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년] ③ 돌아오지 못한 9명, 그리고 팽목항을 지키는 사람들
입력 2015.04.08 (06:05)
수정 2015.04.0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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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는 새처럼 너희도 하늘을 훨훨 날아가렴.”
지난 1일 팽목항을 찾은 민병춘(61)씨는 노란 리본을 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민 씨는 회갑을 맞아 친구들과 여행 중 이곳을 찾았다. 민 씨와 함께 온 박현숙(61)씨는 “직접 와서 보니 가슴이 미어지네요. 아직 시신도 못 찾은 가족도 있다던데…”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 떠나지 못하는 가족들
“하루 빨리 인양돼야 동생도 찾고 금쪽같은 조카도 찾지.”
권오복(62)씨는 오늘도 동생과 조카를 기다린다. 홍매화가 만개한 4월이지만, 팽목항의 바람은 코끝을 세차게 때리며 날카롭게 불어온다. 소주 한 모금으로 추위를 달래고, 약 한 봉지로 쓰린 속을 달래보지만, 그보다 힘든 건 익숙해지지 않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벌써 1년이다. 지난해 4월 사고 소식을 접하고 한걸음에 달려온 후, 다시 봄을 맞았다.
동생 재근 씨 가족은 새로운 꿈을 품고 제주행 배에 몸을 실었다가 사고를 당했다. 현장에서 막내 조카는 구조됐지만, 아직 동생과 조카 혁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재근 씨 부인 한윤지 씨는 사고 37일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권 씨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제수한테 서울에서 새 삶을 산다고 한(漢) 씨로 지었는데 이렇게 황망하게 가버렸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울며 팽목항을 지켰던 실종자 가족들은 하나둘 떠나고, 이제는 권 씨 홀로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을 기다리고 있다.
홀로 이곳을 지키는 것이 힘들진 않았을까?
권 씨는 “말로 한들 다 이해 할 수 있겠느냐”며 술 한 모금을 삼킨다. “여기 있느라 가족도 돌보지 못하고, 멀쩡히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게 됐다”면서도 “이제 실업급여도 끝났고,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지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7남매 중, 유독 사이가 좋았던 형제였다. “동생이 마흔이 넘어 가정도 꾸리고 자식도 봤다. 이제 좀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제주도로 간다고 했는데….”
권 씨는 말을 잊지 못했다. 홀로 남은 조카는 여전히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를 기다리고 있다. 어린 조카를 보살피고 있는 권 씨의 동생 권정순(52)씨는 “아이는 죽음을 모른다”며 “엄마와 아빠는 언제 오느냐고 물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이어 “언론의 관심이 부담스럽고 겁난다”며 “아이를 안전하게 잘 키울 수 있도록 보호해달라”고 당부했다.
이튿날 다시 만난 권오복 씨는 급히 생각난 것이 있다며 다급한 목소리다. 동생이 2011년 KBS에서 다문화가정 합동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사진을 꼭 좀 찾아달라는 부탁이다.
“동생이 결혼식을 못 올리고 살았는데, 아내에게 선물해준다고 사연을 써서 보냈더라고. 어린 조카들을 양손에 잡고 결혼식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 2011년 KBS 다문화가정 합동결혼식 당시 권재근 씨 부부 모습
권 씨는 오늘도 서너 평 남짓한 방에서 홀로 동생과 조카를 기다린다. 기나긴 정적을 깨워주는 것은 휴대전화 메시지 알림 소리였다. ‘이쁜 아내’라고 저장된 발신인은 홀로 남겨진 남편에게 조카들 사진을 보내왔다. 조카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살펴보는 권 씨 뒤로 잇몸 약과 위장약이 담긴 약봉지가 보였다.
가족들은 권 씨가 가장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이곳을 지키는 이유를 물었다.
권 씨는 “나까지 떠나면 아직 못 찾은 사람들은 누가 기다려주겠느냐”며 “하루빨리 동생 시신이라도 찾게 해달라”고 했다. 총 476명의 세월호 탑승자 가운데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는 9명이다. 단원고 학생 4명과 교사 2명, 일반인으로는 권 씨 부자(재근, 혁규)와 이영숙 씨가 있다.
◆ “아이에게 미안해서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럽다.”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실종자 가족만이 아니다. 단원고 조찬민 학생 아버지 인호(52)씨는 “아이의 시신은 사고 33일 만에 돌아왔지만, 아이한테 미안해서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며 이곳을 지키고 있다.
