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만나니 더 아파요”…1.5% 행운의 역설

입력 2015.12.06 (06:03) 수정 2015.12.06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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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 봤다! 누나 봤다!”…혈육 만난 이산가족 1.5%에 불과

"그동안 이를 악물고 살았는데 이유를 모르겠어. 누님 만났을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거든. 근데 요새 와서 사람 만나고, 어울리는데 그냥 눈물이 돌아. 어~ 이게 아닌데,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러지?"

지난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제20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있었습니다. 박용득(81세) 할아버지도 한걸음에 금강산으로 달려갔습니다. 피멍이 들도록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빛바랜 옛 사진을 품고 있었습니다. 꼭 65년 만에 만난 큰 누나 박룡순(83세) 씨. 젖살 통통하던 얼굴은 어느덧 주름이 깊게 팼습니다. 준비한 말을 잊고, 그저 서로 어루만졌습니다. "누나다, 누나 봤다!". 세 형제의 비명 같은 외침만 터져 나왔습니다.

이산 가족 상봉이산 가족 상봉


상봉 이후 주변에선 "평생의 한을 풀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혈육을 만난 이산가족은 다 합해도 전체 신청자의 1.5%(1,950명)에 불과합니다. 불과 몇 년 후, 실향민 1세대가 숨지면 이산가족 문제는 영구미제로 남게 됩니다. 이번에 당첨의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도 663 대 1의 경쟁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답답하다고 합니다. 무언가 가슴에 철근이 박힌 듯 답답하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도 이렇다 할 원인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원인 모를 이 답답함은 금강산을 다녀온 이후 매일 같이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 39%, “상봉 후 기쁘지 않아요”

이산가족 상봉 전수 조사이산가족 상봉 전수 조사


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우리 측 상봉 가족 643명(412명 응답) 모두에게 전화로 물었습니다. 응답자의 39%는 "상봉 후 현재 기쁘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북의 가족이 고생해 온 것 같아서(19%) △상봉 시간이 짧아서 아쉬웠기 때문(17%) △마지막 만남이라는 생각 때문에(15%) 등의 답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응답자의 24%는 "상봉 후 일상생활 속에서 불편함을 느낀다"고도 했습니다. 불면증(11%), 무력감(7%)과 건강악화(7%), 북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5%)과 우울감(5%) 등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이산가족들은 상봉 이후에 2~3주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후유증이 나타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다시는 가족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한 번 큰 상실을 경험하면서 이전보다 더 큰 박탈감을 가질 수 있거든요. 갈수록 고령자가 많아지는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상봉 방식은 오히려 상처를 키울 수 있어요."
- 박유정/대한적십자사 심리사회적 지지 강사 -

■ ‘면회’에 불과한 ‘상봉’…심리 치료 대상자 2배↑

시계를 한 달여 전으로 되돌려보면 실제 그렇습니다. 20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만날 때부터 헤어질 때까지 눈물바다였습니다. 치매로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다 헤어질 때가 돼서야 알아본 93살 김월순 할머니, 전쟁통에 두고 온 다섯 살배기 아들과 만나 아내 사진을 붙잡고 통곡한 98살 이석주 할아버지... 65년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12시간의 만남은 차라리 잔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상봉은 '면회'에 가깝습니다. 혈육과 마주 앉았다 쉬기를 반복하고, 하룻밤같이 잘 수도 없었습니다. 행사는 '작별'과 '상봉'이라는 이질적인 단어를 붙인 '작별 상봉'으로 끝납니다. 늘 그렇듯 기약 없이 헤어집니다. 나이 많은 상봉자들은 혈육을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헤어지는 슬픔이 더 큽니다. 손을 부여잡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그것일 것입니다. 이렇게 잔인하고도, 비인도적인 상봉을 언제까지 계속 해야 하느냐고 되묻던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복귀하는 이산가족 상봉복귀하는 이산가족 상봉


적십자사는 일단 일상생활 복귀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상봉자 195명에 대해 연말까지 방문 상담 치료를 진행합니다. 응답자의 47%나 됩니다. 20개월 전, 제19차 상봉의 경우 21%에 대해서만 이런 '심리 관리 조치'가 이뤄진 데 비해서 두 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어르신들께는 건강과 심리상태 등을 자세히 파악하고, 정서적 지원을 하는 '심리·사회적 지지(PSS: Psycho Social Support) 프로그램'이 적용됩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한마디로 '마음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몸에 피가 철철 흐르면 지혈하는 것처럼, 마음의 병과 상처가 되도록 빨리 아물도록 돕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치유의 비결은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바로 '경청'과 '격려'입니다.

