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215억 ‘기부천사’에서 거액 체납자로…왜?

입력 2015.12.01 (05:59) 수정 2015.12.0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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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원 기부 VS 215억 원 기부

출근 시간, 무궁화호를 타고 수원역에 내리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두 손을 내미는 분들이 있습니다. 돈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구걸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동전이라도 건넨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바쁘다는 건 핑계이고, 그저 남을 돕는데 인색한 성품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엔가 저는 또 무심코 그 옆을 지나가는데, 교복을 입은 한 고등학생이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동전 바구니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습니다. 돈을 받은 사람은 "고맙다"고 했고,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학생이 참 기특하네!" 칭찬을 하더군요.

내 돈으로 남을 도우면, 받는 사람은 고맙고, 이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칭찬하게 되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황필상 씨는 215억 원이라는 자산을 기부했는데, 돌아온 건 긴 법적 소송과 225억 원의 세금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록을 빌리자면 "우째 이런 일이…." 입니다.

기부자 황필상기부자 황필상


■‘기부천사’가 거액의 체납자로…

황필상 씨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뒤늦게 아주대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고 학교의 도움으로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뒤 카이스트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 뒤 '수원교차로'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크게 성공해 수백억 대 자산가가 됐습니다. 자신이 사회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고 성공했던 것처럼, 어렵게 공부하는 이들을 돕겠다는 결심을 하고 2002년에 215억 원의 자산을 기부해 장학재단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6년 뒤 문제가 생겼습니다. 세무서가 장학재단에 증여세 140억 원을 부과한 겁니다. 1심 법원은 증여세가 부당하다는 장학재단의 손을 들어줬지만, 2심은 세무서가 증여세를 부과한 게 정당하다고 판결했습니다. 대법원이 4년째 판단을 미루고 있는 사이, 증여세는 가산세가 붙어 225억 원으로 불어났습니다. 그러자 세무서는 장학재단이 안 낸 세금을, 기부자인 황필상 씨가 대신 내라고 고지서를 발부했습니다. 결국 215억 원을 기부했다가, 세금 225억 원을 내야 할 기막힌 처지가 된 겁니다.

국세청국세청


■세무서가 나쁘다?

아닙니다. 세무서도 할 말은 많습니다. 법대로 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법을 찾아봤더니, 세무서 말도 맞습니다. 법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 48조>를 보면, 공익법인이라도 현금이 아니라 주식을 기부받게 되면 증여세를 내게 돼 있습니다. 황필상 씨가 기부한 건 자신이 창업한 '수원교차로' 회사 주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세무서는 황필상씨의 기부를 '무상증여'로 봤고, 법에 따라 증여세를 부과한 겁니다.

그렇다면 기부한 사람이 증여세를 내라는 것도 법에 있나? 찾아봤더니, 있습니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 4조 4항>은 기부를 받은 쪽이 세금을 낼만한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기부자가 증여세를 내야 할 '연대 책무'가 있다고 돼 있습니다. 세무서는 재단이 기부받은 '수원교차로'의 주식을 압류했는데, 최근 주식의 가치가 떨어져 장학재단이 증여세 225억 원을 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해 이 법을 적용했습니다.

기부내역기부내역


■이 법은 악법인가?

아닙니다. 이 법은 기업의 세금 포탈과 편법 증여를 막을 수 있도록 한, '좋은 법'입니다. 이 규정이 없다면 대기업이 주식을 공익 재단에 기부하는 척하며 세금을 피한 뒤 이 재단을 통해 기업을 지배하고, 부를 세습하는 걸 막을 근거가 없어지는 셈이 되니까요. 또 지금은 주식 기부가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회사 주식의 5% 이상을 기부받아도, 3년 이내에 그 주식을 팔면 세금을 면제해주도록 법이 일부 개정됐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황필상 씨의 사례엔 소급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제 와서 장학재단이 주식을 다 팔아도 소용이 없다는 거죠.

기부자 황필상기부자 황필상


■편법 증여엔 ‘철퇴’를, 선의의 기부엔 ‘박수’를…

황필상 씨가 세운 장학재단은 법이 정한 절차와 규정을 잘 지켜 '성실 공익법인'으로 인정받았고, 장학금 사업을 성실히 수행해 교육청에서 표창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2천4백여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습니다. 증여세 부과가 합당한지에 대한 판단은 엇갈렸지만, 1, 2심 재판부 모두 황필상 씨가 재단을 통해 경영권의 변칙적인 세습을 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기부자 황필상기부자 황필상


내 돈으로 나만 잘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훈훈한' 기부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데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면,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편법 증여를 노리는 재벌의 꼼수는 철저하게 막되, 선의의 주식 기부는 권장하고, 공익 재단이 투명하게 잘 운영되고 있는지, 혹시 변칙적인 기업 경영을 하고 있지 않은지 과세당국이 잘 따져보고, 감시하고, 판단해서 세금을 부과하는 건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요?

