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國記] 국경을 헤매던 장애인 소녀, ‘화해의 씨앗’ 될까?

입력 2015.09.09 (00:12) 수정 2015.09.0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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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군인파키스탄 군인

▲ 과장된 동작으로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인도와 파키스탄 군인들


와가 국경(Wagah Border)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펀자브 주에 있는 국경이다. 이 곳에서는 매일 특별한 볼거리가 펼쳐지는데, 스포츠 경기처럼 진행되는 국기 하강식이다. 화려하게 차려 입은 두 나라 군인들이 자국 국기 게양대까지 행진한 후 국기를 내린다. 동작이 워낙 과장돼 있어 우스꽝스러울 정도지만 국기 내리는 것도 상대방보다 멋져야 한다는 일종의 자존심 대결이 펼쳐진다. 운집한 관중은 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국기를 흔들고 춤을 추며 열기를 고조시킨다. 웃고 떠들며 진행되는 국기 하강식을 보노라면 이 곳이 최대 적국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이라는 것도 잊고 만다.

■ 철통 같은 국경선에 장애인 소녀 출현

인도와 파키스탄은 와가 지역을 포함해 총 2,900킬로미터에 걸쳐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경선을 따라 양측 수비대 초소가 촘촘히 박혀 있다. 야간에도 국경선은 대낮같이 밝다. 인도측이 1,500 만 개 이상의 투광 조명등을 설치해 환하게 밝혀놓기 때문이다. 국경의 불빛은 인공위성에서도 관측될 정도다.

국경선 불빛국경선 불빛

▲ 사진 가운데 주황색 띠 모양으로 길게 이어진 국경선 불빛


10 여년 전, 이런 철통 같은 국경선 근처를 한 소녀가 배회하고 있었다. 파키스탄 지역이었다. 소녀는 파키스탄 수비대에 발견됐다. 수비대는 11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녀를 상대로 아무것도 조사할 수 없었다. 소녀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국경선 근처에서 적발됐다면 일단 '간첩 혐의'를 둬야겠지만, 나이로 보나, 행색으로 보나, 그런 혐의를 둘 수는 없었다.
수비대는 소녀를 파키스탄 동부 도시 라호르에 있는 보호 시설로 보냈다. 이어 파키스탄 최대도시 카라치에 있는 보호시설로 넘어갔다. 소녀에게는 이슬람식으로 '파티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소녀는 어른을 만나면 종종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상대의 발등을 만지는 동작을 취했다. 힌두교도들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즉, 소녀는 힌두교도라는 얘기였다. 자초지종이야 알 수 없지만 연약한 소녀는 혈혈단신으로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갔다.

발견된 기타발견된 기타

▲ 10여년 전 인도-파키스탄 국경선 근처에서 발견된 ‘기타’


■ 11살 소녀가 1,500킬로 미터 거리를 어떻게?

힌두교도임이 분명해지자, 보호소는 힌두식으로 소녀에게 '기타'(Geeta)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조그만 방에서 힌두식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했다. 기타는 보호소 생활에 익숙해진 후에도 늘 집에 가고 싶다는 뜻을 표정과 손짓으로 표현했다. 인도 지도에서 특정 지역을 고향으로 지목했다. 동부 자르칸드 주였다. 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은 정반대쪽에 있다. 자르칸드 주에서 인-파 국경 지역까지는 1,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 자르칸드가 기타의 고향이라면, 그 먼 거리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11살짜리 소녀가 어떻게 이동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기타의 소식은 18살이던 4년 전에 인도 언론에서 기사화됐다. 인도인이 분명한 10대 장애인 소녀가 파키스탄 보호시설에서 고국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잠깐 여론이 이는 듯 했다. 파키스탄 주재 인도 대사관도 영사를 보내 그녀를 만나보게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녀를 인도로 송환하기 위한 적극적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았고 기타는 다시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살만 칸 주연 영화살만 칸 주연 영화

▲ 살만 칸 주연 영화 ‘Bajrangi Bhaijaan’


■ 영화가 되살려낸 소녀의 사연

이렇게 까다득하게 잊혀졌던 기타가 지난 달부터 갑자기 여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인도에서 개봉된 영화 때문이었다. 볼리우드 톱스타 살만 칸이 주연한 'Bajrangi Bhaijaan'이라는 영화였다. '바즈랑기 오빠' 쯤으로 번역되는 이 영화는 주인공이 고향을 잃은 파키스탄 장애인 소녀를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애쓰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녀의 국적만 다를 뿐 스토리가 기타의 사연과 너무도 비슷했다. 사람들은 22살이 된 기타를 기억해냈다.

