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서 만난 위안부의 아리랑

입력 2016.02.08 (07:07) 수정 2016.02.1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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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묵은 취재 기록을 오랜만에 열었습니다.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 이야기를 담은 취재기록입니다. 2010년 밟았던 오키나와 미야코 섬의 분홍빛 노을과 산호 해변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맺어 나라를 뺏긴 지 100년이 되던 2010년, KBS는 <국권침탈 100년, 우리 시대에 던지는 질문>이라는 4부작 프로그램을 제작했습니다. 당시 취재팀 막내였던 저는 오키나와에 있던 위안부들의 흔적과 주민들의 증언을 취재하기 위해 오키나와 5개 섬을 차례로 밟았습니다.

오키나와의 비극, 그 속의 위안부

원래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던 오키나와는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후인 1872년 일본의 식민지가 됐습니다. 2차대전 말기에는 일본 본토에서 유일하게 미군이 상륙해 참혹한 지상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오키나와가 원래 일본 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어도 일본인들이 무심하게 대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군이 밀고 들어오자 기밀 누출 등을 우려한 일본군은 마을 주민들에게 집단 자결을 권하기까지 했습니다. 수십~수백 명씩 사람들이 숲 속 등에서 나무 덩굴에 목을 매거나 수류탄을 던지고 자결을 했습니다.



전쟁의 좋지 않은 기억, 일본에 대한 원망을 동시에 가진 오키나와 인들은 일본의 전쟁 범죄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편입니다. 오키나와의 많은 주민들이 군이 데려왔다가 군과 함께 사라진, 뽀얗고 화려한 옷을 입은 무표정한 처녀들, 위안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군과 함께 왔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처녀들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의 요나하 히로토시 씨는 조선인 위안부를 생애 처음으로 만난 외국인으로 기억했습니다. 처녀들은 쓰가가라는 우물에서 빨래를 한 뒤 앉아서 잠시 쉬다 가곤 했습니다. "피부가 이 지역 여성들과 달라서 한눈에 봐도 이 섬 처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갑자기 보이기 시작했는데, 여성들이 왜 군인이 머무는 병사에 있는지 궁금했죠.".

요나하 씨는 군의 활주로와 통신대 인근에 있던 위안소와 여기 머물던 여성 10여 명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건물은) 중앙에 긴 복도가 있어 구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었어요." 이 처녀 중 5~6명이 1944년 '군기제'라는 축제에서 춤을 추던 모습도 기억난다고 했습니다. 처녀들은 마을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았지만 때로 '오빠'라고 말을 걸기도 했습니다. 위안소는 전쟁이 끝나자 홀연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 15일엔 이미 사라진 후였죠".



마을 주민 사와다 도요조 씨는 위안부들이 자주 빨래를 했던 빨래터의 위치를 취재진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아당 우물'이라는 표지석이 남아있는 우물터였습니다. "위안부들이 목욕을 하러 왔는데 우리가 말을 걸었어요. 저쪽 밭까지 올라갈 때까지 놀리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하고 돌아보지도 않았어요". 어린 마음에 사와다 씨는 위안부들을 많이 놀렸다고 합니다. "조센삐('삐'는 여성의 성기를 저속하게 부르는 말)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 죄스럽고 상처를 줬다고 생각해요"

취재진은 위안소로 직접 군인을 안내해줬던 주민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군에서 심부름을 하며 얻은 군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사쿠다 겐토쿠 씨.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방이 있고 번호가 붙어있었죠. 제가 길을 알았기 때문에 군인을 데려온 뒤 여기서 노는 게 끝나면 다시 데리고 갔어요. 군인들은 저녁 식사 끝나면 있었어요. 위안부 사진을 보고 좋아하는 여성과 얘기를 한 후 놀았지요." 증언 과정에서 말을 탄 장교를 데리고 와 검을 가지고 용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했다는 사쿠다 씨는 주변에 있는 위안부의 묘지에서 간혹 기도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1992년에 발표된 <위안소 지도>에서 오키나와에는 총 121개의 위안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군은 오키나와의 여러 섬에 흩어져 있었고 위안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민가를 이용한 위안소가 60개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군대와 위안소가 민간과 철저히 분리돼 있었던 다른 지역과 달리 오키나와에서 위안부들이 민간인들의 눈에 많이 띈 이유입니다. 조선인 위안부가 있던 위안소는 40여 곳으로 추정됩니다. 이 지역에는 조선인 징용자도 많아 주민들은 '아리랑' 노래를 알고 있었습니다. 멜로디는 똑같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부분은 한글로, 나머지 부분은 한글 가사가 일본어로 그대로 번역된 아리랑입니다.

