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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國記] 여권 성별란에 男·女 아닌 ‘0’…성 소수자의 천국 네팔
입력 2015.08.16 (15:01) 수정 2015.08.16 (15:42) 7국기
새 여권을 보여주는 모니카 샤히새 여권을 보여주는 모니카 샤히

▲ 새 여권을 보여주는 모니카 샤히


■ 네팔 '제3의 성' 표기 여권 첫 발급

네팔 수도 카트만두, 올해 37살의 모니카 샤히가 환하게 웃으며 막 발급받은 여권을 펼쳐보였다. 여느 여권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성별란에 생소한 글자가 있었다. M(Male) 혹은 F(Female)가 아닌 'O'(알파벳 오)가 인쇄돼 있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Other', 즉 제3의 性이라는 뜻이다. 이런 여권 발급은 호주와 뉴질랜드에 이어 네팔이 세계 세 번째다. 네팔 정부가 '제3의 성' 표기를 공식화한 만큼, 비슷한 여권은 앞으로도 계속 발급될 것이다.

네팔은 세계 최빈국이다. 지진, 빈곤, 미개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나라다. 실제로 옛 왕조 유적과 히말라야 관광을 제외하고는 변변한 산업이 없다.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럽다. 오랜 왕정 끝에 공화정이 들어섰지만 근대화된 나라를 세우는 작업은 여전히 더디다. 인구 2천8백만 명 가운데 힌두교도가 80% 차지하는 보수적인 사회다. 가난하고 민주주의 경험이 일천한 나라에서 인권 의식은 낮고 제도도 미비하다.

성 소수자 권리 촉구 행진성 소수자 권리 촉구 행진


■ 세계 최초로 ‘제3의 성’ 인구 센서스에 포함

하지만 '성 소수자'(LGBT,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에 대해서만은 예외다. 제도만 놓고 볼때, 예외 정도가 아니라 서구 어느 나라보다 진보적이다. 2013년에 '제3의 성'을 표기한 주민카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세계 인구 센서스 사상 최초로 '제3의 성'을 인정했다. 남자용, 여자용이 아닌 '성 소수자'를 위한 공중 화장실도 만들었다. 커밍아웃한 게이가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이제 네팔은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정부 위원회에서 이미 동성 결혼 합법화를 권고하는 방대한 양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법제화만 남은 건데, 최근의 진보적 조치들을 고려할 때, 시간 문제로 보인다. 법이 통과할 경우 네팔은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아시아 최초의 국가가 된다.

‘성 소수자’ 보호에 결정적 역할을 한 네팔 대법원‘성 소수자’ 보호에 결정적 역할을 한 네팔 대법원

▲ ‘성 소수자’ 보호에 결정적 역할을 한 네팔 대법원


■ 대법원, 획기적 ‘성 소수자’ 판결

'성 소수자'에 대한 일련의 획기적 조치에 물꼬를 튼 것은 대법원이었다. 2007년 네팔 대법원은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는 그들이 성적으로 남성적인지 여성적인지 관계 없이 모두 정상적 인간이며 자신의 권리를 행사해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 권리를 지닌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그러면서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모든 법률을 바꾸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라고 결정했다.

이런 진보적 조치들이 있었지만 사실 네팔에서도 성 소수자는 사회의 약자이자 이방인이다. 사람들의 냉대가 심해 정상적으로 교육받거나 취업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들을 향한 크고 작은 폭력 행위도 빈번하고 재난 현장에서 게이라는 이유로 구호물품을 제공하지 않는 사례까지 있었다.

인도의 히즈라인도의 히즈라

▲ 인도의 히즈라


■ 힌두교 전통 속 ‘제3의 성’

그렇다면 '특이하게도' 네팔에서 '성 소수자' 보호 제도가 세계 최고 수준을 보이는 건 무엇 때문일까. 사회 통념을 두 발짝 세 발짝 앞서간 대법원의 역할이 1차적으로 꼽힌다. 2007년 네팔 대법원의 판결은 관련 운동가들에게 '기념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는 힌두교 전통에서 '히즈라'로 불리는 '제3의 성'의 존재가 거론된다. 히즈라는 타고난 남자의 성을 물리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포기하고 여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샤머니즘 전통에서의 무당처럼, 환영받지는 못하지만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히즈라는 특별한 에너지를 갖고 있어서 그 에너지로 축복이나 저주를 줄 수 있다고 믿어져왔다. 지금도 아기를 출산한 가정이나 개업한 업소에 가서 축복을 해주고 사례를 받는 일이 있다.

