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퍼] ‘천인갱’, 하이난에서 사라진 조선인 1,300명

입력 2015.08.16 (09:00) 수정 2015.08.17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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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의 항복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천여 명의 조선 노동자들을 끌고 와 지하갱도를 파게하고 무기와 물자를 묻었다. 그리고 일본군들은 뜻밖에도 이 조선인들을 전부 살해해 한 곳에 묻었다. 이곳을 '천인갱'이라고 부르게 됐다."

1995년 중국 하이난 성이 발간한 책 <철발굽 아래의 피비린내 나는 비바람(鐵蹄下的腥風血雨)>에 담긴 문구다. 패전 직후 중국 하이난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강제 동원됐던 조선인 천여 명을 집단학살했다는 내용이다. 이 사실은 3년 뒤인 1998년 국내 언론에 보도되면서 우리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집단학살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니,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KBS <취재파일K>는 중국 하이난 성 현지에서 주민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일제강점기 작성된 서류를 통해 70여 년 전 하이난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을 추적했다.

■ ‘천인갱’ 조선인 집단학살 장소?

하이난의 햇볕은 가혹했다. 모자와 긴소매로 살갗에 쏟아지는 빛은 막았지만 옷 안으로 스며드는 땀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70여 년 전 이곳에 끌려온 조선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은 '동양의 하와이'로 불리는 중국의 대표적 관광지이지만 일제강점기 이곳은 열대의 황무지였다.

일본은 황무지에서 철광석을 얻고 싶었다. 철광석은 당시 가장 중요한 전쟁 물자의 원료였다. 또 이곳은 중국 본토와 동남아로 진격할 수 있는 공군기지가 들어설 수 있는 땅이었다. 1939년 2월 일본은 하이난을 침공했다.

하이난 남부 싼야(三亞)에는 지금도 일본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중국인들이 해수욕을 즐기는 모래해변을 따라 설치된 진지도 그 흔적 가운데 하나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곳이 있다. 바로 '조선촌'이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이다.

취재진이 조선촌을 찾은 건 지난 7일. 이곳에서 만난 린관차이(53)씨가 마을 이름의 유래를 설명했다.

"이 마을은 일본군에 끌려와 일했던 조선인들이 살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조선촌'이라고 불렀습니다."

70여 가구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이름과는 달리 마을에 한국인은 없다. 다만 마을 한쪽에 한국인이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가 묻힌 공터가 있다.

"일을 못하거나 병에 걸렸거나 반항하는 조선인들을 죽여서 여기에 묻었습니다. 그 수가 천 명 정도 된다고 해서 '천인갱'이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 강제동원 한 서린 ‘조선촌 천인갱’

하이난을 점령한 일본은 곧바로 광산 개발과 비행장 건설에 착수한다. 중국대륙 등지로부터 노역자 4만5천 명이 동원됐다. 1943년,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새로운 전시 동원 계획을 세운다. 조선의 수형자, 즉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하이난에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의 이름은 '남방파견보국대', 이른바 '조선보국대'였다. 당시 일본 내무대신이었던 유자와 미치히토가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에게 보낸 문서 '조선총독부 수형자 해남도 출역에 동반할 감독직원 등 증원에 관한 건'에는 이런 상황이 상세히 적혀있다.

조선인조선인


"하이난 광산 개발과 군수시설 건설에 다수의 노동자가 필요해 조선총독부 수형자 가운데 약 2천 명을 이 섬에 출역시키고자 한다."

파견 대상자는 조선인 수형자 2천 명과 간수 240여 명이다. 일본은 이미 4년 전인 1939년부터 남양군도에 자국 수형자들을 보냈지만 조선의 수형자를 동원한 건 처음이었다.

1943년 3월, 첫 조선보국대가 출발했다. 파견은 이듬해까지 8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서울과 평양, 함흥과 원산, 부산과 광주 등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서 20~40대 젊고 건강한 남성들이 차출됐다. 2천 명은 당시 조선 전체 수형자의 10%에 달하는 많은 인원이다.

이들이 일하기로 한 기간은 단 6개월. 일본은 하이난에서 6개월만 일하면 누구든 가출옥, 즉 가석방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쌀밥과 숙소 등 쾌적한 노동조건도 약속했다. 이들을 보내면서 부민관, 지금의 서울시의회 앞에서 성대한 환송식까지 열었다. 자유의 몸이 되길 바라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들이 간다는 '해남(하이난)도'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 조선인 수형자 차출한 ‘조선보국대’

경비는 삼엄했다. 취재진은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에 대비해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촬영을 진행했다. 싼야에서 동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링수이(陵水)의 해군기지. 하이난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천5백 명이 투입돼 건설했다는 비행장이 있는 곳이다. 그들이 만든 비행장은 지금도 중국의 해군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인들은 주로 비행장 건설과 철도, 도로 건설에 투입됐다. 또 하이난 북서부 쉬루(石碌)광산과 바수오(八所)항에서 일했다.

