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해외 입양이 최선? “옷장에 가두고 음식도 안 줬어요”

입력 2015.05.11 (11:43) 수정 2015.05.11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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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입양…아직도 최선입니까?”

최근 한미 두 나라 언론은 미국의 한 프로야구 유망주가 한인 입양아 출신이라며 그의 성장 배경을 집중 조명했다. 미국 언론은 그의 소속 구단이 그를 지난해 최고의 선수로 뽑은 데 대해 ‘입양아들의 롤모델’‘수백만 명의 입양아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고 표현했다. 한국 언론은 그가 한국인이라는데 이목을 집중했다.

두 나라 언론과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면 미묘한 차이가 하나 있다. 우리는 ‘선진국’에 가 '성공의 기회'를 거머쥔 해외 입양인으로 그를 바라본 반면 미 언론은 ‘귀감’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의 역경 극복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몬티(45세)는 이태원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 그는 해외입양인이다. 한국 이름은 한호규이다. 그는 앞서 말한 '성공한' 입양인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경우다. 해외입양을 사랑의 실천이며 미덕으로만 여기는 우리의 관념을 산산이 부서지게 하는 사례이다.

그는 홀트를 통해 8살 때 미국의 한 입양가정에 보내졌다. 그런데 31년 만인 지난 2009년 39살의 나이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금의환향’일까? 아니다. 미국에서 쫓겨 나왔다. 그는 왜 성공하지 못했고 무얼 얼마나 잘못했길래 미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것일까?

‘기회의 땅’ 미국에서 그는 어쩌다 그 좋다는 기회를 거머쥐지 못한 것일까? 개인의 무능 탓일까? 숱한 의문을 풀어가는 출발점은 홀트가 그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보낸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옷장에 가두고 음식도 안 줬다”…두 번의 파양



몬티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미 입양 당시의 사진이다. 지금은 마흔 중턱의 나이지만 사진 속 몬티는 참 해맑기 그지없는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나 이 미소 뒤엔 어린 몬티의 숱한 눈물과 끝 모를 두려움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옥과도 같은 시절이었죠. 저는 정말 작은 방에서 살아야 했어요. 집안일을 해야만 했어요. 그들은 이미 두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어요. 학교에 갔다가 늦게 오면 그들은 저를 벌줬어요. 옷장에 몇 주간 음식도 주지 않고 가둬두거나 음식을 주더라도 물밖에 안 줬어요.”

그에 대한 홀트의 입양기록에 따르면 그의 첫 입양부모는 아이오와의 호먼 부부였다. 그는 이 부부와 약 1년간 함께 살다 파양됐다. 양부모의 학대 사실이 학교와 지역사회에 알려지면서 이뤄진 조치다.

“온몸에 멍이 든 채로 학교에 간 날 선생님이 반으로 저를 들여보내면서 등을 만졌는데 제가 움찔한 거죠. 선생님은 직관적으로 저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느끼셨어요.”

9살 몬티는 그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으려 했다. 살아남기 위해 어린 꼬마는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야 했고 학대가정의 울타리에서 답을 구할 상대는 자신뿐이었다.

“저는 제가 잘못한 줄 알았어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계속해서 생각했어요. 어린 아이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면 당연히 본인이 잘못해서 그런 일이 생긴 거라 생각하게 돼요. ”

파양 후 몬티는 위탁가정과 보육시설을 전전하다 다시 하인즈 부부에게 입양된다. 이들과는 6년간 같이 살았지만 새로운 양아버지 역시 문제가 많았다. 신체적 학대가 되풀이됐고 성적 학대까지 더해졌다. 양성애자인 양아버지는 몬티뿐 아니라 이웃의 다른 소년을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고 이 사건으로 그가 17살이던 1987년 가정은 해체됐다.

학대의 흔적은 그 몸과 마음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의 발가락이 아직도 뒤틀려 있다.

“양아버지가 제 오른쪽 발가락을 반쪽으로 부러뜨리고 담뱃불로 여기 두 곳을 지진 적이 있죠.. 그 후 발가락에 망치족지라고 굳은살이 생겼고 치료를 받았는데 그때 의료진들이 아예 발가락을 부러뜨리고 다시 핀을 삽입해야만 했어요.”

