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영웅의 나라’ 북한…남발 배경은?

입력 2015.07.18 (08:07) 수정 2015.07.1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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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북한 내부를 심층 분석하는 [클로즈업 북한]입니다.

전 세계에서 ‘영웅’이 가장 많은 나라, 미국도, 중국도 아닌 바로 북한인데요.

해마다 100명 정도이던 ‘영웅 칭호’ 수여자가 김정은 시대 들어서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군인과 경찰부터, 스포츠 스타, 예술인, 아이를 많이 낳은 다산 여성들까지 폭도 갈수록 넓어지고 있는데요.

클로즈업 북한 오늘은, ‘영웅의 나라’ 북한의 영웅 남발 실태를 집중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앳된 얼굴의 북한 여성.

스무 살의 나이에 7명의 고아를 맡아 키워 ‘처녀 어머니’로 불리는 장정화 씨다.

북한 매체들은 최근 장 씨의 사연을 수차례 소개하며, 본격적인 영웅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직접 나서 ‘시대의 본보기’ 라며 장 씨를 추켜세우기도 했다.

<녹취> 장정화(북한 ‘처녀 어머니’/지난 달) : "우리 아이들을 더 잘 키워 처녀 어머니로 내세워 주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사랑과 믿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지난 9일에는, 생전 두 번의 영웅 칭호를 받은 정춘실의 빈소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화환을 보내기도 했다.

<녹취> 조선중앙TV (지난 9일) : "정춘실 동지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 9일 고인의 영전에 화환을 보내셨습니다."

최고 지도자의 추모까지 받은 평범한 상업관리소 소장.

북한에서 영웅의 위상은 이처럼 높다.

그렇다면, 북한에서 ‘영웅’은 어떤 의미일까.

<인터뷰> 박세영(前 북한 육상 국가대표/탈북자) : "일단 노력영웅 칭호를 받으면 그 가족은 아예 그냥 대대손손 영웅 집안이 되면서 그렇게 그런 칭호를 받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국민들의, 모든 인민들의 숭배 대상이 되는 거죠. 다 우러러 보는 그런 사람이 되는 거예요."

북한에서 영웅은 최고 수준의 ‘공화국영웅’과 한 단계 낮은 ‘노력영웅’으로 분류된다.

지난 2013년 북한사회는 한 공화국영웅의 탄생으로 떠들썩했다.

화제의 인물은 평양의 교통보안원인 리경심.

<녹취> 조선중앙TV(2013년 5월) : "평양시 인민보안국 교통지휘대 지구대 대원 리경심에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영웅칭호와 함께 금별메달 및 국기훈장 제 1급이 수여됐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혁명의 수뇌부, 즉 김정은을 결사옹위 했다며 최고 영예인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한 것이다.

당시 김정은이 어떤 위급 상황에 처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녹취> 리경심(인민보안국 교통지휘대 대원/2013년 5월) : "교통보안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응당한 일을 한 저에게 공민의 최고 영예인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해주시니 이 은정에 어떻게 보답해야 되겠는지..."

리경심에 대한 파격적인 공화국영웅 수여는 북한 당국의 ‘영웅 선정 기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터뷰> 서재평(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국장) : "북한 사회는 어디까지나 당과 수령, 특별히 수령의 존엄을 지켜내고 수령을 옹호, 결사하는 그 부분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을 영웅으로 가장 많이 내세워줍니다. 수령을 목숨으로 옹호하고 지키는데 공로를 세운 사람들을 영웅 칭호를 수여하는 겁니다."

이처럼 공화국영웅은 국가 안보나 김일성 일가에 목숨으로 충성한 인물에게 주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화국영웅 칭호가 예외적으로 스포츠 스타에게 수여된 사례도 있다.

1999년 세비야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쟁쟁한 세계 정상급 선수들 사이로, 왜소한 동양 선수 한 명이 눈에 들어온다.

42,195킬로미터의 긴 여정을 거쳐 결승선 테이프를 가장 먼저 끊은 사람은 북한의 정성옥.