조 씨는 10여 년 전 아내와 이혼하고 아이들과 떨어져 지냈다. 조 씨는 “아비가 돼서,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시간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며 고개를 숙였다. 반월공단에서 주·야간 교대 근무를 했던 조 씨는 그 약속마저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아들 찬민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사고 두 달 전인 지난해 2월이다. 조 씨는 “아이가 회를 좋아해서 같이 회를 먹고 영화를 보러 갔는데, 원했던 영화는 자리가 없어 못 봤다”며 아이와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조 씨는 안산 집에 올라가기도 하고, 광화문 집회도 참석했지만, 그마저도 마음이 편치 않아 발걸음이 자꾸만 이곳을 향했다. 다니던 회사는 그만뒀다. 얼마 전 14일 치 실업급여가 마지막으로 입금됐다.
자원봉사자들이 떠난 팽목항에는 할 일이 많다. 조 씨는 쓰레기를 치우고, 주변 정리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낮에는 오가는 사람도 있어서 그나마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밤이 되면 찬민이 생각이 더 많이 나죠."
조 씨는 슬퍼서, 괴로워서, 그리고 미안해서 한 잔씩 넘기던 술이 부쩍 늘었다.
이날(2일), 서울 광화문과 동시에 팽목항에서 삭발식에 참석한 조 씨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매서운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려 보내던 아빠는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반복했다.
◆ “아들이 회갑잔치 해준다고 했는데…”
▲ 팽목항에 마련된 합동분향소
단원고 홍순영 학생 아버지 홍종욱(58) 씨는 오랜만에 팽목항을 찾았다. 홍 씨는 건강이 편치 않아 자주 찾지 못했다.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던 홍 씨의 눈가는 이내 촉촉해졌고,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휴. 저기에서 어떻게…”
이어지지 못한 말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홍 씨는 곁에 앉은 기자에게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아이가 엄청나게 효자였다”고 말을 꺼냈다. 당신은 순영이가 4살 때 건강이 나빠져 아이와 제대로 놀아주지 못했다며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홍 씨는 생각이 났다는 듯이 지갑에서 다른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이번에는 순영이가 13살 터울의 누나 결혼식 때 찍었던 사진이다. 코팅까지 해서 간직하던 사진을 보던 아버지는 또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58년생이라, 여기 있는 부모 중에는 나이가 많은 편이다. 순영이가 나중에 회갑잔치 해주겠다고 했었는데 그놈이 가버렸어. 나만 남았네.“
홍 씨 부부는 사고 이후 교회를 다시 찾았다. 아이가 했던 말이 가슴에 남아서다. 순영이는 수학여행을 가기 전 엄마에게 “내년부터 교회에 나가자”고 했단다. 홍 씨는 아들의 말이 가슴에 맺혀 다시 주일마다 교회를 찾고 있다.
아직 순영이의 옷과 방은 안산 집에 그대로 있다. 분향소에서 만난 순영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손에 브이를 그린 채 활짝 웃고 있다. 엄마 아빠에게 보여줬던 그 미소 그대로.
◆ 팽목 식당의 삼시 세끼
▲ 팽목항의 식당 옆, 진도 주민이 희생자 가족을 위해 기증한 진돗개 ‘팽’이와 길고양이 ‘팽목’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팽목항에는 빈 공간이 늘어났다. 비좁았던 자원봉사자 쉼터를 이제는 홀로 지키는 이가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정 모 씨는 지난해 세월호 사고 뒤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7월 이곳에 내려와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 씨는 팽목 식당을 지키고 있다. 정 씨는 피해자 가족들의 삼시 세끼를 담당하고 있다.
일과를 물었다. 아침 6시 30분이면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7시부터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나면, 설거지하고 점심 준비를 한다. 점심상까지 치우면 잠시 여유가 생긴다. 유가족이 많았을 때는 같이 울고 웃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정 씨는“당시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며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가족들의 사연은 아프고 힘들다. 그들을 곁에서 바라보는 자원봉사자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된다. 정 씨는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그 아픔을 나누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자 사명”이라고 말했다.
여름과 겨울, 그리고 봄까지 세 번의 계절을 맞는 동안 요리에 소질이 없던 남자는 제법 실력이 늘었다.
정 씨는 이곳은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고 설명했다. “모두 아픈 사람들끼리 모였지만, 조금 덜 아픈 사람, 여전히 아픈 사람, 나만 아픈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상처를 품고 있다”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사고 1년을 맞는 지금, 세월호 희생자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 씨는 “지금은 관심과 응원이 필요한 시기”라며 “여전히 이분들 마음에 귀 기울여주는 자세, 이거 하나면 된다"고 말했다.