■ “내가 미국 시민이 아니라고요?”

입양인들의 파양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개인의 불운이라며 안타까워하곤 한다. 그런데 몬티의 이후 궤적을 살펴보면 불운만을 탓할 수는 없다.

성인이 된 몬티는 1993년부터 3년 반 동안 걸프전에 참전한다. 불안한 성장 과정에서 이렇다 할 기술도 익히지 못한 그에게 기회가 되리란 기대였다. 그는 이라크 주둔 최전방 물자수송을 담당했다.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도 불가피했다. 가서는 안 될 곳이었다는 게 걸프전에 대한 그의 기억이었다.

몬티가 한국에 추방된 이유는 전역 후 하게 된 트럭운전 일 때문이었다. 마약단속반이 그가 운송하던 화물을 불시 단속했는데 화물칸에 마리화나가 있었다는 것이다. 몬티는 그저 상사의 업무지시로 그날의 운송을 맡게 됐고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한다.

마약 수송 혐의로 법에 처음 연루된 몬티는 이 사건으로 4년여 수형생활을 하던 중 처음으로 자신이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일로 1년을 싸웠죠. 제 (입양인) 형이 선임한 변호사는 1981년 입양법에 의해 제가 미국인이라고 주장했지만, 미 이민국 판사는 2000년 법을 따라야 한다고 했어요. 2000년 법은 미국인에게 입양되면 바로 미국인이 된다는 법이지만 저는 그 전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국적이 취득된 게 아니었단 거에요”

미국에서 30여 년을 살았고 두 번이나 미국인 가정의 자녀였으며 학교를, 그리고 회사에 다녔던 몬티. 자신이 미국인이 아니라는 의심조차 할 수 없었기에 미국을 위한 전쟁에 참여하고도 다른 이민자들처럼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취득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였다.

허술한 입양관리…그러나 그는 싸울 힘 조차 없다.

두 번째 양어머니는 이와 관련해 최근 몬티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몬티를 입양했던 1981년 미국의 입양기관은 시민권 취득을 위해 법적 절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의 입양기관과 우리 정부는 책임이 없을까? 국내 해외입양인 후원단체들에 따르면 몬티가 입양된 1970년대 한국의 입양법은 해외입양인이 외국 국적을 취득할 때 입양기관은 이를 법무부에 통보하고 한국 국적을 삭탈할 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몬티가 다시 한국에 왔을때 그는 한국 국적이 살아 있었다.) 결론적으로 어린 몬티의 인생에 관여한 한국 정부, 홀트, 미국 입양기관 그 누구도 아이를 주고받기만 했지 그들에게 주어진 책임은 내버려둔 것이다.

답답하지만 그는 울분만 터뜨릴 뿐이다. 한국땅에서 그는 하루하루 일자리 걱정이 더 큰 비정규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말을 배울 기회도 갖지 못한 채 그저 영어가 통하는 이태원을 떠돌고 있다.

몬티는 말한다. “친어머니를 만났어요. 어머니는 제가 입양 간 사실도, 파양된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저를 그리며 10여 년을 끼니때마다 제 밥을 떠놓았다고 하더군요. 홀트는 장사를 했던 것뿐이에요. 양부모들에게 돈을 받고 입양 보내는 데만 열을 올렸지 책임지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거죠. 내 잃어버린 31년을 되돌려 받고 싶어요.”

■ 해외 입양 ‘선행’인가? ‘장사’인가?

KBS는 이번 취재에서 해외입양인들과 자녀를 해외로 입양 보낸 부모를 여럿 만났다. 몬티처럼 자신의 입양배경을 모르는 이들, 심지어 친자의 입양 사실조차 모르는 친생부모의 경우도 많았다. 이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홀트를 비롯한 입양기관들은 입양 장사를 하느라 아이를 해외에 팔아넘긴 것이나 다름없으며 당사자들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는 것이다.