위안부 언니가 가르쳐 준 '아리랑' 노래

아직 남아있는 위안소 건물을 찾기 위해 오키나와 아카섬으로 향했습니다. 카기노하나 야스히로 씨는 1944년 위안부들을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전쟁도 막바지인데 왜 여기 왔을까 생각했어요. 나중에 군인들에게 일본군을 위안하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키도 크고 고와서 정말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매춘부'라고 생각하고 아무리 장사라도 이런 벽촌까지 돈을 벌러 왔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는데 전후에야 강제연행됐다는 걸 알게 됐죠". 카기노하나 씨는 위안소로 쓰이던 건물로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민가였습니다. "근심이 많은 얼굴이어서 가족이 그리워서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듬해 3월 오키나와 본토로 군인이 야밤 이동을 했을 때 위안소도 텅 비었다고 합니다.



가네시마 기쿠에 씨는 이 위안소에 고용돼 살림을 도왔었습니다. 7명의 위안부들은 모두 언니였는데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가네시마 씨는 7명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늘 자매처럼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에 (이름을) 잊을 수가 없죠. 가장 어린 건 18살 마치코였어요". 자신도 위안소 여성들도 바빴다고 했습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군의관이 와서 목욕물을 데워야 했기 때문에 더 바빴다고요. "장난도 치면 농담도 하고 고향 가족 얘기를 했어요. 술이 들어가면 일본어가 한국어로 바뀌고 울다가 말다툼을 하기도 했죠."

가네시마 씨는 한국어로 '달래'라는 파 같이 생긴 채소를 위안부 언니들이 볶아 먹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어 중 기억나는 건 '아이고' 와 '못 살겠다' 예요. 술을 마시고 말다툼을 할 때 이런 말을 했는데 뜻은 모르겠어요". 가네시마 씨는 헤어지기 전 위안부 언니들에게 배웠다는 '아리랑'을 불러주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많이 들은 바로 그 '아리랑'이었습니다.

최초로 '위안부' 밝힌 배봉기 할머니의 흔적을 따라

오키나와의 도카시키 섬은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임을 드러낸 배봉기 할머니가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배 할머니는 위안부의 존재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1975년, 특별체류허가를 받기 위해 부득이 '위안부'였음을 밝혔습니다. 충남에 살던 배 할머니는 29살이던 1943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 감언에 속아 오키나와에 왔습니다. 중간에 위안소로 간다는 걸 알게 돼도 돌려보내 주는 일은 없습니다. 배 할머니는 16~24살의 다른 조선인 여성 7명과 함께 와 빨간 지붕의 위안소에 살았습니다.

"7명 가운데 1명은 죽고 2명은 다쳤어. 산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나랑 다른 여자 1명이 2명의 군인과 함께 마지막까지 있었지". 한국정신대연구소가 공개한 배 할머니의 육성 증언은 망국에 버림받고 전쟁에 휘둘려야 했던 한 여성의 삶의 기록입니다. 오키나와 전쟁이 시작되자 배 할머니는 군인들과 함께 도망을 다니며 밥 짓기와 간호, 굴파기에까지 동원됐습니다. "이런 고생할 거라면 전쟁에서 총 한 발 맞고 죽어 버렸으면 고생 안 할텐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정말 힘들 때는..."



