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개성공단 10년…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입력 2014.06.28 (07:49) 수정 2014.06.28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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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철책을 사이에 두고 둘로 갈라진 한반도.

남북 주민이 함께 할 수 있는 한반도 유일의 ‘협력 지역’이 탄생했습니다.

<녹취> 고윤옥(북한 근로자/2004년 12월) : “진짜 50여 년 동안 갈라져 있었다가 서로 이렇게 힘을 합쳐서 하니까 정말 기쁠 따름입니다.”

남북이 함께 한 개성공단 10년, 그리고 함께 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분단 55년 만인 2000년 6월, 남북한 정상이 손을 맞잡았습니다.

두 정상은 ‘6.15 공동 선언’을 발표하고, 경제협력에 합의했습니다.

<녹취> 김대중(前 대통령) : "2000년 8월 15일 “남한의 기술과 자본, 북한의 우수한 노동력과 자원이 합쳐지면 민족 경제의 균형 발전과 대도약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남북경협사업을 추진해온 현대그룹과 북한은 개성공단 조성에 합의했습니다.

서울에서 78km, 한 시간이면 닿는 가까운 거리라는 점이 개성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녹취> KBS 9시뉴스 (2004년 6월 30일) : "북한 개성공단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돼 오늘로 시범단지 부지 조성공사가 완료됐습니다."

2004년 6월, 7대 1의 경쟁을 뚫고 선정된 국내 기업 열 다섯 곳이 개성공단에 입주했고, 이듬해 2005년, 정식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인천에 본사를 둔 자동차용 연료 펌프 생산 기업 역시 개성공단에 처음으로 입주한 15곳 기업 중 한곳입니다.

2004년 당시 임금이 연장수당을 포함해도 월 70달러 정도인 값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단 점이 개성공단의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인터뷰> 유동옥(대화연료펌프 회장/개성공단 입주) : "현재 본봉이 71달러고, 그리고 두 번째는 공장부지 값이 한 15만 원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이런 데는 한 500만원 하거든요. 그리고 세 번째는 뭐니뭐니해도 학력이 높고 우수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이직률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한 나라 거래이기 때문에 관세가 없고, 한 시간 이내 거리에서 물품이 이동이 가능한 것은 중국이나 베트남에 비해서 월등히 유리하죠.”

개성공단의 10년은 남과 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가동 2년 만인 2007년, 개성공단 누적 생산액이 1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가동 첫해 1천 491만 달러였던 연간 생산액은 7년 뒤 2012년에 4억 6천 900만 달러를 훌쩍 넘었습니다.

6천 명 정도였던 북한 근로자는 현재 5만 2천 명으로, 입주 기업도 15곳에서 125곳으로 8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북한 주민에게 지급되는 급여는 총 8천 7백만 달러, 한해 북한 정부 예산인 35억 달러의 3% 가까운 액숩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고질적인 외화난에 시달리는 북한에게 개성공단은 안정적인 외화 공급처이자 5만 명이 넘는 주민들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인터뷰> 임을출(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 “북한 근로자 52000명하고, 그 근로자에 달려있는 가족들, 보통 저희들이 20만에서 25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의 생계를 안정적으로 개성공단을 통해서 보장받는다는 점, 이게 이제 북한 경제적인 측면에서 굉장히 큰 이익을 누리는 거죠. 특히 이제 개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 경제에 미치는 어떤 긍정적인 효과가 굉장히 크다고 봐야 되겠죠.”

북한은 1991년 나선경제특구를 시작으로 경제특구 개발에 열을 올렸지만, 성공 사례는 개성공단이 유일합니다.

폐쇄적인 북한 사회에서 남한의 인프라와 운영 방식을 도입한 점이 개성공단의 성공을 이끌었단 분석입니다.

<인터뷰> 임을출(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 “왜냐하면 북한 스스로 인프라를 건설할 능력과 기술과 자본이 없었던 것이고, 또 외국 자본을 안심시킬 만한 그런 투자 환경을 만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유일하게 우리 정부에, 또는 우리 기업에 경제특구 개발과 운영을 완전히 맡겼기 때문에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봐야 되겠죠.”