박수정(미국명 Raina Smithley.39세)씨와 그녀의 친어머니 이정숙(가명. 60세)씨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엄마 이정숙씨는 미혼모의 몸으로 수정씨를 낳아 세 살 때까지 키웠다. 이 씨는 강압에 의한 임신으로 수정 씨를 낳게 됐지만 어떻게든 키우려다 입양을 보낸 경우다.

이 씨는 딸을 보육원에 맡길 때 딸과 함께 찍은 사진 몇장과 자신의 본적, 이름을 남겼지만 딸 수정 씨는 한평생 자신이 경찰서 앞에 버려진 것으로 알고 컸다. 이를 엄마와 상봉 후 알게 된 후 수정 씨는 크게 분노했다.

"제가 한국 가족을 찾자마자 알게 된 사실은 가족이 저를 버린 게 아니었다는 점과 다시 찾고 싶어 했다는 거였거든요. 그 얘길 듣고 보육원 측에 무척 화가 났어요."

"엄마 말이 보육원에서는 저를 다시 찾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고 했대요. 친자식을 말 그대로 돈 내고 사라는 얘긴데 이건 완전히 비윤리적이죠. 저는 (당시 입양기관이나 보육원이) 입양을 최대한 많이 시키려고 입양을 독려했고 그런 과정에서 돈을 벌었던 게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 국외 입양 수수료 아동 1명당 2,081만 원…홀트는?

KBS는 이런 입양 장사 논란에 대해 홀트에 반론을 요청했다. 처음 인터뷰에 부정적이었던 홀트는 얼마후 입장을 바꿔 서면 인터뷰에 응했다.

첫째, 홀트는 2013년 국외 입양아동 1인당 입양비용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며 논란을 부인했다. 이 자료는 홀트가 입양사업을 해온 60년 중 최근 한 시기의 자료이기 때문에 전체를 다 들여다보기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밝힌다.



홀트는 해외로 아이 1명을 입양 보낼 때 오히려 523만 원의 적자를 보는 구조라고 주장한다.

홀트는 2012년 입양특례법으로 입양절차가 종전보다 길어지면서 입양아들은 보통 2년을 한국에서 대기한다며 이 기준으로 KBS에 수입·지출 항목을 제시했다.

홀트가 제시한 자료를 보면 양부모가 아이 한 명을 입양하며 내는 돈은 후원금을 포함해 2천81만 원이다. 여기에 정부지원금 천3백26만 원까지 포함하면 아이 한명당 총수입은 3천4백8만 원이다.(정부는 지난 2008년 무렵부터 홀트의 입양지원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아동 한 명당 매달 55만 원 가량을 홀트에 주고 있다.)

그렇다면 지출은 어떨까? 3천931만 원에 이른다. 가장 큰 지출항목은 위탁양육 모가 아이를 일대일로 키우며 받는 생계비와 양육수당으로 정부 지원금보다 조금 많은 천5백66만 원이다. 그다음이 홀트의 직원 인건비다. 천218만 원이다. 아이 한 명당 한 달에 50만 원 상당의 직원 인건비가 지출 항목에 포함돼 있다.

홀트의 해외입양은 아동 한명당 한 달에 163만 원이 소요되는 고비용 사업이다. 홀트는 위탁양육 모가 일대일 집중돌봄을 하기 때문에 이런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가정을 연계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데 대한 불편함도 드러냈다. 홀트는 입양뿐 아니라 미혼모 가정을 위한 지원사업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외 입양인 단체들은 그러나 반문한다. 그 지출 항목에 홀트를 유지시키는 직원 인건비가 포함되지 않았냐고…. 또 양부모들로부터 나온 거액의 수수료를 근간 삼아 한 해 수천 명의 입양아들을 송출해 '막대한 흑자'를 남겼던 그 시절은 벌써 잊었느냐고 말이다.

KBS는 몬티와 수정 씨의 입양 기록에 심각한 왜곡이 있다는 점도 문의했다. 두 사람 모두 경찰에 의해 발견돼 보육원에 맡겨졌고 그 직후 홀트에 입양의뢰 됐다는 것이었는데 사실과 달랐기 때문이다.

