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한반도] 애타는 이산가족들 “이제는 만나야 한다”

입력 2015.09.05 (07:49) 수정 2015.09.0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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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남북 간 주요 이슈 현장을 찾아가는 <이슈 & 한반도>입니다.

남북 고위급 합의에 따라 모처럼만에 열리게 되는 남북 적십자 실무 접촉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추석 이산 상봉의 구체적인 일정과 상봉 인원, 그리고 상봉 정례화와 생사 확인 등 이산가족문제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뤄질 예정인데요,

이번에야말로 일회성 상봉을 넘어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 해법을 찾아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슈 앤 한반도, 오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산가족 문제 짚어봤습니다.

송지현 리포터입니다.

<리포트>

<녹취> "지칠 대로 지쳤지만 그래도 기다린다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

<녹취> "언니 진짜 보고 싶어요. 살아있어요?"

<녹취> "살아생전 한번 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녹취> 장사인(이산가족/북한의 형이 보낸 편지) : "이제는 내 나이도 80이 되니 세월이 이렇게 빠른 줄 몰랐다. 동생들을 꼭 만나보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못하니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6.25전쟁 중 큰형과 생이별한 장사인 할아버지.

7년 전 다행히 북한의 형과 연락이 닿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사망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제 북한에 남은 유일한 핏줄은 형이 남기고 간 조카들,

장 할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조카들만이라도 꼭 만나고 싶다며 이번 추석 상봉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장사인(75/이산가족) : "기대하죠. 기대합니다. 어쨌든 기대해요 꼭 이번에 이 기회를 통해서 좀 많이 만났으면 합니다.정 그렇게 많이 만나지 못하면 편지라도 왔다 갔다 하면 얼마나 좋아요, 편지"

장사인 할아버지와 달리 대다수 이산가족은 북측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는 게 현실입니다.

대한 적십자사 강당이 전화 부스로 꽉 들어찼습니다. 100명의 상담원들이 전화작업에 한창입니다.

지난 1일부터 가동된 남북이산가족 생사확인 추진센터

<녹취> 대한적십자사 상담원 :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 생사확인센터에서 연락드렸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이산가족 생사확인 동의를 받고 있는데요.) 네. 동의해요"

12만 이상 가족 상봉 신청자 중 생존해있는 6만 6천여 명 전원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북녘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은지를 조사하는 겁니다.

대한 적십자사가 생존 이산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북측 가족의 생사를 확인 할 의사가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번에 조사된 자료는 올해 안에 추진하려는 남북 이산가족 명단 교환사업과 상봉 정례화 사업에 쓰이게 됩니다

전화를 받은 이산가족들은 생전에 가족들 생사라도 확인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크게 반깁니다.

<녹취> 이산가족 : "세상에 그런 일도 있어? 동의하고말고지요. 사돈의 8촌이라도 고향 소식을 알아도 얼만데…"

정확한 정보를 전하고픈 마음에 적십자사를 직접 찾아와 생년월일까지 꼼꼼히 알려주기도 합니다.

<인터뷰> 이송헌(82살/이산가족) : "생년월일만 수정하려고.(찾아왔어요) 북한에 있을 때 나이가 있잖아요. 원래 나이가. 그게 맞아야 '나 여기 살아있다' '맞다' '우리 식구다' 그렇게 해서 만나는 것 아니겠어요."

일부 이산가족들은 북한 가족의 생사 확인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녹취> 대한적십자사 상담원 : "어느 것을 포기하신다고요? 이유를 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녹취> 생사 확인 포기 이산가족 : "난 (생사확인)안 하련다. 얼마나(상봉신청을) 했노 10번도 더 (상봉 신청을) 했다. 10번이고 20번이고 아무리 해도 안 나오는데…"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본격 시작된 이산가족 상봉..

이후 19차례의 상봉행사가 진행됐지만 상봉의 기회를 얻은 이산가족은 단 4천여 명,

일곱 차례의 화상 상봉을 합해도 전체 이산가족 신청자 12만 9천 695명 가운데 3%에 불과합니다.