일본군과 함께 다녔던 할머니는 오키나와 사람들처럼 일본이 미군에게 지면 죽는다고 믿어 일본의 승리를 바랬다고 합니다. 자신을 '일본을 위해 너무 고생한 국민'으로 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결국 미군 포로가 됐고, 이후 고향에 돌아갈 용기가 없어 오키나와에 남았습니다. 생계 수단이 없어 막노동과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안부임이 알려지면서 할머니는 몇몇 뜻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 살다가 199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담담한 인터뷰 중간중간 할머니는 말합니다. "바다를 보면 그리워. 30년이나 지났네요. 태어난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거대한 실종'...사라진 위안부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 수는 아직도 오리무중입니다. 적어도 7백 명, 많게는 천5백 명 정도로 보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이 중 미군이 일본 패전 이후 조선으로 돌려보낸 위안부는 모두 147명입니다. 오키나와의 지리도 잘 모르고 지인도 없이 일본군에 끌려다녔던 위안부들, 전쟁통에 숨졌을 확률이 일반 주민보다 높았을 것입니다.

2010년 당시 취재는 오키나와의 위안부에 대해 10여 년 동안 연구해 온 홍윤신 현 와세다대 초빙교수를 비롯해 수많은 한일 연구자들과 현지 주민들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6년 전 기록을 다시 꺼내본 것도 홍 교수가 오키나와 위안부들의 이야기를 담은 <오키나와 전장의 기억과 위안소>를 일본에서 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서였습니다. 지금은 제가 당시 담았던 촬영 기록보다 훨씬 많은 연구와 증언들이 용기 있는 분들에 의해 더해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분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름 없이 사라진 오키나와 조선인 위안부들의 이야기는 아마 전장의 포탄 소리에 영영 묻혔을 것입니다.



오키나와 미야코 섬에는 '아리랑비'라는 비석이 있습니다. 요나하 히로토시 씨가 어릴 적 본 위안부들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 바위를 놔뒀던 자리에 나중에 세운 비석입니다. 비석에는 "이 주변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쓰가가(우물이 있던 자리)에서 빨래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이곳에서 쉬던 모습을 기억한다. 처참한 전쟁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세계 평화 상생의 바람을 담아 이 비를 후세에 전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먼 땅에서 사망 기록도 없이 사라져버린 위안부 피해자들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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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키나와에서 만난 위안부의 아리랑
    • 입력 2016-02-08 07:07:09
    • 수정2016-02-11 09:35:08
    취재K
6년 묵은 취재 기록을 오랜만에 열었습니다.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 이야기를 담은 취재기록입니다. 2010년 밟았던 오키나와 미야코 섬의 분홍빛 노을과 산호 해변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맺어 나라를 뺏긴 지 100년이 되던 2010년, KBS는 <국권침탈 100년, 우리 시대에 던지는 질문>이라는 4부작 프로그램을 제작했습니다. 당시 취재팀 막내였던 저는 오키나와에 있던 위안부들의 흔적과 주민들의 증언을 취재하기 위해 오키나와 5개 섬을 차례로 밟았습니다.

오키나와의 비극, 그 속의 위안부

원래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이었던 오키나와는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후인 1872년 일본의 식민지가 됐습니다. 2차대전 말기에는 일본 본토에서 유일하게 미군이 상륙해 참혹한 지상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오키나와가 원래 일본 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에 피해를 입어도 일본인들이 무심하게 대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군이 밀고 들어오자 기밀 누출 등을 우려한 일본군은 마을 주민들에게 집단 자결을 권하기까지 했습니다. 수십~수백 명씩 사람들이 숲 속 등에서 나무 덩굴에 목을 매거나 수류탄을 던지고 자결을 했습니다.



전쟁의 좋지 않은 기억, 일본에 대한 원망을 동시에 가진 오키나와 인들은 일본의 전쟁 범죄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편입니다. 오키나와의 많은 주민들이 군이 데려왔다가 군과 함께 사라진, 뽀얗고 화려한 옷을 입은 무표정한 처녀들, 위안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군과 함께 왔다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처녀들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의 요나하 히로토시 씨는 조선인 위안부를 생애 처음으로 만난 외국인으로 기억했습니다. 처녀들은 쓰가가라는 우물에서 빨래를 한 뒤 앉아서 잠시 쉬다 가곤 했습니다. "피부가 이 지역 여성들과 달라서 한눈에 봐도 이 섬 처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갑자기 보이기 시작했는데, 여성들이 왜 군인이 머무는 병사에 있는지 궁금했죠.".