약속과 달리 작업은 고됐다. 새벽 5시부터 12시간 이상 노동이 이어졌지만 식사는 부실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보급로가 막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풍토병까지 돌았다. 죄수 신분인 조선보국대 대원들은 다른 지역의 강제동원 피해자들보다 훨씬 낮은 처우를 받았다.

1945년 초 미군의 공습으로 비행장 건설과 철광 수송이 어려워지자 일본군은 조선인들을 싼야의 구릉지대로 집결시켰다. 조선촌이었다.

조선인조선인


그녀는 취재진에게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을 봤던 기억이 있으니 족히 여든은 됐을 것이다. 하이난 원주민 리(黎)족 할머니 림야마이 씨 이야기다.

"조선인들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막대기로 다리, 엉덩이, 등, 머리를 사정없이 때려서 죽였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의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은 잔혹했다. 나무에 매달아 매질을 한 뒤 죽으면 불에 태웠다고 한다. 당시의 역겨웠던 냄새가 다시 코를 자극했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든다. 그녀는 일본군을 보면 너무 무서워 소변을 지릴 정도였다고 말했다.

"매일 조선인들을 때려 죽였습니다. 한 번은 조선인들이 배가 고파서 밭에 있던 고구마를 파먹다가 일본군에 걸렸는데, 그냥 두들겨 패서 죽이더군요."

학대와 학살의 연속이었다. 하이난성이 기록한 한 중국인의 목격담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있다.

"당시 콜레라와 말라리아가 유행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감염됐습니다. 일본군들은 자신에게 콜레라가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염된 노동자를 발견하면 생사여부를 불문하고 끌고 가서 불에 태웠습니다."

시신을 불태워 버렸다는 림야마이 할머니의 증언과 일치한다. 취재진은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인들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일본군이 항복하고 이곳을 떠났을 때 남아있는 조선인들은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이 있었던 건물과 낡아빠진 옷가지 몇 조각을 남기곤 사라졌어요. 아마 일본군이 전부 때려 죽였을 겁니다."

■ “살아있는 사람도 불태워”…학대와 학살

지옥 같던 섬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있다. 이는 경성형무소 '가출옥관계서류'를 통해 확인된다.

조선인조선인


이 서류에서 가출옥, 즉 가석방 사유가 '해남도파견보국대(海南島派遣報國隊)'로 적혀있는 사람은 모두 112명. 가석방은 대부분 하이난 강제동원이 시작된 이듬해인 1944년 7월과 8월에 이뤄졌다. 일본의 약속이 일부 지켜진 것이다.

하지만 112명은 전체 동원 인원 2천 명의 5% 정도에 불과하다. 전쟁 말기에 이르자 일본은 보란 듯이 이 약속을 폐기했다. 1944년 9월을 끝으로 더 이상 하이난 파견을 이유로 가석방이 이뤄진 수형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일본 패망 후 하이난에서 귀환한 조선인은 없을까?

취재진은 그동안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었던 문서를 입수했다. 하이난 주둔 일본군 사령관 고가 케이지로가 작성한 '해남지구 종전처리 개요 및 현상보고'이다.

조선인조선인


이 보고서에 '조선보국대'로 분류된 인원은 모두 658명으로 이 가운데 조선인 간수는 52명, 수형자는 606명이다. 전체 2천여 명 가운데 가석방이 확인된 112명, 그리고 귀환보고서에 적힌 606명 등 7백여 명은 살아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머지 천3백 명은 어떻게 된 걸까? 현재 이 천3백 명에 대한 기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이들은 하이난에서, 그리고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 하이난에서 사라진 조선인…1300명 추정

"종전 이후 일본군이 조선인 천여 명을 집단 학살해 한 곳에 묻었다"

<철발굽 아래의 피비린내 나는 비바람(鐵蹄下的腥風血雨)> 이 책에 적힌 내용은 사실일까? 아직까지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나 증언은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미 드러난 자료와 증언들을 통해 조심스럽게 예측해 볼 수는 있다.

