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연평해전 故 윤영하 소령의 추억, 생전 인터뷰 독점 공개

입력 2015.09.02 (00:08) 수정 2015.09.0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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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엔 한때 남북 간 긴장 고조로 안보와 국방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았었습니다. 특히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전역을 앞둔 50여 장병들의 자발적 전역 연기 신청은 ‘2030 신안보 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안보 의식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영화 <연평해전>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속에서 한상국 중사가 육지 근무를 앞두고 벌어진 연평해전에서 끝까지 조타실을 지키다 숨져 간 장면이나 이희완 당시 부정장이 고속정이 아닌 곳으로의 전출 직전 마지막 출항에서 전투 중 한 다리를 잃고도 임무를 완수해내는 모습 등이 대한민국 20대를, 그리고 그들의 안보 의식을 다시 보게 했습니다.

600만을 돌파한 영화 <연평해전>의 열풍이 이어지던 지난 8월 11일 경기도 파주 도라산 평화공원에서는 연평해전 전사자들의 부모님과 가족, 참전용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연평해전 영웅의 숲’ 착공식이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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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를 심고 나서 연신 “사랑한다”고 말하며 나무를 붙들고 우는 한 어머니의 모습은 차마 사진으로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다시 만나자”, “좋은 일인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벌써 13년 전인데 이렇게 기억해주는 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라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부모님들의 태도는 그 절제된 말투에서 오히려 자식 잃은 슬픔이 더욱 깊이 공감되면서 그 슬픔을 감히 가늠이라도 해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나무가 자식인 듯, 심은 나무 주위의 땅을 밟고 또 밟던 부모님들은 “솔직히 우리 애들이 자리를 잡지 못 했었잖아요, 그런데 영화로도 기억되고, 이렇게 숲도 마련되고 그래서 자리를 잡아가는 그 과정이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결국 눈물을 보였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故 윤영하 참수리 357호 정장의 아버지를 뵐 기회가 되었는데요, 영화에 나온 대로 아버지 역시 해군사관학교 출신이셨습니다. 한참을 거절하시다가 어렵사리 인터뷰에 응해, 어렵게 아들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시던 아버지는 故 윤 정장이 생도 시절, 그러니까 20년 가까운 세월 전에 KBS의 한 프로그램에 학생 대표로 출연했었다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1996년 1월 29일자 에 4학년 학생으로서 해군순항훈련을 마치고 출연한 건데요, 이로부터 6년 6개월 후 연평해전이 있었습니다.

KBS 비디오 아카이브에서 구한 프로그램 자료, 그리고 아버지가 직접 이야기 한 故 윤영하 소령의 이야기 직접 보시죠,



▲윤영하 생도 KBS 출연 자료(세상은 넓다 – 바다로 세계로 편, 1996년 1월 29일 방송)




Q. 요즘 많이 바쁘시죠?
그렇죠, 영화 때문에 인터뷰 요청도 많고 그런데 내가 잘 안 해요. 영화를 6월 1일에 봤는데 직후에 몇몇 신문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와서 몇 마디 한 다음에 딱 끊었어요. 거절한 이유는 자꾸 나만 찾아오니까요. 예전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번에 영화를 보고 나니까 ‘다른 유가족들도 얼굴을 세워줘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13년 동안 한 말이 주저리주저리 참 많다, 그러니 이제 다른 가족들한테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시라’고 거절했죠.

Q. 영화에 실제 아드님 인터뷰가 나와서 반가우셨겠어요.
영하가 인터뷰한 거, 그건 나도 몰랐어요. 몰랐는데 그 무렵이 월드컵 때였잖아요. 그래서 어느 날은 식구들하고 저녁 먹으면서 TV를 보고 있는데 우리 영하가 뉴스에 딱 나오더라고. 그래서 “어, 인터뷰도 했네?” 그랬는데, 그게 아마 2002년 6월 초순이었을 거예요. 그리고는 잊어버렸는데 6월 29일 날 그 일이 터지니까, 각 방송에서 계속 그걸 보여주고,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르죠. 그게 나올 적마다 (영하가) 기억나는 거지요.