<녹취> 조선중앙TV(1999년 9월) :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만을 그리며 달렸다고 하면서 바로 그것이 곧 샘솟는 힘이 되고 승리의 장패를 열 수 있는 원천으로 되었다고 긍지 넘쳐 말했습니다."

정성옥의 깜짝 우승에, 북한 당국도 한껏 고무됐다.

정성옥의 일대기를 그린 TV 프로그램, 특별 뉴스까지 제작될 정도였다.

<인터뷰> 박세영(前 북한 육상 국가대표/탈북자) : "그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세계 기자들 앞에서 장군님을 부르면서 달렸다, 그리고 결승선 테이프 끊을 때도 그 테이프 선이 장군님께서 손을 벌리고 ’성옥아, 어서 오너라.’ 하고 막 반겨주는...그 말 한 마디 때문에 그 여자는 노력영웅을 뛰어 넘어서 공화국영웅을 뛰어 넘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올라갔잖아요."

김정은 시대 들어서도 스포츠 분야의 영웅 탄생은 계속되고 있다.

<녹취> 지난 해 10월 : "주체 체육의 발전 면모를 힘있게 과시하고 온 승리자들이여, 참으로 장하다"

최근 각종 국제대회에서 여자축구대표팀과 북한 역도 간판스타 엄윤철과 김은국, 여자 유도의 안금애가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들에게는 파격적인 대우도 제공됐다.

<녹취>조선중앙TV(지난 12일) : "우승의 금메달로 주체조선의 존엄과 기상을 떨친 체육인들에게 노력영웅 칭호를 비롯한 높은 국가수훈과 명예칭호를 수여하도록 해 주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최상의 수준으로 꾸려진 궁궐 같은 살림집도 안겨주시었습니다."

영웅 칭호는 경제, 문화, 예술 전 분야에 걸친 다양한 인재들에게도 주어진다.

<녹취> 모란봉악단 ‘내 마음’ : "날 키워준 정든 어머니 조국 없인 내 삶도 없어."

지난해엔 김정은 시대 최고악단으로 꼽히는 ‘모란봉 악단’ 소속 작곡가 3명에게 노력영웅 칭호가 주어지기도 했다.

한편, 타의 모범이 된 일반인들도 노력영웅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녹취>(지난 해 6월)조선중앙TV : "평양산원에서 10번째로 귀여운 아기를 낳은 평안북도 천마군의 모성영웅 박금옥 여성이 10일 이곳 의료집단의 환영을 받으며 산원을 나섰습니다."

대표적인 게 출산 장려를 위해 다산 여성들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는 것이다.

북한에서 영웅으로 선정되면 가문의 명예는 물론 출세도 보장된다.

<인터뷰> 서재평(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국장) : "명예적 부분, 즉 영웅의 집안, 영웅의 가문, 또 영웅의 어떤 자손이라는 부분이 굉장히 북한 사회에서 중요시되는 부분인데 영웅으로서의 특별한 혜택과 우대를 해줌으로서 그 명예를 간직하도록 하는 부분이고, 또 그로 인해서 사람들이 영웅이 되면 저런 어떤 특별한 혜택과 우대를 누리는구나..."

<녹취> 조선중앙TV : "조선인민군 군관 하사관 전사들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함에 관하여..."

북한에서 영웅 칭호가 처음 도입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과 51년.

당시 북한은 ‘한국군과 미군의 파상공세에 맞서 활약하고 있다’고 내부에 선전할 ‘전쟁영웅’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때문에 다양한 전쟁영웅들을 탄생시켰는데, 올해 아흔다섯으로 ‘마지막 빨치산’이라 불리는 리을설은 대표적인 전쟁영웅 중 한 사람이다.

<녹취> 조선중앙TV(2014년 6월) :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서는 노 투사를 만날 때마다 뜨겁게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투사 동지들이 옆에 앉아만 있어도 나에게 힘이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전후 복구 시기가 도래하면서 북한의 영웅상도 변화를 맞이한다.

