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건지다…6개월의 재판 기록

입력 2015.04.12 (23:25) 수정 2015.04.13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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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장동원(생존학생 아버지) : "세월호에서 숨진)친구 민정이가 보고 싶답니다. 민정이가 꿈에 한번 나와봤으면 좋겠는데 한번도 안 나온대요. 저한테 한 말이 아빠는 진상규명할 거지. 왜. 아빠는 꼭 할 것 같아…"

세월호 생존자 오용선 씨가 인천항을 찾았습니다.

세월호를 타고 여러차례 제주도로 화물을 실어날랐던 오 씨, 지난해 4월 15일에도 오씨는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고 생존자) : "여기서 있다가 출항한다니까 차 실으라고 그러면 저 이 밑으로 들어가서 아까처럼 저 밑으로 해서 차 들어가면 돼요 그냥."

세월호는 그날 저녁 6시 30분에 출항할 예정이었지만 발이 묶였습니다.

안개 때문이었습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고 생존자) : "(그날)등대는 잘 안 보였나요? 전혀 안 보였죠. 그 때는. 나중에 저녁 6시 넘을 적에는 보니까 10미터도 안 보이더라고요."

출항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세월호에는 사람들의 승선이 이어졌습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고 생존자) : "안개가 자욱해서 방송 나와서 안개가 너무많이껴서 배 출항 안한다고 나오더라고. (안개를 보고) 출항 못한다고 느꼈죠. 나중에 배안에서 커피먹고 쉬고 있는데."

밤 8시 35분, 안개가 걷히며 출항이 가능해 보이자 자동차 10여 대도 더 실렸습니다.

그리고 밤 9시. 세월호는 부두를 떠났습니다.

여객과 선원, 승무원 476명, 차량 185대와 컨테이너 105개가 실려 있었습니다.

<인터뷰> 양인석(세월호 사고 생존자) : "바깥에 안개가 얼마나 걷혔나 나가서 확인했는데 어느 정도 시야는 보이더라고, 조금 있으면 출발하겠구나, 그때 출발 시점이 밤 9시쯤..."

배에서는 불꽃놀이도 열렸습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고 생존자) : "출항한 다음에 10시반인가 11시에 폭죽을 터트려요.학생들, 여행객들, 단체관광객들 불꽃놀이해요. 아주 멋있어요. 우리도 어떨 때는 구경하죠. 기념으로."

그런데 승객을 대상으로 안전 교육은 제대로 이뤄졌을까?

<녹취> 강00(여객부 직원) : "출항전 구명조끼 착용법, 비상대피 장소, 화재시 소화기 사용 방법을 DVD로 시청하게 하면서 안내방송을 합니다."

<녹취> 검사 : "2014년 4월 15일 출항 시에도 그와 같은 방송을 했나요?"

<녹취> 강00(여객부 직원) : "예,그렇습니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기억은 다릅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건 생존자) : "VTR 안전교육 하는 거 그날은 전혀 본 기억이 없는데요?

<녹취> 검사 : "청해진해운측에서는 방송을 틀어주어서 교육을 한다는데 그런 것 없었나요?"

<녹취> 오00(세월호 사고 생존자) : "아니요,타자마자 바로 밥을 먹고 휴식시간이에요. 그런 것 없었어요. 방송을 틀어두었다면 식당 텔레비전에 나왔을 테고 저희가 봐야될 텐데 전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4월 16일 아침, 오용선 씨는 같은 방의 동료들을 깨워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갑판에서 담배를 피운 뒤 방으로 돌아가는 순간 갑자기 배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고 생존자) : "아침에 식사하고 침대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갑자기 넘어가버리니까 우리도 얼떨결에 넘어가버려서서 모르겠어요. 얼떨결에 이렇게 이 배가 그렇게 됐는지"

선체는 왼쪽으로 기운 뒤 계속 넘어갔습니다.

<인터뷰> 장은복(세월호 사고 생존자) : "냉장고까지 기울어서 아 장난이 아니다. 그렇게 느꼈죠 저같은 경우에는 이쪽 끝에서 떨어진거죠 기우니까 그래서 갈비뼈가 나간 건데"

<인터뷰> 박솔비(학생) : "배가 기울어서 짐도 다 떨어지고 물건도 다 떨어지고 부딪히고 벽에 치이고 해서요.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다 확 기울었어요"

도대체 그날 세월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취재파일K는 이 의문을 풀 열쇠로 세월호 선원 재판을 주목했습니다.

재판 기록은 현재 상황에서 그 날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객관적이고 심층적인 조사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선원 재판은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33차례 이어졌습니다.

취재진이 입수한 세월호 선원 15명에 대한 1심 재판 기록은 공판조서와 증인신문조서 등 5천 쪽에 이릅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피고인인 선원과 해경을 비롯해 증인으로 나선 승객과 전문가 등 70여 명의 진술을 토대로 세월호 출항에서 침몰까지를 재구성했습니다.

출발 이후 세월호는 밤새 바람도 없고 잔잔한 바다를 순항했습니다.

4월16일 아침 8시 35분, 배는 전남 진도군 조도면 맹골수도를 통과합니다.

당시 조타실 조타기 부근엔 기관장과 조타수, 항해사가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8시 46분, 시속 33킬로미터로 병풍도 부근을 지날 무렵, 항해사가 조타수에게 배의 항로를 135도에서 140도로 오른쪽으로 5도 틀라고 지시했습니다.

조타수가 5도 틀고 2분간 항로를 유지던 중 갑자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8시 48분이었습니다.

<녹취> 검사 : "변침 지시가 있은 후 10초도 되지 않아 조타수가 '어어,조타기가 안 돼 조타기가 안 돼' 라고 말하면서 타기를 끌어안았는데,그 순간에 앞을 쳐다보니까 배가 갑자기 기울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증언하였는데 사실대로 증언한 것인가요"

<녹취> 박00(세월호 기관장) : "예,그렇습니다"

사고가 시작된 상황을 두고 진술은 엇갈립니다.

조타수는 140도로 배의 방향을 바꾸는 과정에서 조타기가 말을 듣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녹취> 검사 : "140도로 변침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 맞는가요?"

<녹취> 조00(세월호 조타수) : "예,저는 135도에서 140도로 조작하라는 명령을 받고 140도를 조작하는 시점에서부터 (사고가) 진행이 됐습니다."

반면 항해사는 140도까지 방향을 튼 뒤 145도로 방향을 바꾸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녹취> 검사 : "피고인은 140도를 지시한 이후 레이더를 통하여 우현으로 도수가 바뀌는 것을 확인하고 레이더와 조타기 사이로 가서 전방견시를 하면서 선수가 우측으로 도는 것을 보았고 다시 레이더 앞으로 와서 보니까 140도여서 이를 확인하고 조타수에게 "145도요"라고 지시하였지요."

<녹취> 박00(세월호 3등 항해사) : "예"

재판부는 조타수가 오른쪽으로 배의 방향을 돌리던 중 당황해 조타기를 오른쪽으로 더 꺾는 바람에 세월호가 급속히 기울었다고 판단했습니다.

<녹취> 선원재판 1심 판결문 : "피고인은 지시에 따라 우현 변침을 시도하던 중 원하는 대로의 변침이 이루어지지 않자 당황하여 임의로 조타기를 우현 측으로 대각도로 돌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선수가 급속도로 우회두하면서 외방경사의 영향으로 선체가 좌현 측으로 급속히 기울어졌다."

세월호가 기운 직후, 승객들은 무엇인가 선체에 강하게 부딪히면서 나는 굉음을 들었습니다.

<인터뷰> 허웅(세월호 사고 생존자) : "쾅, 할 때부터 이미… 와당탕하니까 배가 완전히 수장되더라고요"

<인터뷰> 김홍경(세월호 사고 생존자) : "갑자기 쿵쿵 하는 미세한 소리 들리더니 배가 쓱 왼쪽으로 기울더라고요"

법정에서의 증언 역시 일치합니다.

