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슬럼화된 세운상가…그곳에 사는 사람들

입력 2016.01.14 (06:58) 수정 2016.01.1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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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삼풍상가에서 바라본 세운상가 단지의 모습.

"재개발을 기다린지 20년이 다 돼 가네요. 도시재생이니 뭐니 얼마나 달라질지…"

강추위가 몰아닥친 지난 11일 오후 5시 서울 세운상가.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 임용택(82)씨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임씨는 세운상가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 중 한 명이다. 세운상가는 저층부를 상가로 고층부는 거주용으로 쓰고 있다. 임씨가 거주하고 있는 대림아파트 140세대 중 실거주 주민은 이제 13가구 밖에 남지 않았다(나머지는 모두 아파트형 공장이나 사무실로 쓰고 있다).

이날 찾은 임씨의 집은 이 건물의 오랜 내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방 2개, 화장실 1개로 구성된 집 실내는 제법 넓어보였지만, 집안 곳곳은 심각하게 낡았다. 천장 곳곳은 빗물이 새 페인트 칠이 벗겨졌고, 수압이 떨어지면서 주방 수돗물이 질질 흘렀다. 90년대부터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는 임씨는 이 집의 소유주이자 몇 안 남은 실거주민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운상가. 한때 철거 대상이었던 이곳이 전환점을 맞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곳을 ‘근대유산’으로 인정해 기존 건물은 그대로 두고 주변부를 바꿔 제 2의 전성기를 맞도록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서울역 고가도로 사업에 이은 이른바 '도시재생 프로젝트'다.

세운상가는 정확히 말하면 8개의 동(현재는 7개)으로 구성된 건물군(群)이다. 종묘 앞 종로부터 충무로역이 있는 퇴계로까지 닿는 남과 북 길이 1km에 달하는 길쭉한 건물 집단이다.


▲서울시 마천루에서 바라본 세운상가 전경 [사진작가= 노경]



세운상가의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라는 점이다. 70년대에 지어진 강북의 타워팰리스라고 해야할까. 지금은 낡을대로 낡은 건물이지만, 준공 당시인 1968년에만 하더라도 강남이 개발되기 전으로 4대문 안에 들어선 고급 주거 복합타운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중 세운상가의 최남단에 위치한 진양상가 건물은 주거 기능이 상대적으로 활성화 된 편이다. 4층까지는 꽃도매상과 찜질방, 보석 도매상이 있지만, 5층부터는 사람이 거주하는 용도로 지어져 지금도 140여세대가 넘는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지금은 폐간된 여성잡지 '여원'에 실린 당시 세운상가의 홍보전단.

상가 1층 로비에는 아파트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 4대가 놓여 있다. 상층부에 있는 아파트 복도는 구식이지만, 관리는 잘 되는 듯 했다. 집마다 자체적인 리모델링을 했는지 복도로 나 있는 철문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액션 영화에서나 본듯한 옛 건물양식을 한 아파트 복도. 의외로 복도가 깨끗하다.

"교통은 정말 편리하답니다"

10년 가까이 살던 집을 내놓은 70대 할머니 김 모(가명)씨는 자신의 방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진양아파트는 3분 거리에 3·4호선이 다니는 충무로역이 나 있다. 북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환승선인 을지로 3가역과 을지로 4가역도 있다.

방 2개로 된 김 씨의 집은 실평수 66㎡(20평)쯤 됐을까. 내부는 낡은 편이었지만, 구조가 널찍해 인테리어만 새로 해도 괜찮을 듯 했다. 같은 층 복도엔 어린 아이들도 사는지 아이들용 자전거를 복도에 내놓은 집도 종종 보였다.

그러나 세운상가 전반에 퍼진 슬럼화 현상은 대세에 가까웠다.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있는 중간층 공터에는 이불이며 옷가지 몇 개가 널려있을 뿐 인적이 드물어 보였다. 이따금 담뱃불을 붙이러 나오는 한 두 명이 전부였다.


▲세운상가 상층부에 있는 공터의 모습.

인근 D부동산 중개인은 기자에게 "매물이 제법 있다"며 소개했지만, 전세를 끼고 살 순 없느냐고 묻자 "사실 전세가 잘 나가진 않는다"며 시인했다. 거래가 거의 이뤄지지 않을 뿐더러 살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는 셈이다.

주차공간이 없다는 것도 문제점이었다. 세운상가 일대는 차량 소유가 지금처럼 보편적이지 않았던 시기에 지어져 제대로 된 주차공간이 없다. 자체적인 리모델링을 한 PJ호텔이나 대기업이 사용하고 있는 삼풍상가만 중간층을 리모델링 해 주차장으로 쓰고 있을 뿐이었다.

2006년 수백억원을 들여 리모델링한 풍전호텔(현 PJ호텔)은 거의 새 건물 같았다. 대리석으로 외관을 덮었고 실내는 은은한 조명과 세련된 인테리어로 단장해 해외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2006년 새 단장 한 PJ호텔의 내부 모습.