[연관 기사]
☞ [세월호 참사 1년] ① 생존자들 “눈만 감으면 악몽, 수면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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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팽목항을 찾은 민병춘(61)씨는 노란 리본을 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민 씨는 회갑을 맞아 친구들과 여행 중 이곳을 찾았다. 민 씨와 함께 온 박현숙(61)씨는 “직접 와서 보니 가슴이 미어지네요. 아직 시신도 못 찾은 가족도 있다던데…”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 떠나지 못하는 가족들
“하루 빨리 인양돼야 동생도 찾고 금쪽같은 조카도 찾지.”
권오복(62)씨는 오늘도 동생과 조카를 기다린다. 홍매화가 만개한 4월이지만, 팽목항의 바람은 코끝을 세차게 때리며 날카롭게 불어온다. 소주 한 모금으로 추위를 달래고, 약 한 봉지로 쓰린 속을 달래보지만, 그보다 힘든 건 익숙해지지 않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벌써 1년이다. 지난해 4월 사고 소식을 접하고 한걸음에 달려온 후, 다시 봄을 맞았다.
동생 재근 씨 가족은 새로운 꿈을 품고 제주행 배에 몸을 실었다가 사고를 당했다. 현장에서 막내 조카는 구조됐지만, 아직 동생과 조카 혁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재근 씨 부인 한윤지 씨는 사고 37일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권 씨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제수한테 서울에서 새 삶을 산다고 한(漢) 씨로 지었는데 이렇게 황망하게 가버렸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울며 팽목항을 지켰던 실종자 가족들은 하나둘 떠나고, 이제는 권 씨 홀로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을 기다리고 있다.
홀로 이곳을 지키는 것이 힘들진 않았을까?
권 씨는 “말로 한들 다 이해 할 수 있겠느냐”며 술 한 모금을 삼킨다. “여기 있느라 가족도 돌보지 못하고, 멀쩡히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게 됐다”면서도 “이제 실업급여도 끝났고,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지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7남매 중, 유독 사이가 좋았던 형제였다. “동생이 마흔이 넘어 가정도 꾸리고 자식도 봤다. 이제 좀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제주도로 간다고 했는데….”
권 씨는 말을 잊지 못했다. 홀로 남은 조카는 여전히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를 기다리고 있다. 어린 조카를 보살피고 있는 권 씨의 동생 권정순(52)씨는 “아이는 죽음을 모른다”며 “엄마와 아빠는 언제 오느냐고 물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이어 “언론의 관심이 부담스럽고 겁난다”며 “아이를 안전하게 잘 키울 수 있도록 보호해달라”고 당부했다.
이튿날 다시 만난 권오복 씨는 급히 생각난 것이 있다며 다급한 목소리다. 동생이 2011년 KBS에서 다문화가정 합동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사진을 꼭 좀 찾아달라는 부탁이다.
“동생이 결혼식을 못 올리고 살았는데, 아내에게 선물해준다고 사연을 써서 보냈더라고. 어린 조카들을 양손에 잡고 결혼식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 2011년 KBS 다문화가정 합동결혼식 당시 권재근 씨 부부 모습
권 씨는 오늘도 서너 평 남짓한 방에서 홀로 동생과 조카를 기다린다. 기나긴 정적을 깨워주는 것은 휴대전화 메시지 알림 소리였다. ‘이쁜 아내’라고 저장된 발신인은 홀로 남겨진 남편에게 조카들 사진을 보내왔다. 조카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살펴보는 권 씨 뒤로 잇몸 약과 위장약이 담긴 약봉지가 보였다.
가족들은 권 씨가 가장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이곳을 지키는 이유를 물었다.
권 씨는 “나까지 떠나면 아직 못 찾은 사람들은 누가 기다려주겠느냐”며 “하루빨리 동생 시신이라도 찾게 해달라”고 했다. 총 476명의 세월호 탑승자 가운데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는 9명이다. 단원고 학생 4명과 교사 2명, 일반인으로는 권 씨 부자(재근, 혁규)와 이영숙 씨가 있다.
◆ “아이에게 미안해서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럽다.”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실종자 가족만이 아니다. 단원고 조찬민 학생 아버지 인호(52)씨는 “아이의 시신은 사고 33일 만에 돌아왔지만, 아이한테 미안해서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며 이곳을 지키고 있다.
