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별이 지다”…천경자 화백 별세

입력 2015.10.22 (10:35) 수정 2015.10.22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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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채색화로 여성과 꽃을 그리며 한국 화단에 큰 자취를 남긴 여류 화가 천경자 화백이 몇 달 전 미국에서 타계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지난 8월 천경자 화백의 딸 이혜선 씨가 천 화백의 유골함을 들고 기증작품이 보관돼 있는 수장고를 방문했으며 이를 외부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22일 밝혔다. 이 씨는 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뇌출혈로 투병중이던 천 화백이 8월 초 미국 뉴욕의 자택에서 숨졌으며,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장례를 치렀다고 밝혔다.

천 화백은 화려한 채색화로 당대를 풍미했던 여성 거장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결혼 생활 실패와 위작 논란 등으로 얼룩졌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 화백은 결혼하라는 부모의 요구를 거절하고 1940년 16세 때 여수항을 출발해 도쿄로 떠난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한 천 화백은 야수파나 입체파 등을 가르치던 서양화 고등과 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에 심취하며 일본화 고등과로 가서 모델을 보고 관찰해 섬세하게 사생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는다.

1942년 제22회 선전에서 '조부'로 입선한 천 화백은 이후 귀국해 여성과 꽃을 주제로 한
화려한 색채의 인물화를 선보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화가로 큰 사랑을 받았다.

여인의 한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 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화가였다.

천경자천경자


1972년 베트남전 당시 문공부에서 베트남전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10명을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기창, 박영선, 김원, 임직순 등 남자 화가들 사이에서 홍일점 종군 화가가 된다.

타고난 글재주로 1955년의 '여인소묘' 등 단행본 15건과 수필집 10권, 신문잡지 연재 12건 등을 내기도 했다.

모자를 쓴 여인모자를 쓴 여인

▲천경자 화백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모자를 쓴 여인'


그녀의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몽환적이고 애틋한 눈빛의 여인은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화려했던 화가 생활이었지만, 개인사는 순탄치 못했다.

도교역에서 우연히 만난 명문대생과의 결혼 생활은 1남1녀를 낳았지만 길지 못했다. 이후 그녀는 전남의 지역신문 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을 만나 1남1녀를 낳았지만 가정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그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기다리는 편이 된 나는 끝없이 두 갈래로 평행선을 이루는 철들을 아득히 바라보다가...."(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중)라고 자서전에 적기도 했다.

천 화백 노년에 가장 큰 고비는 1991년 '미인도'위작 논란이었다.

이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 화백의 작품 '미인도'에 대해 천 화백 본인이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이 맞다"고 맞섰다.

미인도미인도

▲천경자 미인도


하지만 이후 고서화 위조범 K씨가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 요청으로 달력 그림 몇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털어놓으며 위작 시비는 재연됐다. 이에 대해 국립미술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 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양측의 공방이 격화되는 가운데 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하는 풍토에 분노한다"며 붓을 놓았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었다.

정신적 충격을 받는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딸이 사는 뉴욕으로 홀연히 떠났다. 이후 2003년 뇌출혈로 쓰려진 후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칩거해왔다. 이 때문에 미술계에서는 지난 10년간 천 화백이 이미 사망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에 천 화백의 타계소식이 뒤늦게 알려진 것에 대해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으로 강력 요청했다고 보고받았다"며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예술계에서는 천 화백의 삶을 프리다 칼로에 비유하기도 하다. 멕시코 여류화가인 칼로는 교통사고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남편(민중벽화의 거장 디에로 리베라)의 문란한 사생활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고통받은 내용은 달랐지만 한과 고독으로 점철된 천 화백의 삶에는 사랑에 대한 아픔과 비애가 끊이지 않았다.