요나하 씨는 군의 활주로와 통신대 인근에 있던 위안소와 여기 머물던 여성 10여 명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건물은) 중앙에 긴 복도가 있어 구역이 두 개로 나뉘어 있었어요." 이 처녀 중 5~6명이 1944년 '군기제'라는 축제에서 춤을 추던 모습도 기억난다고 했습니다. 처녀들은 마을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았지만 때로 '오빠'라고 말을 걸기도 했습니다. 위안소는 전쟁이 끝나자 홀연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 15일엔 이미 사라진 후였죠".



마을 주민 사와다 도요조 씨는 위안부들이 자주 빨래를 했던 빨래터의 위치를 취재진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아당 우물'이라는 표지석이 남아있는 우물터였습니다. "위안부들이 목욕을 하러 왔는데 우리가 말을 걸었어요. 저쪽 밭까지 올라갈 때까지 놀리는데도 아무 말도 안 하고 돌아보지도 않았어요". 어린 마음에 사와다 씨는 위안부들을 많이 놀렸다고 합니다. "조센삐('삐'는 여성의 성기를 저속하게 부르는 말)라고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 죄스럽고 상처를 줬다고 생각해요"

취재진은 위안소로 직접 군인을 안내해줬던 주민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군에서 심부름을 하며 얻은 군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사쿠다 겐토쿠 씨.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방이 있고 번호가 붙어있었죠. 제가 길을 알았기 때문에 군인을 데려온 뒤 여기서 노는 게 끝나면 다시 데리고 갔어요. 군인들은 저녁 식사 끝나면 있었어요. 위안부 사진을 보고 좋아하는 여성과 얘기를 한 후 놀았지요." 증언 과정에서 말을 탄 장교를 데리고 와 검을 가지고 용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는 얘기를 몇 번이나 했다는 사쿠다 씨는 주변에 있는 위안부의 묘지에서 간혹 기도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1992년에 발표된 <위안소 지도>에서 오키나와에는 총 121개의 위안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군은 오키나와의 여러 섬에 흩어져 있었고 위안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민가를 이용한 위안소가 60개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군대와 위안소가 민간과 철저히 분리돼 있었던 다른 지역과 달리 오키나와에서 위안부들이 민간인들의 눈에 많이 띈 이유입니다. 조선인 위안부가 있던 위안소는 40여 곳으로 추정됩니다. 이 지역에는 조선인 징용자도 많아 주민들은 '아리랑' 노래를 알고 있었습니다. 멜로디는 똑같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부분은 한글로, 나머지 부분은 한글 가사가 일본어로 그대로 번역된 아리랑입니다.

위안부 언니가 가르쳐 준 '아리랑' 노래

아직 남아있는 위안소 건물을 찾기 위해 오키나와 아카섬으로 향했습니다. 카기노하나 야스히로 씨는 1944년 위안부들을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전쟁도 막바지인데 왜 여기 왔을까 생각했어요. 나중에 군인들에게 일본군을 위안하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키도 크고 고와서 정말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매춘부'라고 생각하고 아무리 장사라도 이런 벽촌까지 돈을 벌러 왔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는데 전후에야 강제연행됐다는 걸 알게 됐죠". 카기노하나 씨는 위안소로 쓰이던 건물로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민가였습니다. "근심이 많은 얼굴이어서 가족이 그리워서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듬해 3월 오키나와 본토로 군인이 야밤 이동을 했을 때 위안소도 텅 비었다고 합니다.



가네시마 기쿠에 씨는 이 위안소에 고용돼 살림을 도왔었습니다. 7명의 위안부들은 모두 언니였는데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가네시마 씨는 7명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늘 자매처럼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에 (이름을) 잊을 수가 없죠. 가장 어린 건 18살 마치코였어요". 자신도 위안소 여성들도 바빴다고 했습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군의관이 와서 목욕물을 데워야 했기 때문에 더 바빴다고요. "장난도 치면 농담도 하고 고향 가족 얘기를 했어요. 술이 들어가면 일본어가 한국어로 바뀌고 울다가 말다툼을 하기도 했죠."

