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화가’ 변월룡의 삶과 숨은 이야기들

입력 2016.03.26 (09:02) 수정 2016.03.2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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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의 ‘자화상’변월룡의 ‘자화상’


척박한 연해주 땅의 쉬코토프스키 구(區)에 있는 어느 유랑촌. 아버지의 아버지가 정든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궜을 머나먼 이역 땅에서 1916년 9월 29일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이름은 변월룡.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아이는 러시아 국적을 지닌 고려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재주가 남달랐습니다. 한인 자녀들만 다니는 블라디보스토크 8호 모범 10년제 학교에 입학하면서 화가로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지요.

이를 눈여겨본 어른들이 멀리 반대편에 있는 시베리아 철도의 서쪽 종착지 스베르들로프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에 있는 미술학교로 보냅니다. 여기서 난생처음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받게 되지요. 아이의 남다른 재능을 발견한 담당 교수는 더 큰 무대로 가라고 권유합니다.

1940년, 청년 변월룡은 고려인으론 사상 최초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당대 최고의 예술학교인 레핀 예술대학에 입학합니다. 이때부터는 탄탄대로였습니다. 1951년에는 예술학 박사 학위를 따내고 이 대학의 조교수가 됩니다. 정식 화가가 된 건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이 모두가 고려인으로는 '최초'의 기록이었습니다.

‘식민주의의 족쇄를 끊어버려라’(왼쪽)와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A. S. 한슈라의 초상’(오른쪽)‘식민주의의 족쇄를 끊어버려라’(왼쪽)와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A. S. 한슈라의 초상’(오른쪽)


동서 진영이 날카롭게 대립했던 냉전 시대의 러시아에서 화가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이념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절이었지요.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예술적 이념에 부합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 시절이었습니다.

위의 왼쪽 그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인 1945년에 완성한 정치 선전 포스터입니다. 그림 아래 큰 글씨로 새겨진 구호 <식민주의의 족쇄를 끊어버려라!>가 곧 제목이 됐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사회주의가 한껏 떠받들었던 노동자의 모습을 묘사한 1969년 작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A. S. 한슈라의 초상>입니다. 노동 영웅처럼 화면 중앙을 큼지막하게 차지한 이 여인은 얼굴 생김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자녀를 많이 출산해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은 고려인이라 합니다. 이념이라는 프리즘을 걷어내면 후덕한 여인의 건강한 미소를 따뜻하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그리고자 했던 화가의 마음이 우러납니다.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초상’‘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초상’


그러던 어느 날, 화가이자 미술대학 교수인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북한으로 가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북한 미술을 재건하라! 자신의 의지도 아닌 소련 문화성의 지시로 난생처음 고국 땅을 밟게 된 겁니다.

1953년 6월, 변월룡은 러시아 레핀 예술대학 부교수 자격으로 북한을 공식 방문해 북한 최고의 미술대학인 평양미술대학의 학장 겸 고문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평양미술대학을 재건하고 체계적인 미술 교육의 틀을 다져나갑니다.

15개월 남짓 북한에 머무르면서 그가 남긴 업적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습니다. 북녘의 화가들은 그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따랐다고 합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인간성에 깊이 매료된 거지요.

그가 북한을 떠나 러시아로 돌아간 뒤에 어느 북한 화가는 변월룡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 자신은 선생에게서 배운 것이 이론과 기술보다도 예술가로서의 진지한 태도, 정신력 등 인간으로서의 '휴-머니티'를 감동깊이 배웠습니다."

‘무용가 최승희’(왼쪽)와 ‘조선의 모내기’(오른쪽)‘무용가 최승희’(왼쪽)와 ‘조선의 모내기’(오른쪽)


그런 바쁜 나날들 속에서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월북 문인과 화가, 예술가들이 변월룡의 화폭 안에 남은 건 그 때문입니다. 위의 왼쪽 그림은 월북한 천재 무용가 최승희의 40대 모습입니다. 최승희라는 무용가의 40대 시절을 볼 수 있는 대단히 희귀한 작품이지요.

초상화뿐만 아닙니다. 변월룡은 틈틈이 북한 땅 곳곳을 다니며 그 시절 북한 사람들과 산천초목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들 역시 6·25 전쟁이 끝난 직후 북한의 생활상과 풍경을 다채롭게 담고 있어 미술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위의 오른쪽 그림은 변월룡이 북한에서 귀국한 직후인 1955년에 그린 <조선의 모내기>란 작품입니다. 옷차림을 봐도 모 심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표정을 봐도 이 목가적인 그림에서 전쟁이나 이념 대립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변월룡이 북한 현대미술의 초석을 다진 대단한 인물로 북한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거라 여겨지죠.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변월룡은 북한이 내부 정치 노선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숙청 대상으로 분류돼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됩니다.