수형자들과 함께 하이난에 파견된 간수 240여 명 가운데 조선인은 87명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고가 케이지로의 보고서에 따르면 돌아온 조선인 간수는 52명이다. 보고서에서 사라진 35명은 하이난 현지에서 숨진 것으로, 사망률은 40%에 이른다. 대부분 미군의 공습이나 풍토병 때문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데, 더 열악한 환경에 있던 수형자들은 간수에 비해 사망률이 훨씬 높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간수 사망률 40%로 미루어 짐작컨대, 2천 명 중 절반 정도는 공습과 풍토병으로 숨졌고, 여기에 심한 매질과 같은 가혹행위로 더 많은 수형자가 먼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1998년 천인갱 지역을 일부 발굴했던 박선주 충남대 교수는 발굴 당시 유골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종전 뒤 집단학살이 일어났다면 시신을 분명 마구잡이로 구덩이에 집어 던졌을 겁니다. 그런데 천인갱에서 발굴된 유골들은 머리를 동쪽에 두고 나란히 묻혀 있었습니다. 유골의 상태로 봐선 어느 정도 계획을 하고 묻어준 것 같아 보입니다.“

조선인조선인


그러나 학살은 분명히 존재했다. 조선촌의 주민들은 매일같이 나무에 묶여 구타당하는 조선인들을, 불에 태워진 뒤 벌판에 버려지는 조선인들을 보았다. 기록에서 사라진 천3백 명이 이렇게 죽어갔을 것이다. 정혜경 강제동원지원위원회 조사과장은 "일반적으로 강제동원 피해자와 가해자의 증언엔 차이가 있지만 하이난의 경우는 피해자, 가해자, 지역 주민의 증언이 동일하게 가혹행위를 입증한다"며 "그러나 1300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숨졌고, 어디에 묻혔는지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일상적 가혹행위와 학살…진상 규명 필요

황무지였던 천인갱에도 개발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미 고속도로가 관통했고, 판자촌이었던 조선촌에 하나 둘 씩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개발 열풍이 언제 천인갱을 덮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70여 년 전 열대의 섬에서 스러져간 조선인들의 넋은 지금도 조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진상규명이고, 진상규명의 첫 번째 단계는 발굴"이라며 "진상규명과 유골 봉환은 국가의 책무"라고 말했다.

정부는 현재 중국 외교부와 천인갱 발굴조사에 대한 협의를 진행 중이다.

[연관기사]

☞ [취재파일 K] 천인갱, 70년의 기다림

☞ [뉴스9] 중국 섬에서 쓸쓸히…강제징용자 1,300명 묻힌 ‘천인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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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퍼] ‘천인갱’, 하이난에서 사라진 조선인 1,300명
    • 입력 2015-08-16 09:00:52
    • 수정2015-08-17 0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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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의 항복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천여 명의 조선 노동자들을 끌고 와 지하갱도를 파게하고 무기와 물자를 묻었다. 그리고 일본군들은 뜻밖에도 이 조선인들을 전부 살해해 한 곳에 묻었다. 이곳을 '천인갱'이라고 부르게 됐다."

1995년 중국 하이난 성이 발간한 책 <철발굽 아래의 피비린내 나는 비바람(鐵蹄下的腥風血雨)>에 담긴 문구다. 패전 직후 중국 하이난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강제 동원됐던 조선인 천여 명을 집단학살했다는 내용이다. 이 사실은 3년 뒤인 1998년 국내 언론에 보도되면서 우리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집단학살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니,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KBS <취재파일K>는 중국 하이난 성 현지에서 주민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일제강점기 작성된 서류를 통해 70여 년 전 하이난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을 추적했다.

■ ‘천인갱’ 조선인 집단학살 장소?

하이난의 햇볕은 가혹했다. 모자와 긴소매로 살갗에 쏟아지는 빛은 막았지만 옷 안으로 스며드는 땀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70여 년 전 이곳에 끌려온 조선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지금은 '동양의 하와이'로 불리는 중국의 대표적 관광지이지만 일제강점기 이곳은 열대의 황무지였다.

일본은 황무지에서 철광석을 얻고 싶었다. 철광석은 당시 가장 중요한 전쟁 물자의 원료였다. 또 이곳은 중국 본토와 동남아로 진격할 수 있는 공군기지가 들어설 수 있는 땅이었다. 1939년 2월 일본은 하이난을 침공했다.

하이난 남부 싼야(三亞)에는 지금도 일본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중국인들이 해수욕을 즐기는 모래해변을 따라 설치된 진지도 그 흔적 가운데 하나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곳이 있다. 바로 '조선촌'이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이다.

취재진이 조선촌을 찾은 건 지난 7일. 이곳에서 만난 린관차이(53)씨가 마을 이름의 유래를 설명했다.

"이 마을은 일본군에 끌려와 일했던 조선인들이 살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조선촌'이라고 불렀습니다."