조 씨는 10여 년 전 아내와 이혼하고 아이들과 떨어져 지냈다. 조 씨는 “아비가 돼서,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시간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며 고개를 숙였다. 반월공단에서 주·야간 교대 근무를 했던 조 씨는 그 약속마저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아들 찬민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사고 두 달 전인 지난해 2월이다. 조 씨는 “아이가 회를 좋아해서 같이 회를 먹고 영화를 보러 갔는데, 원했던 영화는 자리가 없어 못 봤다”며 아이와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조 씨는 안산 집에 올라가기도 하고, 광화문 집회도 참석했지만, 그마저도 마음이 편치 않아 발걸음이 자꾸만 이곳을 향했다. 다니던 회사는 그만뒀다. 얼마 전 14일 치 실업급여가 마지막으로 입금됐다.
자원봉사자들이 떠난 팽목항에는 할 일이 많다. 조 씨는 쓰레기를 치우고, 주변 정리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낮에는 오가는 사람도 있어서 그나마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밤이 되면 찬민이 생각이 더 많이 나죠."
조 씨는 슬퍼서, 괴로워서, 그리고 미안해서 한 잔씩 넘기던 술이 부쩍 늘었다.
이날(2일), 서울 광화문과 동시에 팽목항에서 삭발식에 참석한 조 씨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매서운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려 보내던 아빠는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반복했다.
◆ “아들이 회갑잔치 해준다고 했는데…”
▲ 팽목항에 마련된 합동분향소
단원고 홍순영 학생 아버지 홍종욱(58) 씨는 오랜만에 팽목항을 찾았다. 홍 씨는 건강이 편치 않아 자주 찾지 못했다.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던 홍 씨의 눈가는 이내 촉촉해졌고,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휴. 저기에서 어떻게…”
이어지지 못한 말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홍 씨는 곁에 앉은 기자에게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아이가 엄청나게 효자였다”고 말을 꺼냈다. 당신은 순영이가 4살 때 건강이 나빠져 아이와 제대로 놀아주지 못했다며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홍 씨는 생각이 났다는 듯이 지갑에서 다른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이번에는 순영이가 13살 터울의 누나 결혼식 때 찍었던 사진이다. 코팅까지 해서 간직하던 사진을 보던 아버지는 또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58년생이라, 여기 있는 부모 중에는 나이가 많은 편이다. 순영이가 나중에 회갑잔치 해주겠다고 했었는데 그놈이 가버렸어. 나만 남았네.“
홍 씨 부부는 사고 이후 교회를 다시 찾았다. 아이가 했던 말이 가슴에 남아서다. 순영이는 수학여행을 가기 전 엄마에게 “내년부터 교회에 나가자”고 했단다. 홍 씨는 아들의 말이 가슴에 맺혀 다시 주일마다 교회를 찾고 있다.
아직 순영이의 옷과 방은 안산 집에 그대로 있다. 분향소에서 만난 순영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손에 브이를 그린 채 활짝 웃고 있다. 엄마 아빠에게 보여줬던 그 미소 그대로.
◆ 팽목 식당의 삼시 세끼
▲ 팽목항의 식당 옆, 진도 주민이 희생자 가족을 위해 기증한 진돗개 ‘팽’이와 길고양이 ‘팽목’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팽목항에는 빈 공간이 늘어났다. 비좁았던 자원봉사자 쉼터를 이제는 홀로 지키는 이가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정 모 씨는 지난해 세월호 사고 뒤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7월 이곳에 내려와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 씨는 팽목 식당을 지키고 있다. 정 씨는 피해자 가족들의 삼시 세끼를 담당하고 있다.
일과를 물었다. 아침 6시 30분이면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7시부터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나면, 설거지하고 점심 준비를 한다. 점심상까지 치우면 잠시 여유가 생긴다. 유가족이 많았을 때는 같이 울고 웃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정 씨는“당시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며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가족들의 사연은 아프고 힘들다. 그들을 곁에서 바라보는 자원봉사자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된다. 정 씨는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그 아픔을 나누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자 사명”이라고 말했다.
여름과 겨울, 그리고 봄까지 세 번의 계절을 맞는 동안 요리에 소질이 없던 남자는 제법 실력이 늘었다.
정 씨는 이곳은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고 설명했다. “모두 아픈 사람들끼리 모였지만, 조금 덜 아픈 사람, 여전히 아픈 사람, 나만 아픈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상처를 품고 있다”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사고 1년을 맞는 지금, 세월호 희생자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 씨는 “지금은 관심과 응원이 필요한 시기”라며 “여전히 이분들 마음에 귀 기울여주는 자세, 이거 하나면 된다"고 말했다.
