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심판’이 야한 그림? 희대의 춘화 소동
입력 2015.09.19 (00:26)
수정 2015.10.2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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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이 야한 그림? 희대의 춘화 소동
이탈리아 로마 여행길에 빼놓아선 안 될 곳으로 바티칸박물관을 손에 꼽습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흔히 ‘대영박물관’이라 부르지만, ‘대영’이라는 용어에서 사대주의의 냄새가 풀풀 나기 때문에 요즘은 British Museum이란 이름 그대로 영국박물관이라 부르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불리는데요. 이곳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시스티나 성당 벽면에 그려진 저 유명한 <최후의 심판>이란 작품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미켈란젤로가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주문을 받아 장장 8년에 걸쳐 완성한 미켈란젤로 만년의 걸작이죠. 저도 운 좋게 몇 년 전에 직접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감동과 흥분은 아직도 쉬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이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 1541년 처음 베일을 벗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외설적’이란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성당 안에 그려진 이 숭엄한 종교 그림에 외설이라니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최후의 심판>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지금껏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이미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중심으로 주변을 에워싼 인물들은 가톨릭교회의 수호성인들입니다. 그런데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에다 버젓이 가슴을 드러냈는가 하면, 키스를 하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제 아무리 독실한 신앙인이라도 이 정도 수위라면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다지만 성직자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겠죠. 그래도 그림을 주문한 교황이 살아 있는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답니다. 하지만, 교황이 선종하자 공개적인 비난을 자제하던 성직자들이 대놓고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미켈란젤로를 ‘외설의 발명자’라고 부르기도 했다는군요. <최후의 심판>은 졸지에 ‘춘화’(야한 그림)로 낙인 찍혔습니다. 급기야 가톨릭 종교회의는 수호성인의 벗은 몸에 옷을 입히기로 하고, ‘다니엘 레 다 볼테라’라는 이름도 생소한 화가에게 작품을 수정하는 임무를 맡깁니다. 결국 후대의 누구도 미켈란젤로가 처음에 그린 <최후의 심판> 원본은 영영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당시 왜 그런 묘사를 했던 걸까요? 당시 성직자들의 비난대로 이 작품은 정녕 교회의 신성함과 경건함을 해친 걸까요?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위대한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은 470여 년이란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신윤복 ‘기다림’ (간송미술관 소장)
벽돌담과 수양버들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다소곳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조선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의 <기다림>이란 작품입니다. 혜원을 주인공으로 쓴 가상의 소설 <바람의 화원>의 도입부에 이 그림을 둘러싼 한바탕 소동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동생인 혜원을 대신해 이복형이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도화서에서 쫓겨나게 만드는 이 그림의 무엇이 완고한 도화서 화원들을 분노하게 한 걸까요? 소설에 등장하는 한 원로화원의 말을 들어봅니다. “화면 가운데다 떡하니 아녀자를 배치하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조선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했던 정부기관인 ‘도화서’에서 여성을 그리는 건 당시엔 금기 중의 금기였습니다. 설령 여성을 그릴 때조차 화면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작게 그려 넣었다는 거죠. 또 다른 화원의 말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춘화도야. 저질스럽기 짝이 없는 더러운 그림이라고!” 결국 이번에도 문제는 ‘춘화’였던 겁니다. 정부기관에 속한 공무원이 지엄하기 이를 데 없는 유교적 도의와 도화서의 품격을 짓뭉개는 불순한 그림을 그렸다는 겁니다.