<인터뷰> 김수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지금까지 그 백 명 내의 제한된 규모로 비정기적으로 간헐적인 대면 상봉 방식으로 이산가족 문제가 진행돼 왔습니다. 이런 제한된 규모의 비정기적 대면 상봉으로는 이산가족 정보 종합센터에 등록된 생존자 6만 6천여 명의 희망을 해결하기에는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남북은 지난 2008년 금강산에 이산가족 면회소를 만들었습니다.

600억 원을 들여 만든 이산가족 면회소는 상봉 정례화를 이뤄내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2009년 이후 금강산 면회소에서 열린 상봉 행사는 불과 3차례뿐입니다.

<인터뷰> 김수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북한 당국은 이산가족 문제를 남한 정부에 대한 협상 카드로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특히 대북지원을 유도한다거나 남한 정부의 대북 정책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협상 카드로서 활용하는 정치적 성격이 강합니다."

그 사이 이산가족들의 고령화는 급격히 진행됐습니다.

우리 측 상봉신청자 12만 여 명의 절반 정도가 이미 숨을 거뒀고 생존자의 80% 이상은 70대 이상의 고령층입니다.

특히 한 해 평균 3,800명이 숨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올해를 기점으로 생존자 비율이 50% 이하로 떨어지고, 17년 후에는 1% 미만을 기록할 거란 예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인터뷰> 홍순직(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 "2013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평균 기대수명을 본다 그러면 81.9세입니다. 이분들이 생애 한 번이라도 상봉하려면 최소한 매년 6천 명 이상 만나야 되고, 70대 이상의 고령자의 경우에는 최소한 5,500명 이상이 매년 만나야만 이분들이 생애 한 번이라도 이산가족의 얼굴을 보고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지난 15년간 진행되는 동안 그동안의 이산 상봉 방식으로는 이산가족들의 설움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일부 이산가족들은 생사만이라도 확인하자는 심정으로 제3국을 통해 직접 가족 찾기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올해 여든여섯 살의 김송순 할머니는 함경남도 북청이 고향입니다.

5남매 중 둘째인 김 할머니는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홀로 피난길에 나섰다 가족들과 헤어졌습니다.

여러 차례 상봉 신청을 했지만 끝내 좌절만 거듭했던 김 할머니…

김 할머니는 7년 전 민간단체의 도움을 받아 북한에 가족이 살아있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인터뷰> 김송순(86/이산가족) : "그 때 그 심정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제일 처음의 그 심정을 뭐라고 말하겠어요. 살아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이후 김 할머니는 일 년에 몇 차례씩 제3국을 통해 편지로 북한의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송순(86/이산가족) : "약을 좀 보내달라고 자꾸 그런 편지가 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보내면 다음에 편지에 ‘누나가 보낸 약을 먹고 많이 좋아졌다’고 그렇게 오더라고요. 저번에 며칠 전도 조카한테서 왔는데… 8월 27일인가 그때 왔더라고요."

가족을 못 만나면 고향 땅이라도 밟게 해달라는 이산가족들도 있습니다.

개성이 고향인 83살 김금옥 할머니는 상봉 신청은 포기하는 대신 고향에 가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이달 말 이산가족들의 개성 성묘 행을 추진하는 한 단체의 방북 사업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금옥(이산가족) : "내가 살던 고향 땅 한 번 더 밟아보고 오자. 그래서 이번에 가면 개성 흙을 한 번 좀 집어올까 그런 생각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개성 가는 걸 신청을 했습니다."

<녹취> 이규순 (이산가족/영상편지) : "오빠, 오빠, 보고 싶다. 참 너무 너무 보고 싶어. 꿈에라도 보고 싶은데 꿈에도 안 보이더라."

6.25 전쟁 당시 21살의 나이로 북한군에 끌려간 오빠를 찾는 이규순 씨는 영상으로라도 오빠에게 소식을 남기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인터뷰> 이규순(이산가족) : "오빠만 보면 나는 여한이 없어 제가 이 나이에 뭐가 있겠어요. 내 핏줄 오빠만 보면 아무 걱정 없이 죽겠어요."

2005년부터 처음 시작돼 지난해까지 제작된 영상 편지는 8천여 편,

올해 만 편을 추가로 제작해야 할 정도로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간절합니다.

