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eye] 독일과 폴란드, 과거사 ‘화해의 길’

입력 2015.08.15 (08:41) 수정 2015.08.1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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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아우슈비츠 수용소입니다.

나찌 독일이 유대인을 강제로 가두고 학살한 곳으로 악명 높은 곳이죠.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에 있는데요.

원래 독일에 항거한 폴란드인 정치범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폴란드는 2차대전 때 독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곳 아우슈비츠 희생자를 포함해 전체 인구의 16%인 560만명이 숨지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습니다.

폴란드에게 독일은 우리에게 일본과 같은 존재인 셈입니다.

그런데 두 나라는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딛고 화해의 길을 순조롭게 열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사 문제로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역대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되어 있는데요.

독일과 폴란드는 어떻게 과거사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이정민 순회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남쪽으로 300km 떨어진 오시비엥침.

철조망 사이로 낡은 목조 건물과 굴뚝들이 눈에 띕니다.

지금은 드문드문 판자로 지어진 건물만이 남아있는 공터가 된 이 곳은 독일식 이름으로 더 유명합니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 공장으로 불렸던 곳입니다.

철길을 따라 수백만명이 끌려와 학살됐던 곳.

입구에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가 걸려 있습니다.

당시의 수용소는 지금은 희생자들을 위한 박물관이 됐습니다.

뭉텅이로 잘려진 머리카락.

숨진 이들의 신발과 의족들.

나중에 돌려받을 희망에 크게 이름을 써 놓은 가방들....

아이들은 공포 속에 사진을 찍고 숨진 뒤에는 모든 것을 뺏겼습니다.

누군가는 중노동과 굶주림에 죽어갔고, 누군가는 생체 실험에 희생됐으며, 누군가는 노동하기엔 허약하다는 판정으로 가스실로 끌려갔습니다.

천장에서 하얀 자갈 모양의 화학 약품, 사이클론 B를 떨어뜨려 한 번에 4백 명 씩 살해했습니다.

<인터뷰> 다비드 기에르막(폴란드 시민) : "이런 슬픈 일이 우리 나라에서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충격적입니다. 폴란드가 독일에서 가까웠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수용소에서 유대인들만 희생된 건 아니었습니다.

수용소의 한 쪽 벽.

이 곳에서 숨진 사람들의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나치 체제에 저항하다 정치범으로 끌려온 폴란드인 15만 명 역시 희생자였습니다.

이 곳 아우슈비츠의 사망자를 포함해 2차 대전 중 숨진 폴란드인은 모두 560만 명.

전체 인구의 16%에 달했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2차 대전.

이어 구소련의 침공까지 겪으며 폴란드는 처참한 전장이 됐습니다.

연이은 봉기와 독일군의 진압으로 초토화된 수도 바르샤바를.

독일군은 1945년 퇴각하면서 다시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당시 폴란드인이면 누구나 한 명 이상 가족을 잃었다는 끔찍한 전쟁.

하지만 폴란드인들은 다시 도시를 살려 냈습니다.

전후 70년이 지난 바르샤바 구 시가. 여전히 복원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건물 모양은 물론, 자잘한 장식까지 전쟁 전과 똑같이 복원한 시가지.

복원 문화재로는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입니다.

전쟁 당시 어린 아이는 이제 성벽 복원 작업을 하는 노인이 됐지만, 전쟁의 기억만은 잊지 않고자 파괴의 흔적을 살려두고 있습니다.

<인터뷰> 안드레이 레이냐크(폴란드 시민) : "어렴풋한 어릴 적 기억으로는 지금 이 자리도 다 불에 타고 파괴됐었고, 저 뒤에 있는바르샤바 성까지 모두 불에 탔었습니다."

전쟁 후 냉전 하에서 독일과 폴란드 양국 관계는 더 멀어졌습니다.

60년대 들어 폴란드와 독일의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화해를 조심스럽게 거론했지만, 전쟁 책임을 묻는 폴란드인들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분위기를 반전 시킨 것은 뜻밖의 사건.

수교를 위해 1970년 폴란드를 찾은 빌리 브란트 총리는 독일에서 가져온 화환조차 곱지 않게 보는 폴란드인들 앞에서, 과거사를 사과한다는 의미로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과거 유대인을 격리했던 게토에 위치한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 앞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의 참회에 대해 당시 세계 언론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독일과 폴란드의 화해도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됐습니다.

독일은 말로만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재단을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40억 유로를 배상했습니다.