▲ 신윤복 ‘소년전홍’ (간송미술관 소장)
‘춘화’는 남녀 간의 성행위나 성기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가리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선 그런 유의 그림을 ‘춘화’라 불러왔고, 중국에선 춘궁도(春宮圖) 또는 춘궁화(春宮畵)라 했습니다. 소설 <바람의 화원>에서 단원 김홍도가 혜원을 두둔하면서 “남녀가 반벌거숭이로 얽힌 춘화가 저자거리에 지천으로 나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영화 <음란서생>을 보면 시중에 떠도는 이른바 야한 소설 중에서도 특히 야릇한 그림이 들어가 있는 쪽이 훨씬 더 구하기도 어렵고 인기가 좋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그에 비하면 사실 신윤복의 <기다림>은 춘화의 근처에도 못 가는 그림입니다. 게다가 순전히 개인 감상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대에 그토록 떠들썩하게 문제 됐던 건 소설에 나오는 어느 원로화원의 말마따나 “이런 속된 그림이 민가의 화실도 아니고, 저자를 떠도는 환쟁이 품속도 아닌 도화서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철옹성 같은 법도와 금기에 도전하는 위험천만한 그림이었던 거죠. 신분이 천한 기생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등장시킨 신윤복의 그림들은 당시로선 대단한 파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금기를 깨는 그 파격 덕분에 우리는 운 좋게도 조선 후기에 그 누구와도 차별화되는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나간 ‘신윤복 표 풍속화’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 마네 ‘풀밭 위의 점심’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미술의 역사를 보면 이런 유의 논란은 숱하게 나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도 공개 당시 엄청난 논란을 불렀습니다. 과거와 달리 정장 차려 입은 남성들 옆에서 노골적으로 알몸을 드러낸 여성을 그렸으니까요. 이 논란 역시 춘화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해 빚어졌다는 점에서 위에 언급한 조선시대의 사정과 흡사합니다. 춘화를 둘러싼 논란의 역사를 기술한 책 <아트파탈>의 저자 이연식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들 그림을 놓고 난리를 피웠던 파리의 부르주아들이 한편으로 훨씬 더 음란한 삽화와 판화를 보고 즐겼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마네나 제르벡스의 그림을 용인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은밀해야 마땅할 요소를 공식적인 영역, 소위 고상한 예술의 영역에 등장시켰다는 점이었다.” 미술 작품을 박물관이나 미술관, 화랑에 걸어놓고 공개적으로 감상하는 문화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보편화된 겁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혼자 몰래 보던 그림들이 공개된 전시 공간에 버젓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과연 어땠을까요? ‘춘화’와는 거리가 먼 ‘춘화 소동’이 화랑 전시에서 문제가 된 기억할 만한 첫 사례는 바로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 중의 거장으로 꼽히는 이중섭 화백의 경우였습니다.
▲ 이중섭의 은지화
지독한 가난 때문에 평생 캔버스 그림을 단 한 점도 남기지 않았던 비운의 거장 이중섭. 그럼에도 그림에 대한 열정은 그 어떤 화가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담뱃값 속지를 뜯어내 그린 은지화를 꼽을 수 있죠.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가 중에서 은지화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혹 들어보셨나요? 없습니다. 은지화 하면 곧 이중섭인 셈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은지화가 얼토당토않은 춘화 시비에 휘말렸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백화점 4층 미도파화랑에서 화가 이중섭의 첫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당연히 화가로선 공개적인 전시회 자리에서 작품 세계도 인정받고 그림도 많이 팔리기를 바랐겠죠. 그런데 전시회가 한창이던 어느 날 정부 당국 인사들이 전시장에 들이닥쳐 은지화만 골라서 모두 철거해 가버립니다. 벌거벗은 어린이들을 그렸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위 은지화를 한 번 보시죠. 어디에서 춘화적 요소를 찾을 수 있답니까? 그런데도 당국은 매몰차게 이중섭의 은지화를 몽땅 벽에서 떼어냈습니다. <이중섭 평전>을 쓴 미술평론가 최열은 이 사건을 ‘사건’이라 부를 수도, 새로울 것도 없다 했습니다. 사건을 전후해 이중섭이 쓴 엽서 편지 어디에도 충격을 받았다고 볼 만한 내용이 없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첫 전시회에서 당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그저 ‘있을 수 있는 일’로 가볍게 넘겨버리고 말았을까요.
▲ 이중섭 화백
차라리 최문희의 장편소설 <이중섭>에 묘사된 다음과 같은 대목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들이 춘화라고 뜯어간 그 은지화에는 음탕함이나 관능이나 퇴폐적인 어떤 의도도 삽입하지 않았다. 단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순환과 회귀를 간결하게 선묘로 처리했을 뿐이었다. 노래를 부르듯 즐거운 마음으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예술을 모르는 한 치졸한 인간에 의한 고발이라니, 그는 헛, 헛바람이 빠지듯 웃었다. (중략) 춘화 건으로 전시회 마무리는 씁쓸했다. 대향(이중섭의 호)에게는 처음인 개인전이었다. 혼신의 열정으로 작업한 결과물이었다.” 규제와 검열까지 일제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답습하고 있던 질곡의 1950년대에 이런 일들이 ‘사회질서’와 ‘미풍양속’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됐던 겁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야말로 ‘소가 웃을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앞에서 설명한 이른바 춘화 소동이라는 것들도 결국은 지금의 윤리적, 미학적, 사회 통념적 기준으로 봤을 때 “저게 왜 춘화야?” 내지는 “저게 논란꺼리가 되는 거야?”라는 반응을 부를 만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만, 춘화는 그 자체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드러나는 시간과 공간과 맥락 안에서 논란이 되고 소동을 불러 왔습니다.