<녹취> 최00(세월호 사고 생존자) : "배가 기울면서 밖에 있는 난간에 기댔을 때 밑에서 화물차 같은 꽝꽝하는 굉장히 큰 소리가 많이 났습니다"

<녹취> 양00(새월호 사고 생존자) : "무거운 컨테이너 같은 것이 철벽에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어요. 쾅 하고 부딪하는 소리. 제가 알기로는 밑에서 들렸어요"

일부에선 이 굉음을 두고 세월호가 잠수함과 충돌했거나 암초에 부딪혀서 난 소리라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선체 오른쪽 바닥에 움푹 파인 것으로 보이는 흔적을 근거로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선체 바닥의 하얀 부분은 파이거나 구멍난 게 아니라 도색이 변색되거나 탈색된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재판부도 외부 충격이나 충돌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녹취> 선원재판 1심 판결문 : "사고지점 해역의 수심은 30m 이상으로 항해에 장애가 될 요소가 없었고 세월호가 완전히 전복되었을 때에 촬영된 영상들에 의하면 세월호의 수면 아랫 부분에 외부 충격으로 인한 파공이나 외부 물체와 충돌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굉음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녹취> 한00(세월호 사고 생존자) : "기울어진 다음에 조금 있으니까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때 제가 방송한 직원에게 "무슨 소리냐"고 하니까 화물 넘어가는 소리다, 컨테이너 넘어가는 소리다라고 해서 그때 알았습니다"

당시 여객실 아래 화물창엔 컨테이너와 자동차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선체 바닥에 제대로 고정돼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녹취> 검사 : "세월호는 그동안 '세월호 차량 및 화물 고박 배치도'에 규정된 대로 화물을 적재하거나 고박을 하지 않았지요"

<녹취> 신00(세월호 또다른 선장) : "예"

<녹취> 검사 : "규정대로 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짐을 많이 싣기 위해서인가요"

<녹취> 신00(세월호 또다른 선장) : "그렇다고 봐야겠습니다"

<녹취> 검사 : "세월호의 D 데크와 E데크에는 컨테이너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가 전혀 없지요"

<녹취> 신00(세월호 또다른 선장) : "없습니다"

<녹취> 검사 : "그럼에도 세월호는 그동안 D데크와 E데크에도 컨테이너를 적재하여 운반하여 왔지요"

<녹취> 신00(세월호 또다른 선장) : "예"

특히 갑판 앞부분에 고정장치도 없이 실려있던 컨테이너들은 세월호가 기울자 미끄러지면서 무더기로 바다에 떨어졌습니다.

<인터뷰> 세월호 사고 생존자 : "컨테이너가 먼저 다 우르르 떨어졌거든요. 바닥에. 컨테이너가 기울면서 다 떨어지면서 그 많은 컨테이너가 배를 우당탕 쳤어요, 배를. (그거 보셨어요? 컨테이너 떨어지는 거?) 네. 제가 탄 곳이 컨테이너 보이는 곳이었는데 그냥 우르르 쏟아지더라고요"

<녹취> 검사 : "증인은 세월호가 기울 당시 컨테이너 등이 넘어지는 소리를 듣거나 본 적이 있나요?"

<녹취> 고00(세월호 사고 생존자) : "예 소리를 들었었고, 배가 나가는 속도가 있기 때문에 컨테이너가 떨어지는 것과 뒤로 지나가는 것까지 다 봤습니다"

배는 기울더라도 복원성만 있으면 다시 바로설 수 있습니다.

기울어서 컨테이너와 차량이 쏠리더라도 복원성을 유지하고 있으면 뒤집어지는 사고는 나지 않는다.

세월호의 경우, 화물을 1077톤 이하로 실어야만 복원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무리한 증축과 개축 때문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무게가 많지 않았던 세월호.

사고 당시 세월호엔 두 배에 가까운 2142톤의 화물이 실려 있었습니다.

<녹취> 검사 : "복원성 계산서에는 세월호가 안전 운항을 위해서는 화물을 최대 1077톤까지, 평형수는 거의 다 채우게 돼 있는데 피고인은 왜 복원성 계산서에 기재된 대로 평형수와 화물을 적재하지 않았는가요"

<녹취> 이준석(세월호 선장) : "짐을 많이 싣기 위해 그렇게 됐습니다."

인천항 운항관리실에 제출한 출항 전 여객선 안전점검 보고서도 엉터리였습니다.

<녹취> 검사 : "출항 후 운항관리자인 전정윤에게 불러준 여객이 450명 일반화물이 657톤, 자동차가 150대로 기재되어 있어 이마저 사실과 다른데 어떻게 된 것 인가요?"

<녹취> 박00(3등 항해사) : "저는 그냥 불러주는 대로만 적어서 그것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

결국 세월호는 제대로 고정하지 않은 화물들이 선체 왼편으로 한꺼번에 쏠리면서 복원성을 잃고 넘어져 바닷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녹취> 학생 : '으아, 기울어졌어!"

<녹취> 선내 안내방송 : "승객 여러분들께 안내, 잠시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녹취> 학생 : "야, 나 좀 살려줘!"

<녹취> 선내안내방송 : "현재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안전봉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녹취> 학생 : "진짜, 진짜 침수되는 거 아니야?" "야, 쏠리는 거 장난 아니야. 계속 이쪽으로 쏠려" "야 여기" "못 움직여"

<녹취> 선내안내방송 : "이동을 하시면 지금 위험하오니…"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들립니다.

삶과 죽음이 갈렸던 순간 학생들과 승객들에게 전달된 행동 지침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녹취> 선내안내방송 :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녹취> 학생 : "잠깐. 이거 뭐야, 이거." "야, 팔 후들거려" "이거 더 기울어져!" "더 기울어진다고?" "어"

느닷없는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학생들은 배가 기운지 10분 만에 구명조끼를 나눠 입으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습니다.

<녹취> 학생 : "하나 줘 봐. 어디 어디 있어?" "야, 저기 구명조끼 여기 줘. 구명조끼" "야! 야! 있어. 슬라바! 슬라바! 여기 있어" "빨리 빨리. 야" "야, 야, 야! 조심해. 여기서 바로 하면 애들 다 다쳐" "나도 줘!" "구명조끼 다 던져!" "구명조끼 줘" "야, 구명조끼!" "내려. 내려" "야, 조심해" "나도 입어야 돼"

학생들의 다음 행동을 가로막은 건 역설적이게도 선내 방송이었습니다.

<녹취> 선내안내방송 : "다시 한 번 안내말씀 드립니다. 구명동의가 창용가능하신 승객 여러분들께서 는 구명동의를 착용해 주시고…"

<녹취> 학생 : "아니 무슨 일인지 말을 하고 해야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 "입으래" "구명조끼 입으라는 건 침몰되고 있다는 소리 아니야?"

<녹취> 선내안내방송 : "…계신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황은 알려주지 않은 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은 계속됐습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고 생존자) : "'(왜) 방송에서 이걸 가만있으라고 하지? 이걸 탈출시켜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고, 학생들이 있는 곳과 방송실하고 거리가 70미터 정도 되고, 또 문을 4개 열어서 가야하고 또 배는 기울었지, 우리도 그 때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15분 남짓한 동영상 속 선내방송은 8~9차례쯤 반복됩니다.

왜 승무원은 방송을 통해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반복했을까?

<녹취> 강00(여객부 직원) : "처음에는 승객들을 안심시키고자 최초에는 제 자체 판단으로 안내방송을 했고 이후에는 사무장을 통해서 전달을 받고 안내방송을 했습니다."

하지만 배가 기운 상황에서 안전을 위해 취해야 할 행동이 뭔지 본인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녹취> 검사 : "안전방송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녹취> 강00(세월호 여객부 직원) :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잘 모르겠고 저는 승객들을 안심시키면서 대기를 하고 있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탈출 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는 선장의 지시도 받지 못했습니다.

<녹취> 검사 : "당시 세월호가 어떤 상황인지 조타실로부터 전달 및 상황에 대한 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지요."

<녹취> 강00(세월호 여객부 직원) : "예,받은 적 없습니다. 정확한 지시가 왔거나 침몰상황을 전달받았다면 계속적으로 대기하라는 취지의 안내방송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녹취> 검사 : "조타실이나 다른 여객부 승무원으로부터 승객들에 대한 대피 또는 탈출지시를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녹취> 강00(세월호 여객부 직원) : "저희가 수십 번 무전이나 전화로 조타실 쪽에 확인을 했으나 전달받은 사항은 없었습니다."