1960년대 대표적 사회운동이었던 ‘천리마 운동’에서 특출한 성과를 낸 생산, 건설 분야 노동자들을 영웅으로 추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뷰> 남성욱(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 "그 분야에서 특정하게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낸 인물을 하나 인위적으로 발굴을 하고, 그를 모방하게 만들어 모든 인민들이 그를 따라하게 함으로서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경제 개발 목표를 달성시키는데 이러한 영웅 모방 전략을 추구해왔습니다."

북한의 이러한 영웅 모방 전략은 1930년대 소련의 광부 영웅이었던 ‘스타하노프 운동’

그리고 마오쩌뚱 시대 이른바 혁명의 나사못으로 유명한 중국의 ‘레이펑’ 등에서 유래했다.

1970, 1980년대 경제 호조와 더불어 과학기술 분야로까지 영웅의 범위를 넓힌 북한.

하지만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가 닥치면서, 북한 당국은 영웅 상의 변화 필요성을 절감한다.

극심한 경제난을 헤쳐 나갈 시대적 모델이 필요해진 것이다.

어려운 시기, 근검절약을 통해 자력갱생의 본보기가 됐다는 자강도 상업관리소의 노력영웅 정춘실이 대표적이다.

<인터뷰> 서재평(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국장) : "북한 사회가 이제 국가적으로 많이 위기가 오거나 어려움이 올 때마다 내세우는 영웅들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합니다. 이 사람들처럼 해서 이 난관을 극복해가자. 저 영웅들처럼 아주 높은 충성심과 열의를 가지고 일을 하면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그런 어떤 모범적인 역할의 어떤 모델이라고 보면 되는 겁니다."

특히 이러한 흐름은 김정은 시대 들어 더욱 뚜렷해졌는데, 이는 북한의 시대적 변화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뷰> 남성욱(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 "영웅이라는 것이 시대에 고정되지 않고 머무르지 않고 새롭게 상황에 맞춰서 유연하게 확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1세기 들어서서는 IT라든가 스포츠라든가 예술, 문화 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판단하고 있고, 이 분야에서 영웅을 배출함으로서 인민들이 이러한 영웅을 따라 배움으로서 결국은 김정은 3대 세습에 적극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지난 2012년, 노동신문은 21세기 들어 총 910여 명의 노력영웅이 배출됐다고 밝혔다.

연 평균 100여 명의 영웅이 탄생한 셈인데, 김정은 시대 들어 그 수는 더욱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2012년 12월 이후 불과 3개월 사이에 장거리 미사일과 핵 실험에 기여한 과학자,기술자 201명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녹취> 조선중앙TV(2012년 12월) : "우리 조국을 인공위성 제작 및 발사국 보유국의 지위에 확고히 올려 세우시어 반만년 민족사의 특기할 대 경사를 안아 오신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

북한 매체들은 영웅 탄생 역시 김정은의 업적으로 칭송하며 이를 체제 결속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영웅을 바라보는 북한 주민들의 시선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인터뷰> 박세영(前 북한 육상 국가대표/탈북자) : "인민들 속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이제는 뭐, 예전에는 정말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공화국영웅 칭호 받기 위해서 엄청 노력을 했는데 이제는 김정은이 여기저기서 영웅 칭호를 주고 하니까 이젠 너도나도 개나 소나 다 주네, 하니까 그런 의미가 별로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인터뷰> 남성욱(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 "집권 3,4년을 지나면서 단기에 성과를 거두고자 하는 전략이 한계를 보임으로서 조급하고 초조한 마음에 계속적으로 영웅을 발굴하고, 그런 영웅 과잉 전략으로 변질됨으로서 인민들이 더 이상 영웅 전략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70여 년의 세월 동안 체제 선전과 충성심 유발을 위해 영웅 만들기에 주력해온 북한,

하지만 김정은 시대 진정한 영웅의 가치가 퇴색된 지금, 남발되는 영웅 칭호가 얼마나 더 오래 주민들의 마음을 붙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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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7-18 08:25:38
    • 수정2015-07-18 08: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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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북한 내부를 심층 분석하는 [클로즈업 북한]입니다.