※ 작품 출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신윤복 <기다림>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소년전홍> 간송미술관 소장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 더 읽으면 좋은 책
성제환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문학동네, 2013)
이연식 <아트파탈>(휴머니스트, 2011)
이정명 <바람의 화원>(밀리언하우스, 2007)
최문희 <이중섭>(다산책방, 2013)
최열 <이중섭 평전>(돌베개, 2014)
이탈리아 로마 여행길에 빼놓아선 안 될 곳으로 바티칸박물관을 손에 꼽습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흔히 ‘대영박물관’이라 부르지만, ‘대영’이라는 용어에서 사대주의의 냄새가 풀풀 나기 때문에 요즘은 British Museum이란 이름 그대로 영국박물관이라 부르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불리는데요. 이곳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시스티나 성당 벽면에 그려진 저 유명한 <최후의 심판>이란 작품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미켈란젤로가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주문을 받아 장장 8년에 걸쳐 완성한 미켈란젤로 만년의 걸작이죠. 저도 운 좋게 몇 년 전에 직접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감동과 흥분은 아직도 쉬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이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 1541년 처음 베일을 벗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외설적’이란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성당 안에 그려진 이 숭엄한 종교 그림에 외설이라니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최후의 심판>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지금껏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이미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중심으로 주변을 에워싼 인물들은 가톨릭교회의 수호성인들입니다. 그런데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에다 버젓이 가슴을 드러냈는가 하면, 키스를 하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제 아무리 독실한 신앙인이라도 이 정도 수위라면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다지만 성직자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겠죠. 그래도 그림을 주문한 교황이 살아 있는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답니다. 하지만, 교황이 선종하자 공개적인 비난을 자제하던 성직자들이 대놓고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미켈란젤로를 ‘외설의 발명자’라고 부르기도 했다는군요. <최후의 심판>은 졸지에 ‘춘화’(야한 그림)로 낙인 찍혔습니다. 급기야 가톨릭 종교회의는 수호성인의 벗은 몸에 옷을 입히기로 하고, ‘다니엘 레 다 볼테라’라는 이름도 생소한 화가에게 작품을 수정하는 임무를 맡깁니다. 결국 후대의 누구도 미켈란젤로가 처음에 그린 <최후의 심판> 원본은 영영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당시 왜 그런 묘사를 했던 걸까요? 당시 성직자들의 비난대로 이 작품은 정녕 교회의 신성함과 경건함을 해친 걸까요?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위대한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은 470여 년이란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신윤복 ‘기다림’ (간송미술관 소장)
벽돌담과 수양버들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다소곳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조선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의 <기다림>이란 작품입니다. 혜원을 주인공으로 쓴 가상의 소설 <바람의 화원>의 도입부에 이 그림을 둘러싼 한바탕 소동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동생인 혜원을 대신해 이복형이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도화서에서 쫓겨나게 만드는 이 그림의 무엇이 완고한 도화서 화원들을 분노하게 한 걸까요? 소설에 등장하는 한 원로화원의 말을 들어봅니다. “화면 가운데다 떡하니 아녀자를 배치하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조선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했던 정부기관인 ‘도화서’에서 여성을 그리는 건 당시엔 금기 중의 금기였습니다. 설령 여성을 그릴 때조차 화면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작게 그려 넣었다는 거죠. 또 다른 화원의 말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춘화도야. 저질스럽기 짝이 없는 더러운 그림이라고!” 결국 이번에도 문제는 ‘춘화’였던 겁니다. 정부기관에 속한 공무원이 지엄하기 이를 데 없는 유교적 도의와 도화서의 품격을 짓뭉개는 불순한 그림을 그렸다는 겁니다.
▲ 신윤복 ‘소년전홍’ (간송미술관 소장)
‘춘화’는 남녀 간의 성행위나 성기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가리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선 그런 유의 그림을 ‘춘화’라 불러왔고, 중국에선 춘궁도(春宮圖) 또는 춘궁화(春宮畵)라 했습니다. 소설 <바람의 화원>에서 단원 김홍도가 혜원을 두둔하면서 “남녀가 반벌거숭이로 얽힌 춘화가 저자거리에 지천으로 나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영화 <음란서생>을 보면 시중에 떠도는 이른바 야한 소설 중에서도 특히 야릇한 그림이 들어가 있는 쪽이 훨씬 더 구하기도 어렵고 인기가 좋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그에 비하면 사실 신윤복의 <기다림>은 춘화의 근처에도 못 가는 그림입니다. 게다가 순전히 개인 감상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대에 그토록 떠들썩하게 문제 됐던 건 소설에 나오는 어느 원로화원의 말마따나 “이런 속된 그림이 민가의 화실도 아니고, 저자를 떠도는 환쟁이 품속도 아닌 도화서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철옹성 같은 법도와 금기에 도전하는 위험천만한 그림이었던 거죠. 신분이 천한 기생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등장시킨 신윤복의 그림들은 당시로선 대단한 파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금기를 깨는 그 파격 덕분에 우리는 운 좋게도 조선 후기에 그 누구와도 차별화되는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나간 ‘신윤복 표 풍속화’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 마네 ‘풀밭 위의 점심’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미술의 역사를 보면 이런 유의 논란은 숱하게 나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도 공개 당시 엄청난 논란을 불렀습니다. 과거와 달리 정장 차려 입은 남성들 옆에서 노골적으로 알몸을 드러낸 여성을 그렸으니까요. 이 논란 역시 춘화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해 빚어졌다는 점에서 위에 언급한 조선시대의 사정과 흡사합니다. 춘화를 둘러싼 논란의 역사를 기술한 책 <아트파탈>의 저자 이연식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들 그림을 놓고 난리를 피웠던 파리의 부르주아들이 한편으로 훨씬 더 음란한 삽화와 판화를 보고 즐겼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마네나 제르벡스의 그림을 용인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은밀해야 마땅할 요소를 공식적인 영역, 소위 고상한 예술의 영역에 등장시켰다는 점이었다.” 미술 작품을 박물관이나 미술관, 화랑에 걸어놓고 공개적으로 감상하는 문화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보편화된 겁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혼자 몰래 보던 그림들이 공개된 전시 공간에 버젓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과연 어땠을까요? ‘춘화’와는 거리가 먼 ‘춘화 소동’이 화랑 전시에서 문제가 된 기억할 만한 첫 사례는 바로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 중의 거장으로 꼽히는 이중섭 화백의 경우였습니다.