평소 비상시에 대처하는 훈련도 미흡했습니다.

<녹취> 검사 : "2항사와 3항사는 선내비상훈련은 거의 하지 않고 항해일지에 훈련한 것처럼 적기만 한다고 진술하는 등 대부분의 선원들이 선내비상훈련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피고인이 아는 한 선내비상훈련을 실시하지 않은 게 맞지요?"

<녹취> 이준석(세월호 선장) : "예"

<녹취> 검사 : "올해는 2014년 2월경 소화훈련을 단 1회 실시했다고 선원들이 이야기하는데 맞는가요?"

<녹취> 이준석 : "제가 확인을 못했습니다만 그때 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 김홍경(세월호 사고 생존자) : "대피하지 마라, 그 자리에 있어라. 구명조끼 입고 그 자리에 있어라 했지 어디로 대피하라, 그런 방송만 했어도 애들이 알아서 높은 쪽으로 가니까 많이 올라왔을 텐데."

<녹취> 김00(세월호 사고 생존자) : "대피 방송만 제대로, 방송만 정말 제대로 했다면…"

<녹취> 재판장 : "방송만 제대로 했다면 친구들이 많이 살았을 것 같은가요"

<녹취> 김00 : "예"

첫 신고가 접수된 시각은 8시 52분.

신고자는 선원이 아닌 단원고 학생이었습니다.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119상황실입니다"

<녹취> 학생 : "살려 주세요"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여보세요. "

<녹취> 학생 : "여보세요"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네 119상황실입니다"

<녹취> 학생 : "여기 배인데 여기 배가 침몰하는 거 같아요"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배가 침몰해요?"

<녹취> 학생 : "제주도 가고 있었는데 여기 지금 배가 침몰하는 것 같아요"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자... 잠깐만요. 자... 지금 타고 계신 배가 침몰한다는 소리에요? 아니면 옆에 있는 다른 배가 침몰한다는 소리에요?"

<녹취> 학생 : "타고 가는 배가요. 타고 가는 배가!"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배가 침몰했어요? 배 이름이 뭐에요? 여보세요? "

<녹취> 학생 :"네"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배 이름이 뭐에요? 제가 해경으로 바로 연결해 드릴게요"

<녹취> 학생 : "잠시만요. 세월호요. 세월호"

학생이 119에 신고하는 동안 선원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공판 조서를 보면 지휘 체계가 무너진 채 우왕좌왕하다가 시간만 보냈음이 드러납니다.

사고 당시 자기 방에 있던 선장은 부랴부랴 조타실로 돌아왔습니다.

선장이 돌아왔을 때 조타실엔 조타수와 2등 항해사는 조타기와 레이더 사이에서 몸을 기대고 있었습니다.

기관장은 조타실 앞쪽 봉을 잡고 있었고 3등 항해사는 울고 있었습니다.

<녹취> 이준석(세월호 선장) : "당시 조타실에 들어가서 '지금 힐링이 얼마냐'(균형이 어떻냐)고 3항사에게 묻자 "게이지가 다 넘어갔다"고 했습니다. 그게 35도까지 있는데 거기 다 넘어가면 35도 이상 경사가 진 상태입니다. 그 다음에 경사를 완화시켜 보려고 힐링펌프를 작동시켜 보라고 하니까 3등 항해사가 "힐링펌프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타수에게 "왜 이렇게 됐냐"고 물었더니 "타가 안 먹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관장에게 기관실에 내려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 사이 1등 항해사는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와 교신해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녹취> 세월호 : "저기… 해경에 연락해주십시오 본선, 위험합니다. 지금 배가 넘어가 있습니다"

<녹취> 제주 VTS : "네, 귀선 어디입니까?"

<녹취> 세월호 : "빨리, 빨리 좀 (연락)해주십시오"

<녹취> 제주 VTS : "네, 알겠습니다. 일단 해경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녹취> 세월호 : "지금 배가 많아 넘어가 있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빨리 좀 해주십시오."

9시 7분,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와도 교신이 이뤄졌습니다.

<녹취> 세월호 : "진도 VTS. 세월호"

<녹취> 진도 VTS : "세월호. 여기 진도연안 VTS. 귀선 지금 침몰 중입니까?"

<녹취> 세월호 : "예, 그렇습니다. 해경 빨리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 교신을 통해 세월호에 여러 차례 승객을 탈출시킬지 말지를 신속히 결정하라고 다그칩니다.

하지만 세월호에서는 탈출하면 바로 구조할 수 있는지를 되묻기만 합니다.

<녹취> 진도 VTS : "선장님께서 최종 판단을 하셔서 승객 탈출 시킬지 빨리 결정을 내리십시오."

<녹취> 세월호 : "그게 아니고 지금 탈출하면은 바로 구조할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후 9시 38분까지 세월호와 11차례 교신이 이어졌지만 세월호 선원 가운데 승객에게 탈출할 것을 알리거나 구조 활동을 벌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2등 항해사는 9시 20분쯤 무전기로 사무장에게 승객이 탈출하라고 방송할 것을 지시했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장은 대답이 없었고 실제 방송을 들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녹취> 검사 : "피고인은 사무부에서 승객들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배 밖으로 탈출하라는 방송을 하였습니다라고 진술하였는 바, 그것은 사무부에서 이러한 방송을 직접했다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사무부에서 방송한 것이 맞나요?"

<녹취> 김00(세월호 2등 항해사) : "저는 그렇게 방송이 된 줄 알았습니다."

<녹취> 검사 : "피고인은 승객들에게 탈출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하라고 사무장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무전기로 호출하였으나 사무장은 호출에 답변하지 않았지요? -김00: 예. -검사: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무전기에 대고 일방적으로 퇴선방송을 하세요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녹취> 김00(세월호 2등 항해사) : "예"

기관장은 배가 기울자 바로 기관실에 연락해 기관부 선원들을 나오게 했습니다.

그 뒤 3층의 기관부 선실 통로에 30분쯤 모여 있다가 헬기 소리를 듣고 자신들만 탈출했습니다.

<녹취> 검사 : "피고인은 최종적으로 어디에서 머물렀나요?"

<녹취> 이00(세월호 3등 기관사) : "저는 제 방 앞에 있었습니다."

<녹취> 검사 : "피고인은 세월호의 선원이지요?"

<녹취> 이00(세월호 3등 기관사) : "예"

<녹취> 검사 : "비상시에 승객들을 대피시킬 의무가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 앞에 가서 승객 대피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려고 하였나요?"

<녹취> 이00(세월호 3등 기관사) : "일단 아무 것도 모르고 올라갔고 승객 대피라는 것은 어떤 상황인지 알고 대피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을 때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때 당시에는 대피해야 되는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무슨 일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사고 초기에는 선원들도 당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고 38분 뒤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로부터 곧 구조정이 도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승객들에게 퇴선 명령을 전달하고 출입문으로 안내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승객들에 대한 구호 조치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녹취> 검사 : "선장인 피고인은 당시 조타실에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가요?"

<녹취> 이준석(세월호 선장) : "거의 실신상태에 있었습니다. 교신내용을 듣지 못하고 사람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사실 제가 기억은 못하지만 그 상태가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녹취> 검사 : "승객들을 구조해야겠다, 승객들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는 것인가요?"

<녹취> 이준석(세월호 선장) : "그것보다도 사고가 나고 퇴선할 때까지 무엇을 한지도 모르고, 저는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재판부가 9시 26분을 선원들이 승객들을 위험에 버려뒀다는 유기죄, 즉 범죄가 성립된 시점으로 보는 이윱니다.

<인터뷰> 박선영(세월호 유족측 변호사) : "위험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이 사람들을 그냥 두고 나가겠다 그냥 둬야겠다 나는 어떻게 할 수없다라고 마음을 잡았던 시기가 26분이라는 것이고요. 26분이라는 건 배가 많이 기울었고 주변에서 라이프링을 던져서 나오라고 하고 그런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시한이거든요"

첫 신고가 접수되고 6분 뒤인 오전 8시 58분.

목포해경은 100톤급 소형 경비정 123정에 출동 지시를 내렸습니다.

