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경비원은 자리를 24시간 지켜야 할까?

입력 2015.10.18 (00:03) 수정 2015.10.18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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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프랑스 사회학자의 표현처럼 우리나라는 '아파트 공화국'입니다. 이 공화국의 시민들은 스스로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모두 '고용주'로서의 신분을 갖고 있는데요, 주민 자치 기구를 통해 직접 고용하든, 아니면 관리업체를 통해 간접 고용하든 경비원을 고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경비원의 임금이나 휴식 시간을 알고 계신가요? 저도 그랬지만 대체로 잘 모를 겁니다.

■ 최저임금 인상 앞두고 ‘휴식시간’ 늘린 이유는?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 주민들은 최근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내년도 경비원 기본급을 결정했습니다. 인상률은 5.3%입니다. 내년도 시간당 최저임금은 8.1%가 오릅니다. 한참 미치지 못하죠. 어찌 된 일일까요? '꼼수'가 있었습니다. 경비원의 휴식시간을 30분 늘려 부족한 인상분 2.8%를 대체한 겁니다. 이 아파트는 지난해에도 이렇게 휴식시간을 늘렸습니다. 다른 아파트도 사정이 비슷합니다. 노원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은 "휴식시간을 많이 주면 8시간까지 줘 만날 쉬다 말아버린다"며 "일하는 사람 입장에선 정부에서 정해준 대로만 (최저임금이) 적용되면 좋겠다"고 토로했습니다.

경비원경비원


■ “휴식시간에 순찰 돌아라”…무늬만 휴식

그렇다면 늘어난 휴식시간은 제대로 지켜지는 걸까요? 한 아파트의 오후 휴식시간(12:00~14:00)을 살펴봤습니다. 경비원들이 삼삼오오 점심을 먹으러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더니 30~40분이 지나 대부분 경비실로 돌아왔습니다. 휴식 공간이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두 평 남짓한 경비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아 봅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오는 택배나 주민 민원 때문에 제대로 된 휴식은 불가능합니다. 쓰레기 수거함을 청소하거나 불법 주차를 단속하는 경비원들도 쉽게 발견됐는데요, 애초에 일과 휴식이 분리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이보다 더한 곳도 있습니다. 서울 서초구의 한 아파트는 야간 휴식시간에 경비원들에게 1시간씩 순찰을 돌게 했습니다. 경비원들은 법원에 소송을 내고서야 순찰 시간을 초과근무시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대법원은 휴식시간일지라도 사용자의 실질적인 지휘, 감독 아래에 있는 시간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판례 2006다41990)

경비원경비원


■ “자리 비운다”…주민 민원에 경위서까지

고용노동부는 휴식시간을 보장하라는 안내문을 아파트에 보냅니다. 안내문에는 경비원은 휴식시간에 경비실을 벗어나 자유롭게 쉴 수 있고, 어떤 업무 지시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만나 본 주민들은 휴식시간이 언제인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24시간 내내 경비실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민도 있었습니다. 한 경비원은 "휴식시간에 경비원이 자거나 자리를 비우면 곧바로 주민 민원으로 접수된다"며 그러면 "관리사무소는 경위서를 쓰게 하거나 점수를 깎아 재계약 시 반영한다"며 한숨을 쉬어댔습니다.

경비원들은 보통 1년 단위로 계약을 연장합니다. 부당함을 알면서도 재계약을 위해선 문제 제기를 못 합니다. 고용주와 수평적인 관계에서 근로조건을 정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죠. 전국의 건물 경비원은 11만여 명으로 지난해 기준 월평균 153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을 고용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이 아파트 공화국의 대다수 시민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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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경비원은 자리를 24시간 지켜야 할까?
    • 입력 2015-10-18 00:03:29
    • 수정2015-10-18 00:39:42
    취재후·사건후
어느 프랑스 사회학자의 표현처럼 우리나라는 '아파트 공화국'입니다. 이 공화국의 시민들은 스스로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모두 '고용주'로서의 신분을 갖고 있는데요, 주민 자치 기구를 통해 직접 고용하든, 아니면 관리업체를 통해 간접 고용하든 경비원을 고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경비원의 임금이나 휴식 시간을 알고 계신가요? 저도 그랬지만 대체로 잘 모를 겁니다. ■ 최저임금 인상 앞두고 ‘휴식시간’ 늘린 이유는?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 주민들은 최근 입주자대표회의에서 내년도 경비원 기본급을 결정했습니다. 인상률은 5.3%입니다. 내년도 시간당 최저임금은 8.1%가 오릅니다. 한참 미치지 못하죠. 어찌 된 일일까요? '꼼수'가 있었습니다. 경비원의 휴식시간을 30분 늘려 부족한 인상분 2.8%를 대체한 겁니다. 이 아파트는 지난해에도 이렇게 휴식시간을 늘렸습니다. 다른 아파트도 사정이 비슷합니다. 노원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은 "휴식시간을 많이 주면 8시간까지 줘 만날 쉬다 말아버린다"며 "일하는 사람 입장에선 정부에서 정해준 대로만 (최저임금이) 적용되면 좋겠다"고 토로했습니다.
경비원
■ “휴식시간에 순찰 돌아라”…무늬만 휴식 그렇다면 늘어난 휴식시간은 제대로 지켜지는 걸까요? 한 아파트의 오후 휴식시간(12:00~14:00)을 살펴봤습니다. 경비원들이 삼삼오오 점심을 먹으러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더니 30~40분이 지나 대부분 경비실로 돌아왔습니다. 휴식 공간이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두 평 남짓한 경비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아 봅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오는 택배나 주민 민원 때문에 제대로 된 휴식은 불가능합니다. 쓰레기 수거함을 청소하거나 불법 주차를 단속하는 경비원들도 쉽게 발견됐는데요, 애초에 일과 휴식이 분리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이보다 더한 곳도 있습니다. 서울 서초구의 한 아파트는 야간 휴식시간에 경비원들에게 1시간씩 순찰을 돌게 했습니다. 경비원들은 법원에 소송을 내고서야 순찰 시간을 초과근무시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대법원은 휴식시간일지라도 사용자의 실질적인 지휘, 감독 아래에 있는 시간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판례 2006다41990)
경비원
■ “자리 비운다”…주민 민원에 경위서까지 고용노동부는 휴식시간을 보장하라는 안내문을 아파트에 보냅니다. 안내문에는 경비원은 휴식시간에 경비실을 벗어나 자유롭게 쉴 수 있고, 어떤 업무 지시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돼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만나 본 주민들은 휴식시간이 언제인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24시간 내내 경비실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민도 있었습니다. 한 경비원은 "휴식시간에 경비원이 자거나 자리를 비우면 곧바로 주민 민원으로 접수된다"며 그러면 "관리사무소는 경위서를 쓰게 하거나 점수를 깎아 재계약 시 반영한다"며 한숨을 쉬어댔습니다. 경비원들은 보통 1년 단위로 계약을 연장합니다. 부당함을 알면서도 재계약을 위해선 문제 제기를 못 합니다. 고용주와 수평적인 관계에서 근로조건을 정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죠. 전국의 건물 경비원은 11만여 명으로 지난해 기준 월평균 153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을 고용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이 아파트 공화국의 대다수 시민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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