▲ 이중섭의 은지화
지독한 가난 때문에 평생 캔버스 그림을 단 한 점도 남기지 않았던 비운의 거장 이중섭. 그럼에도 그림에 대한 열정은 그 어떤 화가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담뱃값 속지를 뜯어내 그린 은지화를 꼽을 수 있죠.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가 중에서 은지화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혹 들어보셨나요? 없습니다. 은지화 하면 곧 이중섭인 셈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은지화가 얼토당토않은 춘화 시비에 휘말렸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백화점 4층 미도파화랑에서 화가 이중섭의 첫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당연히 화가로선 공개적인 전시회 자리에서 작품 세계도 인정받고 그림도 많이 팔리기를 바랐겠죠. 그런데 전시회가 한창이던 어느 날 정부 당국 인사들이 전시장에 들이닥쳐 은지화만 골라서 모두 철거해 가버립니다. 벌거벗은 어린이들을 그렸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위 은지화를 한 번 보시죠. 어디에서 춘화적 요소를 찾을 수 있답니까? 그런데도 당국은 매몰차게 이중섭의 은지화를 몽땅 벽에서 떼어냈습니다. <이중섭 평전>을 쓴 미술평론가 최열은 이 사건을 ‘사건’이라 부를 수도, 새로울 것도 없다 했습니다. 사건을 전후해 이중섭이 쓴 엽서 편지 어디에도 충격을 받았다고 볼 만한 내용이 없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첫 전시회에서 당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그저 ‘있을 수 있는 일’로 가볍게 넘겨버리고 말았을까요.
▲ 이중섭 화백
차라리 최문희의 장편소설 <이중섭>에 묘사된 다음과 같은 대목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들이 춘화라고 뜯어간 그 은지화에는 음탕함이나 관능이나 퇴폐적인 어떤 의도도 삽입하지 않았다. 단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순환과 회귀를 간결하게 선묘로 처리했을 뿐이었다. 노래를 부르듯 즐거운 마음으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예술을 모르는 한 치졸한 인간에 의한 고발이라니, 그는 헛, 헛바람이 빠지듯 웃었다. (중략) 춘화 건으로 전시회 마무리는 씁쓸했다. 대향(이중섭의 호)에게는 처음인 개인전이었다. 혼신의 열정으로 작업한 결과물이었다.” 규제와 검열까지 일제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답습하고 있던 질곡의 1950년대에 이런 일들이 ‘사회질서’와 ‘미풍양속’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됐던 겁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야말로 ‘소가 웃을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앞에서 설명한 이른바 춘화 소동이라는 것들도 결국은 지금의 윤리적, 미학적, 사회 통념적 기준으로 봤을 때 “저게 왜 춘화야?” 내지는 “저게 논란꺼리가 되는 거야?”라는 반응을 부를 만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만, 춘화는 그 자체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드러나는 시간과 공간과 맥락 안에서 논란이 되고 소동을 불러 왔습니다.