전 세계에서 ‘영웅’이 가장 많은 나라, 미국도, 중국도 아닌 바로 북한인데요.

해마다 100명 정도이던 ‘영웅 칭호’ 수여자가 김정은 시대 들어서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군인과 경찰부터, 스포츠 스타, 예술인, 아이를 많이 낳은 다산 여성들까지 폭도 갈수록 넓어지고 있는데요.

클로즈업 북한 오늘은, ‘영웅의 나라’ 북한의 영웅 남발 실태를 집중 분석했습니다.

<리포트>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앳된 얼굴의 북한 여성.

스무 살의 나이에 7명의 고아를 맡아 키워 ‘처녀 어머니’로 불리는 장정화 씨다.

북한 매체들은 최근 장 씨의 사연을 수차례 소개하며, 본격적인 영웅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직접 나서 ‘시대의 본보기’ 라며 장 씨를 추켜세우기도 했다.

<녹취> 장정화(북한 ‘처녀 어머니’/지난 달) : "우리 아이들을 더 잘 키워 처녀 어머니로 내세워 주신 경애하는 원수님의 사랑과 믿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지난 9일에는, 생전 두 번의 영웅 칭호를 받은 정춘실의 빈소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화환을 보내기도 했다.

<녹취> 조선중앙TV (지난 9일) : "정춘실 동지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 9일 고인의 영전에 화환을 보내셨습니다."

최고 지도자의 추모까지 받은 평범한 상업관리소 소장.

북한에서 영웅의 위상은 이처럼 높다.

그렇다면, 북한에서 ‘영웅’은 어떤 의미일까.

<인터뷰> 박세영(前 북한 육상 국가대표/탈북자) : "일단 노력영웅 칭호를 받으면 그 가족은 아예 그냥 대대손손 영웅 집안이 되면서 그렇게 그런 칭호를 받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국민들의, 모든 인민들의 숭배 대상이 되는 거죠. 다 우러러 보는 그런 사람이 되는 거예요."

북한에서 영웅은 최고 수준의 ‘공화국영웅’과 한 단계 낮은 ‘노력영웅’으로 분류된다.

지난 2013년 북한사회는 한 공화국영웅의 탄생으로 떠들썩했다.

화제의 인물은 평양의 교통보안원인 리경심.

<녹취> 조선중앙TV(2013년 5월) : "평양시 인민보안국 교통지휘대 지구대 대원 리경심에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영웅칭호와 함께 금별메달 및 국기훈장 제 1급이 수여됐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혁명의 수뇌부, 즉 김정은을 결사옹위 했다며 최고 영예인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한 것이다.

당시 김정은이 어떤 위급 상황에 처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녹취> 리경심(인민보안국 교통지휘대 대원/2013년 5월) : "교통보안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응당한 일을 한 저에게 공민의 최고 영예인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해주시니 이 은정에 어떻게 보답해야 되겠는지..."

리경심에 대한 파격적인 공화국영웅 수여는 북한 당국의 ‘영웅 선정 기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터뷰> 서재평(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국장) : "북한 사회는 어디까지나 당과 수령, 특별히 수령의 존엄을 지켜내고 수령을 옹호, 결사하는 그 부분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을 영웅으로 가장 많이 내세워줍니다. 수령을 목숨으로 옹호하고 지키는데 공로를 세운 사람들을 영웅 칭호를 수여하는 겁니다."

이처럼 공화국영웅은 국가 안보나 김일성 일가에 목숨으로 충성한 인물에게 주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화국영웅 칭호가 예외적으로 스포츠 스타에게 수여된 사례도 있다.

1999년 세비야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쟁쟁한 세계 정상급 선수들 사이로, 왜소한 동양 선수 한 명이 눈에 들어온다.

42,195킬로미터의 긴 여정을 거쳐 결승선 테이프를 가장 먼저 끊은 사람은 북한의 정성옥.