홀트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아동복지법에 따라 무연고자만이 시설 입소가 가능했습니다. 친가족이 시설입소 의뢰를 했다고 하더라도 행정상의 절차로 기아로 처리되어 보호되었을 것입니다."

보육시설은 연고가 있는 아동이더라도 무연고자로 기록을 바꿨고 이들을 홀트에 입양 의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KBS의 확인 결과 이 같은 사실 왜곡의 문제점과 부작용은 당시 신문 기사에도 자주 등장했다. 70년대 홀트 역시 이런 관행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홀트는 이런 기록 왜곡에 대한 책임은 자신들의 영역 밖이라고 주장한다.

수정 씨의 엄마 이정숙 씨는 홀트의 설명에 대해 이렇게 반문했다.

"그때 보육원에서 딸을 입양 보내지 않으면 자식 앞길 망치는 사람 취급하며 입양보내야 한다고 설득했어요. 제가 제 딸에게만 죄인이지 그 사람들에게도 죄인이었던가요? 제 딸과 딸을 입양 보내는 저는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였나요?"

숨이 끊길 듯 깊은 곳에서 눈물을 토해내는 그녀에게 사과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 입양의 날…묻어 둔 슬픔 언제까지?

2012년 입양특례법이 개정되기 전 한국의 입양법은 그랬다. 완벽한 단절이 아이와 친생부모의 행복을 보장하리란 생각이 지배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완벽해 보이던 단절은 치유하기 힘든 아픔으로 확장되고 있고 그들의 슬픔은 법이 바뀐 2012년 뒤에도 그 어느 곳에서도 위로받을 길이 없다.

5월 11일은 정부가 정한 입양의 날이다. 온정이 넘치고 축복이 가득할 것만 같은 이 날 60년간 해외로 송출된 입양인 20만여 명의 슬픔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들의 아픔을 여전히 개인의 아픔으로만 여기고 있다. 지난해에도 535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됐다. 그들도 언젠가 고국을 방문해 같은 아픔을 겪게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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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해외 입양이 최선? “옷장에 가두고 음식도 안 줬어요”
    • 입력 2015-05-11 11:43:47
    • 수정2015-05-11 18:52:35
    취재후·사건후
“해외 입양…아직도 최선입니까?”

최근 한미 두 나라 언론은 미국의 한 프로야구 유망주가 한인 입양아 출신이라며 그의 성장 배경을 집중 조명했다. 미국 언론은 그의 소속 구단이 그를 지난해 최고의 선수로 뽑은 데 대해 ‘입양아들의 롤모델’‘수백만 명의 입양아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고 표현했다. 한국 언론은 그가 한국인이라는데 이목을 집중했다.

두 나라 언론과 네티즌들의 반응을 보면 미묘한 차이가 하나 있다. 우리는 ‘선진국’에 가 '성공의 기회'를 거머쥔 해외 입양인으로 그를 바라본 반면 미 언론은 ‘귀감’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의 역경 극복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몬티(45세)는 이태원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 그는 해외입양인이다. 한국 이름은 한호규이다. 그는 앞서 말한 '성공한' 입양인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른 경우다. 해외입양을 사랑의 실천이며 미덕으로만 여기는 우리의 관념을 산산이 부서지게 하는 사례이다.

그는 홀트를 통해 8살 때 미국의 한 입양가정에 보내졌다. 그런데 31년 만인 지난 2009년 39살의 나이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금의환향’일까? 아니다. 미국에서 쫓겨 나왔다. 그는 왜 성공하지 못했고 무얼 얼마나 잘못했길래 미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것일까?

‘기회의 땅’ 미국에서 그는 어쩌다 그 좋다는 기회를 거머쥐지 못한 것일까? 개인의 무능 탓일까? 숱한 의문을 풀어가는 출발점은 홀트가 그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보낸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옷장에 가두고 음식도 안 줬다”…두 번의 파양



몬티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미 입양 당시의 사진이다. 지금은 마흔 중턱의 나이지만 사진 속 몬티는 참 해맑기 그지없는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나 이 미소 뒤엔 어린 몬티의 숱한 눈물과 끝 모를 두려움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옥과도 같은 시절이었죠. 저는 정말 작은 방에서 살아야 했어요. 집안일을 해야만 했어요. 그들은 이미 두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었어요. 학교에 갔다가 늦게 오면 그들은 저를 벌줬어요. 옷장에 몇 주간 음식도 주지 않고 가둬두거나 음식을 주더라도 물밖에 안 줬어요.”