123정은 사고 지점에서 2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9시 10분엔 목포에 있던 헬기 B-511호기도 항공 구조사를 태우고 사고 해역으로 떠났습니다.

세월호를 뒤따라 가던 유조선 둘라에이스호도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로부터 구조 작업에 나서줄 것을 요청 받았습니다.

<녹취> 세월호 : "지금 50도 이상 좌현으로 기울어져서 사람들이 이렇게 좌우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벽을 잡고 겨우 버티고 있는 상태입니다."

<녹취> 진도 VTS : "근처 둘라에이스호가 접근 중에 있습니다."

<녹취> 둘라에이스호 : "인근에 대기하고 있다가 승객들 탈출하면 인명 구조하겠습니다."

9시 11분, 둘라에이스호 선장은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에 보트를 이용해 탈출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녹취> 문00(둘라에이스호 선장) : "1마일 앞에서 봤을 땐 구명 뗏목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 보니 컨테이너와 스티로폼 등 부유물이었습니다."

9시 27분, 목포에서 출발한 헬기 B-511호기가 세월호 상공에 도착합니다.

곧이어 해경의 123정도 도착해 9시 37분부터 구조작업을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헬기 B-511호기 기장은 현장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녹취> 양00(B-511호기 기장) : "사람들이 나와서 갑판에 대기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세월호 주변을 한 바퀴 돌 때까지 사람들이 안 나와서 '어, 이상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9시 34분, 항공 구조사가 내려가 세월호 조리원 김종임을 시작으로 6명을 구조했습니다.

하지만 항공 구조사는 선내에 진입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선내에 승객 4백여 명이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선내 진입을 지시하지도 않았습니다.

항공 구조사들은 무전기를 갖고있지 않아 지시를 할 수단조차 없었습니다.

<녹취> 박00(B-511호기 항공 구조사) : "저희는 올라온 승객을 구조하는 임무를 했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만약 선내에 많은 승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분명히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내 진입을 시도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녹취> 권00(B-511호기 항공 구조사) : "선내로 진입할 상황이 아니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정보도 없었습니다. 70도 이상 기울어진 상태에서 탈출을 안 하고 배 안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해경 123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녹취> 이00(123정 해경 경사) : "많은 인원이 승선해 있는 배가 저 정도로 기울었다면 기다리지 못하고 탈출을 하거나, 구명벌을 이용해서라도 해상에 뛰어들거나, 외부 갑판에 탈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훈련받은 대로 승객들을 구조할 생각으로 갔는데,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라서 당황했습니다."

수백 명의 승객들이 선내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 그 사실을, 123정 해경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녹취> 김00(123정 정장) : "세월호 승객들이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퇴선 위치에 집결해있거나 구명벌을 투하해서 해상에 다 내려와 있을 것이라고 가상하고 갔는데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 너무 당황했습니다."

상황실과 현장, 헬기와 항공 구조사, 123정과 헬기 사이, 의사소통과 협력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구조를 도왔던 다른 선박 역시 현장 상황을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녹취> 박00(어업지도선 항해사) :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사람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주변 배들이 구조 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떠 있었고 123정과 헬기만 구조 활동을 하고 있어서 주변의 배들이 도와줄 필요가 없는 상황으로 잠시 착각했습니다.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여객들은 없고 승무원만 있는 배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9시 37분, 해경 대원 2명은 7인승 고무 단정을 타고 세월호로 접근했습니다.

해경 고무 단정에 처음 구조된 이들은 바로 승객을 버리고 나온 세월호 선원들이었습니다.

<녹취> 박00(123정 해경 경장) : "처음에는 접근을 목적으로 선체 중앙부로 갔다가 사람이 보여서 선미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선원임을 밝혔다고 하는데, 그 당시 상황에서 제가 어떤 사람의 말을 인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위에는 헬기가 있고 밑에는 고무보트 엔진 소리가 나고 있었고, 당시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어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습니다.

9시 57분, 123정은 세월호 좌현이 완전히 침수됐다고 보고합니다.

그때까지도 선내 진입 명령은 없었습니다.

<녹취> 검사 : "9시 48분 경 해경지방청 상황실로부터 선체 진입 명령을 받은 적이 있나요?"

<녹취> 김00(123정 정장) : "예 제가 받았습니다."

<녹취> 검사 : "진입 명령을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녹취> 김00(123정 정장) : "그때 조타실의 인명을 구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쪽에 직원이 두 명 있었는데 미끄러져서 못 올라갔씁니다. 제가 올라가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녹취> 검사 : "지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녹취> 김00(123정 정장) : "그때 당황해서 깜빡 잊었습니다."

'당황해서 잊었다'는 123정 정장의 진술, 해경의 구조 과정에서 가장 뼈아픈 부분입니다.

<인터뷰> 박00(유가족) : "9시 30분이죠? 그러면 여기가 9시 42분이거든요. 그러면 00이가 엄마한테 전화했을 때가 31분이었어요. 해경이 거의 도착할 시간에 지금 이 배의 각도를 보면 그렇게 많이 넘어가 있는 상태는 아니에요. 배가 지금 이렇게 20도 기울어져 있는데 해경이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해요. 해경이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해경이 안 들어간 이유는 왜 안 들어갔는지 그런 부분들이 매우 의심스럽다는 얘기죠."

퇴선방송도 마찬가지 이유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23정 정장은 현장에 도착해 퇴선 방송을 했다고 말했지만,

<인터뷰> 김00(123정 정장) : "(경비정) 함내 경보를 이용해서 승객 총원 퇴선하라는, 바다로 뛰어내리라는 방송을 수회 실시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퇴선 방송은 없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거짓말이었던 것입니다.

<녹취> 김00(123정 정장) : "구명보트를 내리고 세월호 쪽으로 접근해 들어갔습니다. 퇴선 방송을 했어야 되는데 퇴선 방송을 하지 못했습니다."

10시 6분, 123정은 다시 세월호로 접근합니다.

해경 대원은 세월호 다인실 유리창을 깨고 사람들을 끌어올렸습니다.

<녹취> 이00(123정 해경 경사) : "창문을 깰 때 창문 높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유리창을 깨고 두 명은 갑판으로 쉽게 올라왔고, 그동안 세월호가 계속 좌현으로 침수하면서 높이가 낮아짐에 따라 나머지 두 명은 손을 잡고 끌어올렸고, 최종적으로 나머지 두 명은 너무 낮아져서 사다리로 올려서 구조했습니다."

생존자 누구도 갑판부와 기관부 승무원이 구조를 하거나 승객들에게 탈출을 지시하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오용선 : "선원들이 진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건데… 자기네들도 살려고 그냥 나가버렸으니까. 이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탈출은 그야말로 '알아서'였습니다

<인터뷰> 김동수(세월호 사고 생존자) : "저는 몇 명 구했는지도 생각안나고, 김홍균씨가 제가 처음 구조할때 20명이라고 해서 20명이라고 하지 저는 거기서 구해서 구조 끝나고 그분들은 다 가면, 저 혼자 홀에서 학생들, 일반인들 누가 누가 구한것도 모르고. 어느 부부. 학생. 일반인. 구한 것만 생각나지. 몇 명을 구한거나 어떤 사람을… 얼굴이 전혀 기억 안나요."

해경이 마지막으로 선내에서 나온 학생을 구조한 건, 10시 13분.

<녹취> 박00(123정 해경 경사) : "정말 배가 가라앉는 순간에 마지막 학생이 나왔습니다. 거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들이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학생이 울었던 것은 기억합니다. 그 학생 이후로 다른 학생은 보지 못했습니다."

123정이 세월호에 접안한 시간은 두 번에 걸쳐 약 11분입니다.

10시 18분, 세월호는 108도로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우현 3층 난간에 모여있던 마지막 40여 명이 이때 바다로 뛰어듭니다.

이들은 해경과 어업지도선에 구조됐습니다.

한 시간 뒤인 11시 18분, 배의 앞부분 일부만 남기고 세월호는 바다 밑으로 가라 앉습니다.