Q. 윤영하 정장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제가 듣기로는 우리 영하가 학교 다닐 때 관심의 대상이었지 않았나 싶어요. 왜냐면 아버지가 해군이었으니까 해군사관학교 생도 때부터 선배 장교들이 아무래도 좀 더 관심을 가져준 것 같기도 하고, 또 영어랑 수영을 아주 잘 해서 입학해서부터 두각을 나타냈어요. 수영은 영국에 있을 때 학교에서 배웠는데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수영부터 하거든요, 여름에 수영 훈련을 나가는데 시켜보니까 잘 하거든? 그러니까 1학년이 교관이 된 거예요. ‘빨간 모자’ 쓰고. 나중에 그러더라고. “아버지, 저 선배들한테 밉보이는 것 같아요. 1학년이 ‘빨간 모자(교관)’한다고.” 그 정도였어요. 그리고 영국에서 영국 영어, 네덜란드에선 아메리칸 스쿨을 다녀서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를 다 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1,2,3,4 학년이 똑같이 보는 영어시험에서 1등도 하고 그래서 실은 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방송에도 여러 번 출연하고 (학교 소개 프로그램 같은 거)했어요.



실제로 KBS에 돌아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윤영하 생도가 출연한 자료가 고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KBS는 아니지만 다른 방송사에서도 <미리 가본 대학>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한민국해군사관학교 소개자로서 윤 생도가 등장한 적이 있었다고 부모님께서 귀띔해주셨습니다.


영화에 나온 그 월드컵 승리 기원 인터뷰도 영하가 일 터지기 바로 직전에 집에 왔을 때 잠깐 이야기를 했었어요. 방송에서 인터뷰해갔다고. 그러고 갔는데 나중에 사건이 나고 나니까 영하는 가고, 그 때 살아남은 편대장이 나한테 와가지고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인터뷰 뒷 얘기를 하더라고요. 원래는 방송사에서 편대장을 인터뷰하자고 했는데 자기가 윤영하 정장을 하라고 해서 영하가 인터뷰를 하게 된 거라고, 그래서 그 인터뷰가 남게 된 거예요.

Q.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로 윤영하 정장을 접했을 텐데요, 실존 인물과 얼마나 비슷한가요?
제가 고속정 정장으로 있을 때 대원들을 좀 엄격하게 다뤘어요. 정신적으로 기합을 준 거죠. 일부러 스케쥴을 타이트하게 한다든지 부담을 주면서 정신 차리라고. 그렇게 하고는 영하가 장교가 되니까 “나는 옛날에 이렇게 했다, 장교는 이렇게 하는 거다, 네가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실행해도 좋아.”라고 얘기해줬죠. 배 생활을 집에 와서 얘기하지를 않으니까 나는 몰랐죠. 그런데 나중에 이희완 소령이 저녁 먹는 자리에서 나한테“선배님은 과거에 어땠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했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친구 말이 “정장님이 아버지하고 똑같아요” 그래요. 나도 얼핏 그런 이야기는 들었었어요. 대원들한테 엄하게 한다고. 원칙대로 하는 거지.
일례로 내가 어떻게 가르쳤냐 하면 ‘장교는 탱크 속을 기어야 한다. 내가 기었다. 왜 그래야 되냐?’ 해군 배는 격실로 되어 있잖아요. 기름 탱크도 있고 각종 탱크들이 있는데 그걸 가끔 청소를 해야 돼요. 그럼 대원들이 청소를 했다고 보고를 하잖아요. ‘그 때 “어, 수고했어” 그러고 끝나면 안 된다. 안에 걸레도 남아 있을 수 있고, 잡동사니 쓰레기를 애들이 귀찮으면 그냥 놓고 나오는 경우도 있으니 네가 맨 처음에 정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그런 일을 당했을 때는 탱크를 기어라. 왜? 기어야 그 다음부터 애들이 거짓말도 안 하고 실수를 안 한다. 쓰레기 다 걷어서 가지고 나온다. 내가 첫 번째에 기고 나서, 두 번째, 세 번째 가보니까 깨끗하게 정돈을 했더라.’ 이랬죠. 정장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청소가 제대로 샅샅이 됐는지 확인도 못 하고, 대원들이 청소를 엉터리로 했을 수도 있고, 그러면 사고가 난단 말이에요. 펌프가 막힌다든지 하면 배가 사고가 나니까 그런 소소한 것까지 철저히 실천하는 게 장교가 할 일이라고 가르치고, 작업은 대원들이 하지만 마지막 점검은 꼭 정장이 현장 확인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나도 그렇게 했었고.