70여 가구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이름과는 달리 마을에 한국인은 없다. 다만 마을 한쪽에 한국인이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가 묻힌 공터가 있다.

"일을 못하거나 병에 걸렸거나 반항하는 조선인들을 죽여서 여기에 묻었습니다. 그 수가 천 명 정도 된다고 해서 '천인갱'이라고 부르게 됐습니다."

■ 강제동원 한 서린 ‘조선촌 천인갱’

하이난을 점령한 일본은 곧바로 광산 개발과 비행장 건설에 착수한다. 중국대륙 등지로부터 노역자 4만5천 명이 동원됐다. 1943년,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일본은 새로운 전시 동원 계획을 세운다. 조선의 수형자, 즉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하이난에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이들의 이름은 '남방파견보국대', 이른바 '조선보국대'였다. 당시 일본 내무대신이었던 유자와 미치히토가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에게 보낸 문서 '조선총독부 수형자 해남도 출역에 동반할 감독직원 등 증원에 관한 건'에는 이런 상황이 상세히 적혀있다.

조선인


"하이난 광산 개발과 군수시설 건설에 다수의 노동자가 필요해 조선총독부 수형자 가운데 약 2천 명을 이 섬에 출역시키고자 한다."

파견 대상자는 조선인 수형자 2천 명과 간수 240여 명이다. 일본은 이미 4년 전인 1939년부터 남양군도에 자국 수형자들을 보냈지만 조선의 수형자를 동원한 건 처음이었다.

1943년 3월, 첫 조선보국대가 출발했다. 파견은 이듬해까지 8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서울과 평양, 함흥과 원산, 부산과 광주 등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서 20~40대 젊고 건강한 남성들이 차출됐다. 2천 명은 당시 조선 전체 수형자의 10%에 달하는 많은 인원이다.

이들이 일하기로 한 기간은 단 6개월. 일본은 하이난에서 6개월만 일하면 누구든 가출옥, 즉 가석방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쌀밥과 숙소 등 쾌적한 노동조건도 약속했다. 이들을 보내면서 부민관, 지금의 서울시의회 앞에서 성대한 환송식까지 열었다. 자유의 몸이 되길 바라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들이 간다는 '해남(하이난)도'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 조선인 수형자 차출한 ‘조선보국대’

경비는 삼엄했다. 취재진은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에 대비해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촬영을 진행했다. 싼야에서 동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링수이(陵水)의 해군기지. 하이난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천5백 명이 투입돼 건설했다는 비행장이 있는 곳이다. 그들이 만든 비행장은 지금도 중국의 해군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인들은 주로 비행장 건설과 철도, 도로 건설에 투입됐다. 또 하이난 북서부 쉬루(石碌)광산과 바수오(八所)항에서 일했다.

약속과 달리 작업은 고됐다. 새벽 5시부터 12시간 이상 노동이 이어졌지만 식사는 부실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보급로가 막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풍토병까지 돌았다. 죄수 신분인 조선보국대 대원들은 다른 지역의 강제동원 피해자들보다 훨씬 낮은 처우를 받았다.

1945년 초 미군의 공습으로 비행장 건설과 철광 수송이 어려워지자 일본군은 조선인들을 싼야의 구릉지대로 집결시켰다. 조선촌이었다.

조선인


그녀는 취재진에게 자신이 언제 태어났는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을 봤던 기억이 있으니 족히 여든은 됐을 것이다. 하이난 원주민 리(黎)족 할머니 림야마이 씨 이야기다.

"조선인들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막대기로 다리, 엉덩이, 등, 머리를 사정없이 때려서 죽였습니다."

어린 시절 그녀의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은 잔혹했다. 나무에 매달아 매질을 한 뒤 죽으면 불에 태웠다고 한다. 당시의 역겨웠던 냄새가 다시 코를 자극했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든다. 그녀는 일본군을 보면 너무 무서워 소변을 지릴 정도였다고 말했다.

"매일 조선인들을 때려 죽였습니다. 한 번은 조선인들이 배가 고파서 밭에 있던 고구마를 파먹다가 일본군에 걸렸는데, 그냥 두들겨 패서 죽이더군요."

학대와 학살의 연속이었다. 하이난성이 기록한 한 중국인의 목격담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있다.

"당시 콜레라와 말라리아가 유행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감염됐습니다. 일본군들은 자신에게 콜레라가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감염된 노동자를 발견하면 생사여부를 불문하고 끌고 가서 불에 태웠습니다."