사무용으로 쓰고 있는 삼풍상가 역시 건물 안팎이 리모델링 되면서 한화생명, 롯데닷컴 등 대기업들이 입주해 있었다. 건물 외벽에는 고급 음식점이 입주해 있었고,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도 여럿 눈에 띄었다. 이곳에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40대 여성 박 모(가명)씨는 "주변에 지하철이 많아 출퇴근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시는 세운상가 3층에 나 있는 데크(난간)를 연결해 사람들이 지나는 길로 만들 계획이다. 건물을 전부 해체하는 대신 외관의 데크를 연결짓고 녹지를 조성해 마치 청계천처럼 젊은 사람들이 찾기 좋은 관광명소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 계획에 대한 주민들의 입장은 회의적이었다. 자녀 교육 문제로 이사를 갔다가 3년 전 다시 세운상가로 돌아왔다는 김정태(52)씨는 "(세운상가는) 사실상 제대로 된 주거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라며 "제대로 된 보상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림아파트 관리소장인 진철남 씨도 "낡을 만큼 낡은 이곳에 계속 거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입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상가쪽은 업종과 위치, 상가 지분 보유 여부에 따라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계획대로라면 가장 많은 수혜를 볼 것으로 보이는 3층 데크 바로 옆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고영계(64)씨는 "유동인구가 늘면 인근 상권도 될 살아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1988년부터 28년째 이곳 슈퍼마켓을 지켜왔다는 고씨는 "전성기 때는 하루 매출이 100만원도 넘었다"며 "오늘은 담배 10갑이 고작"이라며 낡은 장부를 펴보였다.


▲ 고영계(64세)/ 슈퍼마켓 운영

상가 측면부에서 전기 설비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정 모(57)씨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정씨는 "세운상가가 가진 고유의 정체성이 있는데, 서울시 계획대로 라면 그냥 먹자골목에 그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계획에 따르면 공중보행도로로 새 단장 할 예정인 세운상가 도크. 지금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방치돼 있다.

그는 1984년 군 제대 후 이곳에서 장사를 해왔다. 임대로 장사를 하고 있지만, 이곳 일대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는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세운상가 한 바퀴를 돌면 못 만들 것이 없었다"며 "이곳의 정체성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제대로 된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단지, 세운상가는 1968년 설립됐다. 건물마다 발코니 형태의 보행데크가 서로 연결돼 있었는데, 2005년 청계천 복원 당시 일부 데크가 철거됐다. 시는 끊어진 데크를 복구시켜 종묘에서 남산까지 잇는 공중보행로를 설치해 기존 단지의 역사적 가치는 보존하되 상권은 되살린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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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포] 슬럼화된 세운상가…그곳에 사는 사람들
    • 입력 2016-01-14 06:58:07
    • 수정2016-01-14 11:01:11
    사회

▲11일 오후 삼풍상가에서 바라본 세운상가 단지의 모습.

"재개발을 기다린지 20년이 다 돼 가네요. 도시재생이니 뭐니 얼마나 달라질지…"

강추위가 몰아닥친 지난 11일 오후 5시 서울 세운상가.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 임용택(82)씨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임씨는 세운상가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 중 한 명이다. 세운상가는 저층부를 상가로 고층부는 거주용으로 쓰고 있다. 임씨가 거주하고 있는 대림아파트 140세대 중 실거주 주민은 이제 13가구 밖에 남지 않았다(나머지는 모두 아파트형 공장이나 사무실로 쓰고 있다).

이날 찾은 임씨의 집은 이 건물의 오랜 내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방 2개, 화장실 1개로 구성된 집 실내는 제법 넓어보였지만, 집안 곳곳은 심각하게 낡았다. 천장 곳곳은 빗물이 새 페인트 칠이 벗겨졌고, 수압이 떨어지면서 주방 수돗물이 질질 흘렀다. 90년대부터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는 임씨는 이 집의 소유주이자 몇 안 남은 실거주민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운상가. 한때 철거 대상이었던 이곳이 전환점을 맞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곳을 ‘근대유산’으로 인정해 기존 건물은 그대로 두고 주변부를 바꿔 제 2의 전성기를 맞도록 유도한다는 계획이다. 서울역 고가도로 사업에 이은 이른바 '도시재생 프로젝트'다.

세운상가는 정확히 말하면 8개의 동(현재는 7개)으로 구성된 건물군(群)이다. 종묘 앞 종로부터 충무로역이 있는 퇴계로까지 닿는 남과 북 길이 1km에 달하는 길쭉한 건물 집단이다.


▲서울시 마천루에서 바라본 세운상가 전경 [사진작가= 노경]



세운상가의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이라는 점이다. 70년대에 지어진 강북의 타워팰리스라고 해야할까. 지금은 낡을대로 낡은 건물이지만, 준공 당시인 1968년에만 하더라도 강남이 개발되기 전으로 4대문 안에 들어선 고급 주거 복합타운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중 세운상가의 최남단에 위치한 진양상가 건물은 주거 기능이 상대적으로 활성화 된 편이다. 4층까지는 꽃도매상과 찜질방, 보석 도매상이 있지만, 5층부터는 사람이 거주하는 용도로 지어져 지금도 140여세대가 넘는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지금은 폐간된 여성잡지 '여원'에 실린 당시 세운상가의 홍보전단.