Q. 윤영하 정장님은 왜 해군이 되셨나요?
영하는 스스로 간 거예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사실 사관학교는 아무나 못 가요. 실력이 돼야 가는 곳이죠. 그래서 저는 사관생도들을 존경해요. 실력들도 대한민국의 엘리트들이라고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한번 도전해 볼래?’하는 이야기는 몇 번 했었어요, 영하한테. 그런데 그때는 안 가겠대요. 근데 제가 영국에 살 때 영하한테 ‘영국의 귀족은 다 해군 장교다. 미국도 해군이 제일이다. 미국 애너폴리스 해군사관학교는 입학하기도 어렵고, 훌륭한 사람들만 가는 곳이고, 해군은 세계를 다 지배할 수 있다. 왜? 해군은 육해공을 다 가지고 있으니까. 항공모함도 있고, 비행기도 있고, 해병대가 있으니 어디든지 상륙해서 육상 전투도 할 수 있고,오직 해군만 단독 전투가 가능하다. 그래서 해군이 세계적으로도 으뜸이고 해군 장교는 어느 나라엘 가나 가장 존경 받는다, 국제 신사다’라고 이야기를 해줬거든요.

그 다음에 죽는 거? 그거 나도 그렇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줬어요.
“죽는 거 두려워하지 마라. 사람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한번 죽을 때 나라를 위해서 죽는 거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 그건 정말 훌륭한 일이다.” 라고요. 그러면서 “사관학교 가는 것도 겁먹을 거 없어. 목숨을 바친다고 생각하고 가.”라고 이야기했죠.

그랬더니 처음에는 안 간대요. 싫다고 했는데 송도 고등학교 3학년 때 내가 ‘실력테스트’ 한번 해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해사 시험은 일찍 보니까 시험 봐서 안 되면 그만이고 하는 마음으로 ‘너, 대학교 입학시험 보려면 실력을 한번 테스트 해보고 싶지 않냐? 그러니까 한번 봐봐’ 해서 시험을 보게 됐어요. 근데 필기시험을 보면 배수로 발표가 나거든요. 200명 뽑는데 400명, 근데 거기에 뽑혀서 진해 사관학교에 가서 신체검사 받고 면접 보고 하는데 같이 갔다가 시험 절차 다 끝내고 기차 타고 돌아오는데 영하가 나한테 그러더라고. “아빠, 나 마음이 바뀌었어. 금년에 떨어지면 내년에 다시 볼래.”

Q.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겉으로는 “시험도 안 본다더니 그런 생각은 왜 했어?” 라고 했지만, 바로 “그래, 좋은 생각이야.”라고 얘기해줬죠. 그랬더니 “나는 군인하고 싶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럼, 장교가 뭐 어때서? 죽는 거? 그거 두려워하지 마.” 라고 다시 얘기해줬어요. 평소 내 신조대로 이야기해준 거죠. 나도 최전방 볼음도를 중위 때 들어갔어요. 거기는 권총을 항상 머리 맡에 두고 자야 해요, 불안하니까. 그걸 딱 6개월 하고 나왔어요. 원래 1년 하려고 했었는데 사령관이 6개월 만에 빼주더라고요. 볼음도 바로 앞이 북한 연백평야거든요, 물 빠지면 북한군이 바로 걸어서 올 수도 있어요.