잠수가 가능한 서해지방청 해경특공대원이 사고 현장에 도착한 시각은 11시 28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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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억을 건지다…6개월의 재판 기록
    • 입력 2015-04-13 00:00:54
    • 수정2015-04-13 00:56:06
    취재파일K
<녹취> 장동원(생존학생 아버지) : "세월호에서 숨진)친구 민정이가 보고 싶답니다. 민정이가 꿈에 한번 나와봤으면 좋겠는데 한번도 안 나온대요. 저한테 한 말이 아빠는 진상규명할 거지. 왜. 아빠는 꼭 할 것 같아…"

세월호 생존자 오용선 씨가 인천항을 찾았습니다.

세월호를 타고 여러차례 제주도로 화물을 실어날랐던 오 씨, 지난해 4월 15일에도 오씨는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고 생존자) : "여기서 있다가 출항한다니까 차 실으라고 그러면 저 이 밑으로 들어가서 아까처럼 저 밑으로 해서 차 들어가면 돼요 그냥."

세월호는 그날 저녁 6시 30분에 출항할 예정이었지만 발이 묶였습니다.

안개 때문이었습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고 생존자) : "(그날)등대는 잘 안 보였나요? 전혀 안 보였죠. 그 때는. 나중에 저녁 6시 넘을 적에는 보니까 10미터도 안 보이더라고요."

출항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세월호에는 사람들의 승선이 이어졌습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고 생존자) : "안개가 자욱해서 방송 나와서 안개가 너무많이껴서 배 출항 안한다고 나오더라고. (안개를 보고) 출항 못한다고 느꼈죠. 나중에 배안에서 커피먹고 쉬고 있는데."

밤 8시 35분, 안개가 걷히며 출항이 가능해 보이자 자동차 10여 대도 더 실렸습니다.

그리고 밤 9시. 세월호는 부두를 떠났습니다.

여객과 선원, 승무원 476명, 차량 185대와 컨테이너 105개가 실려 있었습니다.

<인터뷰> 양인석(세월호 사고 생존자) : "바깥에 안개가 얼마나 걷혔나 나가서 확인했는데 어느 정도 시야는 보이더라고, 조금 있으면 출발하겠구나, 그때 출발 시점이 밤 9시쯤..."

배에서는 불꽃놀이도 열렸습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고 생존자) : "출항한 다음에 10시반인가 11시에 폭죽을 터트려요.학생들, 여행객들, 단체관광객들 불꽃놀이해요. 아주 멋있어요. 우리도 어떨 때는 구경하죠. 기념으로."

그런데 승객을 대상으로 안전 교육은 제대로 이뤄졌을까?

<녹취> 강00(여객부 직원) : "출항전 구명조끼 착용법, 비상대피 장소, 화재시 소화기 사용 방법을 DVD로 시청하게 하면서 안내방송을 합니다."

<녹취> 검사 : "2014년 4월 15일 출항 시에도 그와 같은 방송을 했나요?"

<녹취> 강00(여객부 직원) : "예,그렇습니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기억은 다릅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건 생존자) : "VTR 안전교육 하는 거 그날은 전혀 본 기억이 없는데요?

<녹취> 검사 : "청해진해운측에서는 방송을 틀어주어서 교육을 한다는데 그런 것 없었나요?"

<녹취> 오00(세월호 사고 생존자) : "아니요,타자마자 바로 밥을 먹고 휴식시간이에요. 그런 것 없었어요. 방송을 틀어두었다면 식당 텔레비전에 나왔을 테고 저희가 봐야될 텐데 전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4월 16일 아침, 오용선 씨는 같은 방의 동료들을 깨워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갑판에서 담배를 피운 뒤 방으로 돌아가는 순간 갑자기 배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고 생존자) : "아침에 식사하고 침대 안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갑자기 넘어가버리니까 우리도 얼떨결에 넘어가버려서서 모르겠어요. 얼떨결에 이렇게 이 배가 그렇게 됐는지"

선체는 왼쪽으로 기운 뒤 계속 넘어갔습니다.

<인터뷰> 장은복(세월호 사고 생존자) : "냉장고까지 기울어서 아 장난이 아니다. 그렇게 느꼈죠 저같은 경우에는 이쪽 끝에서 떨어진거죠 기우니까 그래서 갈비뼈가 나간 건데"

<인터뷰> 박솔비(학생) : "배가 기울어서 짐도 다 떨어지고 물건도 다 떨어지고 부딪히고 벽에 치이고 해서요.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다 확 기울었어요"

도대체 그날 세월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취재파일K는 이 의문을 풀 열쇠로 세월호 선원 재판을 주목했습니다.

재판 기록은 현재 상황에서 그 날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가장 객관적이고 심층적인 조사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선원 재판은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33차례 이어졌습니다.

취재진이 입수한 세월호 선원 15명에 대한 1심 재판 기록은 공판조서와 증인신문조서 등 5천 쪽에 이릅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피고인인 선원과 해경을 비롯해 증인으로 나선 승객과 전문가 등 70여 명의 진술을 토대로 세월호 출항에서 침몰까지를 재구성했습니다.

출발 이후 세월호는 밤새 바람도 없고 잔잔한 바다를 순항했습니다.

4월16일 아침 8시 35분, 배는 전남 진도군 조도면 맹골수도를 통과합니다.

당시 조타실 조타기 부근엔 기관장과 조타수, 항해사가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8시 46분, 시속 33킬로미터로 병풍도 부근을 지날 무렵, 항해사가 조타수에게 배의 항로를 135도에서 140도로 오른쪽으로 5도 틀라고 지시했습니다.

조타수가 5도 틀고 2분간 항로를 유지던 중 갑자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8시 48분이었습니다.

<녹취> 검사 : "변침 지시가 있은 후 10초도 되지 않아 조타수가 '어어,조타기가 안 돼 조타기가 안 돼' 라고 말하면서 타기를 끌어안았는데,그 순간에 앞을 쳐다보니까 배가 갑자기 기울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증언하였는데 사실대로 증언한 것인가요"

<녹취> 박00(세월호 기관장) : "예,그렇습니다"

사고가 시작된 상황을 두고 진술은 엇갈립니다.

조타수는 140도로 배의 방향을 바꾸는 과정에서 조타기가 말을 듣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녹취> 검사 : "140도로 변침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한 것이 맞는가요?"

<녹취> 조00(세월호 조타수) : "예,저는 135도에서 140도로 조작하라는 명령을 받고 140도를 조작하는 시점에서부터 (사고가) 진행이 됐습니다."

반면 항해사는 140도까지 방향을 튼 뒤 145도로 방향을 바꾸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녹취> 검사 : "피고인은 140도를 지시한 이후 레이더를 통하여 우현으로 도수가 바뀌는 것을 확인하고 레이더와 조타기 사이로 가서 전방견시를 하면서 선수가 우측으로 도는 것을 보았고 다시 레이더 앞으로 와서 보니까 140도여서 이를 확인하고 조타수에게 "145도요"라고 지시하였지요."

<녹취> 박00(세월호 3등 항해사) : "예"

재판부는 조타수가 오른쪽으로 배의 방향을 돌리던 중 당황해 조타기를 오른쪽으로 더 꺾는 바람에 세월호가 급속히 기울었다고 판단했습니다.

<녹취> 선원재판 1심 판결문 : "피고인은 지시에 따라 우현 변침을 시도하던 중 원하는 대로의 변침이 이루어지지 않자 당황하여 임의로 조타기를 우현 측으로 대각도로 돌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선수가 급속도로 우회두하면서 외방경사의 영향으로 선체가 좌현 측으로 급속히 기울어졌다."

세월호가 기운 직후, 승객들은 무엇인가 선체에 강하게 부딪히면서 나는 굉음을 들었습니다.

<인터뷰> 허웅(세월호 사고 생존자) : "쾅, 할 때부터 이미… 와당탕하니까 배가 완전히 수장되더라고요"

<인터뷰> 김홍경(세월호 사고 생존자) : "갑자기 쿵쿵 하는 미세한 소리 들리더니 배가 쓱 왼쪽으로 기울더라고요"

법정에서의 증언 역시 일치합니다.