※ 작품 출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신윤복 <기다림>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소년전홍> 간송미술관 소장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 더 읽으면 좋은 책
성제환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문학동네, 2013)
이연식 <아트파탈>(휴머니스트, 2011)
이정명 <바람의 화원>(밀리언하우스, 2007)
최문희 <이중섭>(다산책방, 2013)
최열 <이중섭 평전>(돌베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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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심판’이 야한 그림? 희대의 춘화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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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5-09-19 00:26:56
- 수정2015-10-27 14:25:34
‘최후의 심판’이 야한 그림? 희대의 춘화 소동
이탈리아 로마 여행길에 빼놓아선 안 될 곳으로 바티칸박물관을 손에 꼽습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흔히 ‘대영박물관’이라 부르지만, ‘대영’이라는 용어에서 사대주의의 냄새가 풀풀 나기 때문에 요즘은 British Museum이란 이름 그대로 영국박물관이라 부르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불리는데요. 이곳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시스티나 성당 벽면에 그려진 저 유명한 <최후의 심판>이란 작품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미켈란젤로가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주문을 받아 장장 8년에 걸쳐 완성한 미켈란젤로 만년의 걸작이죠. 저도 운 좋게 몇 년 전에 직접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감동과 흥분은 아직도 쉬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이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 1541년 처음 베일을 벗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외설적’이란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성당 안에 그려진 이 숭엄한 종교 그림에 외설이라니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최후의 심판>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지금껏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이미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중심으로 주변을 에워싼 인물들은 가톨릭교회의 수호성인들입니다. 그런데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에다 버젓이 가슴을 드러냈는가 하면, 키스를 하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제 아무리 독실한 신앙인이라도 이 정도 수위라면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다지만 성직자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겠죠. 그래도 그림을 주문한 교황이 살아 있는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답니다. 하지만, 교황이 선종하자 공개적인 비난을 자제하던 성직자들이 대놓고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미켈란젤로를 ‘외설의 발명자’라고 부르기도 했다는군요. <최후의 심판>은 졸지에 ‘춘화’(야한 그림)로 낙인 찍혔습니다. 급기야 가톨릭 종교회의는 수호성인의 벗은 몸에 옷을 입히기로 하고, ‘다니엘 레 다 볼테라’라는 이름도 생소한 화가에게 작품을 수정하는 임무를 맡깁니다. 결국 후대의 누구도 미켈란젤로가 처음에 그린 <최후의 심판> 원본은 영영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당시 왜 그런 묘사를 했던 걸까요? 당시 성직자들의 비난대로 이 작품은 정녕 교회의 신성함과 경건함을 해친 걸까요?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위대한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은 470여 년이란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신윤복 ‘기다림’ (간송미술관 소장)
벽돌담과 수양버들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다소곳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조선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의 <기다림>이란 작품입니다. 혜원을 주인공으로 쓴 가상의 소설 <바람의 화원>의 도입부에 이 그림을 둘러싼 한바탕 소동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동생인 혜원을 대신해 이복형이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도화서에서 쫓겨나게 만드는 이 그림의 무엇이 완고한 도화서 화원들을 분노하게 한 걸까요? 소설에 등장하는 한 원로화원의 말을 들어봅니다. “화면 가운데다 떡하니 아녀자를 배치하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조선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했던 정부기관인 ‘도화서’에서 여성을 그리는 건 당시엔 금기 중의 금기였습니다. 설령 여성을 그릴 때조차 화면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작게 그려 넣었다는 거죠. 또 다른 화원의 말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춘화도야. 저질스럽기 짝이 없는 더러운 그림이라고!” 결국 이번에도 문제는 ‘춘화’였던 겁니다. 정부기관에 속한 공무원이 지엄하기 이를 데 없는 유교적 도의와 도화서의 품격을 짓뭉개는 불순한 그림을 그렸다는 겁니다.