Q. 그런 생명의 위협을 느끼시고서도 아드님한테 권하고 싶으셨어요?
좋은 일 아니에요? 나라를 지키는 건 전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Q. 영화에서 보면 아버님이 통역장교 하지 않겠느냐고 권하시는 걸로 나오잖아요, 사실이에요?
그것도 사실이에요. 별이 된다는 보장은 없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왕이면 편안한 해군생활을 해봐라, 그리고 병과 장교들은 이사를 수없이 다녀야 하는데 그러면 나중에 애들 교육이 문제가 되거든요. 그런 거 보니까 영하가 영어도 잘 하겠다 해서 ‘사관학교 후배나 길러라’ 그랬더니 ‘알았다’고 ‘생각해보겠다’고 하더니 안 바꾸더라고요. 교수 병과가 따로 있거든요, 전투 병과는 항해 장교고. 함장을 죽 해서 큰 배로 올라가다가 별을 바라보는 코스인데 결국 포기를 안 하더라고요.

Q. 전투 병과가 힘들지 않았을까요?
힘들었을 거예요. 나도 힘들었어요. 나도 대위 때 나왔는데, 군대 생활이 정말 쉬운 게 아니에요.

Q. 소설이나 영화가 실제랑 얼마나 비슷할까요?
있는 그대로는 아니에요. 소설 쓰면서 조금 바뀐 부분이 있고, 영화를 찍으면서 또 조금 바뀌었으니까 그런 건 또 그런대로 봐주어야지, 소설도 읽히기 위해서 조금 바꾸고, 영화는 많이 보게 하기 위해서 또 조금씩 바뀌었으니까 그런 걸 갖고 이건 틀렸고 저건 맞다 그러면 안 되죠.

Q. 많이 그리우시죠?
영하한테 ‘한번 죽지, 두 번 죽느냐?’고 말은 했지만, 이렇게 일찍 갈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사람들이 언제가 제일 그리우냐고 묻는데 ‘눈 뜨면 생각난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내가 다 끝나고 나서 국군병원에 앉아 있으니까 자기 아들을 먼저 보낸 동기가 와서 ‘부인 잘 모셔라’라면서 ‘눈만 뜨면 생각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진짜예요. 눈 뜨면 생각나요, 지금도. 그리고 처음에는 기억을 잘 못 해주는 것 같아서 섭섭한 마음도 있었는데, <연평해전> 영화가 나오고, 또 윤영하함이나 박동혁함처럼 애들 이름이 들어간 배도 나오고-그건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거든요-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알게 되었으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고 있지요.

Q. 다른 유가족들과도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세요?
거의 붙어 살다시피 했죠. 모두 불교 신자라 일 년에 몇 번 애들 있는 법당에 가는데, 그러다 보면 한 해에 열 몇 번씩은 봐요. 그럼 우리끼리는 못할 이야기가 없어요. 밖에 나가면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고 그런데 우리끼리 있으면 서로 다 이해하니까 지금까지 관계를 잘 끌어오고 있지요.




故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는 ‘세월이 흘러도 아들이 너무 그리워, 집에 사진도 딱 두 개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보이지 않는 곳에 두었다’고 말씀하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잊혀지는 것에 대해서는 ‘기억해주면 고맙지만, 잊어버렸다고 뭐라 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다 이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연평해전의 6 용사들’을 어쩔 수 없이 잊게 되더라도 그들이 숲으로라도 기억되기를 바라신다면 http://treepla.net/yphero_forest.html이곳을 눌러 마음을 보태주시는 건 어떨까요?


