식혀야하고, 창문을 올리고 내릴 때에도 손으로 작동을 시켜야 하는 등 당시 자동차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출시된 지 10년 만에 단종되는 바람에 이제는 부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다행히 자동차 부품공장을 운영해 부품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터뷰> 백중길(자동차 수집가) : “종로 거리에도 그렇고 어디에도 그렇고 가다 보면 길가에 서 있는 차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러면 한쪽에다 세워놓고 밀고 가고 그 시절에는 꼭 그랬어요.”

포니는 이후 한국 자동차 산업의 발판이 됐는데요.

<인터뷰> 백중길(자동차 수집가) : “우리가 디자인해서 우리가 설계해서 만든 자동차, 포니1이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죠. 뿌듯하잖아요. 그런 마음으로 관리하고 있어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타자기로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고급 기술이었는데요.

덕분에 젊은 여성들이 타자 기술을 익혀 문서를 작성하는 화이트칼라 직종으로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이대로(공병우 선생 제자) : “영어에 토익 이런 시험이 있듯이 상고생들 타자수에는 몇 타를 치느냐 하는 1급, 2급 이런 급수 시험이 있었어요. 급수 자격증이 있으면 취직이 잘됐죠.”

타자기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

1970년대부터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를 겪으면서 타자기가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는데요.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까지 타자기는 문서를 작성하는 시간을 단축하는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최초의 한글타자기였던 공병우 타자기는 안과의사였던 공병우 선생이 개발했는데요.

공 선생은 1930년대 후반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을 만나면서 한글의 기계화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후 몇 년간의 노력 끝에 훈민정음 창제원리를 그대로 반영해 만든 것이 바로 세벌식 타자기.

공병우 선생은 작고 직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한글 기계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이대로(공병우 선생 제자) : “최초의 한글 타자기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공병우 박사의 그 정신, 그 뜻을 살려야 되겠다, 이제 때가 오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손바닥만한 흑백TV지만 한 대만 있다면 저녁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잔치 분위기였던 시절!

요즘 세대는 모르는 다이얼식 19인치 흑백TV입니다.

<인터뷰> 박암종(근현대사디자인박물관장) : “이 TV 가격은요. 약 6만 원 정도 됐습니다. 그 당시 쌀 26가마 정도에 해당하니까 굉장히 고가의 상품에 해당합니다만 인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혼수 1순위였던 19인치 흑백TV는 최초로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진공관식 TV인데요.

버튼이 아닌 다이얼식에, 가구를 대신해 다리까지 달린 획기적인 디자인을 선보여 그야말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쉽게 볼 수 있었던 가전제품들!

최근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재조명을 받고 있는데요.

포니를 비롯해 흑백TV와 냉장고 등은 실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한국 자동차산업과 가전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문화재청이 등록 문화재로 지정했습니다.

<인터뷰> 박암종(근현대사디자인박물관장) : “우리나라가 가전 산업의 역사가 1959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면 벌써 60년 넘어가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중요한 자료로 삼아서 제대로 보관도 하고 거기에 담긴 정신과 의미도 생각을 해봐야죠.”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기술 발전에 밀려 사라졌던 물건들!

우리 근현대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 그 가치를 다시 인정받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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