<녹취> 최00(세월호 사고 생존자) : "배가 기울면서 밖에 있는 난간에 기댔을 때 밑에서 화물차 같은 꽝꽝하는 굉장히 큰 소리가 많이 났습니다"

<녹취> 양00(새월호 사고 생존자) : "무거운 컨테이너 같은 것이 철벽에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어요. 쾅 하고 부딪하는 소리. 제가 알기로는 밑에서 들렸어요"

일부에선 이 굉음을 두고 세월호가 잠수함과 충돌했거나 암초에 부딪혀서 난 소리라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선체 오른쪽 바닥에 움푹 파인 것으로 보이는 흔적을 근거로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선체 바닥의 하얀 부분은 파이거나 구멍난 게 아니라 도색이 변색되거나 탈색된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재판부도 외부 충격이나 충돌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녹취> 선원재판 1심 판결문 : "사고지점 해역의 수심은 30m 이상으로 항해에 장애가 될 요소가 없었고 세월호가 완전히 전복되었을 때에 촬영된 영상들에 의하면 세월호의 수면 아랫 부분에 외부 충격으로 인한 파공이나 외부 물체와 충돌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굉음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녹취> 한00(세월호 사고 생존자) : "기울어진 다음에 조금 있으니까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때 제가 방송한 직원에게 "무슨 소리냐"고 하니까 화물 넘어가는 소리다, 컨테이너 넘어가는 소리다라고 해서 그때 알았습니다"

당시 여객실 아래 화물창엔 컨테이너와 자동차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선체 바닥에 제대로 고정돼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녹취> 검사 : "세월호는 그동안 '세월호 차량 및 화물 고박 배치도'에 규정된 대로 화물을 적재하거나 고박을 하지 않았지요"

<녹취> 신00(세월호 또다른 선장) : "예"

<녹취> 검사 : "규정대로 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짐을 많이 싣기 위해서인가요"

<녹취> 신00(세월호 또다른 선장) : "그렇다고 봐야겠습니다"

<녹취> 검사 : "세월호의 D 데크와 E데크에는 컨테이너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가 전혀 없지요"

<녹취> 신00(세월호 또다른 선장) : "없습니다"

<녹취> 검사 : "그럼에도 세월호는 그동안 D데크와 E데크에도 컨테이너를 적재하여 운반하여 왔지요"

<녹취> 신00(세월호 또다른 선장) : "예"

특히 갑판 앞부분에 고정장치도 없이 실려있던 컨테이너들은 세월호가 기울자 미끄러지면서 무더기로 바다에 떨어졌습니다.

<인터뷰> 세월호 사고 생존자 : "컨테이너가 먼저 다 우르르 떨어졌거든요. 바닥에. 컨테이너가 기울면서 다 떨어지면서 그 많은 컨테이너가 배를 우당탕 쳤어요, 배를. (그거 보셨어요? 컨테이너 떨어지는 거?) 네. 제가 탄 곳이 컨테이너 보이는 곳이었는데 그냥 우르르 쏟아지더라고요"

<녹취> 검사 : "증인은 세월호가 기울 당시 컨테이너 등이 넘어지는 소리를 듣거나 본 적이 있나요?"

<녹취> 고00(세월호 사고 생존자) : "예 소리를 들었었고, 배가 나가는 속도가 있기 때문에 컨테이너가 떨어지는 것과 뒤로 지나가는 것까지 다 봤습니다"

배는 기울더라도 복원성만 있으면 다시 바로설 수 있습니다.

기울어서 컨테이너와 차량이 쏠리더라도 복원성을 유지하고 있으면 뒤집어지는 사고는 나지 않는다.

세월호의 경우, 화물을 1077톤 이하로 실어야만 복원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무리한 증축과 개축 때문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무게가 많지 않았던 세월호.

사고 당시 세월호엔 두 배에 가까운 2142톤의 화물이 실려 있었습니다.

<녹취> 검사 : "복원성 계산서에는 세월호가 안전 운항을 위해서는 화물을 최대 1077톤까지, 평형수는 거의 다 채우게 돼 있는데 피고인은 왜 복원성 계산서에 기재된 대로 평형수와 화물을 적재하지 않았는가요"

<녹취> 이준석(세월호 선장) : "짐을 많이 싣기 위해 그렇게 됐습니다."

인천항 운항관리실에 제출한 출항 전 여객선 안전점검 보고서도 엉터리였습니다.

<녹취> 검사 : "출항 후 운항관리자인 전정윤에게 불러준 여객이 450명 일반화물이 657톤, 자동차가 150대로 기재되어 있어 이마저 사실과 다른데 어떻게 된 것 인가요?"

<녹취> 박00(3등 항해사) : "저는 그냥 불러주는 대로만 적어서 그것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

결국 세월호는 제대로 고정하지 않은 화물들이 선체 왼편으로 한꺼번에 쏠리면서 복원성을 잃고 넘어져 바닷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녹취> 학생 : '으아, 기울어졌어!"

<녹취> 선내 안내방송 : "승객 여러분들께 안내, 잠시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녹취> 학생 : "야, 나 좀 살려줘!"

<녹취> 선내안내방송 : "현재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안전봉을 잡고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녹취> 학생 : "진짜, 진짜 침수되는 거 아니야?" "야, 쏠리는 거 장난 아니야. 계속 이쪽으로 쏠려" "야 여기" "못 움직여"

<녹취> 선내안내방송 : "이동을 하시면 지금 위험하오니…"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들립니다.

삶과 죽음이 갈렸던 순간 학생들과 승객들에게 전달된 행동 지침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녹취> 선내안내방송 :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녹취> 학생 : "잠깐. 이거 뭐야, 이거." "야, 팔 후들거려" "이거 더 기울어져!" "더 기울어진다고?" "어"

느닷없는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학생들은 배가 기운지 10분 만에 구명조끼를 나눠 입으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습니다.

<녹취> 학생 : "하나 줘 봐. 어디 어디 있어?" "야, 저기 구명조끼 여기 줘. 구명조끼" "야! 야! 있어. 슬라바! 슬라바! 여기 있어" "빨리 빨리. 야" "야, 야, 야! 조심해. 여기서 바로 하면 애들 다 다쳐" "나도 줘!" "구명조끼 다 던져!" "구명조끼 줘" "야, 구명조끼!" "내려. 내려" "야, 조심해" "나도 입어야 돼"

학생들의 다음 행동을 가로막은 건 역설적이게도 선내 방송이었습니다.

<녹취> 선내안내방송 : "다시 한 번 안내말씀 드립니다. 구명동의가 창용가능하신 승객 여러분들께서 는 구명동의를 착용해 주시고…"

<녹취> 학생 : "아니 무슨 일인지 말을 하고 해야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 "입으래" "구명조끼 입으라는 건 침몰되고 있다는 소리 아니야?"

<녹취> 선내안내방송 : "…계신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황은 알려주지 않은 채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은 계속됐습니다.

<인터뷰> 오용선(세월호 사고 생존자) : "'(왜) 방송에서 이걸 가만있으라고 하지? 이걸 탈출시켜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고, 학생들이 있는 곳과 방송실하고 거리가 70미터 정도 되고, 또 문을 4개 열어서 가야하고 또 배는 기울었지, 우리도 그 때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15분 남짓한 동영상 속 선내방송은 8~9차례쯤 반복됩니다.

왜 승무원은 방송을 통해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반복했을까?

<녹취> 강00(여객부 직원) : "처음에는 승객들을 안심시키고자 최초에는 제 자체 판단으로 안내방송을 했고 이후에는 사무장을 통해서 전달을 받고 안내방송을 했습니다."

하지만 배가 기운 상황에서 안전을 위해 취해야 할 행동이 뭔지 본인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녹취> 검사 : "안전방송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녹취> 강00(세월호 여객부 직원) :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잘 모르겠고 저는 승객들을 안심시키면서 대기를 하고 있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탈출 명령을 내릴 권한이 있는 선장의 지시도 받지 못했습니다.

<녹취> 검사 : "당시 세월호가 어떤 상황인지 조타실로부터 전달 및 상황에 대한 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지요."

<녹취> 강00(세월호 여객부 직원) : "예,받은 적 없습니다. 정확한 지시가 왔거나 침몰상황을 전달받았다면 계속적으로 대기하라는 취지의 안내방송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녹취> 검사 : "조타실이나 다른 여객부 승무원으로부터 승객들에 대한 대피 또는 탈출지시를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녹취> 강00(세월호 여객부 직원) : "저희가 수십 번 무전이나 전화로 조타실 쪽에 확인을 했으나 전달받은 사항은 없었습니다."