상가 1층 로비에는 아파트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 4대가 놓여 있다. 상층부에 있는 아파트 복도는 구식이지만, 관리는 잘 되는 듯 했다. 집마다 자체적인 리모델링을 했는지 복도로 나 있는 철문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액션 영화에서나 본듯한 옛 건물양식을 한 아파트 복도. 의외로 복도가 깨끗하다.

"교통은 정말 편리하답니다"

10년 가까이 살던 집을 내놓은 70대 할머니 김 모(가명)씨는 자신의 방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진양아파트는 3분 거리에 3·4호선이 다니는 충무로역이 나 있다. 북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환승선인 을지로 3가역과 을지로 4가역도 있다.

방 2개로 된 김 씨의 집은 실평수 66㎡(20평)쯤 됐을까. 내부는 낡은 편이었지만, 구조가 널찍해 인테리어만 새로 해도 괜찮을 듯 했다. 같은 층 복도엔 어린 아이들도 사는지 아이들용 자전거를 복도에 내놓은 집도 종종 보였다.

그러나 세운상가 전반에 퍼진 슬럼화 현상은 대세에 가까웠다. 아파트 단지 사이에 있는 중간층 공터에는 이불이며 옷가지 몇 개가 널려있을 뿐 인적이 드물어 보였다. 이따금 담뱃불을 붙이러 나오는 한 두 명이 전부였다.


▲세운상가 상층부에 있는 공터의 모습.

인근 D부동산 중개인은 기자에게 "매물이 제법 있다"며 소개했지만, 전세를 끼고 살 순 없느냐고 묻자 "사실 전세가 잘 나가진 않는다"며 시인했다. 거래가 거의 이뤄지지 않을 뿐더러 살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는 셈이다.

주차공간이 없다는 것도 문제점이었다. 세운상가 일대는 차량 소유가 지금처럼 보편적이지 않았던 시기에 지어져 제대로 된 주차공간이 없다. 자체적인 리모델링을 한 PJ호텔이나 대기업이 사용하고 있는 삼풍상가만 중간층을 리모델링 해 주차장으로 쓰고 있을 뿐이었다.

2006년 수백억원을 들여 리모델링한 풍전호텔(현 PJ호텔)은 거의 새 건물 같았다. 대리석으로 외관을 덮었고 실내는 은은한 조명과 세련된 인테리어로 단장해 해외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2006년 새 단장 한 PJ호텔의 내부 모습.

사무용으로 쓰고 있는 삼풍상가 역시 건물 안팎이 리모델링 되면서 한화생명, 롯데닷컴 등 대기업들이 입주해 있었다. 건물 외벽에는 고급 음식점이 입주해 있었고,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도 여럿 눈에 띄었다. 이곳에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40대 여성 박 모(가명)씨는 "주변에 지하철이 많아 출퇴근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고 설명했다.

시는 세운상가 3층에 나 있는 데크(난간)를 연결해 사람들이 지나는 길로 만들 계획이다. 건물을 전부 해체하는 대신 외관의 데크를 연결짓고 녹지를 조성해 마치 청계천처럼 젊은 사람들이 찾기 좋은 관광명소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 계획에 대한 주민들의 입장은 회의적이었다. 자녀 교육 문제로 이사를 갔다가 3년 전 다시 세운상가로 돌아왔다는 김정태(52)씨는 "(세운상가는) 사실상 제대로 된 주거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라며 "제대로 된 보상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림아파트 관리소장인 진철남 씨도 "낡을 만큼 낡은 이곳에 계속 거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입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상가쪽은 업종과 위치, 상가 지분 보유 여부에 따라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계획대로라면 가장 많은 수혜를 볼 것으로 보이는 3층 데크 바로 옆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고영계(64)씨는 "유동인구가 늘면 인근 상권도 될 살아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1988년부터 28년째 이곳 슈퍼마켓을 지켜왔다는 고씨는 "전성기 때는 하루 매출이 100만원도 넘었다"며 "오늘은 담배 10갑이 고작"이라며 낡은 장부를 펴보였다.


▲ 고영계(64세)/ 슈퍼마켓 운영

상가 측면부에서 전기 설비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정 모(57)씨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정씨는 "세운상가가 가진 고유의 정체성이 있는데, 서울시 계획대로 라면 그냥 먹자골목에 그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계획에 따르면 공중보행도로로 새 단장 할 예정인 세운상가 도크. 지금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방치돼 있다.

그는 1984년 군 제대 후 이곳에서 장사를 해왔다. 임대로 장사를 하고 있지만, 이곳 일대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는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세운상가 한 바퀴를 돌면 못 만들 것이 없었다"며 "이곳의 정체성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제대로 된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단지, 세운상가는 1968년 설립됐다. 건물마다 발코니 형태의 보행데크가 서로 연결돼 있었는데, 2005년 청계천 복원 당시 일부 데크가 철거됐다. 시는 끊어진 데크를 복구시켜 종묘에서 남산까지 잇는 공중보행로를 설치해 기존 단지의 역사적 가치는 보존하되 상권은 되살린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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