[연관 기사]
☞ [세월호 참사 1년] ① 생존자들 “눈만 감으면 악몽, 수면제로…”
☞ [세월호 참사 1년] ② 무관심·경제적 어려움에 두번 우는 생존자들
☞ [세월호 참사 1년] ③ 돌아오지 못한 9명, 그리고 팽목항을 지키는 사람들
☞ [세월호 참사 1년] ④ “아직도 하루 손님 1명도 안 오기도”…진도 주민들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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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1년] ③ 돌아오지 못한 9명, 그리고 팽목항을 지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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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5-04-08 06:05:58
- 수정2015-04-09 08:00:21
“여기 있는 새처럼 너희도 하늘을 훨훨 날아가렴.”
지난 1일 팽목항을 찾은 민병춘(61)씨는 노란 리본을 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민 씨는 회갑을 맞아 친구들과 여행 중 이곳을 찾았다. 민 씨와 함께 온 박현숙(61)씨는 “직접 와서 보니 가슴이 미어지네요. 아직 시신도 못 찾은 가족도 있다던데…”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 떠나지 못하는 가족들
“하루 빨리 인양돼야 동생도 찾고 금쪽같은 조카도 찾지.”
권오복(62)씨는 오늘도 동생과 조카를 기다린다. 홍매화가 만개한 4월이지만, 팽목항의 바람은 코끝을 세차게 때리며 날카롭게 불어온다. 소주 한 모금으로 추위를 달래고, 약 한 봉지로 쓰린 속을 달래보지만, 그보다 힘든 건 익숙해지지 않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벌써 1년이다. 지난해 4월 사고 소식을 접하고 한걸음에 달려온 후, 다시 봄을 맞았다.
동생 재근 씨 가족은 새로운 꿈을 품고 제주행 배에 몸을 실었다가 사고를 당했다. 현장에서 막내 조카는 구조됐지만, 아직 동생과 조카 혁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재근 씨 부인 한윤지 씨는 사고 37일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권 씨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제수한테 서울에서 새 삶을 산다고 한(漢) 씨로 지었는데 이렇게 황망하게 가버렸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울며 팽목항을 지켰던 실종자 가족들은 하나둘 떠나고, 이제는 권 씨 홀로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을 기다리고 있다.
홀로 이곳을 지키는 것이 힘들진 않았을까?
권 씨는 “말로 한들 다 이해 할 수 있겠느냐”며 술 한 모금을 삼킨다. “여기 있느라 가족도 돌보지 못하고, 멀쩡히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게 됐다”면서도 “이제 실업급여도 끝났고,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지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7남매 중, 유독 사이가 좋았던 형제였다. “동생이 마흔이 넘어 가정도 꾸리고 자식도 봤다. 이제 좀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제주도로 간다고 했는데….”
권 씨는 말을 잊지 못했다. 홀로 남은 조카는 여전히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를 기다리고 있다. 어린 조카를 보살피고 있는 권 씨의 동생 권정순(52)씨는 “아이는 죽음을 모른다”며 “엄마와 아빠는 언제 오느냐고 물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이어 “언론의 관심이 부담스럽고 겁난다”며 “아이를 안전하게 잘 키울 수 있도록 보호해달라”고 당부했다.
이튿날 다시 만난 권오복 씨는 급히 생각난 것이 있다며 다급한 목소리다. 동생이 2011년 KBS에서 다문화가정 합동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사진을 꼭 좀 찾아달라는 부탁이다.
“동생이 결혼식을 못 올리고 살았는데, 아내에게 선물해준다고 사연을 써서 보냈더라고. 어린 조카들을 양손에 잡고 결혼식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 2011년 KBS 다문화가정 합동결혼식 당시 권재근 씨 부부 모습
권 씨는 오늘도 서너 평 남짓한 방에서 홀로 동생과 조카를 기다린다. 기나긴 정적을 깨워주는 것은 휴대전화 메시지 알림 소리였다. ‘이쁜 아내’라고 저장된 발신인은 홀로 남겨진 남편에게 조카들 사진을 보내왔다. 조카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살펴보는 권 씨 뒤로 잇몸 약과 위장약이 담긴 약봉지가 보였다.
가족들은 권 씨가 가장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이곳을 지키는 이유를 물었다.
권 씨는 “나까지 떠나면 아직 못 찾은 사람들은 누가 기다려주겠느냐”며 “하루빨리 동생 시신이라도 찾게 해달라”고 했다. 총 476명의 세월호 탑승자 가운데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는 9명이다. 단원고 학생 4명과 교사 2명, 일반인으로는 권 씨 부자(재근, 혁규)와 이영숙 씨가 있다.
◆ “아이에게 미안해서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럽다.”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실종자 가족만이 아니다. 단원고 조찬민 학생 아버지 인호(52)씨는 “아이의 시신은 사고 33일 만에 돌아왔지만, 아이한테 미안해서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며 이곳을 지키고 있다.