'제3의 성'이 전통 속에 자리잡고 있다 보니 힌두교도가 다수인 네팔이 오늘날 '성 소수자'에 대한 포용적 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인도와 네팔,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 인도 문화권 국가들에서는 '성 소수자'에 대한 정책이 이례적으로 진보적이다.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네팔의 '성 소수자' 35만 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도적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나라가 가난하다고 모든 게 뒤떨어진 것은 아니다.
  • [7國記] 여권 성별란에 男·女 아닌 ‘0’…성 소수자의 천국 네팔
    • 입력 2015-08-16 15:01:44
    • 수정2015-08-16 15:42:46
    7국기
새 여권을 보여주는 모니카 샤히새 여권을 보여주는 모니카 샤히

▲ 새 여권을 보여주는 모니카 샤히


■ 네팔 '제3의 성' 표기 여권 첫 발급

네팔 수도 카트만두, 올해 37살의 모니카 샤히가 환하게 웃으며 막 발급받은 여권을 펼쳐보였다. 여느 여권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성별란에 생소한 글자가 있었다. M(Male) 혹은 F(Female)가 아닌 'O'(알파벳 오)가 인쇄돼 있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Other', 즉 제3의 性이라는 뜻이다. 이런 여권 발급은 호주와 뉴질랜드에 이어 네팔이 세계 세 번째다. 네팔 정부가 '제3의 성' 표기를 공식화한 만큼, 비슷한 여권은 앞으로도 계속 발급될 것이다.

네팔은 세계 최빈국이다. 지진, 빈곤, 미개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나라다. 실제로 옛 왕조 유적과 히말라야 관광을 제외하고는 변변한 산업이 없다.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럽다. 오랜 왕정 끝에 공화정이 들어섰지만 근대화된 나라를 세우는 작업은 여전히 더디다. 인구 2천8백만 명 가운데 힌두교도가 80% 차지하는 보수적인 사회다. 가난하고 민주주의 경험이 일천한 나라에서 인권 의식은 낮고 제도도 미비하다.

성 소수자 권리 촉구 행진성 소수자 권리 촉구 행진


■ 세계 최초로 ‘제3의 성’ 인구 센서스에 포함

하지만 '성 소수자'(LGBT,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에 대해서만은 예외다. 제도만 놓고 볼때, 예외 정도가 아니라 서구 어느 나라보다 진보적이다. 2013년에 '제3의 성'을 표기한 주민카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세계 인구 센서스 사상 최초로 '제3의 성'을 인정했다. 남자용, 여자용이 아닌 '성 소수자'를 위한 공중 화장실도 만들었다. 커밍아웃한 게이가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이제 네팔은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정부 위원회에서 이미 동성 결혼 합법화를 권고하는 방대한 양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법제화만 남은 건데, 최근의 진보적 조치들을 고려할 때, 시간 문제로 보인다. 법이 통과할 경우 네팔은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아시아 최초의 국가가 된다.

‘성 소수자’ 보호에 결정적 역할을 한 네팔 대법원‘성 소수자’ 보호에 결정적 역할을 한 네팔 대법원

▲ ‘성 소수자’ 보호에 결정적 역할을 한 네팔 대법원


■ 대법원, 획기적 ‘성 소수자’ 판결

'성 소수자'에 대한 일련의 획기적 조치에 물꼬를 튼 것은 대법원이었다. 2007년 네팔 대법원은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는 그들이 성적으로 남성적인지 여성적인지 관계 없이 모두 정상적 인간이며 자신의 권리를 행사해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 권리를 지닌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그러면서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모든 법률을 바꾸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라고 결정했다.

이런 진보적 조치들이 있었지만 사실 네팔에서도 성 소수자는 사회의 약자이자 이방인이다. 사람들의 냉대가 심해 정상적으로 교육받거나 취업하기가 무척 어렵다. 이들을 향한 크고 작은 폭력 행위도 빈번하고 재난 현장에서 게이라는 이유로 구호물품을 제공하지 않는 사례까지 있었다.

인도의 히즈라인도의 히즈라

▲ 인도의 히즈라


■ 힌두교 전통 속 ‘제3의 성’

그렇다면 '특이하게도' 네팔에서 '성 소수자' 보호 제도가 세계 최고 수준을 보이는 건 무엇 때문일까. 사회 통념을 두 발짝 세 발짝 앞서간 대법원의 역할이 1차적으로 꼽힌다. 2007년 네팔 대법원의 판결은 관련 운동가들에게 '기념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는 힌두교 전통에서 '히즈라'로 불리는 '제3의 성'의 존재가 거론된다. 히즈라는 타고난 남자의 성을 물리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포기하고 여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샤머니즘 전통에서의 무당처럼, 환영받지는 못하지만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히즈라는 특별한 에너지를 갖고 있어서 그 에너지로 축복이나 저주를 줄 수 있다고 믿어져왔다. 지금도 아기를 출산한 가정이나 개업한 업소에 가서 축복을 해주고 사례를 받는 일이 있다.

'제3의 성'이 전통 속에 자리잡고 있다 보니 힌두교도가 다수인 네팔이 오늘날 '성 소수자'에 대한 포용적 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인도와 네팔,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 인도 문화권 국가들에서는 '성 소수자'에 대한 정책이 이례적으로 진보적이다.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네팔의 '성 소수자' 35만 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도적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나라가 가난하다고 모든 게 뒤떨어진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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