자신의 용돈을 쪼개 어려운 사람을 도운 학생이 칭찬받는 게 당연한 것처럼, 평생 누리고 살 수 있는 자산을 기부해 학생들을 돕는 황필상씨도 박수를 받아야 한다는 게 아마 보통 사람이 가진 상식일 겁니다. 4년 넘게 판단을 미루고 있는 대법원이, 더 늦지 않게,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맞는 판단을 내려줄 거라고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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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5억 기부했더니 225억 세금 폭탄 ‘황당’ (20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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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215억 ‘기부천사’에서 거액 체납자로…왜?
    • 입력 2015-12-01 05:59:17
    • 수정2015-12-01 09:34:14
    취재후·사건후
■만 원 기부 VS 215억 원 기부

출근 시간, 무궁화호를 타고 수원역에 내리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두 손을 내미는 분들이 있습니다. 돈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구걸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동전이라도 건넨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바쁘다는 건 핑계이고, 그저 남을 돕는데 인색한 성품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엔가 저는 또 무심코 그 옆을 지나가는데, 교복을 입은 한 고등학생이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동전 바구니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습니다. 돈을 받은 사람은 "고맙다"고 했고,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학생이 참 기특하네!" 칭찬을 하더군요.

내 돈으로 남을 도우면, 받는 사람은 고맙고, 이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칭찬하게 되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황필상 씨는 215억 원이라는 자산을 기부했는데, 돌아온 건 긴 법적 소송과 225억 원의 세금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록을 빌리자면 "우째 이런 일이…." 입니다.

기부자 황필상


■‘기부천사’가 거액의 체납자로…

황필상 씨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뒤늦게 아주대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고 학교의 도움으로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온 뒤 카이스트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 뒤 '수원교차로'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크게 성공해 수백억 대 자산가가 됐습니다. 자신이 사회의 도움을 받아 공부하고 성공했던 것처럼, 어렵게 공부하는 이들을 돕겠다는 결심을 하고 2002년에 215억 원의 자산을 기부해 장학재단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6년 뒤 문제가 생겼습니다. 세무서가 장학재단에 증여세 140억 원을 부과한 겁니다. 1심 법원은 증여세가 부당하다는 장학재단의 손을 들어줬지만, 2심은 세무서가 증여세를 부과한 게 정당하다고 판결했습니다. 대법원이 4년째 판단을 미루고 있는 사이, 증여세는 가산세가 붙어 225억 원으로 불어났습니다. 그러자 세무서는 장학재단이 안 낸 세금을, 기부자인 황필상 씨가 대신 내라고 고지서를 발부했습니다. 결국 215억 원을 기부했다가, 세금 225억 원을 내야 할 기막힌 처지가 된 겁니다.

국세청


■세무서가 나쁘다?

아닙니다. 세무서도 할 말은 많습니다. 법대로 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법을 찾아봤더니, 세무서 말도 맞습니다. 법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 48조>를 보면, 공익법인이라도 현금이 아니라 주식을 기부받게 되면 증여세를 내게 돼 있습니다. 황필상 씨가 기부한 건 자신이 창업한 '수원교차로' 회사 주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세무서는 황필상씨의 기부를 '무상증여'로 봤고, 법에 따라 증여세를 부과한 겁니다.

그렇다면 기부한 사람이 증여세를 내라는 것도 법에 있나? 찾아봤더니, 있습니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 4조 4항>은 기부를 받은 쪽이 세금을 낼만한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기부자가 증여세를 내야 할 '연대 책무'가 있다고 돼 있습니다. 세무서는 재단이 기부받은 '수원교차로'의 주식을 압류했는데, 최근 주식의 가치가 떨어져 장학재단이 증여세 225억 원을 내지 못할 것으로 판단해 이 법을 적용했습니다.

기부내역


■이 법은 악법인가?

아닙니다. 이 법은 기업의 세금 포탈과 편법 증여를 막을 수 있도록 한, '좋은 법'입니다. 이 규정이 없다면 대기업이 주식을 공익 재단에 기부하는 척하며 세금을 피한 뒤 이 재단을 통해 기업을 지배하고, 부를 세습하는 걸 막을 근거가 없어지는 셈이 되니까요. 또 지금은 주식 기부가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회사 주식의 5% 이상을 기부받아도, 3년 이내에 그 주식을 팔면 세금을 면제해주도록 법이 일부 개정됐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황필상 씨의 사례엔 소급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제 와서 장학재단이 주식을 다 팔아도 소용이 없다는 거죠.

기부자 황필상


■편법 증여엔 ‘철퇴’를, 선의의 기부엔 ‘박수’를…

황필상 씨가 세운 장학재단은 법이 정한 절차와 규정을 잘 지켜 '성실 공익법인'으로 인정받았고, 장학금 사업을 성실히 수행해 교육청에서 표창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2천4백여 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습니다. 증여세 부과가 합당한지에 대한 판단은 엇갈렸지만, 1, 2심 재판부 모두 황필상 씨가 재단을 통해 경영권의 변칙적인 세습을 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기부자 황필상


내 돈으로 나만 잘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훈훈한' 기부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데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면,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편법 증여를 노리는 재벌의 꼼수는 철저하게 막되, 선의의 주식 기부는 권장하고, 공익 재단이 투명하게 잘 운영되고 있는지, 혹시 변칙적인 기업 경영을 하고 있지 않은지 과세당국이 잘 따져보고, 감시하고, 판단해서 세금을 부과하는 건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요?

자신의 용돈을 쪼개 어려운 사람을 도운 학생이 칭찬받는 게 당연한 것처럼, 평생 누리고 살 수 있는 자산을 기부해 학생들을 돕는 황필상씨도 박수를 받아야 한다는 게 아마 보통 사람이 가진 상식일 겁니다. 4년 넘게 판단을 미루고 있는 대법원이, 더 늦지 않게,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맞는 판단을 내려줄 거라고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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