<녹취> "입안에 사탕처럼 잠깐 물고 계시면 되세요"

12살 때 가족과 헤어진 조성삼 할아버지처럼 사후에라도 혈육을 만나기 위해 유전자 정보를 남기는 이산가족들도 늘고 있습니다.

<녹취> 조성삼(76/이산가족) : "훗날에 내가 없더라도 형제간들은 만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해 놔야지"

정부는 지난해 천2백 명에 이어 올해 이산가족 만 명의 유전자 정보를 채취해 보관할 예정입니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한 사진전,

이산가족들이 간직하고 있는 옛 사진을 토대로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모습을 합성해 만든 사진들이 전시됐습니다.

비록 직접은 아니지만 사진 속에서나마 혈육을 만난 이산가족들, 끝내 가슴을 치며 오열합니다.

<인터뷰> 심구섭(남북 이산가족협회장) : "우선 생사확인. 지금 상봉은 암만 많이 해도 얼마 안 됩니다. 생사 확인한 사람들은 편지왕래 해 달라. 편지가 어려우면 엽서라도 보내게 해 달라. 그래야 이 많은 이산가족들이 한을 품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거죠."

<인터뷰> 홍순직(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 "다시 말해서 뭐뭐 때문에 못하겠다가 아니라 뭐뭐임에도 불구하고 하겠다는 정책 당국의 강력한 의지와 함께 이산가족 상봉은 이산가족 입장에서 본다 그러면 80대, 90대 이산가족에 대해서는 대규모 특별상봉을 실시하고 그리고 50대, 60대, 70대 이 분들에 대해서는 정기상봉을 통해서 점차 확대해 나가고"

남북 고위 당국자 접촉을 통해 추석 이산가족 상봉에 전격 합의한 남과 북,

남북은 모레 적십자 실무 접촉을 통해 구체적인 상봉 일정 등과 함께 상봉 정례화와 이산가족들의 생사 확인 문제 등을 논의할 예정입니다.

이산가족들의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번에야 말로 이산가족문제의 근본해법에 대한 남북 모두의 진지한 고민, 그리고 실천적 노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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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슈&한반도] 애타는 이산가족들 “이제는 만나야 한다”
    • 입력 2015-09-05 08:26:47
    • 수정2015-09-05 09: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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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남북 간 주요 이슈 현장을 찾아가는 <이슈 & 한반도>입니다.

남북 고위급 합의에 따라 모처럼만에 열리게 되는 남북 적십자 실무 접촉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추석 이산 상봉의 구체적인 일정과 상봉 인원, 그리고 상봉 정례화와 생사 확인 등 이산가족문제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뤄질 예정인데요,

이번에야말로 일회성 상봉을 넘어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 해법을 찾아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슈 앤 한반도, 오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산가족 문제 짚어봤습니다.

송지현 리포터입니다.

<리포트>

<녹취> "지칠 대로 지쳤지만 그래도 기다린다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

<녹취> "언니 진짜 보고 싶어요. 살아있어요?"

<녹취> "살아생전 한번 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녹취> 장사인(이산가족/북한의 형이 보낸 편지) : "이제는 내 나이도 80이 되니 세월이 이렇게 빠른 줄 몰랐다. 동생들을 꼭 만나보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못하니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6.25전쟁 중 큰형과 생이별한 장사인 할아버지.

7년 전 다행히 북한의 형과 연락이 닿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사망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제 북한에 남은 유일한 핏줄은 형이 남기고 간 조카들,

장 할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조카들만이라도 꼭 만나고 싶다며 이번 추석 상봉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장사인(75/이산가족) : "기대하죠. 기대합니다. 어쨌든 기대해요 꼭 이번에 이 기회를 통해서 좀 많이 만났으면 합니다.정 그렇게 많이 만나지 못하면 편지라도 왔다 갔다 하면 얼마나 좋아요, 편지"

장사인 할아버지와 달리 대다수 이산가족은 북측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는 게 현실입니다.

대한 적십자사 강당이 전화 부스로 꽉 들어찼습니다. 100명의 상담원들이 전화작업에 한창입니다.