<녹취> 조선중앙TV(1999년 9월) : "그는 경애하는 장군님만을 그리며 달렸다고 하면서 바로 그것이 곧 샘솟는 힘이 되고 승리의 장패를 열 수 있는 원천으로 되었다고 긍지 넘쳐 말했습니다."

정성옥의 깜짝 우승에, 북한 당국도 한껏 고무됐다.

정성옥의 일대기를 그린 TV 프로그램, 특별 뉴스까지 제작될 정도였다.

<인터뷰> 박세영(前 북한 육상 국가대표/탈북자) : "그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세계 기자들 앞에서 장군님을 부르면서 달렸다, 그리고 결승선 테이프 끊을 때도 그 테이프 선이 장군님께서 손을 벌리고 ’성옥아, 어서 오너라.’ 하고 막 반겨주는...그 말 한 마디 때문에 그 여자는 노력영웅을 뛰어 넘어서 공화국영웅을 뛰어 넘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올라갔잖아요."

김정은 시대 들어서도 스포츠 분야의 영웅 탄생은 계속되고 있다.

<녹취> 지난 해 10월 : "주체 체육의 발전 면모를 힘있게 과시하고 온 승리자들이여, 참으로 장하다"

최근 각종 국제대회에서 여자축구대표팀과 북한 역도 간판스타 엄윤철과 김은국, 여자 유도의 안금애가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들에게는 파격적인 대우도 제공됐다.

<녹취>조선중앙TV(지난 12일) : "우승의 금메달로 주체조선의 존엄과 기상을 떨친 체육인들에게 노력영웅 칭호를 비롯한 높은 국가수훈과 명예칭호를 수여하도록 해 주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최상의 수준으로 꾸려진 궁궐 같은 살림집도 안겨주시었습니다."

영웅 칭호는 경제, 문화, 예술 전 분야에 걸친 다양한 인재들에게도 주어진다.

<녹취> 모란봉악단 ‘내 마음’ : "날 키워준 정든 어머니 조국 없인 내 삶도 없어."

지난해엔 김정은 시대 최고악단으로 꼽히는 ‘모란봉 악단’ 소속 작곡가 3명에게 노력영웅 칭호가 주어지기도 했다.

한편, 타의 모범이 된 일반인들도 노력영웅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녹취>(지난 해 6월)조선중앙TV : "평양산원에서 10번째로 귀여운 아기를 낳은 평안북도 천마군의 모성영웅 박금옥 여성이 10일 이곳 의료집단의 환영을 받으며 산원을 나섰습니다."

대표적인 게 출산 장려를 위해 다산 여성들에게 영웅 칭호를 수여하는 것이다.

북한에서 영웅으로 선정되면 가문의 명예는 물론 출세도 보장된다.

<인터뷰> 서재평(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국장) : "명예적 부분, 즉 영웅의 집안, 영웅의 가문, 또 영웅의 어떤 자손이라는 부분이 굉장히 북한 사회에서 중요시되는 부분인데 영웅으로서의 특별한 혜택과 우대를 해줌으로서 그 명예를 간직하도록 하는 부분이고, 또 그로 인해서 사람들이 영웅이 되면 저런 어떤 특별한 혜택과 우대를 누리는구나..."

<녹취> 조선중앙TV : "조선인민군 군관 하사관 전사들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함에 관하여..."

북한에서 영웅 칭호가 처음 도입된 것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과 51년.

당시 북한은 ‘한국군과 미군의 파상공세에 맞서 활약하고 있다’고 내부에 선전할 ‘전쟁영웅’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때문에 다양한 전쟁영웅들을 탄생시켰는데, 올해 아흔다섯으로 ‘마지막 빨치산’이라 불리는 리을설은 대표적인 전쟁영웅 중 한 사람이다.

<녹취> 조선중앙TV(2014년 6월) :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서는 노 투사를 만날 때마다 뜨겁게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투사 동지들이 옆에 앉아만 있어도 나에게 힘이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전후 복구 시기가 도래하면서 북한의 영웅상도 변화를 맞이한다.