그에 대한 홀트의 입양기록에 따르면 그의 첫 입양부모는 아이오와의 호먼 부부였다. 그는 이 부부와 약 1년간 함께 살다 파양됐다. 양부모의 학대 사실이 학교와 지역사회에 알려지면서 이뤄진 조치다.

“온몸에 멍이 든 채로 학교에 간 날 선생님이 반으로 저를 들여보내면서 등을 만졌는데 제가 움찔한 거죠. 선생님은 직관적으로 저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느끼셨어요.”

9살 몬티는 그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으려 했다. 살아남기 위해 어린 꼬마는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야 했고 학대가정의 울타리에서 답을 구할 상대는 자신뿐이었다.

“저는 제가 잘못한 줄 알았어요.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계속해서 생각했어요. 어린 아이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면 당연히 본인이 잘못해서 그런 일이 생긴 거라 생각하게 돼요. ”

파양 후 몬티는 위탁가정과 보육시설을 전전하다 다시 하인즈 부부에게 입양된다. 이들과는 6년간 같이 살았지만 새로운 양아버지 역시 문제가 많았다. 신체적 학대가 되풀이됐고 성적 학대까지 더해졌다. 양성애자인 양아버지는 몬티뿐 아니라 이웃의 다른 소년을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고 이 사건으로 그가 17살이던 1987년 가정은 해체됐다.

학대의 흔적은 그 몸과 마음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의 발가락이 아직도 뒤틀려 있다.

“양아버지가 제 오른쪽 발가락을 반쪽으로 부러뜨리고 담뱃불로 여기 두 곳을 지진 적이 있죠.. 그 후 발가락에 망치족지라고 굳은살이 생겼고 치료를 받았는데 그때 의료진들이 아예 발가락을 부러뜨리고 다시 핀을 삽입해야만 했어요.”

■ “내가 미국 시민이 아니라고요?”

입양인들의 파양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개인의 불운이라며 안타까워하곤 한다. 그런데 몬티의 이후 궤적을 살펴보면 불운만을 탓할 수는 없다.

성인이 된 몬티는 1993년부터 3년 반 동안 걸프전에 참전한다. 불안한 성장 과정에서 이렇다 할 기술도 익히지 못한 그에게 기회가 되리란 기대였다. 그는 이라크 주둔 최전방 물자수송을 담당했다.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도 불가피했다. 가서는 안 될 곳이었다는 게 걸프전에 대한 그의 기억이었다.

몬티가 한국에 추방된 이유는 전역 후 하게 된 트럭운전 일 때문이었다. 마약단속반이 그가 운송하던 화물을 불시 단속했는데 화물칸에 마리화나가 있었다는 것이다. 몬티는 그저 상사의 업무지시로 그날의 운송을 맡게 됐고 자신은 그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한다.

마약 수송 혐의로 법에 처음 연루된 몬티는 이 사건으로 4년여 수형생활을 하던 중 처음으로 자신이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일로 1년을 싸웠죠. 제 (입양인) 형이 선임한 변호사는 1981년 입양법에 의해 제가 미국인이라고 주장했지만, 미 이민국 판사는 2000년 법을 따라야 한다고 했어요. 2000년 법은 미국인에게 입양되면 바로 미국인이 된다는 법이지만 저는 그 전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국적이 취득된 게 아니었단 거에요”

미국에서 30여 년을 살았고 두 번이나 미국인 가정의 자녀였으며 학교를, 그리고 회사에 다녔던 몬티. 자신이 미국인이 아니라는 의심조차 할 수 없었기에 미국을 위한 전쟁에 참여하고도 다른 이민자들처럼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취득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였다.

허술한 입양관리…그러나 그는 싸울 힘 조차 없다.