■ 차가운 국경 녹이는 ‘화해의 씨앗’ 되나?

이번에는 파키스탄 주재 인도 대사가 직접 보호소를 찾아 기타를 만났다. 대사는 "기타가 인도 국적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인도 정부 차원에서 그녀의 국적을 인도로 공식화한 것은 처음이었다. 인도 외교부장관은 기타를 인도로 데리고 오겠다고 천명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가타부타 말이 없지만 송환을 반대하지 않는다. 데려오는 측이나, 돌려보내는 측이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칭찬받을 만한 일이기에, 기타의 송환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양국 국민들도 장애인 소녀의 딱한 사연에 함께 눈시울을 붉히며 하루빨리 가족 품에 안기기를 바란다. 대결의식으로 가득찬 두 나라 국민들이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하나의 마음으로 뭉쳤다.
이런 가운데 파키스탄 법원이 묘한 판결을 내린다. 법원 명령으로 기타를 인도로 송환시키라는 한 인도 변호사의 청원에 대해, 송환 문제는 법원에서 결정할 권한이 없으니, 양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해결하라'는 요지였다. 송환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는 만큼 양국 정부는 대화를 통해 원만하게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사건건 으르렁대는 두 나라가 모처럼 화해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기타의 가족은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가정이 어릴 때 잃어버린 딸 같다고 나섰다. 인도 정부가 본격적으로 나선 만큼 가족 찾기도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다. 10 여년 전 국경선 근처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장애인 소녀가 그 차가운 국경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

인-파 국경인-파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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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國記] 국경을 헤매던 장애인 소녀, ‘화해의 씨앗’ 될까?
    • 입력 2015-09-09 00:12:45
    • 수정2015-09-09 10:42:44
    7국기
파키스탄 군인
▲ 과장된 동작으로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인도와 파키스탄 군인들


와가 국경(Wagah Border)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펀자브 주에 있는 국경이다. 이 곳에서는 매일 특별한 볼거리가 펼쳐지는데, 스포츠 경기처럼 진행되는 국기 하강식이다. 화려하게 차려 입은 두 나라 군인들이 자국 국기 게양대까지 행진한 후 국기를 내린다. 동작이 워낙 과장돼 있어 우스꽝스러울 정도지만 국기 내리는 것도 상대방보다 멋져야 한다는 일종의 자존심 대결이 펼쳐진다. 운집한 관중은 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국기를 흔들고 춤을 추며 열기를 고조시킨다. 웃고 떠들며 진행되는 국기 하강식을 보노라면 이 곳이 최대 적국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이라는 것도 잊고 만다.

■ 철통 같은 국경선에 장애인 소녀 출현

인도와 파키스탄은 와가 지역을 포함해 총 2,900킬로미터에 걸쳐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경선을 따라 양측 수비대 초소가 촘촘히 박혀 있다. 야간에도 국경선은 대낮같이 밝다. 인도측이 1,500 만 개 이상의 투광 조명등을 설치해 환하게 밝혀놓기 때문이다. 국경의 불빛은 인공위성에서도 관측될 정도다.