▲ 연평해전 6용사의 숲 기부하기 공식 사이트 (모금 기간이 끝났어도 참여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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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연평해전 故 윤영하 소령의 추억, 생전 인터뷰 독점 공개
    • 입력 2015-09-02 00:08:47
    • 수정2015-09-02 10:20:31
    취재후·사건후
지난달엔 한때 남북 간 긴장 고조로 안보와 국방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았었습니다. 특히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전역을 앞둔 50여 장병들의 자발적 전역 연기 신청은 ‘2030 신안보 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안보 의식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영화 <연평해전>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속에서 한상국 중사가 육지 근무를 앞두고 벌어진 연평해전에서 끝까지 조타실을 지키다 숨져 간 장면이나 이희완 당시 부정장이 고속정이 아닌 곳으로의 전출 직전 마지막 출항에서 전투 중 한 다리를 잃고도 임무를 완수해내는 모습 등이 대한민국 20대를, 그리고 그들의 안보 의식을 다시 보게 했습니다.

600만을 돌파한 영화 <연평해전>의 열풍이 이어지던 지난 8월 11일 경기도 파주 도라산 평화공원에서는 연평해전 전사자들의 부모님과 가족, 참전용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연평해전 영웅의 숲’ 착공식이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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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해전 영웅의 숲


소나무를 심고 나서 연신 “사랑한다”고 말하며 나무를 붙들고 우는 한 어머니의 모습은 차마 사진으로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다시 만나자”, “좋은 일인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벌써 13년 전인데 이렇게 기억해주는 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라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부모님들의 태도는 그 절제된 말투에서 오히려 자식 잃은 슬픔이 더욱 깊이 공감되면서 그 슬픔을 감히 가늠이라도 해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나무가 자식인 듯, 심은 나무 주위의 땅을 밟고 또 밟던 부모님들은 “솔직히 우리 애들이 자리를 잡지 못 했었잖아요, 그런데 영화로도 기억되고, 이렇게 숲도 마련되고 그래서 자리를 잡아가는 그 과정이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결국 눈물을 보였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故 윤영하 참수리 357호 정장의 아버지를 뵐 기회가 되었는데요, 영화에 나온 대로 아버지 역시 해군사관학교 출신이셨습니다. 한참을 거절하시다가 어렵사리 인터뷰에 응해, 어렵게 아들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시던 아버지는 故 윤 정장이 생도 시절, 그러니까 20년 가까운 세월 전에 KBS의 한 프로그램에 학생 대표로 출연했었다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1996년 1월 29일자 에 4학년 학생으로서 해군순항훈련을 마치고 출연한 건데요, 이로부터 6년 6개월 후 연평해전이 있었습니다.

KBS 비디오 아카이브에서 구한 프로그램 자료, 그리고 아버지가 직접 이야기 한 故 윤영하 소령의 이야기 직접 보시죠,



▲윤영하 생도 KBS 출연 자료(세상은 넓다 – 바다로 세계로 편, 1996년 1월 29일 방송)




Q. 요즘 많이 바쁘시죠?
그렇죠, 영화 때문에 인터뷰 요청도 많고 그런데 내가 잘 안 해요. 영화를 6월 1일에 봤는데 직후에 몇몇 신문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와서 몇 마디 한 다음에 딱 끊었어요. 거절한 이유는 자꾸 나만 찾아오니까요. 예전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번에 영화를 보고 나니까 ‘다른 유가족들도 얼굴을 세워줘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13년 동안 한 말이 주저리주저리 참 많다, 그러니 이제 다른 가족들한테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시라’고 거절했죠.

Q. 영화에 실제 아드님 인터뷰가 나와서 반가우셨겠어요.
영하가 인터뷰한 거, 그건 나도 몰랐어요. 몰랐는데 그 무렵이 월드컵 때였잖아요. 그래서 어느 날은 식구들하고 저녁 먹으면서 TV를 보고 있는데 우리 영하가 뉴스에 딱 나오더라고. 그래서 “어, 인터뷰도 했네?” 그랬는데, 그게 아마 2002년 6월 초순이었을 거예요. 그리고는 잊어버렸는데 6월 29일 날 그 일이 터지니까, 각 방송에서 계속 그걸 보여주고,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르죠. 그게 나올 적마다 (영하가) 기억나는 거지요.