전쟁 뒤 폴란드에 빼앗긴 11만 제곱킬로미터, 한반도의 절반이나 되는 땅을 단 한 번의 반환 요구도 하지 않고 그대로 폴란드 땅으로 인정했습니다.

독일 최고위층의 사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전 70년, 올해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인터뷰> 앙겔라 메르켈(독일 총리/지난 1월) : "독일인들은 범죄자였고 공모자였습니다. 만행을 못본 척 했고 침묵했습니다. 독일은 '홀로코스트'라는 문명 파괴 행위에 대해 영구적인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독일의 계속된 사과는 폴란드인들의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주변국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했던 독일의 통일.

폴란드는 오늘의 강국 독일을 만든 이 통일을 가장 먼저 지지해 줬습니다.

불가침 약속을 맺고도 영토를 침범했던 과거의 독일과 지금의 독일이 다르다는 걸 믿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인터뷰> 바르토셰프스키(폴란드 역사학자) : "독일의 통일에 대해 프랑스는 회의적이었고 미국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유럽의 심장부에서 독일이 강해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폴란드는 독일의 통일을 지지했습니다."

이제 폴란드인에게 과거사는 국가 대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닌 전쟁 범죄 그 자체일 뿐입니다.

<인터뷰> 비톨드 쉬마이다(폴란드 시민) : "폴란드와 독일은 매 순간 과거사에 대해 정리하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결과도 결과지만 이런 노력을 함께 해 왔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폴란드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독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답은 놀라울 정도로 모두 같았습니다.

<인터뷰> 피오트르 기에르막(폴란드 시민) : "독일의 지금 세대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이건 이전 세대가 저지른 일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지금 세대가 같은 생각을 한다면 그건 용서할 수 없을 겁니다."

<인터뷰> 그제고슈 스헤티나(폴란드 외교부 장관) : "폴란드와 독일 사이의 힘든 역사를 감안한다 해도, 우리는 지금의 양국 관계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과거란 잊으라고 말만 한다고 잊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피해자가 충분하다고 느낄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독일도, 그 사과를 포용했던 폴란드도 먼저 진심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화해가 이뤄지기는 어렵지만 깨지기는 쉽다는 것도 두 나라는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독일과 폴란드는 말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화해의 과정을 걷고 있으며, 그 과정은 여전히 쉽지 않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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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eye] 독일과 폴란드, 과거사 ‘화해의 길’
    • 입력 2015-08-15 09:40:23
    • 수정2015-08-15 17:18:44
    특파원 현장보고
<앵커 멘트>

아우슈비츠 수용소입니다.

나찌 독일이 유대인을 강제로 가두고 학살한 곳으로 악명 높은 곳이죠.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에 있는데요.

원래 독일에 항거한 폴란드인 정치범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폴란드는 2차대전 때 독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곳 아우슈비츠 희생자를 포함해 전체 인구의 16%인 560만명이 숨지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습니다.

폴란드에게 독일은 우리에게 일본과 같은 존재인 셈입니다.

그런데 두 나라는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딛고 화해의 길을 순조롭게 열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사 문제로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역대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되어 있는데요.

독일과 폴란드는 어떻게 과거사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이정민 순회특파원이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남쪽으로 300km 떨어진 오시비엥침.

철조망 사이로 낡은 목조 건물과 굴뚝들이 눈에 띕니다.

지금은 드문드문 판자로 지어진 건물만이 남아있는 공터가 된 이 곳은 독일식 이름으로 더 유명합니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 공장으로 불렸던 곳입니다.

철길을 따라 수백만명이 끌려와 학살됐던 곳.

입구에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가 걸려 있습니다.

당시의 수용소는 지금은 희생자들을 위한 박물관이 됐습니다.

뭉텅이로 잘려진 머리카락.

숨진 이들의 신발과 의족들.

나중에 돌려받을 희망에 크게 이름을 써 놓은 가방들....

아이들은 공포 속에 사진을 찍고 숨진 뒤에는 모든 것을 뺏겼습니다.

누군가는 중노동과 굶주림에 죽어갔고, 누군가는 생체 실험에 희생됐으며, 누군가는 노동하기엔 허약하다는 판정으로 가스실로 끌려갔습니다.

천장에서 하얀 자갈 모양의 화학 약품, 사이클론 B를 떨어뜨려 한 번에 4백 명 씩 살해했습니다.

<인터뷰> 다비드 기에르막(폴란드 시민) : "이런 슬픈 일이 우리 나라에서 있었다는 것은 굉장히 충격적입니다. 폴란드가 독일에서 가까웠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수용소에서 유대인들만 희생된 건 아니었습니다.

수용소의 한 쪽 벽.