천 화백의 타계소식에 한 네티즌(다음 닉네임 Asylum)은 " 또 하나의 거대한 별이 발자취만 남기고 떠나가는 구나"고 안타까워하는 등 네티즌들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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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9]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 화백 지난 8월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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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0-22 10:35:51
    • 수정2015-10-22 22: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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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채색화로 여성과 꽃을 그리며 한국 화단에 큰 자취를 남긴 여류 화가 천경자 화백이 몇 달 전 미국에서 타계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지난 8월 천경자 화백의 딸 이혜선 씨가 천 화백의 유골함을 들고 기증작품이 보관돼 있는 수장고를 방문했으며 이를 외부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22일 밝혔다. 이 씨는 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뇌출혈로 투병중이던 천 화백이 8월 초 미국 뉴욕의 자택에서 숨졌으며, 외부에 알리지 않은 채 장례를 치렀다고 밝혔다.

천 화백은 화려한 채색화로 당대를 풍미했던 여성 거장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결혼 생활 실패와 위작 논란 등으로 얼룩졌다.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천 화백은 결혼하라는 부모의 요구를 거절하고 1940년 16세 때 여수항을 출발해 도쿄로 떠난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한 천 화백은 야수파나 입체파 등을 가르치던 서양화 고등과 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에 심취하며 일본화 고등과로 가서 모델을 보고 관찰해 섬세하게 사생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는다.

1942년 제22회 선전에서 '조부'로 입선한 천 화백은 이후 귀국해 여성과 꽃을 주제로 한
화려한 색채의 인물화를 선보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화가로 큰 사랑을 받았다.

여인의 한과 환상, 꿈과 고독을 화려한 원색의 한국화로 그려 1960~1980년대 국내 화단에서 여류화가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의 화풍을 개척했고, 문화 예술계 전반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스타'화가였다.

천경자


1972년 베트남전 당시 문공부에서 베트남전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10명을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기창, 박영선, 김원, 임직순 등 남자 화가들 사이에서 홍일점 종군 화가가 된다.

타고난 글재주로 1955년의 '여인소묘' 등 단행본 15건과 수필집 10권, 신문잡지 연재 12건 등을 내기도 했다.

모자를 쓴 여인
▲천경자 화백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모자를 쓴 여인'


그녀의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몽환적이고 애틋한 눈빛의 여인은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화려했던 화가 생활이었지만, 개인사는 순탄치 못했다.

도교역에서 우연히 만난 명문대생과의 결혼 생활은 1남1녀를 낳았지만 길지 못했다. 이후 그녀는 전남의 지역신문 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을 만나 1남1녀를 낳았지만 가정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그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기다리는 편이 된 나는 끝없이 두 갈래로 평행선을 이루는 철들을 아득히 바라보다가...."(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중)라고 자서전에 적기도 했다.

천 화백 노년에 가장 큰 고비는 1991년 '미인도'위작 논란이었다.

이 논란은 1991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천 화백의 작품 '미인도'에 대해 천 화백 본인이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경위 등을 추적해 "진품이 맞다"고 맞섰다.

미인도
▲천경자 미인도


하지만 이후 고서화 위조범 K씨가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 요청으로 달력 그림 몇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털어놓으며 위작 시비는 재연됐다. 이에 대해 국립미술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 화랑협회에서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양측의 공방이 격화되는 가운데 천 화백은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하는 풍토에 분노한다"며 붓을 놓았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직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불명예를 안았고, 엄청난 정신적 고초를 겪었다.

정신적 충격을 받는 천 화백은 19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딸이 사는 뉴욕으로 홀연히 떠났다. 이후 2003년 뇌출혈로 쓰려진 후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칩거해왔다. 이 때문에 미술계에서는 지난 10년간 천 화백이 이미 사망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에 천 화백의 타계소식이 뒤늦게 알려진 것에 대해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으로 강력 요청했다고 보고받았다"며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예술계에서는 천 화백의 삶을 프리다 칼로에 비유하기도 하다. 멕시코 여류화가인 칼로는 교통사고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남편(민중벽화의 거장 디에로 리베라)의 문란한 사생활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고통받은 내용은 달랐지만 한과 고독으로 점철된 천 화백의 삶에는 사랑에 대한 아픔과 비애가 끊이지 않았다.

천 화백의 타계소식에 한 네티즌(다음 닉네임 Asylum)은 " 또 하나의 거대한 별이 발자취만 남기고 떠나가는 구나"고 안타까워하는 등 네티즌들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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