▲ 신윤복 ‘소년전홍’ (간송미술관 소장)
‘춘화’는 남녀 간의 성행위나 성기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가리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선 그런 유의 그림을 ‘춘화’라 불러왔고, 중국에선 춘궁도(春宮圖) 또는 춘궁화(春宮畵)라 했습니다. 소설 <바람의 화원>에서 단원 김홍도가 혜원을 두둔하면서 “남녀가 반벌거숭이로 얽힌 춘화가 저자거리에 지천으로 나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영화 <음란서생>을 보면 시중에 떠도는 이른바 야한 소설 중에서도 특히 야릇한 그림이 들어가 있는 쪽이 훨씬 더 구하기도 어렵고 인기가 좋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그에 비하면 사실 신윤복의 <기다림>은 춘화의 근처에도 못 가는 그림입니다. 게다가 순전히 개인 감상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대에 그토록 떠들썩하게 문제 됐던 건 소설에 나오는 어느 원로화원의 말마따나 “이런 속된 그림이 민가의 화실도 아니고, 저자를 떠도는 환쟁이 품속도 아닌 도화서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철옹성 같은 법도와 금기에 도전하는 위험천만한 그림이었던 거죠. 신분이 천한 기생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등장시킨 신윤복의 그림들은 당시로선 대단한 파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금기를 깨는 그 파격 덕분에 우리는 운 좋게도 조선 후기에 그 누구와도 차별화되는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나간 ‘신윤복 표 풍속화’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 마네 ‘풀밭 위의 점심’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미술의 역사를 보면 이런 유의 논란은 숱하게 나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도 공개 당시 엄청난 논란을 불렀습니다. 과거와 달리 정장 차려 입은 남성들 옆에서 노골적으로 알몸을 드러낸 여성을 그렸으니까요. 이 논란 역시 춘화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해 빚어졌다는 점에서 위에 언급한 조선시대의 사정과 흡사합니다. 춘화를 둘러싼 논란의 역사를 기술한 책 <아트파탈>의 저자 이연식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들 그림을 놓고 난리를 피웠던 파리의 부르주아들이 한편으로 훨씬 더 음란한 삽화와 판화를 보고 즐겼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마네나 제르벡스의 그림을 용인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은밀해야 마땅할 요소를 공식적인 영역, 소위 고상한 예술의 영역에 등장시켰다는 점이었다.” 미술 작품을 박물관이나 미술관, 화랑에 걸어놓고 공개적으로 감상하는 문화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보편화된 겁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혼자 몰래 보던 그림들이 공개된 전시 공간에 버젓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과연 어땠을까요? ‘춘화’와는 거리가 먼 ‘춘화 소동’이 화랑 전시에서 문제가 된 기억할 만한 첫 사례는 바로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 중의 거장으로 꼽히는 이중섭 화백의 경우였습니다.
▲ 이중섭의 은지화
지독한 가난 때문에 평생 캔버스 그림을 단 한 점도 남기지 않았던 비운의 거장 이중섭. 그럼에도 그림에 대한 열정은 그 어떤 화가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담뱃값 속지를 뜯어내 그린 은지화를 꼽을 수 있죠.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가 중에서 은지화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혹 들어보셨나요? 없습니다. 은지화 하면 곧 이중섭인 셈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은지화가 얼토당토않은 춘화 시비에 휘말렸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백화점 4층 미도파화랑에서 화가 이중섭의 첫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당연히 화가로선 공개적인 전시회 자리에서 작품 세계도 인정받고 그림도 많이 팔리기를 바랐겠죠. 그런데 전시회가 한창이던 어느 날 정부 당국 인사들이 전시장에 들이닥쳐 은지화만 골라서 모두 철거해 가버립니다. 벌거벗은 어린이들을 그렸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위 은지화를 한 번 보시죠. 어디에서 춘화적 요소를 찾을 수 있답니까? 그런데도 당국은 매몰차게 이중섭의 은지화를 몽땅 벽에서 떼어냈습니다. <이중섭 평전>을 쓴 미술평론가 최열은 이 사건을 ‘사건’이라 부를 수도, 새로울 것도 없다 했습니다. 사건을 전후해 이중섭이 쓴 엽서 편지 어디에도 충격을 받았다고 볼 만한 내용이 없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첫 전시회에서 당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그저 ‘있을 수 있는 일’로 가볍게 넘겨버리고 말았을까요.
▲ 이중섭 화백
차라리 최문희의 장편소설 <이중섭>에 묘사된 다음과 같은 대목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들이 춘화라고 뜯어간 그 은지화에는 음탕함이나 관능이나 퇴폐적인 어떤 의도도 삽입하지 않았다. 단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순환과 회귀를 간결하게 선묘로 처리했을 뿐이었다. 노래를 부르듯 즐거운 마음으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예술을 모르는 한 치졸한 인간에 의한 고발이라니, 그는 헛, 헛바람이 빠지듯 웃었다. (중략) 춘화 건으로 전시회 마무리는 씁쓸했다. 대향(이중섭의 호)에게는 처음인 개인전이었다. 혼신의 열정으로 작업한 결과물이었다.” 규제와 검열까지 일제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답습하고 있던 질곡의 1950년대에 이런 일들이 ‘사회질서’와 ‘미풍양속’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됐던 겁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야말로 ‘소가 웃을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앞에서 설명한 이른바 춘화 소동이라는 것들도 결국은 지금의 윤리적, 미학적, 사회 통념적 기준으로 봤을 때 “저게 왜 춘화야?” 내지는 “저게 논란꺼리가 되는 거야?”라는 반응을 부를 만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만, 춘화는 그 자체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드러나는 시간과 공간과 맥락 안에서 논란이 되고 소동을 불러 왔습니다.