지난 1일부터 가동된 남북이산가족 생사확인 추진센터

<녹취> 대한적십자사 상담원 :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 생사확인센터에서 연락드렸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이산가족 생사확인 동의를 받고 있는데요.) 네. 동의해요"

12만 이상 가족 상봉 신청자 중 생존해있는 6만 6천여 명 전원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북녘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은지를 조사하는 겁니다.

대한 적십자사가 생존 이산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북측 가족의 생사를 확인 할 의사가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번에 조사된 자료는 올해 안에 추진하려는 남북 이산가족 명단 교환사업과 상봉 정례화 사업에 쓰이게 됩니다

전화를 받은 이산가족들은 생전에 가족들 생사라도 확인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크게 반깁니다.

<녹취> 이산가족 : "세상에 그런 일도 있어? 동의하고말고지요. 사돈의 8촌이라도 고향 소식을 알아도 얼만데…"

정확한 정보를 전하고픈 마음에 적십자사를 직접 찾아와 생년월일까지 꼼꼼히 알려주기도 합니다.

<인터뷰> 이송헌(82살/이산가족) : "생년월일만 수정하려고.(찾아왔어요) 북한에 있을 때 나이가 있잖아요. 원래 나이가. 그게 맞아야 '나 여기 살아있다' '맞다' '우리 식구다' 그렇게 해서 만나는 것 아니겠어요."

일부 이산가족들은 북한 가족의 생사 확인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녹취> 대한적십자사 상담원 : "어느 것을 포기하신다고요? 이유를 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녹취> 생사 확인 포기 이산가족 : "난 (생사확인)안 하련다. 얼마나(상봉신청을) 했노 10번도 더 (상봉 신청을) 했다. 10번이고 20번이고 아무리 해도 안 나오는데…"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본격 시작된 이산가족 상봉..

이후 19차례의 상봉행사가 진행됐지만 상봉의 기회를 얻은 이산가족은 단 4천여 명,

일곱 차례의 화상 상봉을 합해도 전체 이산가족 신청자 12만 9천 695명 가운데 3%에 불과합니다.

<인터뷰> 김수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지금까지 그 백 명 내의 제한된 규모로 비정기적으로 간헐적인 대면 상봉 방식으로 이산가족 문제가 진행돼 왔습니다. 이런 제한된 규모의 비정기적 대면 상봉으로는 이산가족 정보 종합센터에 등록된 생존자 6만 6천여 명의 희망을 해결하기에는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남북은 지난 2008년 금강산에 이산가족 면회소를 만들었습니다.

600억 원을 들여 만든 이산가족 면회소는 상봉 정례화를 이뤄내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2009년 이후 금강산 면회소에서 열린 상봉 행사는 불과 3차례뿐입니다.

<인터뷰> 김수암(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북한 당국은 이산가족 문제를 남한 정부에 대한 협상 카드로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특히 대북지원을 유도한다거나 남한 정부의 대북 정책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협상 카드로서 활용하는 정치적 성격이 강합니다."

그 사이 이산가족들의 고령화는 급격히 진행됐습니다.

우리 측 상봉신청자 12만 여 명의 절반 정도가 이미 숨을 거뒀고 생존자의 80% 이상은 70대 이상의 고령층입니다.

특히 한 해 평균 3,800명이 숨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올해를 기점으로 생존자 비율이 50% 이하로 떨어지고, 17년 후에는 1% 미만을 기록할 거란 예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인터뷰> 홍순직(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 "2013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평균 기대수명을 본다 그러면 81.9세입니다. 이분들이 생애 한 번이라도 상봉하려면 최소한 매년 6천 명 이상 만나야 되고, 70대 이상의 고령자의 경우에는 최소한 5,500명 이상이 매년 만나야만 이분들이 생애 한 번이라도 이산가족의 얼굴을 보고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지난 15년간 진행되는 동안 그동안의 이산 상봉 방식으로는 이산가족들의 설움을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일부 이산가족들은 생사만이라도 확인하자는 심정으로 제3국을 통해 직접 가족 찾기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올해 여든여섯 살의 김송순 할머니는 함경남도 북청이 고향입니다.

5남매 중 둘째인 김 할머니는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홀로 피난길에 나섰다 가족들과 헤어졌습니다.