평소 비상시에 대처하는 훈련도 미흡했습니다.

<녹취> 검사 : "2항사와 3항사는 선내비상훈련은 거의 하지 않고 항해일지에 훈련한 것처럼 적기만 한다고 진술하는 등 대부분의 선원들이 선내비상훈련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피고인이 아는 한 선내비상훈련을 실시하지 않은 게 맞지요?"

<녹취> 이준석(세월호 선장) : "예"

<녹취> 검사 : "올해는 2014년 2월경 소화훈련을 단 1회 실시했다고 선원들이 이야기하는데 맞는가요?"

<녹취> 이준석 : "제가 확인을 못했습니다만 그때 제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 김홍경(세월호 사고 생존자) : "대피하지 마라, 그 자리에 있어라. 구명조끼 입고 그 자리에 있어라 했지 어디로 대피하라, 그런 방송만 했어도 애들이 알아서 높은 쪽으로 가니까 많이 올라왔을 텐데."

<녹취> 김00(세월호 사고 생존자) : "대피 방송만 제대로, 방송만 정말 제대로 했다면…"

<녹취> 재판장 : "방송만 제대로 했다면 친구들이 많이 살았을 것 같은가요"

<녹취> 김00 : "예"

첫 신고가 접수된 시각은 8시 52분.

신고자는 선원이 아닌 단원고 학생이었습니다.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119상황실입니다"

<녹취> 학생 : "살려 주세요"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여보세요. "

<녹취> 학생 : "여보세요"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네 119상황실입니다"

<녹취> 학생 : "여기 배인데 여기 배가 침몰하는 거 같아요"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배가 침몰해요?"

<녹취> 학생 : "제주도 가고 있었는데 여기 지금 배가 침몰하는 것 같아요"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자... 잠깐만요. 자... 지금 타고 계신 배가 침몰한다는 소리에요? 아니면 옆에 있는 다른 배가 침몰한다는 소리에요?"

<녹취> 학생 : "타고 가는 배가요. 타고 가는 배가!"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배가 침몰했어요? 배 이름이 뭐에요? 여보세요? "

<녹취> 학생 :"네"

<녹취>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 : "배 이름이 뭐에요? 제가 해경으로 바로 연결해 드릴게요"

<녹취> 학생 : "잠시만요. 세월호요. 세월호"

학생이 119에 신고하는 동안 선원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공판 조서를 보면 지휘 체계가 무너진 채 우왕좌왕하다가 시간만 보냈음이 드러납니다.

사고 당시 자기 방에 있던 선장은 부랴부랴 조타실로 돌아왔습니다.

선장이 돌아왔을 때 조타실엔 조타수와 2등 항해사는 조타기와 레이더 사이에서 몸을 기대고 있었습니다.

기관장은 조타실 앞쪽 봉을 잡고 있었고 3등 항해사는 울고 있었습니다.

<녹취> 이준석(세월호 선장) : "당시 조타실에 들어가서 '지금 힐링이 얼마냐'(균형이 어떻냐)고 3항사에게 묻자 "게이지가 다 넘어갔다"고 했습니다. 그게 35도까지 있는데 거기 다 넘어가면 35도 이상 경사가 진 상태입니다. 그 다음에 경사를 완화시켜 보려고 힐링펌프를 작동시켜 보라고 하니까 3등 항해사가 "힐링펌프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타수에게 "왜 이렇게 됐냐"고 물었더니 "타가 안 먹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관장에게 기관실에 내려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 사이 1등 항해사는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와 교신해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녹취> 세월호 : "저기… 해경에 연락해주십시오 본선, 위험합니다. 지금 배가 넘어가 있습니다"

<녹취> 제주 VTS : "네, 귀선 어디입니까?"

<녹취> 세월호 : "빨리, 빨리 좀 (연락)해주십시오"

<녹취> 제주 VTS : "네, 알겠습니다. 일단 해경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녹취> 세월호 : "지금 배가 많아 넘어가 있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빨리 좀 해주십시오."

9시 7분,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와도 교신이 이뤄졌습니다.

<녹취> 세월호 : "진도 VTS. 세월호"

<녹취> 진도 VTS : "세월호. 여기 진도연안 VTS. 귀선 지금 침몰 중입니까?"

<녹취> 세월호 : "예, 그렇습니다. 해경 빨리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 교신을 통해 세월호에 여러 차례 승객을 탈출시킬지 말지를 신속히 결정하라고 다그칩니다.

하지만 세월호에서는 탈출하면 바로 구조할 수 있는지를 되묻기만 합니다.

<녹취> 진도 VTS : "선장님께서 최종 판단을 하셔서 승객 탈출 시킬지 빨리 결정을 내리십시오."

<녹취> 세월호 : "그게 아니고 지금 탈출하면은 바로 구조할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후 9시 38분까지 세월호와 11차례 교신이 이어졌지만 세월호 선원 가운데 승객에게 탈출할 것을 알리거나 구조 활동을 벌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2등 항해사는 9시 20분쯤 무전기로 사무장에게 승객이 탈출하라고 방송할 것을 지시했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장은 대답이 없었고 실제 방송을 들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녹취> 검사 : "피고인은 사무부에서 승객들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배 밖으로 탈출하라는 방송을 하였습니다라고 진술하였는 바, 그것은 사무부에서 이러한 방송을 직접했다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사무부에서 방송한 것이 맞나요?"

<녹취> 김00(세월호 2등 항해사) : "저는 그렇게 방송이 된 줄 알았습니다."

<녹취> 검사 : "피고인은 승객들에게 탈출하라는 내용의 방송을 하라고 사무장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무전기로 호출하였으나 사무장은 호출에 답변하지 않았지요? -김00: 예. -검사: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무전기에 대고 일방적으로 퇴선방송을 하세요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녹취> 김00(세월호 2등 항해사) : "예"

기관장은 배가 기울자 바로 기관실에 연락해 기관부 선원들을 나오게 했습니다.

그 뒤 3층의 기관부 선실 통로에 30분쯤 모여 있다가 헬기 소리를 듣고 자신들만 탈출했습니다.

<녹취> 검사 : "피고인은 최종적으로 어디에서 머물렀나요?"

<녹취> 이00(세월호 3등 기관사) : "저는 제 방 앞에 있었습니다."

<녹취> 검사 : "피고인은 세월호의 선원이지요?"

<녹취> 이00(세월호 3등 기관사) : "예"

<녹취> 검사 : "비상시에 승객들을 대피시킬 의무가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 앞에 가서 승객 대피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려고 하였나요?"

<녹취> 이00(세월호 3등 기관사) : "일단 아무 것도 모르고 올라갔고 승객 대피라는 것은 어떤 상황인지 알고 대피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을 때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때 당시에는 대피해야 되는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무슨 일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사고 초기에는 선원들도 당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고 38분 뒤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로부터 곧 구조정이 도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승객들에게 퇴선 명령을 전달하고 출입문으로 안내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승객들에 대한 구호 조치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녹취> 검사 : "선장인 피고인은 당시 조타실에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가요?"

<녹취> 이준석(세월호 선장) : "거의 실신상태에 있었습니다. 교신내용을 듣지 못하고 사람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사실 제가 기억은 못하지만 그 상태가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녹취> 검사 : "승객들을 구조해야겠다, 승객들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는 것인가요?"

<녹취> 이준석(세월호 선장) : "그것보다도 사고가 나고 퇴선할 때까지 무엇을 한지도 모르고, 저는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합니다."

재판부가 9시 26분을 선원들이 승객들을 위험에 버려뒀다는 유기죄, 즉 범죄가 성립된 시점으로 보는 이윱니다.

<인터뷰> 박선영(세월호 유족측 변호사) : "위험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이 사람들을 그냥 두고 나가겠다 그냥 둬야겠다 나는 어떻게 할 수없다라고 마음을 잡았던 시기가 26분이라는 것이고요. 26분이라는 건 배가 많이 기울었고 주변에서 라이프링을 던져서 나오라고 하고 그런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시한이거든요"

첫 신고가 접수되고 6분 뒤인 오전 8시 58분.

목포해경은 100톤급 소형 경비정 123정에 출동 지시를 내렸습니다.