※ 작품 출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신윤복 <기다림>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소년전홍> 간송미술관 소장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 더 읽으면 좋은 책
성제환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문학동네, 2013)
이연식 <아트파탈>(휴머니스트, 2011)
이정명 <바람의 화원>(밀리언하우스, 2007)
최문희 <이중섭>(다산책방, 2013)
최열 <이중섭 평전>(돌베개, 2014)
이탈리아 로마 여행길에 빼놓아선 안 될 곳으로 바티칸박물관을 손에 꼽습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흔히 ‘대영박물관’이라 부르지만, ‘대영’이라는 용어에서 사대주의의 냄새가 풀풀 나기 때문에 요즘은 British Museum이란 이름 그대로 영국박물관이라 부르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불리는데요. 이곳에 가면 반드시 봐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시스티나 성당 벽면에 그려진 저 유명한 <최후의 심판>이란 작품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미켈란젤로가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주문을 받아 장장 8년에 걸쳐 완성한 미켈란젤로 만년의 걸작이죠. 저도 운 좋게 몇 년 전에 직접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감동과 흥분은 아직도 쉬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이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 1541년 처음 베일을 벗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외설적’이란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성당 안에 그려진 이 숭엄한 종교 그림에 외설이라니요?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최후의 심판>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지금껏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이미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중심으로 주변을 에워싼 인물들은 가톨릭교회의 수호성인들입니다. 그런데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에다 버젓이 가슴을 드러냈는가 하면, 키스를 하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제 아무리 독실한 신앙인이라도 이 정도 수위라면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다지만 성직자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겠죠. 그래도 그림을 주문한 교황이 살아 있는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답니다. 하지만, 교황이 선종하자 공개적인 비난을 자제하던 성직자들이 대놓고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미켈란젤로를 ‘외설의 발명자’라고 부르기도 했다는군요. <최후의 심판>은 졸지에 ‘춘화’(야한 그림)로 낙인 찍혔습니다. 급기야 가톨릭 종교회의는 수호성인의 벗은 몸에 옷을 입히기로 하고, ‘다니엘 레 다 볼테라’라는 이름도 생소한 화가에게 작품을 수정하는 임무를 맡깁니다. 결국 후대의 누구도 미켈란젤로가 처음에 그린 <최후의 심판> 원본은 영영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당시 왜 그런 묘사를 했던 걸까요? 당시 성직자들의 비난대로 이 작품은 정녕 교회의 신성함과 경건함을 해친 걸까요?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위대한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은 470여 년이란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신윤복 ‘기다림’ (간송미술관 소장)
벽돌담과 수양버들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다소곳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조선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의 <기다림>이란 작품입니다. 혜원을 주인공으로 쓴 가상의 소설 <바람의 화원>의 도입부에 이 그림을 둘러싼 한바탕 소동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동생인 혜원을 대신해 이복형이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도화서에서 쫓겨나게 만드는 이 그림의 무엇이 완고한 도화서 화원들을 분노하게 한 걸까요? 소설에 등장하는 한 원로화원의 말을 들어봅니다. “화면 가운데다 떡하니 아녀자를 배치하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조선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했던 정부기관인 ‘도화서’에서 여성을 그리는 건 당시엔 금기 중의 금기였습니다. 설령 여성을 그릴 때조차 화면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작게 그려 넣었다는 거죠. 또 다른 화원의 말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춘화도야. 저질스럽기 짝이 없는 더러운 그림이라고!” 결국 이번에도 문제는 ‘춘화’였던 겁니다. 정부기관에 속한 공무원이 지엄하기 이를 데 없는 유교적 도의와 도화서의 품격을 짓뭉개는 불순한 그림을 그렸다는 겁니다.
▲ 신윤복 ‘소년전홍’ (간송미술관 소장)
‘춘화’는 남녀 간의 성행위나 성기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가리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선 그런 유의 그림을 ‘춘화’라 불러왔고, 중국에선 춘궁도(春宮圖) 또는 춘궁화(春宮畵)라 했습니다. 소설 <바람의 화원>에서 단원 김홍도가 혜원을 두둔하면서 “남녀가 반벌거숭이로 얽힌 춘화가 저자거리에 지천으로 나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영화 <음란서생>을 보면 시중에 떠도는 이른바 야한 소설 중에서도 특히 야릇한 그림이 들어가 있는 쪽이 훨씬 더 구하기도 어렵고 인기가 좋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그에 비하면 사실 신윤복의 <기다림>은 춘화의 근처에도 못 가는 그림입니다. 게다가 순전히 개인 감상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대에 그토록 떠들썩하게 문제 됐던 건 소설에 나오는 어느 원로화원의 말마따나 “이런 속된 그림이 민가의 화실도 아니고, 저자를 떠도는 환쟁이 품속도 아닌 도화서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철옹성 같은 법도와 금기에 도전하는 위험천만한 그림이었던 거죠. 신분이 천한 기생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등장시킨 신윤복의 그림들은 당시로선 대단한 파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금기를 깨는 그 파격 덕분에 우리는 운 좋게도 조선 후기에 그 누구와도 차별화되는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나간 ‘신윤복 표 풍속화’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 마네 ‘풀밭 위의 점심’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미술의 역사를 보면 이런 유의 논란은 숱하게 나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점심>도 공개 당시 엄청난 논란을 불렀습니다. 과거와 달리 정장 차려 입은 남성들 옆에서 노골적으로 알몸을 드러낸 여성을 그렸으니까요. 이 논란 역시 춘화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해 빚어졌다는 점에서 위에 언급한 조선시대의 사정과 흡사합니다. 춘화를 둘러싼 논란의 역사를 기술한 책 <아트파탈>의 저자 이연식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들 그림을 놓고 난리를 피웠던 파리의 부르주아들이 한편으로 훨씬 더 음란한 삽화와 판화를 보고 즐겼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마네나 제르벡스의 그림을 용인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은밀해야 마땅할 요소를 공식적인 영역, 소위 고상한 예술의 영역에 등장시켰다는 점이었다.” 미술 작품을 박물관이나 미술관, 화랑에 걸어놓고 공개적으로 감상하는 문화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보편화된 겁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혼자 몰래 보던 그림들이 공개된 전시 공간에 버젓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과연 어땠을까요? ‘춘화’와는 거리가 먼 ‘춘화 소동’이 화랑 전시에서 문제가 된 기억할 만한 첫 사례는 바로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 중의 거장으로 꼽히는 이중섭 화백의 경우였습니다.