조 씨는 10여 년 전 아내와 이혼하고 아이들과 떨어져 지냈다. 조 씨는 “아비가 돼서,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시간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며 고개를 숙였다. 반월공단에서 주·야간 교대 근무를 했던 조 씨는 그 약속마저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아들 찬민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사고 두 달 전인 지난해 2월이다. 조 씨는 “아이가 회를 좋아해서 같이 회를 먹고 영화를 보러 갔는데, 원했던 영화는 자리가 없어 못 봤다”며 아이와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조 씨는 안산 집에 올라가기도 하고, 광화문 집회도 참석했지만, 그마저도 마음이 편치 않아 발걸음이 자꾸만 이곳을 향했다. 다니던 회사는 그만뒀다. 얼마 전 14일 치 실업급여가 마지막으로 입금됐다.
자원봉사자들이 떠난 팽목항에는 할 일이 많다. 조 씨는 쓰레기를 치우고, 주변 정리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낮에는 오가는 사람도 있어서 그나마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밤이 되면 찬민이 생각이 더 많이 나죠."
조 씨는 슬퍼서, 괴로워서, 그리고 미안해서 한 잔씩 넘기던 술이 부쩍 늘었다.
이날(2일), 서울 광화문과 동시에 팽목항에서 삭발식에 참석한 조 씨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매서운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려 보내던 아빠는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반복했다.
◆ “아들이 회갑잔치 해준다고 했는데…”
▲ 팽목항에 마련된 합동분향소
단원고 홍순영 학생 아버지 홍종욱(58) 씨는 오랜만에 팽목항을 찾았다. 홍 씨는 건강이 편치 않아 자주 찾지 못했다.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던 홍 씨의 눈가는 이내 촉촉해졌고,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휴. 저기에서 어떻게…”
이어지지 못한 말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홍 씨는 곁에 앉은 기자에게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아이가 엄청나게 효자였다”고 말을 꺼냈다. 당신은 순영이가 4살 때 건강이 나빠져 아이와 제대로 놀아주지 못했다며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홍 씨는 생각이 났다는 듯이 지갑에서 다른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이번에는 순영이가 13살 터울의 누나 결혼식 때 찍었던 사진이다. 코팅까지 해서 간직하던 사진을 보던 아버지는 또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58년생이라, 여기 있는 부모 중에는 나이가 많은 편이다. 순영이가 나중에 회갑잔치 해주겠다고 했었는데 그놈이 가버렸어. 나만 남았네.“
홍 씨 부부는 사고 이후 교회를 다시 찾았다. 아이가 했던 말이 가슴에 남아서다. 순영이는 수학여행을 가기 전 엄마에게 “내년부터 교회에 나가자”고 했단다. 홍 씨는 아들의 말이 가슴에 맺혀 다시 주일마다 교회를 찾고 있다.
아직 순영이의 옷과 방은 안산 집에 그대로 있다. 분향소에서 만난 순영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손에 브이를 그린 채 활짝 웃고 있다. 엄마 아빠에게 보여줬던 그 미소 그대로.
◆ 팽목 식당의 삼시 세끼
▲ 팽목항의 식당 옆, 진도 주민이 희생자 가족을 위해 기증한 진돗개 ‘팽’이와 길고양이 ‘팽목’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팽목항에는 빈 공간이 늘어났다. 비좁았던 자원봉사자 쉼터를 이제는 홀로 지키는 이가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정 모 씨는 지난해 세월호 사고 뒤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7월 이곳에 내려와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 씨는 팽목 식당을 지키고 있다. 정 씨는 피해자 가족들의 삼시 세끼를 담당하고 있다.
일과를 물었다. 아침 6시 30분이면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7시부터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나면, 설거지하고 점심 준비를 한다. 점심상까지 치우면 잠시 여유가 생긴다. 유가족이 많았을 때는 같이 울고 웃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정 씨는“당시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며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가족들의 사연은 아프고 힘들다. 그들을 곁에서 바라보는 자원봉사자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된다. 정 씨는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그 아픔을 나누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자 사명”이라고 말했다.
여름과 겨울, 그리고 봄까지 세 번의 계절을 맞는 동안 요리에 소질이 없던 남자는 제법 실력이 늘었다.