123정은 사고 지점에서 2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9시 10분엔 목포에 있던 헬기 B-511호기도 항공 구조사를 태우고 사고 해역으로 떠났습니다.

세월호를 뒤따라 가던 유조선 둘라에이스호도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로부터 구조 작업에 나서줄 것을 요청 받았습니다.

<녹취> 세월호 : "지금 50도 이상 좌현으로 기울어져서 사람들이 이렇게 좌우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벽을 잡고 겨우 버티고 있는 상태입니다."

<녹취> 진도 VTS : "근처 둘라에이스호가 접근 중에 있습니다."

<녹취> 둘라에이스호 : "인근에 대기하고 있다가 승객들 탈출하면 인명 구조하겠습니다."

9시 11분, 둘라에이스호 선장은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에 보트를 이용해 탈출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녹취> 문00(둘라에이스호 선장) : "1마일 앞에서 봤을 땐 구명 뗏목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 보니 컨테이너와 스티로폼 등 부유물이었습니다."

9시 27분, 목포에서 출발한 헬기 B-511호기가 세월호 상공에 도착합니다.

곧이어 해경의 123정도 도착해 9시 37분부터 구조작업을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헬기 B-511호기 기장은 현장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녹취> 양00(B-511호기 기장) : "사람들이 나와서 갑판에 대기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세월호 주변을 한 바퀴 돌 때까지 사람들이 안 나와서 '어, 이상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9시 34분, 항공 구조사가 내려가 세월호 조리원 김종임을 시작으로 6명을 구조했습니다.

하지만 항공 구조사는 선내에 진입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선내에 승객 4백여 명이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선내 진입을 지시하지도 않았습니다.

항공 구조사들은 무전기를 갖고있지 않아 지시를 할 수단조차 없었습니다.

<녹취> 박00(B-511호기 항공 구조사) : "저희는 올라온 승객을 구조하는 임무를 했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만약 선내에 많은 승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분명히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선내 진입을 시도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녹취> 권00(B-511호기 항공 구조사) : "선내로 진입할 상황이 아니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정보도 없었습니다. 70도 이상 기울어진 상태에서 탈출을 안 하고 배 안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해경 123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녹취> 이00(123정 해경 경사) : "많은 인원이 승선해 있는 배가 저 정도로 기울었다면 기다리지 못하고 탈출을 하거나, 구명벌을 이용해서라도 해상에 뛰어들거나, 외부 갑판에 탈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훈련받은 대로 승객들을 구조할 생각으로 갔는데,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라서 당황했습니다."

수백 명의 승객들이 선내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 그 사실을, 123정 해경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녹취> 김00(123정 정장) : "세월호 승객들이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퇴선 위치에 집결해있거나 구명벌을 투하해서 해상에 다 내려와 있을 것이라고 가상하고 갔는데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 너무 당황했습니다."

상황실과 현장, 헬기와 항공 구조사, 123정과 헬기 사이, 의사소통과 협력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구조를 도왔던 다른 선박 역시 현장 상황을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녹취> 박00(어업지도선 항해사) : "여객선이 침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사람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갔습니다. 그런데 주변 배들이 구조 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떠 있었고 123정과 헬기만 구조 활동을 하고 있어서 주변의 배들이 도와줄 필요가 없는 상황으로 잠시 착각했습니다.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여객들은 없고 승무원만 있는 배인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9시 37분, 해경 대원 2명은 7인승 고무 단정을 타고 세월호로 접근했습니다.

해경 고무 단정에 처음 구조된 이들은 바로 승객을 버리고 나온 세월호 선원들이었습니다.

<녹취> 박00(123정 해경 경장) : "처음에는 접근을 목적으로 선체 중앙부로 갔다가 사람이 보여서 선미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선원임을 밝혔다고 하는데, 그 당시 상황에서 제가 어떤 사람의 말을 인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위에는 헬기가 있고 밑에는 고무보트 엔진 소리가 나고 있었고, 당시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어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습니다.

9시 57분, 123정은 세월호 좌현이 완전히 침수됐다고 보고합니다.

그때까지도 선내 진입 명령은 없었습니다.

<녹취> 검사 : "9시 48분 경 해경지방청 상황실로부터 선체 진입 명령을 받은 적이 있나요?"

<녹취> 김00(123정 정장) : "예 제가 받았습니다."

<녹취> 검사 : "진입 명령을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녹취> 김00(123정 정장) : "그때 조타실의 인명을 구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쪽에 직원이 두 명 있었는데 미끄러져서 못 올라갔씁니다. 제가 올라가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습니다."

<녹취> 검사 : "지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녹취> 김00(123정 정장) : "그때 당황해서 깜빡 잊었습니다."

'당황해서 잊었다'는 123정 정장의 진술, 해경의 구조 과정에서 가장 뼈아픈 부분입니다.

<인터뷰> 박00(유가족) : "9시 30분이죠? 그러면 여기가 9시 42분이거든요. 그러면 00이가 엄마한테 전화했을 때가 31분이었어요. 해경이 거의 도착할 시간에 지금 이 배의 각도를 보면 그렇게 많이 넘어가 있는 상태는 아니에요. 배가 지금 이렇게 20도 기울어져 있는데 해경이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해요. 해경이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해경이 안 들어간 이유는 왜 안 들어갔는지 그런 부분들이 매우 의심스럽다는 얘기죠."

퇴선방송도 마찬가지 이유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23정 정장은 현장에 도착해 퇴선 방송을 했다고 말했지만,

<인터뷰> 김00(123정 정장) : "(경비정) 함내 경보를 이용해서 승객 총원 퇴선하라는, 바다로 뛰어내리라는 방송을 수회 실시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퇴선 방송은 없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거짓말이었던 것입니다.

<녹취> 김00(123정 정장) : "구명보트를 내리고 세월호 쪽으로 접근해 들어갔습니다. 퇴선 방송을 했어야 되는데 퇴선 방송을 하지 못했습니다."

10시 6분, 123정은 다시 세월호로 접근합니다.

해경 대원은 세월호 다인실 유리창을 깨고 사람들을 끌어올렸습니다.

<녹취> 이00(123정 해경 경사) : "창문을 깰 때 창문 높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유리창을 깨고 두 명은 갑판으로 쉽게 올라왔고, 그동안 세월호가 계속 좌현으로 침수하면서 높이가 낮아짐에 따라 나머지 두 명은 손을 잡고 끌어올렸고, 최종적으로 나머지 두 명은 너무 낮아져서 사다리로 올려서 구조했습니다."

생존자 누구도 갑판부와 기관부 승무원이 구조를 하거나 승객들에게 탈출을 지시하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인터뷰> 오용선 : "선원들이 진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건데… 자기네들도 살려고 그냥 나가버렸으니까. 이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탈출은 그야말로 '알아서'였습니다

<인터뷰> 김동수(세월호 사고 생존자) : "저는 몇 명 구했는지도 생각안나고, 김홍균씨가 제가 처음 구조할때 20명이라고 해서 20명이라고 하지 저는 거기서 구해서 구조 끝나고 그분들은 다 가면, 저 혼자 홀에서 학생들, 일반인들 누가 누가 구한것도 모르고. 어느 부부. 학생. 일반인. 구한 것만 생각나지. 몇 명을 구한거나 어떤 사람을… 얼굴이 전혀 기억 안나요."

해경이 마지막으로 선내에서 나온 학생을 구조한 건, 10시 13분.

<녹취> 박00(123정 해경 경사) : "정말 배가 가라앉는 순간에 마지막 학생이 나왔습니다. 거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들이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학생이 울었던 것은 기억합니다. 그 학생 이후로 다른 학생은 보지 못했습니다."

123정이 세월호에 접안한 시간은 두 번에 걸쳐 약 11분입니다.

10시 18분, 세월호는 108도로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우현 3층 난간에 모여있던 마지막 40여 명이 이때 바다로 뛰어듭니다.

이들은 해경과 어업지도선에 구조됐습니다.

한 시간 뒤인 11시 18분, 배의 앞부분 일부만 남기고 세월호는 바다 밑으로 가라 앉습니다.

잠수가 가능한 서해지방청 해경특공대원이 사고 현장에 도착한 시각은 11시 28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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