▲ 이중섭의 은지화
지독한 가난 때문에 평생 캔버스 그림을 단 한 점도 남기지 않았던 비운의 거장 이중섭. 그럼에도 그림에 대한 열정은 그 어떤 화가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담뱃값 속지를 뜯어내 그린 은지화를 꼽을 수 있죠.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가 중에서 은지화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혹 들어보셨나요? 없습니다. 은지화 하면 곧 이중섭인 셈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은지화가 얼토당토않은 춘화 시비에 휘말렸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백화점 4층 미도파화랑에서 화가 이중섭의 첫 개인전이 열렸습니다. 당연히 화가로선 공개적인 전시회 자리에서 작품 세계도 인정받고 그림도 많이 팔리기를 바랐겠죠. 그런데 전시회가 한창이던 어느 날 정부 당국 인사들이 전시장에 들이닥쳐 은지화만 골라서 모두 철거해 가버립니다. 벌거벗은 어린이들을 그렸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위 은지화를 한 번 보시죠. 어디에서 춘화적 요소를 찾을 수 있답니까? 그런데도 당국은 매몰차게 이중섭의 은지화를 몽땅 벽에서 떼어냈습니다. <이중섭 평전>을 쓴 미술평론가 최열은 이 사건을 ‘사건’이라 부를 수도, 새로울 것도 없다 했습니다. 사건을 전후해 이중섭이 쓴 엽서 편지 어디에도 충격을 받았다고 볼 만한 내용이 없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첫 전시회에서 당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그저 ‘있을 수 있는 일’로 가볍게 넘겨버리고 말았을까요.
▲ 이중섭 화백
차라리 최문희의 장편소설 <이중섭>에 묘사된 다음과 같은 대목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들이 춘화라고 뜯어간 그 은지화에는 음탕함이나 관능이나 퇴폐적인 어떤 의도도 삽입하지 않았다. 단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순환과 회귀를 간결하게 선묘로 처리했을 뿐이었다. 노래를 부르듯 즐거운 마음으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예술을 모르는 한 치졸한 인간에 의한 고발이라니, 그는 헛, 헛바람이 빠지듯 웃었다. (중략) 춘화 건으로 전시회 마무리는 씁쓸했다. 대향(이중섭의 호)에게는 처음인 개인전이었다. 혼신의 열정으로 작업한 결과물이었다.” 규제와 검열까지 일제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답습하고 있던 질곡의 1950년대에 이런 일들이 ‘사회질서’와 ‘미풍양속’의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됐던 겁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야말로 ‘소가 웃을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앞에서 설명한 이른바 춘화 소동이라는 것들도 결국은 지금의 윤리적, 미학적, 사회 통념적 기준으로 봤을 때 “저게 왜 춘화야?” 내지는 “저게 논란꺼리가 되는 거야?”라는 반응을 부를 만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만, 춘화는 그 자체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드러나는 시간과 공간과 맥락 안에서 논란이 되고 소동을 불러 왔습니다.
※ 작품 출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소장
신윤복 <기다림>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소년전홍> 간송미술관 소장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 더 읽으면 좋은 책
성제환 <피렌체의 빛나는 순간>(문학동네, 2013)
이연식 <아트파탈>(휴머니스트, 2011)
이정명 <바람의 화원>(밀리언하우스, 2007)
최문희 <이중섭>(다산책방, 2013)
최열 <이중섭 평전>(돌베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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