시신을 불태워 버렸다는 림야마이 할머니의 증언과 일치한다. 취재진은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인들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일본군이 항복하고 이곳을 떠났을 때 남아있는 조선인들은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이 있었던 건물과 낡아빠진 옷가지 몇 조각을 남기곤 사라졌어요. 아마 일본군이 전부 때려 죽였을 겁니다."

■ “살아있는 사람도 불태워”…학대와 학살

지옥 같던 섬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있다. 이는 경성형무소 '가출옥관계서류'를 통해 확인된다.

조선인


이 서류에서 가출옥, 즉 가석방 사유가 '해남도파견보국대(海南島派遣報國隊)'로 적혀있는 사람은 모두 112명. 가석방은 대부분 하이난 강제동원이 시작된 이듬해인 1944년 7월과 8월에 이뤄졌다. 일본의 약속이 일부 지켜진 것이다.

하지만 112명은 전체 동원 인원 2천 명의 5% 정도에 불과하다. 전쟁 말기에 이르자 일본은 보란 듯이 이 약속을 폐기했다. 1944년 9월을 끝으로 더 이상 하이난 파견을 이유로 가석방이 이뤄진 수형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일본 패망 후 하이난에서 귀환한 조선인은 없을까?

취재진은 그동안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었던 문서를 입수했다. 하이난 주둔 일본군 사령관 고가 케이지로가 작성한 '해남지구 종전처리 개요 및 현상보고'이다.

조선인


이 보고서에 '조선보국대'로 분류된 인원은 모두 658명으로 이 가운데 조선인 간수는 52명, 수형자는 606명이다. 전체 2천여 명 가운데 가석방이 확인된 112명, 그리고 귀환보고서에 적힌 606명 등 7백여 명은 살아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머지 천3백 명은 어떻게 된 걸까? 현재 이 천3백 명에 대한 기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이들은 하이난에서, 그리고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 하이난에서 사라진 조선인…1300명 추정

"종전 이후 일본군이 조선인 천여 명을 집단 학살해 한 곳에 묻었다"

<철발굽 아래의 피비린내 나는 비바람(鐵蹄下的腥風血雨)> 이 책에 적힌 내용은 사실일까? 아직까지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나 증언은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미 드러난 자료와 증언들을 통해 조심스럽게 예측해 볼 수는 있다.

수형자들과 함께 하이난에 파견된 간수 240여 명 가운데 조선인은 87명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고가 케이지로의 보고서에 따르면 돌아온 조선인 간수는 52명이다. 보고서에서 사라진 35명은 하이난 현지에서 숨진 것으로, 사망률은 40%에 이른다. 대부분 미군의 공습이나 풍토병 때문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데, 더 열악한 환경에 있던 수형자들은 간수에 비해 사망률이 훨씬 높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간수 사망률 40%로 미루어 짐작컨대, 2천 명 중 절반 정도는 공습과 풍토병으로 숨졌고, 여기에 심한 매질과 같은 가혹행위로 더 많은 수형자가 먼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1998년 천인갱 지역을 일부 발굴했던 박선주 충남대 교수는 발굴 당시 유골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종전 뒤 집단학살이 일어났다면 시신을 분명 마구잡이로 구덩이에 집어 던졌을 겁니다. 그런데 천인갱에서 발굴된 유골들은 머리를 동쪽에 두고 나란히 묻혀 있었습니다. 유골의 상태로 봐선 어느 정도 계획을 하고 묻어준 것 같아 보입니다.“

조선인


그러나 학살은 분명히 존재했다. 조선촌의 주민들은 매일같이 나무에 묶여 구타당하는 조선인들을, 불에 태워진 뒤 벌판에 버려지는 조선인들을 보았다. 기록에서 사라진 천3백 명이 이렇게 죽어갔을 것이다. 정혜경 강제동원지원위원회 조사과장은 "일반적으로 강제동원 피해자와 가해자의 증언엔 차이가 있지만 하이난의 경우는 피해자, 가해자, 지역 주민의 증언이 동일하게 가혹행위를 입증한다"며 "그러나 1300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숨졌고, 어디에 묻혔는지는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일상적 가혹행위와 학살…진상 규명 필요

황무지였던 천인갱에도 개발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미 고속도로가 관통했고, 판자촌이었던 조선촌에 하나 둘 씩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개발 열풍이 언제 천인갱을 덮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70여 년 전 열대의 섬에서 스러져간 조선인들의 넋은 지금도 조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신주백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진상규명이고, 진상규명의 첫 번째 단계는 발굴"이라며 "진상규명과 유골 봉환은 국가의 책무"라고 말했다.

정부는 현재 중국 외교부와 천인갱 발굴조사에 대한 협의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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