이곳 통일대교를 통해 개성공단과 남한을 오가는 물량은 하루 평균 840톤이 넘습니다.

2006년 198톤에 비해 네 배 이상 늘어난 수친데요, 이처럼 개성공단은 남북한의 경제 성장은 물론 북한 사회의 변화를 일으키는 데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개성공단의 북측 관리자들이 근로자들에게 지급되던 간식 중 초코파이를 빼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루 평균 2개씩 지급되는 초코파이는 북한 근로자들에게 간식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장마당에서 남한보다 비싼 값에 거래가 되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합니다.

북한이 초코파이를 거부한 것도 남한 제품이 북한 시장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인터뷰> 유동옥(대화연료펌프 회장) : “우리가 목표 달성했을 때 인센티브 개념으로 일종의 시장 경제 도구로서 사용됐던 겁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 보니까 한 공장에서 매일 7개에서 한 10개 사이, 그러면 월 한 200개에서 250개를 타면 이것은 그 사람들한테는 말하자면 북한 시내에 가서 팔게 되면 월급보다도 더 많다는 설이 있었습니다.”

북한은 개성공단을 통해 경제특구 개발의 노하우 역시 익혀나가고 있습니다.

북한의 경제 관리와 근로자들은 남한의 생산 기술은 물론 공장관리와 회계, 인센티브 제도 같은 관리 기법도 배우고 있습니다.

숙련된 북한의 근로자들은 다른 경제 현장에 투입돼 개성공단의 성공 경험을 녹여내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근로자들을 통해 북한이 시장경제를 학습해 나가는 것입니다.

<인터뷰> 이상만(중앙대 대학원 북한개발협력학과 교수) : “결국 개혁이라는 말은 북한의 그런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시장 경제의 기능을 집어넣는 것이거든요. 그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시장 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부분인데 그런 부분에서는 개성공단에서 트레이닝 된 그 근로자와 매니저들이 큰 역할을 하리라 봅니다. 북한에 고스란히 하나의 시장 경제에 대한 하나의 노하우로 이전되고 있거든요.”

지난해 3월, 북한이 돌연 남북간 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차단시켰습니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안 결의와 한-미 연합군사훈련에 반발하며 ‘개성공단 잠정 가동 중단’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북한은 남측 체류 인원을 전원 귀환시키며 개성공단 폐쇄를 강행했습니다.

남북은 일곱 차례의 실무회담 끝에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를 채택했고, 파행 6개월 만인 지난해 9월, 개성공단이 재가동 됐습니다.

그러나 자체 상품이 없는 90% 이상의 입주 기업들은 거래처 상당수를 잃게 됐습니다.

<인터뷰> 유창근(개성공단기업협회 부대표) : “90% 이상이 임가공에 의존하는 기업들이다보니까 자체적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많은 기업들이 바이어로부터 신뢰를 잃었었기 때문에 바이어가 원하는 것은 개성공단 하나만 가지고는 정말 어렵다."

개성공단의 위기는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찾아왔습니다.

지난 2008년, 북한은 남한의 대북정책에 반발하며 이른바 ‘12.1 조치’를 단행합니다.

하루 육로 통행 횟수를 3차례로 줄이고, 출입 인원과 체류 기간까지 제한에 들어갔습니다.

한미합동군사훈련 기간에는 3차례 육로를 차단하는 등 12.1조치는 7개월 간 계속됐습니다.

그리고 2010년, 우리 정부가 천안함 관련 5.24조치를 발표하면서 개성공단의 신규 투자가 금지됐습니다.

남북관계에 따라 개성공단에 위기가 찾아오면서 기업들은 불안감을 토로합니다.

<인터뷰> 유동옥(대화연료펌프 회장) : “개성공단을 가령 자율적인 것에 맡기지 않고 규제원을 얼마로 줄여라, 하루에 통행 출입 개수를 줄여라, 그건 남쪽에서 몇 번하고 북쪽에 있었는데 정치 군사적인 어느 상황 때문에 우리 개성공단을 전개적인 관점으로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면 자체 경쟁력이 굉장히 훌륭한 공단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영향을 받았던 것이 좀 어려웠습니다.”