국경선 불빛
▲ 사진 가운데 주황색 띠 모양으로 길게 이어진 국경선 불빛


10 여년 전, 이런 철통 같은 국경선 근처를 한 소녀가 배회하고 있었다. 파키스탄 지역이었다. 소녀는 파키스탄 수비대에 발견됐다. 수비대는 11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녀를 상대로 아무것도 조사할 수 없었다. 소녀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국경선 근처에서 적발됐다면 일단 '간첩 혐의'를 둬야겠지만, 나이로 보나, 행색으로 보나, 그런 혐의를 둘 수는 없었다.
수비대는 소녀를 파키스탄 동부 도시 라호르에 있는 보호 시설로 보냈다. 이어 파키스탄 최대도시 카라치에 있는 보호시설로 넘어갔다. 소녀에게는 이슬람식으로 '파티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소녀는 어른을 만나면 종종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상대의 발등을 만지는 동작을 취했다. 힌두교도들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즉, 소녀는 힌두교도라는 얘기였다. 자초지종이야 알 수 없지만 연약한 소녀는 혈혈단신으로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갔다.

발견된 기타
▲ 10여년 전 인도-파키스탄 국경선 근처에서 발견된 ‘기타’


■ 11살 소녀가 1,500킬로 미터 거리를 어떻게?

힌두교도임이 분명해지자, 보호소는 힌두식으로 소녀에게 '기타'(Geeta)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조그만 방에서 힌두식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했다. 기타는 보호소 생활에 익숙해진 후에도 늘 집에 가고 싶다는 뜻을 표정과 손짓으로 표현했다. 인도 지도에서 특정 지역을 고향으로 지목했다. 동부 자르칸드 주였다. 하지만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은 정반대쪽에 있다. 자르칸드 주에서 인-파 국경 지역까지는 1,5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 자르칸드가 기타의 고향이라면, 그 먼 거리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11살짜리 소녀가 어떻게 이동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기타의 소식은 18살이던 4년 전에 인도 언론에서 기사화됐다. 인도인이 분명한 10대 장애인 소녀가 파키스탄 보호시설에서 고국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잠깐 여론이 이는 듯 했다. 파키스탄 주재 인도 대사관도 영사를 보내 그녀를 만나보게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녀를 인도로 송환하기 위한 적극적 움직임은 일어나지 않았고 기타는 다시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살만 칸 주연 영화
▲ 살만 칸 주연 영화 ‘Bajrangi Bhaijaan’


■ 영화가 되살려낸 소녀의 사연

이렇게 까다득하게 잊혀졌던 기타가 지난 달부터 갑자기 여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인도에서 개봉된 영화 때문이었다. 볼리우드 톱스타 살만 칸이 주연한 'Bajrangi Bhaijaan'이라는 영화였다. '바즈랑기 오빠' 쯤으로 번역되는 이 영화는 주인공이 고향을 잃은 파키스탄 장애인 소녀를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애쓰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녀의 국적만 다를 뿐 스토리가 기타의 사연과 너무도 비슷했다. 사람들은 22살이 된 기타를 기억해냈다.

■ 차가운 국경 녹이는 ‘화해의 씨앗’ 되나?

이번에는 파키스탄 주재 인도 대사가 직접 보호소를 찾아 기타를 만났다. 대사는 "기타가 인도 국적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인도 정부 차원에서 그녀의 국적을 인도로 공식화한 것은 처음이었다. 인도 외교부장관은 기타를 인도로 데리고 오겠다고 천명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가타부타 말이 없지만 송환을 반대하지 않는다. 데려오는 측이나, 돌려보내는 측이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칭찬받을 만한 일이기에, 기타의 송환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양국 국민들도 장애인 소녀의 딱한 사연에 함께 눈시울을 붉히며 하루빨리 가족 품에 안기기를 바란다. 대결의식으로 가득찬 두 나라 국민들이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하나의 마음으로 뭉쳤다.
이런 가운데 파키스탄 법원이 묘한 판결을 내린다. 법원 명령으로 기타를 인도로 송환시키라는 한 인도 변호사의 청원에 대해, 송환 문제는 법원에서 결정할 권한이 없으니, 양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해결하라'는 요지였다. 송환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는 만큼 양국 정부는 대화를 통해 원만하게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사건건 으르렁대는 두 나라가 모처럼 화해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기타의 가족은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가정이 어릴 때 잃어버린 딸 같다고 나섰다. 인도 정부가 본격적으로 나선 만큼 가족 찾기도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다. 10 여년 전 국경선 근처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장애인 소녀가 그 차가운 국경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

인-파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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