이 곳에서 숨진 사람들의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나치 체제에 저항하다 정치범으로 끌려온 폴란드인 15만 명 역시 희생자였습니다.

이 곳 아우슈비츠의 사망자를 포함해 2차 대전 중 숨진 폴란드인은 모두 560만 명.

전체 인구의 16%에 달했습니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2차 대전.

이어 구소련의 침공까지 겪으며 폴란드는 처참한 전장이 됐습니다.

연이은 봉기와 독일군의 진압으로 초토화된 수도 바르샤바를.

독일군은 1945년 퇴각하면서 다시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당시 폴란드인이면 누구나 한 명 이상 가족을 잃었다는 끔찍한 전쟁.

하지만 폴란드인들은 다시 도시를 살려 냈습니다.

전후 70년이 지난 바르샤바 구 시가. 여전히 복원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건물 모양은 물론, 자잘한 장식까지 전쟁 전과 똑같이 복원한 시가지.

복원 문화재로는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입니다.

전쟁 당시 어린 아이는 이제 성벽 복원 작업을 하는 노인이 됐지만, 전쟁의 기억만은 잊지 않고자 파괴의 흔적을 살려두고 있습니다.

<인터뷰> 안드레이 레이냐크(폴란드 시민) : "어렴풋한 어릴 적 기억으로는 지금 이 자리도 다 불에 타고 파괴됐었고, 저 뒤에 있는바르샤바 성까지 모두 불에 탔었습니다."

전쟁 후 냉전 하에서 독일과 폴란드 양국 관계는 더 멀어졌습니다.

60년대 들어 폴란드와 독일의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화해를 조심스럽게 거론했지만, 전쟁 책임을 묻는 폴란드인들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분위기를 반전 시킨 것은 뜻밖의 사건.

수교를 위해 1970년 폴란드를 찾은 빌리 브란트 총리는 독일에서 가져온 화환조차 곱지 않게 보는 폴란드인들 앞에서, 과거사를 사과한다는 의미로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과거 유대인을 격리했던 게토에 위치한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 앞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의 참회에 대해 당시 세계 언론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독일과 폴란드의 화해도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됐습니다.

독일은 말로만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재단을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40억 유로를 배상했습니다.

전쟁 뒤 폴란드에 빼앗긴 11만 제곱킬로미터, 한반도의 절반이나 되는 땅을 단 한 번의 반환 요구도 하지 않고 그대로 폴란드 땅으로 인정했습니다.

독일 최고위층의 사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전 70년, 올해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인터뷰> 앙겔라 메르켈(독일 총리/지난 1월) : "독일인들은 범죄자였고 공모자였습니다. 만행을 못본 척 했고 침묵했습니다. 독일은 '홀로코스트'라는 문명 파괴 행위에 대해 영구적인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독일의 계속된 사과는 폴란드인들의 마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주변국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했던 독일의 통일.

폴란드는 오늘의 강국 독일을 만든 이 통일을 가장 먼저 지지해 줬습니다.

불가침 약속을 맺고도 영토를 침범했던 과거의 독일과 지금의 독일이 다르다는 걸 믿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인터뷰> 바르토셰프스키(폴란드 역사학자) : "독일의 통일에 대해 프랑스는 회의적이었고 미국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유럽의 심장부에서 독일이 강해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폴란드는 독일의 통일을 지지했습니다."

이제 폴란드인에게 과거사는 국가 대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닌 전쟁 범죄 그 자체일 뿐입니다.

<인터뷰> 비톨드 쉬마이다(폴란드 시민) : "폴란드와 독일은 매 순간 과거사에 대해 정리하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결과도 결과지만 이런 노력을 함께 해 왔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폴란드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독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답은 놀라울 정도로 모두 같았습니다.

<인터뷰> 피오트르 기에르막(폴란드 시민) : "독일의 지금 세대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이건 이전 세대가 저지른 일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지금 세대가 같은 생각을 한다면 그건 용서할 수 없을 겁니다."

<인터뷰> 그제고슈 스헤티나(폴란드 외교부 장관) : "폴란드와 독일 사이의 힘든 역사를 감안한다 해도, 우리는 지금의 양국 관계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과거란 잊으라고 말만 한다고 잊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피해자가 충분하다고 느낄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독일도, 그 사과를 포용했던 폴란드도 먼저 진심이 앞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화해가 이뤄지기는 어렵지만 깨지기는 쉽다는 것도 두 나라는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독일과 폴란드는 말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화해의 과정을 걷고 있으며, 그 과정은 여전히 쉽지 않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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