가네시마 씨는 한국어로 '달래'라는 파 같이 생긴 채소를 위안부 언니들이 볶아 먹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어 중 기억나는 건 '아이고' 와 '못 살겠다' 예요. 술을 마시고 말다툼을 할 때 이런 말을 했는데 뜻은 모르겠어요". 가네시마 씨는 헤어지기 전 위안부 언니들에게 배웠다는 '아리랑'을 불러주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많이 들은 바로 그 '아리랑'이었습니다.

최초로 '위안부' 밝힌 배봉기 할머니의 흔적을 따라

오키나와의 도카시키 섬은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임을 드러낸 배봉기 할머니가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배 할머니는 위안부의 존재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1975년, 특별체류허가를 받기 위해 부득이 '위안부'였음을 밝혔습니다. 충남에 살던 배 할머니는 29살이던 1943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준다는 감언에 속아 오키나와에 왔습니다. 중간에 위안소로 간다는 걸 알게 돼도 돌려보내 주는 일은 없습니다. 배 할머니는 16~24살의 다른 조선인 여성 7명과 함께 와 빨간 지붕의 위안소에 살았습니다.

"7명 가운데 1명은 죽고 2명은 다쳤어. 산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나랑 다른 여자 1명이 2명의 군인과 함께 마지막까지 있었지". 한국정신대연구소가 공개한 배 할머니의 육성 증언은 망국에 버림받고 전쟁에 휘둘려야 했던 한 여성의 삶의 기록입니다. 오키나와 전쟁이 시작되자 배 할머니는 군인들과 함께 도망을 다니며 밥 짓기와 간호, 굴파기에까지 동원됐습니다. "이런 고생할 거라면 전쟁에서 총 한 발 맞고 죽어 버렸으면 고생 안 할텐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정말 힘들 때는..."



일본군과 함께 다녔던 할머니는 오키나와 사람들처럼 일본이 미군에게 지면 죽는다고 믿어 일본의 승리를 바랬다고 합니다. 자신을 '일본을 위해 너무 고생한 국민'으로 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결국 미군 포로가 됐고, 이후 고향에 돌아갈 용기가 없어 오키나와에 남았습니다. 생계 수단이 없어 막노동과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안부임이 알려지면서 할머니는 몇몇 뜻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 살다가 199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담담한 인터뷰 중간중간 할머니는 말합니다. "바다를 보면 그리워. 30년이나 지났네요. 태어난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거대한 실종'...사라진 위안부들은 어디로 갔을까?

오키나와의 조선인 위안부 수는 아직도 오리무중입니다. 적어도 7백 명, 많게는 천5백 명 정도로 보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이 중 미군이 일본 패전 이후 조선으로 돌려보낸 위안부는 모두 147명입니다. 오키나와의 지리도 잘 모르고 지인도 없이 일본군에 끌려다녔던 위안부들, 전쟁통에 숨졌을 확률이 일반 주민보다 높았을 것입니다.

2010년 당시 취재는 오키나와의 위안부에 대해 10여 년 동안 연구해 온 홍윤신 현 와세다대 초빙교수를 비롯해 수많은 한일 연구자들과 현지 주민들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6년 전 기록을 다시 꺼내본 것도 홍 교수가 오키나와 위안부들의 이야기를 담은 <오키나와 전장의 기억과 위안소>를 일본에서 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서였습니다. 지금은 제가 당시 담았던 촬영 기록보다 훨씬 많은 연구와 증언들이 용기 있는 분들에 의해 더해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분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름 없이 사라진 오키나와 조선인 위안부들의 이야기는 아마 전장의 포탄 소리에 영영 묻혔을 것입니다.



오키나와 미야코 섬에는 '아리랑비'라는 비석이 있습니다. 요나하 히로토시 씨가 어릴 적 본 위안부들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 바위를 놔뒀던 자리에 나중에 세운 비석입니다. 비석에는 "이 주변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쓰가가(우물이 있던 자리)에서 빨래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이곳에서 쉬던 모습을 기억한다. 처참한 전쟁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세계 평화 상생의 바람을 담아 이 비를 후세에 전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먼 땅에서 사망 기록도 없이 사라져버린 위안부 피해자들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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