1960년대 대표적 사회운동이었던 ‘천리마 운동’에서 특출한 성과를 낸 생산, 건설 분야 노동자들을 영웅으로 추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뷰> 남성욱(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 "그 분야에서 특정하게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낸 인물을 하나 인위적으로 발굴을 하고, 그를 모방하게 만들어 모든 인민들이 그를 따라하게 함으로서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경제 개발 목표를 달성시키는데 이러한 영웅 모방 전략을 추구해왔습니다."

북한의 이러한 영웅 모방 전략은 1930년대 소련의 광부 영웅이었던 ‘스타하노프 운동’

그리고 마오쩌뚱 시대 이른바 혁명의 나사못으로 유명한 중국의 ‘레이펑’ 등에서 유래했다.

1970, 1980년대 경제 호조와 더불어 과학기술 분야로까지 영웅의 범위를 넓힌 북한.

하지만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가 닥치면서, 북한 당국은 영웅 상의 변화 필요성을 절감한다.

극심한 경제난을 헤쳐 나갈 시대적 모델이 필요해진 것이다.

어려운 시기, 근검절약을 통해 자력갱생의 본보기가 됐다는 자강도 상업관리소의 노력영웅 정춘실이 대표적이다.

<인터뷰> 서재평(북한민주화위원회 사무국장) : "북한 사회가 이제 국가적으로 많이 위기가 오거나 어려움이 올 때마다 내세우는 영웅들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합니다. 이 사람들처럼 해서 이 난관을 극복해가자. 저 영웅들처럼 아주 높은 충성심과 열의를 가지고 일을 하면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그런 어떤 모범적인 역할의 어떤 모델이라고 보면 되는 겁니다."

특히 이러한 흐름은 김정은 시대 들어 더욱 뚜렷해졌는데, 이는 북한의 시대적 변화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터뷰> 남성욱(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 "영웅이라는 것이 시대에 고정되지 않고 머무르지 않고 새롭게 상황에 맞춰서 유연하게 확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1세기 들어서서는 IT라든가 스포츠라든가 예술, 문화 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판단하고 있고, 이 분야에서 영웅을 배출함으로서 인민들이 이러한 영웅을 따라 배움으로서 결국은 김정은 3대 세습에 적극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지난 2012년, 노동신문은 21세기 들어 총 910여 명의 노력영웅이 배출됐다고 밝혔다.

연 평균 100여 명의 영웅이 탄생한 셈인데, 김정은 시대 들어 그 수는 더욱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2012년 12월 이후 불과 3개월 사이에 장거리 미사일과 핵 실험에 기여한 과학자,기술자 201명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녹취> 조선중앙TV(2012년 12월) : "우리 조국을 인공위성 제작 및 발사국 보유국의 지위에 확고히 올려 세우시어 반만년 민족사의 특기할 대 경사를 안아 오신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

북한 매체들은 영웅 탄생 역시 김정은의 업적으로 칭송하며 이를 체제 결속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영웅을 바라보는 북한 주민들의 시선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인터뷰> 박세영(前 북한 육상 국가대표/탈북자) : "인민들 속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이제는 뭐, 예전에는 정말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공화국영웅 칭호 받기 위해서 엄청 노력을 했는데 이제는 김정은이 여기저기서 영웅 칭호를 주고 하니까 이젠 너도나도 개나 소나 다 주네, 하니까 그런 의미가 별로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인터뷰> 남성욱(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 "집권 3,4년을 지나면서 단기에 성과를 거두고자 하는 전략이 한계를 보임으로서 조급하고 초조한 마음에 계속적으로 영웅을 발굴하고, 그런 영웅 과잉 전략으로 변질됨으로서 인민들이 더 이상 영웅 전략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부작용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70여 년의 세월 동안 체제 선전과 충성심 유발을 위해 영웅 만들기에 주력해온 북한,

하지만 김정은 시대 진정한 영웅의 가치가 퇴색된 지금, 남발되는 영웅 칭호가 얼마나 더 오래 주민들의 마음을 붙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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