여러 차례 상봉 신청을 했지만 끝내 좌절만 거듭했던 김 할머니…

김 할머니는 7년 전 민간단체의 도움을 받아 북한에 가족이 살아있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인터뷰> 김송순(86/이산가족) : "그 때 그 심정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제일 처음의 그 심정을 뭐라고 말하겠어요. 살아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이후 김 할머니는 일 년에 몇 차례씩 제3국을 통해 편지로 북한의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송순(86/이산가족) : "약을 좀 보내달라고 자꾸 그런 편지가 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보내면 다음에 편지에 ‘누나가 보낸 약을 먹고 많이 좋아졌다’고 그렇게 오더라고요. 저번에 며칠 전도 조카한테서 왔는데… 8월 27일인가 그때 왔더라고요."

가족을 못 만나면 고향 땅이라도 밟게 해달라는 이산가족들도 있습니다.

개성이 고향인 83살 김금옥 할머니는 상봉 신청은 포기하는 대신 고향에 가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이달 말 이산가족들의 개성 성묘 행을 추진하는 한 단체의 방북 사업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금옥(이산가족) : "내가 살던 고향 땅 한 번 더 밟아보고 오자. 그래서 이번에 가면 개성 흙을 한 번 좀 집어올까 그런 생각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개성 가는 걸 신청을 했습니다."

<녹취> 이규순 (이산가족/영상편지) : "오빠, 오빠, 보고 싶다. 참 너무 너무 보고 싶어. 꿈에라도 보고 싶은데 꿈에도 안 보이더라."

6.25 전쟁 당시 21살의 나이로 북한군에 끌려간 오빠를 찾는 이규순 씨는 영상으로라도 오빠에게 소식을 남기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인터뷰> 이규순(이산가족) : "오빠만 보면 나는 여한이 없어 제가 이 나이에 뭐가 있겠어요. 내 핏줄 오빠만 보면 아무 걱정 없이 죽겠어요."

2005년부터 처음 시작돼 지난해까지 제작된 영상 편지는 8천여 편,

올해 만 편을 추가로 제작해야 할 정도로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간절합니다.

<녹취> "입안에 사탕처럼 잠깐 물고 계시면 되세요"

12살 때 가족과 헤어진 조성삼 할아버지처럼 사후에라도 혈육을 만나기 위해 유전자 정보를 남기는 이산가족들도 늘고 있습니다.

<녹취> 조성삼(76/이산가족) : "훗날에 내가 없더라도 형제간들은 만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해 놔야지"

정부는 지난해 천2백 명에 이어 올해 이산가족 만 명의 유전자 정보를 채취해 보관할 예정입니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한 사진전,

이산가족들이 간직하고 있는 옛 사진을 토대로 반세기가 지난 지금의 모습을 합성해 만든 사진들이 전시됐습니다.

비록 직접은 아니지만 사진 속에서나마 혈육을 만난 이산가족들, 끝내 가슴을 치며 오열합니다.

<인터뷰> 심구섭(남북 이산가족협회장) : "우선 생사확인. 지금 상봉은 암만 많이 해도 얼마 안 됩니다. 생사 확인한 사람들은 편지왕래 해 달라. 편지가 어려우면 엽서라도 보내게 해 달라. 그래야 이 많은 이산가족들이 한을 품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거죠."

<인터뷰> 홍순직(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 "다시 말해서 뭐뭐 때문에 못하겠다가 아니라 뭐뭐임에도 불구하고 하겠다는 정책 당국의 강력한 의지와 함께 이산가족 상봉은 이산가족 입장에서 본다 그러면 80대, 90대 이산가족에 대해서는 대규모 특별상봉을 실시하고 그리고 50대, 60대, 70대 이 분들에 대해서는 정기상봉을 통해서 점차 확대해 나가고"

남북 고위 당국자 접촉을 통해 추석 이산가족 상봉에 전격 합의한 남과 북,

남북은 모레 적십자 실무 접촉을 통해 구체적인 상봉 일정 등과 함께 상봉 정례화와 이산가족들의 생사 확인 문제 등을 논의할 예정입니다.

이산가족들의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번에야 말로 이산가족문제의 근본해법에 대한 남북 모두의 진지한 고민, 그리고 실천적 노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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