두 번째 양어머니는 이와 관련해 최근 몬티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몬티를 입양했던 1981년 미국의 입양기관은 시민권 취득을 위해 법적 절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의 입양기관과 우리 정부는 책임이 없을까? 국내 해외입양인 후원단체들에 따르면 몬티가 입양된 1970년대 한국의 입양법은 해외입양인이 외국 국적을 취득할 때 입양기관은 이를 법무부에 통보하고 한국 국적을 삭탈할 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몬티가 다시 한국에 왔을때 그는 한국 국적이 살아 있었다.) 결론적으로 어린 몬티의 인생에 관여한 한국 정부, 홀트, 미국 입양기관 그 누구도 아이를 주고받기만 했지 그들에게 주어진 책임은 내버려둔 것이다.

답답하지만 그는 울분만 터뜨릴 뿐이다. 한국땅에서 그는 하루하루 일자리 걱정이 더 큰 비정규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말을 배울 기회도 갖지 못한 채 그저 영어가 통하는 이태원을 떠돌고 있다.

몬티는 말한다. “친어머니를 만났어요. 어머니는 제가 입양 간 사실도, 파양된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저를 그리며 10여 년을 끼니때마다 제 밥을 떠놓았다고 하더군요. 홀트는 장사를 했던 것뿐이에요. 양부모들에게 돈을 받고 입양 보내는 데만 열을 올렸지 책임지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거죠. 내 잃어버린 31년을 되돌려 받고 싶어요.”

■ 해외 입양 ‘선행’인가? ‘장사’인가?

KBS는 이번 취재에서 해외입양인들과 자녀를 해외로 입양 보낸 부모를 여럿 만났다. 몬티처럼 자신의 입양배경을 모르는 이들, 심지어 친자의 입양 사실조차 모르는 친생부모의 경우도 많았다. 이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홀트를 비롯한 입양기관들은 입양 장사를 하느라 아이를 해외에 팔아넘긴 것이나 다름없으며 당사자들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는 것이다.



박수정(미국명 Raina Smithley.39세)씨와 그녀의 친어머니 이정숙(가명. 60세)씨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엄마 이정숙씨는 미혼모의 몸으로 수정씨를 낳아 세 살 때까지 키웠다. 이 씨는 강압에 의한 임신으로 수정 씨를 낳게 됐지만 어떻게든 키우려다 입양을 보낸 경우다.

이 씨는 딸을 보육원에 맡길 때 딸과 함께 찍은 사진 몇장과 자신의 본적, 이름을 남겼지만 딸 수정 씨는 한평생 자신이 경찰서 앞에 버려진 것으로 알고 컸다. 이를 엄마와 상봉 후 알게 된 후 수정 씨는 크게 분노했다.

"제가 한국 가족을 찾자마자 알게 된 사실은 가족이 저를 버린 게 아니었다는 점과 다시 찾고 싶어 했다는 거였거든요. 그 얘길 듣고 보육원 측에 무척 화가 났어요."

"엄마 말이 보육원에서는 저를 다시 찾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고 했대요. 친자식을 말 그대로 돈 내고 사라는 얘긴데 이건 완전히 비윤리적이죠. 저는 (당시 입양기관이나 보육원이) 입양을 최대한 많이 시키려고 입양을 독려했고 그런 과정에서 돈을 벌었던 게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 국외 입양 수수료 아동 1명당 2,081만 원…홀트는?

KBS는 이런 입양 장사 논란에 대해 홀트에 반론을 요청했다. 처음 인터뷰에 부정적이었던 홀트는 얼마후 입장을 바꿔 서면 인터뷰에 응했다.

첫째, 홀트는 2013년 국외 입양아동 1인당 입양비용에 대한 자료를 제시하며 논란을 부인했다. 이 자료는 홀트가 입양사업을 해온 60년 중 최근 한 시기의 자료이기 때문에 전체를 다 들여다보기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밝힌다.



홀트는 해외로 아이 1명을 입양 보낼 때 오히려 523만 원의 적자를 보는 구조라고 주장한다.