Q. 윤영하 정장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제가 듣기로는 우리 영하가 학교 다닐 때 관심의 대상이었지 않았나 싶어요. 왜냐면 아버지가 해군이었으니까 해군사관학교 생도 때부터 선배 장교들이 아무래도 좀 더 관심을 가져준 것 같기도 하고, 또 영어랑 수영을 아주 잘 해서 입학해서부터 두각을 나타냈어요. 수영은 영국에 있을 때 학교에서 배웠는데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수영부터 하거든요, 여름에 수영 훈련을 나가는데 시켜보니까 잘 하거든? 그러니까 1학년이 교관이 된 거예요. ‘빨간 모자’ 쓰고. 나중에 그러더라고. “아버지, 저 선배들한테 밉보이는 것 같아요. 1학년이 ‘빨간 모자(교관)’한다고.” 그 정도였어요. 그리고 영국에서 영국 영어, 네덜란드에선 아메리칸 스쿨을 다녀서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를 다 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1,2,3,4 학년이 똑같이 보는 영어시험에서 1등도 하고 그래서 실은 사관학교 생도 시절부터 방송에도 여러 번 출연하고 (학교 소개 프로그램 같은 거)했어요.



실제로 KBS에 돌아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윤영하 생도가 출연한 자료가 고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KBS는 아니지만 다른 방송사에서도 <미리 가본 대학>이라는 프로그램에 대한민국해군사관학교 소개자로서 윤 생도가 등장한 적이 있었다고 부모님께서 귀띔해주셨습니다.


영화에 나온 그 월드컵 승리 기원 인터뷰도 영하가 일 터지기 바로 직전에 집에 왔을 때 잠깐 이야기를 했었어요. 방송에서 인터뷰해갔다고. 그러고 갔는데 나중에 사건이 나고 나니까 영하는 가고, 그 때 살아남은 편대장이 나한테 와가지고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인터뷰 뒷 얘기를 하더라고요. 원래는 방송사에서 편대장을 인터뷰하자고 했는데 자기가 윤영하 정장을 하라고 해서 영하가 인터뷰를 하게 된 거라고, 그래서 그 인터뷰가 남게 된 거예요.

Q.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로 윤영하 정장을 접했을 텐데요, 실존 인물과 얼마나 비슷한가요?
제가 고속정 정장으로 있을 때 대원들을 좀 엄격하게 다뤘어요. 정신적으로 기합을 준 거죠. 일부러 스케쥴을 타이트하게 한다든지 부담을 주면서 정신 차리라고. 그렇게 하고는 영하가 장교가 되니까 “나는 옛날에 이렇게 했다, 장교는 이렇게 하는 거다, 네가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실행해도 좋아.”라고 얘기해줬죠. 배 생활을 집에 와서 얘기하지를 않으니까 나는 몰랐죠. 그런데 나중에 이희완 소령이 저녁 먹는 자리에서 나한테“선배님은 과거에 어땠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했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친구 말이 “정장님이 아버지하고 똑같아요” 그래요. 나도 얼핏 그런 이야기는 들었었어요. 대원들한테 엄하게 한다고. 원칙대로 하는 거지.
일례로 내가 어떻게 가르쳤냐 하면 ‘장교는 탱크 속을 기어야 한다. 내가 기었다. 왜 그래야 되냐?’ 해군 배는 격실로 되어 있잖아요. 기름 탱크도 있고 각종 탱크들이 있는데 그걸 가끔 청소를 해야 돼요. 그럼 대원들이 청소를 했다고 보고를 하잖아요. ‘그 때 “어, 수고했어” 그러고 끝나면 안 된다. 안에 걸레도 남아 있을 수 있고, 잡동사니 쓰레기를 애들이 귀찮으면 그냥 놓고 나오는 경우도 있으니 네가 맨 처음에 정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그런 일을 당했을 때는 탱크를 기어라. 왜? 기어야 그 다음부터 애들이 거짓말도 안 하고 실수를 안 한다. 쓰레기 다 걷어서 가지고 나온다. 내가 첫 번째에 기고 나서, 두 번째, 세 번째 가보니까 깨끗하게 정돈을 했더라.’ 이랬죠. 정장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청소가 제대로 샅샅이 됐는지 확인도 못 하고, 대원들이 청소를 엉터리로 했을 수도 있고, 그러면 사고가 난단 말이에요. 펌프가 막힌다든지 하면 배가 사고가 나니까 그런 소소한 것까지 철저히 실천하는 게 장교가 할 일이라고 가르치고, 작업은 대원들이 하지만 마지막 점검은 꼭 정장이 현장 확인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나도 그렇게 했었고.