얼마 전 섬유 기계용 바늘을 판매하는 독일 기업이 개성공단 내 영업점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개성공단 내 첫 번째 외국 기업인 것입니다.

한국산 신발을 판매하는 또 다른 독일 기업도 개성공단 진출을 검토 중입니다.

개성공단 올해 근로자의 임금은 월 140달러 정도로 중국 칭다오 공단이나 베트남 떤투언 공단에 비해 50달러 이상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녹취> 에르틀(독일 '미앤프렌즈'사 대표) : "한국은 우수한 제품을 만들지만 임금이 비싸기 때문에 중. 장기적 사업 계획에 개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개성공단의 국제화는 북한의 돌발 행동을 줄이고, 기업 환경을 안정화시키는 데 안전장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나 해외 기업 진출을 위해선 선결 과제가 있습니다.

통신, 통행, 통관을 아우르는 이른바 3통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북은 지난 26일, 3통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6개월 만에 남북공동관리위원회를 개최했습니다.

통신, 통행, 통관의 3통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해외 기업의 투자와 자본을 유치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상만(중앙대 대학원 북한개발협력학과 교수) : “통행, 통신, 통관이죠. 이런 것들이 보장이 됨으로써, 그 다음에 또 우리가 투자 보장 협정 같은 게 되어가지고 우리가 북한이 아니라 어느 외국 어디라도 선진국에 가서 우리가 기업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런 제도적 장치가 이뤄지는 것, 외국 기업이 개성공단에서 투자를 하고 기업 활동을 하게 되면 지난번 같은 개성공단의 중단 사태가 남북 관계 때문에 개성공단이 중단되는 사태는 막을 수가 있다는 거죠.”

남북관계가 경색된 가운데서도 개성공단은 남북의 유일한 대화 창구이자, 경제 통합의 실험대였습니다.

남북이 10년 간 지켜온 개성공단이 원래 목표했던 입주기업 2천개, 고용인력 35만명을 달성하고 경제 통일을 넘어 한반도 통일의 발판이 될 수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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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한반도] 개성공단 10년…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 입력 2014-06-28 08:31:07
    • 수정2014-06-28 08:51:42
    남북의 창
<리포트>

철책을 사이에 두고 둘로 갈라진 한반도.

남북 주민이 함께 할 수 있는 한반도 유일의 ‘협력 지역’이 탄생했습니다.

<녹취> 고윤옥(북한 근로자/2004년 12월) : “진짜 50여 년 동안 갈라져 있었다가 서로 이렇게 힘을 합쳐서 하니까 정말 기쁠 따름입니다.”

남북이 함께 한 개성공단 10년, 그리고 함께 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분단 55년 만인 2000년 6월, 남북한 정상이 손을 맞잡았습니다.

두 정상은 ‘6.15 공동 선언’을 발표하고, 경제협력에 합의했습니다.

<녹취> 김대중(前 대통령) : "2000년 8월 15일 “남한의 기술과 자본, 북한의 우수한 노동력과 자원이 합쳐지면 민족 경제의 균형 발전과 대도약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남북경협사업을 추진해온 현대그룹과 북한은 개성공단 조성에 합의했습니다.

서울에서 78km, 한 시간이면 닿는 가까운 거리라는 점이 개성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녹취> KBS 9시뉴스 (2004년 6월 30일) : "북한 개성공단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돼 오늘로 시범단지 부지 조성공사가 완료됐습니다."

2004년 6월, 7대 1의 경쟁을 뚫고 선정된 국내 기업 열 다섯 곳이 개성공단에 입주했고, 이듬해 2005년, 정식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인천에 본사를 둔 자동차용 연료 펌프 생산 기업 역시 개성공단에 처음으로 입주한 15곳 기업 중 한곳입니다.

2004년 당시 임금이 연장수당을 포함해도 월 70달러 정도인 값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단 점이 개성공단의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인터뷰> 유동옥(대화연료펌프 회장/개성공단 입주) : "현재 본봉이 71달러고, 그리고 두 번째는 공장부지 값이 한 15만 원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이런 데는 한 500만원 하거든요. 그리고 세 번째는 뭐니뭐니해도 학력이 높고 우수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이직률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는 한 나라 거래이기 때문에 관세가 없고, 한 시간 이내 거리에서 물품이 이동이 가능한 것은 중국이나 베트남에 비해서 월등히 유리하죠.”