정 씨는 이곳은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고 설명했다. “모두 아픈 사람들끼리 모였지만, 조금 덜 아픈 사람, 여전히 아픈 사람, 나만 아픈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상처를 품고 있다”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사고 1년을 맞는 지금, 세월호 희생자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 씨는 “지금은 관심과 응원이 필요한 시기”라며 “여전히 이분들 마음에 귀 기울여주는 자세, 이거 하나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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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팽목항을 찾은 민병춘(61)씨는 노란 리본을 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민 씨는 회갑을 맞아 친구들과 여행 중 이곳을 찾았다. 민 씨와 함께 온 박현숙(61)씨는 “직접 와서 보니 가슴이 미어지네요. 아직 시신도 못 찾은 가족도 있다던데…”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 떠나지 못하는 가족들
“하루 빨리 인양돼야 동생도 찾고 금쪽같은 조카도 찾지.”
권오복(62)씨는 오늘도 동생과 조카를 기다린다. 홍매화가 만개한 4월이지만, 팽목항의 바람은 코끝을 세차게 때리며 날카롭게 불어온다. 소주 한 모금으로 추위를 달래고, 약 한 봉지로 쓰린 속을 달래보지만, 그보다 힘든 건 익숙해지지 않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벌써 1년이다. 지난해 4월 사고 소식을 접하고 한걸음에 달려온 후, 다시 봄을 맞았다.
동생 재근 씨 가족은 새로운 꿈을 품고 제주행 배에 몸을 실었다가 사고를 당했다. 현장에서 막내 조카는 구조됐지만, 아직 동생과 조카 혁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재근 씨 부인 한윤지 씨는 사고 37일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권 씨는 “베트남에서 시집온 제수한테 서울에서 새 삶을 산다고 한(漢) 씨로 지었는데 이렇게 황망하게 가버렸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울며 팽목항을 지켰던 실종자 가족들은 하나둘 떠나고, 이제는 권 씨 홀로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을 기다리고 있다.
홀로 이곳을 지키는 것이 힘들진 않았을까?
권 씨는 “말로 한들 다 이해 할 수 있겠느냐”며 술 한 모금을 삼킨다. “여기 있느라 가족도 돌보지 못하고, 멀쩡히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게 됐다”면서도 “이제 실업급여도 끝났고,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지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7남매 중, 유독 사이가 좋았던 형제였다. “동생이 마흔이 넘어 가정도 꾸리고 자식도 봤다. 이제 좀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제주도로 간다고 했는데….”
권 씨는 말을 잊지 못했다. 홀로 남은 조카는 여전히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를 기다리고 있다. 어린 조카를 보살피고 있는 권 씨의 동생 권정순(52)씨는 “아이는 죽음을 모른다”며 “엄마와 아빠는 언제 오느냐고 물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이어 “언론의 관심이 부담스럽고 겁난다”며 “아이를 안전하게 잘 키울 수 있도록 보호해달라”고 당부했다.
이튿날 다시 만난 권오복 씨는 급히 생각난 것이 있다며 다급한 목소리다. 동생이 2011년 KBS에서 다문화가정 합동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사진을 꼭 좀 찾아달라는 부탁이다.
“동생이 결혼식을 못 올리고 살았는데, 아내에게 선물해준다고 사연을 써서 보냈더라고. 어린 조카들을 양손에 잡고 결혼식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 2011년 KBS 다문화가정 합동결혼식 당시 권재근 씨 부부 모습
권 씨는 오늘도 서너 평 남짓한 방에서 홀로 동생과 조카를 기다린다. 기나긴 정적을 깨워주는 것은 휴대전화 메시지 알림 소리였다. ‘이쁜 아내’라고 저장된 발신인은 홀로 남겨진 남편에게 조카들 사진을 보내왔다. 조카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살펴보는 권 씨 뒤로 잇몸 약과 위장약이 담긴 약봉지가 보였다.
가족들은 권 씨가 가장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이곳을 지키는 이유를 물었다.
권 씨는 “나까지 떠나면 아직 못 찾은 사람들은 누가 기다려주겠느냐”며 “하루빨리 동생 시신이라도 찾게 해달라”고 했다. 총 476명의 세월호 탑승자 가운데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는 9명이다. 단원고 학생 4명과 교사 2명, 일반인으로는 권 씨 부자(재근, 혁규)와 이영숙 씨가 있다.
◆ “아이에게 미안해서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럽다.”
팽목항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실종자 가족만이 아니다. 단원고 조찬민 학생 아버지 인호(52)씨는 “아이의 시신은 사고 33일 만에 돌아왔지만, 아이한테 미안해서 도저히 떠날 수가 없다”며 이곳을 지키고 있다.