Q. 윤영하 정장님은 왜 해군이 되셨나요?
영하는 스스로 간 거예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사실 사관학교는 아무나 못 가요. 실력이 돼야 가는 곳이죠. 그래서 저는 사관생도들을 존경해요. 실력들도 대한민국의 엘리트들이라고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한번 도전해 볼래?’하는 이야기는 몇 번 했었어요, 영하한테. 그런데 그때는 안 가겠대요. 근데 제가 영국에 살 때 영하한테 ‘영국의 귀족은 다 해군 장교다. 미국도 해군이 제일이다. 미국 애너폴리스 해군사관학교는 입학하기도 어렵고, 훌륭한 사람들만 가는 곳이고, 해군은 세계를 다 지배할 수 있다. 왜? 해군은 육해공을 다 가지고 있으니까. 항공모함도 있고, 비행기도 있고, 해병대가 있으니 어디든지 상륙해서 육상 전투도 할 수 있고,오직 해군만 단독 전투가 가능하다. 그래서 해군이 세계적으로도 으뜸이고 해군 장교는 어느 나라엘 가나 가장 존경 받는다, 국제 신사다’라고 이야기를 해줬거든요.

그 다음에 죽는 거? 그거 나도 그렇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줬어요.
“죽는 거 두려워하지 마라. 사람이 한번 죽지 두 번 죽냐? 한번 죽을 때 나라를 위해서 죽는 거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 그건 정말 훌륭한 일이다.” 라고요. 그러면서 “사관학교 가는 것도 겁먹을 거 없어. 목숨을 바친다고 생각하고 가.”라고 이야기했죠.

그랬더니 처음에는 안 간대요. 싫다고 했는데 송도 고등학교 3학년 때 내가 ‘실력테스트’ 한번 해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해사 시험은 일찍 보니까 시험 봐서 안 되면 그만이고 하는 마음으로 ‘너, 대학교 입학시험 보려면 실력을 한번 테스트 해보고 싶지 않냐? 그러니까 한번 봐봐’ 해서 시험을 보게 됐어요. 근데 필기시험을 보면 배수로 발표가 나거든요. 200명 뽑는데 400명, 근데 거기에 뽑혀서 진해 사관학교에 가서 신체검사 받고 면접 보고 하는데 같이 갔다가 시험 절차 다 끝내고 기차 타고 돌아오는데 영하가 나한테 그러더라고. “아빠, 나 마음이 바뀌었어. 금년에 떨어지면 내년에 다시 볼래.”

Q.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겉으로는 “시험도 안 본다더니 그런 생각은 왜 했어?” 라고 했지만, 바로 “그래, 좋은 생각이야.”라고 얘기해줬죠. 그랬더니 “나는 군인하고 싶어.”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럼, 장교가 뭐 어때서? 죽는 거? 그거 두려워하지 마.” 라고 다시 얘기해줬어요. 평소 내 신조대로 이야기해준 거죠. 나도 최전방 볼음도를 중위 때 들어갔어요. 거기는 권총을 항상 머리 맡에 두고 자야 해요, 불안하니까. 그걸 딱 6개월 하고 나왔어요. 원래 1년 하려고 했었는데 사령관이 6개월 만에 빼주더라고요. 볼음도 바로 앞이 북한 연백평야거든요, 물 빠지면 북한군이 바로 걸어서 올 수도 있어요.