개성공단의 10년은 남과 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가동 2년 만인 2007년, 개성공단 누적 생산액이 1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가동 첫해 1천 491만 달러였던 연간 생산액은 7년 뒤 2012년에 4억 6천 900만 달러를 훌쩍 넘었습니다.

6천 명 정도였던 북한 근로자는 현재 5만 2천 명으로, 입주 기업도 15곳에서 125곳으로 8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북한 주민에게 지급되는 급여는 총 8천 7백만 달러, 한해 북한 정부 예산인 35억 달러의 3% 가까운 액숩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고질적인 외화난에 시달리는 북한에게 개성공단은 안정적인 외화 공급처이자 5만 명이 넘는 주민들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인터뷰> 임을출(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 “북한 근로자 52000명하고, 그 근로자에 달려있는 가족들, 보통 저희들이 20만에서 25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의 생계를 안정적으로 개성공단을 통해서 보장받는다는 점, 이게 이제 북한 경제적인 측면에서 굉장히 큰 이익을 누리는 거죠. 특히 이제 개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 경제에 미치는 어떤 긍정적인 효과가 굉장히 크다고 봐야 되겠죠.”

북한은 1991년 나선경제특구를 시작으로 경제특구 개발에 열을 올렸지만, 성공 사례는 개성공단이 유일합니다.

폐쇄적인 북한 사회에서 남한의 인프라와 운영 방식을 도입한 점이 개성공단의 성공을 이끌었단 분석입니다.

<인터뷰> 임을출(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 “왜냐하면 북한 스스로 인프라를 건설할 능력과 기술과 자본이 없었던 것이고, 또 외국 자본을 안심시킬 만한 그런 투자 환경을 만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유일하게 우리 정부에, 또는 우리 기업에 경제특구 개발과 운영을 완전히 맡겼기 때문에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봐야 되겠죠.”

이곳 통일대교를 통해 개성공단과 남한을 오가는 물량은 하루 평균 840톤이 넘습니다.

2006년 198톤에 비해 네 배 이상 늘어난 수친데요, 이처럼 개성공단은 남북한의 경제 성장은 물론 북한 사회의 변화를 일으키는 데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개성공단의 북측 관리자들이 근로자들에게 지급되던 간식 중 초코파이를 빼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루 평균 2개씩 지급되는 초코파이는 북한 근로자들에게 간식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장마당에서 남한보다 비싼 값에 거래가 되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합니다.

북한이 초코파이를 거부한 것도 남한 제품이 북한 시장에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인터뷰> 유동옥(대화연료펌프 회장) : “우리가 목표 달성했을 때 인센티브 개념으로 일종의 시장 경제 도구로서 사용됐던 겁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 보니까 한 공장에서 매일 7개에서 한 10개 사이, 그러면 월 한 200개에서 250개를 타면 이것은 그 사람들한테는 말하자면 북한 시내에 가서 팔게 되면 월급보다도 더 많다는 설이 있었습니다.”

북한은 개성공단을 통해 경제특구 개발의 노하우 역시 익혀나가고 있습니다.

북한의 경제 관리와 근로자들은 남한의 생산 기술은 물론 공장관리와 회계, 인센티브 제도 같은 관리 기법도 배우고 있습니다.

숙련된 북한의 근로자들은 다른 경제 현장에 투입돼 개성공단의 성공 경험을 녹여내고 있습니다.

개성공단 근로자들을 통해 북한이 시장경제를 학습해 나가는 것입니다.

<인터뷰> 이상만(중앙대 대학원 북한개발협력학과 교수) : “결국 개혁이라는 말은 북한의 그런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시장 경제의 기능을 집어넣는 것이거든요. 그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시장 경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부분인데 그런 부분에서는 개성공단에서 트레이닝 된 그 근로자와 매니저들이 큰 역할을 하리라 봅니다. 북한에 고스란히 하나의 시장 경제에 대한 하나의 노하우로 이전되고 있거든요.”