조 씨는 10여 년 전 아내와 이혼하고 아이들과 떨어져 지냈다. 조 씨는 “아비가 돼서,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시간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며 고개를 숙였다. 반월공단에서 주·야간 교대 근무를 했던 조 씨는 그 약속마저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아들 찬민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사고 두 달 전인 지난해 2월이다. 조 씨는 “아이가 회를 좋아해서 같이 회를 먹고 영화를 보러 갔는데, 원했던 영화는 자리가 없어 못 봤다”며 아이와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조 씨는 안산 집에 올라가기도 하고, 광화문 집회도 참석했지만, 그마저도 마음이 편치 않아 발걸음이 자꾸만 이곳을 향했다. 다니던 회사는 그만뒀다. 얼마 전 14일 치 실업급여가 마지막으로 입금됐다.
자원봉사자들이 떠난 팽목항에는 할 일이 많다. 조 씨는 쓰레기를 치우고, 주변 정리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낮에는 오가는 사람도 있어서 그나마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밤이 되면 찬민이 생각이 더 많이 나죠."
조 씨는 슬퍼서, 괴로워서, 그리고 미안해서 한 잔씩 넘기던 술이 부쩍 늘었다.
이날(2일), 서울 광화문과 동시에 팽목항에서 삭발식에 참석한 조 씨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매서운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려 보내던 아빠는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반복했다.
◆ “아들이 회갑잔치 해준다고 했는데…”
▲ 팽목항에 마련된 합동분향소
단원고 홍순영 학생 아버지 홍종욱(58) 씨는 오랜만에 팽목항을 찾았다. 홍 씨는 건강이 편치 않아 자주 찾지 못했다.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던 홍 씨의 눈가는 이내 촉촉해졌고,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휴. 저기에서 어떻게…”
이어지지 못한 말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홍 씨는 곁에 앉은 기자에게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아이가 엄청나게 효자였다”고 말을 꺼냈다. 당신은 순영이가 4살 때 건강이 나빠져 아이와 제대로 놀아주지 못했다며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홍 씨는 생각이 났다는 듯이 지갑에서 다른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이번에는 순영이가 13살 터울의 누나 결혼식 때 찍었던 사진이다. 코팅까지 해서 간직하던 사진을 보던 아버지는 또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58년생이라, 여기 있는 부모 중에는 나이가 많은 편이다. 순영이가 나중에 회갑잔치 해주겠다고 했었는데 그놈이 가버렸어. 나만 남았네.“
홍 씨 부부는 사고 이후 교회를 다시 찾았다. 아이가 했던 말이 가슴에 남아서다. 순영이는 수학여행을 가기 전 엄마에게 “내년부터 교회에 나가자”고 했단다. 홍 씨는 아들의 말이 가슴에 맺혀 다시 주일마다 교회를 찾고 있다.
아직 순영이의 옷과 방은 안산 집에 그대로 있다. 분향소에서 만난 순영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손에 브이를 그린 채 활짝 웃고 있다. 엄마 아빠에게 보여줬던 그 미소 그대로.
◆ 팽목 식당의 삼시 세끼
▲ 팽목항의 식당 옆, 진도 주민이 희생자 가족을 위해 기증한 진돗개 ‘팽’이와 길고양이 ‘팽목’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팽목항에는 빈 공간이 늘어났다. 비좁았던 자원봉사자 쉼터를 이제는 홀로 지키는 이가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정 모 씨는 지난해 세월호 사고 뒤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7월 이곳에 내려와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 씨는 팽목 식당을 지키고 있다. 정 씨는 피해자 가족들의 삼시 세끼를 담당하고 있다.
일과를 물었다. 아침 6시 30분이면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7시부터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나면, 설거지하고 점심 준비를 한다. 점심상까지 치우면 잠시 여유가 생긴다. 유가족이 많았을 때는 같이 울고 웃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은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정 씨는“당시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며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가족들의 사연은 아프고 힘들다. 그들을 곁에서 바라보는 자원봉사자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된다. 정 씨는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그 아픔을 나누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자 사명”이라고 말했다.
여름과 겨울, 그리고 봄까지 세 번의 계절을 맞는 동안 요리에 소질이 없던 남자는 제법 실력이 늘었다.
정 씨는 이곳은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고 설명했다. “모두 아픈 사람들끼리 모였지만, 조금 덜 아픈 사람, 여전히 아픈 사람, 나만 아픈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상처를 품고 있다”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사고 1년을 맞는 지금, 세월호 희생자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 씨는 “지금은 관심과 응원이 필요한 시기”라며 “여전히 이분들 마음에 귀 기울여주는 자세, 이거 하나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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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1년] ② 무관심·경제적 어려움에 두번 우는 생존자들
☞ [세월호 참사 1년] ③ 돌아오지 못한 9명, 그리고 팽목항을 지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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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혜원 기자 hey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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