홀트는 2012년 입양특례법으로 입양절차가 종전보다 길어지면서 입양아들은 보통 2년을 한국에서 대기한다며 이 기준으로 KBS에 수입·지출 항목을 제시했다.

홀트가 제시한 자료를 보면 양부모가 아이 한 명을 입양하며 내는 돈은 후원금을 포함해 2천81만 원이다. 여기에 정부지원금 천3백26만 원까지 포함하면 아이 한명당 총수입은 3천4백8만 원이다.(정부는 지난 2008년 무렵부터 홀트의 입양지원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아동 한 명당 매달 55만 원 가량을 홀트에 주고 있다.)

그렇다면 지출은 어떨까? 3천931만 원에 이른다. 가장 큰 지출항목은 위탁양육 모가 아이를 일대일로 키우며 받는 생계비와 양육수당으로 정부 지원금보다 조금 많은 천5백66만 원이다. 그다음이 홀트의 직원 인건비다. 천218만 원이다. 아이 한 명당 한 달에 50만 원 상당의 직원 인건비가 지출 항목에 포함돼 있다.

홀트의 해외입양은 아동 한명당 한 달에 163만 원이 소요되는 고비용 사업이다. 홀트는 위탁양육 모가 일대일 집중돌봄을 하기 때문에 이런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가정을 연계하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데 대한 불편함도 드러냈다. 홀트는 입양뿐 아니라 미혼모 가정을 위한 지원사업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외 입양인 단체들은 그러나 반문한다. 그 지출 항목에 홀트를 유지시키는 직원 인건비가 포함되지 않았냐고…. 또 양부모들로부터 나온 거액의 수수료를 근간 삼아 한 해 수천 명의 입양아들을 송출해 '막대한 흑자'를 남겼던 그 시절은 벌써 잊었느냐고 말이다.

KBS는 몬티와 수정 씨의 입양 기록에 심각한 왜곡이 있다는 점도 문의했다. 두 사람 모두 경찰에 의해 발견돼 보육원에 맡겨졌고 그 직후 홀트에 입양의뢰 됐다는 것이었는데 사실과 달랐기 때문이다.

홀트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아동복지법에 따라 무연고자만이 시설 입소가 가능했습니다. 친가족이 시설입소 의뢰를 했다고 하더라도 행정상의 절차로 기아로 처리되어 보호되었을 것입니다."

보육시설은 연고가 있는 아동이더라도 무연고자로 기록을 바꿨고 이들을 홀트에 입양 의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KBS의 확인 결과 이 같은 사실 왜곡의 문제점과 부작용은 당시 신문 기사에도 자주 등장했다. 70년대 홀트 역시 이런 관행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홀트는 이런 기록 왜곡에 대한 책임은 자신들의 영역 밖이라고 주장한다.

수정 씨의 엄마 이정숙 씨는 홀트의 설명에 대해 이렇게 반문했다.

"그때 보육원에서 딸을 입양 보내지 않으면 자식 앞길 망치는 사람 취급하며 입양보내야 한다고 설득했어요. 제가 제 딸에게만 죄인이지 그 사람들에게도 죄인이었던가요? 제 딸과 딸을 입양 보내는 저는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였나요?"

숨이 끊길 듯 깊은 곳에서 눈물을 토해내는 그녀에게 사과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 입양의 날…묻어 둔 슬픔 언제까지?

2012년 입양특례법이 개정되기 전 한국의 입양법은 그랬다. 완벽한 단절이 아이와 친생부모의 행복을 보장하리란 생각이 지배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완벽해 보이던 단절은 치유하기 힘든 아픔으로 확장되고 있고 그들의 슬픔은 법이 바뀐 2012년 뒤에도 그 어느 곳에서도 위로받을 길이 없다.

5월 11일은 정부가 정한 입양의 날이다. 온정이 넘치고 축복이 가득할 것만 같은 이 날 60년간 해외로 송출된 입양인 20만여 명의 슬픔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들의 아픔을 여전히 개인의 아픔으로만 여기고 있다. 지난해에도 535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됐다. 그들도 언젠가 고국을 방문해 같은 아픔을 겪게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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