Q. 그런 생명의 위협을 느끼시고서도 아드님한테 권하고 싶으셨어요?
좋은 일 아니에요? 나라를 지키는 건 전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Q. 영화에서 보면 아버님이 통역장교 하지 않겠느냐고 권하시는 걸로 나오잖아요, 사실이에요?
그것도 사실이에요. 별이 된다는 보장은 없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왕이면 편안한 해군생활을 해봐라, 그리고 병과 장교들은 이사를 수없이 다녀야 하는데 그러면 나중에 애들 교육이 문제가 되거든요. 그런 거 보니까 영하가 영어도 잘 하겠다 해서 ‘사관학교 후배나 길러라’ 그랬더니 ‘알았다’고 ‘생각해보겠다’고 하더니 안 바꾸더라고요. 교수 병과가 따로 있거든요, 전투 병과는 항해 장교고. 함장을 죽 해서 큰 배로 올라가다가 별을 바라보는 코스인데 결국 포기를 안 하더라고요.

Q. 전투 병과가 힘들지 않았을까요?
힘들었을 거예요. 나도 힘들었어요. 나도 대위 때 나왔는데, 군대 생활이 정말 쉬운 게 아니에요.

Q. 소설이나 영화가 실제랑 얼마나 비슷할까요?
있는 그대로는 아니에요. 소설 쓰면서 조금 바뀐 부분이 있고, 영화를 찍으면서 또 조금 바뀌었으니까 그런 건 또 그런대로 봐주어야지, 소설도 읽히기 위해서 조금 바꾸고, 영화는 많이 보게 하기 위해서 또 조금씩 바뀌었으니까 그런 걸 갖고 이건 틀렸고 저건 맞다 그러면 안 되죠.

Q. 많이 그리우시죠?
영하한테 ‘한번 죽지, 두 번 죽느냐?’고 말은 했지만, 이렇게 일찍 갈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사람들이 언제가 제일 그리우냐고 묻는데 ‘눈 뜨면 생각난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내가 다 끝나고 나서 국군병원에 앉아 있으니까 자기 아들을 먼저 보낸 동기가 와서 ‘부인 잘 모셔라’라면서 ‘눈만 뜨면 생각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진짜예요. 눈 뜨면 생각나요, 지금도. 그리고 처음에는 기억을 잘 못 해주는 것 같아서 섭섭한 마음도 있었는데, <연평해전> 영화가 나오고, 또 윤영하함이나 박동혁함처럼 애들 이름이 들어간 배도 나오고-그건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거든요-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알게 되었으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고 있지요.

Q. 다른 유가족들과도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세요?
거의 붙어 살다시피 했죠. 모두 불교 신자라 일 년에 몇 번 애들 있는 법당에 가는데, 그러다 보면 한 해에 열 몇 번씩은 봐요. 그럼 우리끼리는 못할 이야기가 없어요. 밖에 나가면 울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고 그런데 우리끼리 있으면 서로 다 이해하니까 지금까지 관계를 잘 끌어오고 있지요.




故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는 ‘세월이 흘러도 아들이 너무 그리워, 집에 사진도 딱 두 개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보이지 않는 곳에 두었다’고 말씀하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잊혀지는 것에 대해서는 ‘기억해주면 고맙지만, 잊어버렸다고 뭐라 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다 이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연평해전의 6 용사들’을 어쩔 수 없이 잊게 되더라도 그들이 숲으로라도 기억되기를 바라신다면 http://treepla.net/yphero_forest.html이곳을 눌러 마음을 보태주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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