지난해 3월, 북한이 돌연 남북간 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차단시켰습니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안 결의와 한-미 연합군사훈련에 반발하며 ‘개성공단 잠정 가동 중단’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북한은 남측 체류 인원을 전원 귀환시키며 개성공단 폐쇄를 강행했습니다.

남북은 일곱 차례의 실무회담 끝에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를 채택했고, 파행 6개월 만인 지난해 9월, 개성공단이 재가동 됐습니다.

그러나 자체 상품이 없는 90% 이상의 입주 기업들은 거래처 상당수를 잃게 됐습니다.

<인터뷰> 유창근(개성공단기업협회 부대표) : “90% 이상이 임가공에 의존하는 기업들이다보니까 자체적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많은 기업들이 바이어로부터 신뢰를 잃었었기 때문에 바이어가 원하는 것은 개성공단 하나만 가지고는 정말 어렵다."

개성공단의 위기는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찾아왔습니다.

지난 2008년, 북한은 남한의 대북정책에 반발하며 이른바 ‘12.1 조치’를 단행합니다.

하루 육로 통행 횟수를 3차례로 줄이고, 출입 인원과 체류 기간까지 제한에 들어갔습니다.

한미합동군사훈련 기간에는 3차례 육로를 차단하는 등 12.1조치는 7개월 간 계속됐습니다.

그리고 2010년, 우리 정부가 천안함 관련 5.24조치를 발표하면서 개성공단의 신규 투자가 금지됐습니다.

남북관계에 따라 개성공단에 위기가 찾아오면서 기업들은 불안감을 토로합니다.

<인터뷰> 유동옥(대화연료펌프 회장) : “개성공단을 가령 자율적인 것에 맡기지 않고 규제원을 얼마로 줄여라, 하루에 통행 출입 개수를 줄여라, 그건 남쪽에서 몇 번하고 북쪽에 있었는데 정치 군사적인 어느 상황 때문에 우리 개성공단을 전개적인 관점으로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면 자체 경쟁력이 굉장히 훌륭한 공단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영향을 받았던 것이 좀 어려웠습니다.”

얼마 전 섬유 기계용 바늘을 판매하는 독일 기업이 개성공단 내 영업점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개성공단 내 첫 번째 외국 기업인 것입니다.

한국산 신발을 판매하는 또 다른 독일 기업도 개성공단 진출을 검토 중입니다.

개성공단 올해 근로자의 임금은 월 140달러 정도로 중국 칭다오 공단이나 베트남 떤투언 공단에 비해 50달러 이상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녹취> 에르틀(독일 '미앤프렌즈'사 대표) : "한국은 우수한 제품을 만들지만 임금이 비싸기 때문에 중. 장기적 사업 계획에 개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개성공단의 국제화는 북한의 돌발 행동을 줄이고, 기업 환경을 안정화시키는 데 안전장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나 해외 기업 진출을 위해선 선결 과제가 있습니다.

통신, 통행, 통관을 아우르는 이른바 3통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북은 지난 26일, 3통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6개월 만에 남북공동관리위원회를 개최했습니다.

통신, 통행, 통관의 3통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해외 기업의 투자와 자본을 유치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상만(중앙대 대학원 북한개발협력학과 교수) : “통행, 통신, 통관이죠. 이런 것들이 보장이 됨으로써, 그 다음에 또 우리가 투자 보장 협정 같은 게 되어가지고 우리가 북한이 아니라 어느 외국 어디라도 선진국에 가서 우리가 기업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런 제도적 장치가 이뤄지는 것, 외국 기업이 개성공단에서 투자를 하고 기업 활동을 하게 되면 지난번 같은 개성공단의 중단 사태가 남북 관계 때문에 개성공단이 중단되는 사태는 막을 수가 있다는 거죠.”

남북관계가 경색된 가운데서도 개성공단은 남북의 유일한 대화 창구이자, 경제 통합의 실험대였습니다.

남북이 10년 간 지켜온 개성공단이 원래 목표했던 입주기업 2천개, 고용인력 35만명을 달성하고 경제 통일을 넘어 한반도 통일의 발판이 될 수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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