■ 생사 확인·서신 교환 등 근본적 대책 절실

문제는 이런 심리·사회적 지지프로그램이 사후조치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결국, 상봉 정례화를 비롯해 생사 확인과 서신 교환, 화상 상봉 등 최소한의 틀이 마련되지 않는 한 이산 상봉의 후유증은 계속될 수밖에 없겠죠. 궁극적인 해결책이 절실한데 북한은 우리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제 12월 11일부터 현 정부의 첫 번째 남북 당국회담이 시작됩니다. 우리 정부는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북측에 적극 요구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가족이 없는 사람은 등뼈가 없는 사람과 같다"는 아랍 격언이 있습니다. 남과 북의 분발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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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9] [단독] 이산 상봉자 절반 ‘심리 관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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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만나니 더 아파요”…1.5% 행운의 역설
    • 입력 2015-12-06 06:03:40
    • 수정2015-12-06 06:20:17
    취재후·사건후
■ “누나 봤다! 누나 봤다!”…혈육 만난 이산가족 1.5%에 불과 "그동안 이를 악물고 살았는데 이유를 모르겠어. 누님 만났을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거든. 근데 요새 와서 사람 만나고, 어울리는데 그냥 눈물이 돌아. 어~ 이게 아닌데,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러지?" 지난 10월 20일부터 26일까지 제20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있었습니다. 박용득(81세) 할아버지도 한걸음에 금강산으로 달려갔습니다. 피멍이 들도록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빛바랜 옛 사진을 품고 있었습니다. 꼭 65년 만에 만난 큰 누나 박룡순(83세) 씨. 젖살 통통하던 얼굴은 어느덧 주름이 깊게 팼습니다. 준비한 말을 잊고, 그저 서로 어루만졌습니다. "누나다, 누나 봤다!". 세 형제의 비명 같은 외침만 터져 나왔습니다.
이산 가족 상봉
상봉 이후 주변에선 "평생의 한을 풀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혈육을 만난 이산가족은 다 합해도 전체 신청자의 1.5%(1,950명)에 불과합니다. 불과 몇 년 후, 실향민 1세대가 숨지면 이산가족 문제는 영구미제로 남게 됩니다. 이번에 당첨의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도 663 대 1의 경쟁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답답하다고 합니다. 무언가 가슴에 철근이 박힌 듯 답답하다고 합니다. 병원에 가도 이렇다 할 원인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원인 모를 이 답답함은 금강산을 다녀온 이후 매일 같이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 39%, “상봉 후 기쁘지 않아요”
이산가족 상봉 전수 조사
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우리 측 상봉 가족 643명(412명 응답) 모두에게 전화로 물었습니다. 응답자의 39%는 "상봉 후 현재 기쁘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북의 가족이 고생해 온 것 같아서(19%) △상봉 시간이 짧아서 아쉬웠기 때문(17%) △마지막 만남이라는 생각 때문에(15%) 등의 답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응답자의 24%는 "상봉 후 일상생활 속에서 불편함을 느낀다"고도 했습니다. 불면증(11%), 무력감(7%)과 건강악화(7%), 북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5%)과 우울감(5%) 등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이산가족들은 상봉 이후에 2~3주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후유증이 나타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다시는 가족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한 번 큰 상실을 경험하면서 이전보다 더 큰 박탈감을 가질 수 있거든요. 갈수록 고령자가 많아지는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상봉 방식은 오히려 상처를 키울 수 있어요." - 박유정/대한적십자사 심리사회적 지지 강사 - ■ ‘면회’에 불과한 ‘상봉’…심리 치료 대상자 2배↑ 시계를 한 달여 전으로 되돌려보면 실제 그렇습니다. 20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만날 때부터 헤어질 때까지 눈물바다였습니다. 치매로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다 헤어질 때가 돼서야 알아본 93살 김월순 할머니, 전쟁통에 두고 온 다섯 살배기 아들과 만나 아내 사진을 붙잡고 통곡한 98살 이석주 할아버지... 65년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12시간의 만남은 차라리 잔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상봉은 '면회'에 가깝습니다. 혈육과 마주 앉았다 쉬기를 반복하고, 하룻밤같이 잘 수도 없었습니다. 행사는 '작별'과 '상봉'이라는 이질적인 단어를 붙인 '작별 상봉'으로 끝납니다. 늘 그렇듯 기약 없이 헤어집니다. 나이 많은 상봉자들은 혈육을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헤어지는 슬픔이 더 큽니다. 손을 부여잡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그것일 것입니다. 이렇게 잔인하고도, 비인도적인 상봉을 언제까지 계속 해야 하느냐고 되묻던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복귀하는 이산가족 상봉
적십자사는 일단 일상생활 복귀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상봉자 195명에 대해 연말까지 방문 상담 치료를 진행합니다. 응답자의 47%나 됩니다. 20개월 전, 제19차 상봉의 경우 21%에 대해서만 이런 '심리 관리 조치'가 이뤄진 데 비해서 두 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어르신들께는 건강과 심리상태 등을 자세히 파악하고, 정서적 지원을 하는 '심리·사회적 지지(PSS: Psycho Social Support) 프로그램'이 적용됩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한마디로 '마음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몸에 피가 철철 흐르면 지혈하는 것처럼, 마음의 병과 상처가 되도록 빨리 아물도록 돕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치유의 비결은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바로 '경청'과 '격려'입니다. ■ 생사 확인·서신 교환 등 근본적 대책 절실 문제는 이런 심리·사회적 지지프로그램이 사후조치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결국, 상봉 정례화를 비롯해 생사 확인과 서신 교환, 화상 상봉 등 최소한의 틀이 마련되지 않는 한 이산 상봉의 후유증은 계속될 수밖에 없겠죠. 궁극적인 해결책이 절실한데 북한은 우리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제 12월 11일부터 현 정부의 첫 번째 남북 당국회담이 시작됩니다. 우리 정부는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북측에 적극 요구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가족이 없는 사람은 등뼈가 없는 사람과 같다"는 아랍 격언이 있습니다. 남과 북의 분발을 기대합니다. [연관 기사] ☞ [뉴스9] [단독] 이산 상봉자 절반 ‘심리 관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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