‘금강산 소나무’‘금강산 소나무’


화가로서, 미술 교육자로서 변월룡의 삶은 순탄했습니다. 소수민족 출신으로 러시아 최고의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대학원까지 나와 교수가 되었으며, 미술가동맹 회원으로 개인 화실까지 배정받아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으니 성공적인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시절에 두루 해외여행까지 다닌 걸 두고 안톤 우스벤스키 국립러시아미술관 큐레이터는 "그가 정치적으로 신뢰받는 인물이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변월룡은 1961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거의 해마다 자신이 태어난 연해주 지방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 틈틈이 주변 인물들의 얼굴을 끊임없이 화폭에 그려 남기기도 했지요. 1990년 5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화가라는 직업은 그에게 천직이었던 것 같습니다.

위 그림은 변월룡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그린 <금강산 소나무>입니다. 생의 만년에 화가의 시선은, 멀리 두고 다시는 갈 수 없는 고국의 산천으로 줄곧 달음질하고 있었습니다. 화면 한가운데 고고하게 서 있는 소나무가 꼭 화가를 닮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금강산(만물상)’‘금강산(만물상)’


‘바람’‘바람’


변월룡은 모든 그림을 다 잘 그렸습니다. 특히 초상화와 풍경화가 높은 평가를 받지요. 회화뿐 아니라 에칭 동판화에서도 발군의 성취를 보여줬습니다. 위 동판화 두 점은 나란히 1959년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유채 물감으로 캔버스에 그린 회화와는 또 다른 화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작품들입니다.

안톤 우스벤스키는 특히 변월룡의 동판화를 두고 "수많은 테마 가운데 일상을 주제로 한 것이 많았지만 뛰어난 재능 덕에 진부하지 않았다."고 평가했습니다. 핵심을 꿰뚫는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전시회를 취재하다 보면 간혹 이 화가는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였구나 싶어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주제넘은 얘기인지도 모르지만 모든 화가가 그림을 다 잘 그리는 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변월룡의 작품은 일단 작품으로만 봐도 대번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단지 그동안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숨은 화가'였을 뿐이지요.

그런 시대였습니다. 러시아와 조선이라는 두 개의 조국이 있었고,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고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에도, 북에도 그가 깃들 자리는 없었습니다.

‘풍경’‘풍경’


풍경 부분 확대풍경 부분 확대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죽는 날까지 우리말 이름 '변월룡'을 그대로 썼지요. 그림을 완성한 뒤에도 곳곳에 우리말로 흔적을 남겼습니다.

위 동판화 작품은 1960년 작품인 <풍경: 독수리를 부리는 사람>입니다. 왼쪽 위에 화가가 직접 글씨를 써놓았습니다. 아주 단정한 글씨로 그림 제목과 그린 장소, 시기까지 우리말로 써놓은 걸 볼 수 있습니다. 전시장에서 이런 작품을 만나면 우리 핏줄이 그린 우리 그림이란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게 되지요.

사실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라 러시아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러시아 화가인 변월룡을 대뜸 한국 미술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전시회 한 번으로 그게 그렇게 선뜻 될 리도 없고요.

도리어 우리는 이번 변월룡 회고전을 하나의 의미 있는 출발점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냉전에 가려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한 화가를 역사의 무대로, 대중의 앞으로 불러내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보여줬으니까요. 그만큼 변월룡이란 화가를 우리 시선으로 마주하는 게 그동안은 쉽지 않았던 겁니다.

전시 도록전시 도록


북한 예술가들로부터의 서신북한 예술가들로부터의 서신


이번 전시의 출발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국내에 변월룡이란 낯선 화가를 처음 소개한 분은 미술평론가 문영대 선생입니다.

문 선생이 2004년에 <러시아 한인 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의 책을 낸 바 있는데,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에 변월룡 전시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었다고 합니다. 국내의 모 방송사도 흥미를 느껴 다큐멘터리 제작을 추진하기도 했다는데, 북한과의 관계 등 녹록지 않은 사정 때문에 결국 좌절되고 말았답니다.

그러다 한참 시간이 지나 2013년에 변월룡 화백의 유족이 북한 예술가들이 보낸 서신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면서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옵니다. 마침 미술관 측이 올해 2016년 내내 탄생 100주년을 맞은 화가들의 전시를 연중 기획하고 있던 차에, 이중섭, 유영국과 같은 해인 1916년에 태어난 또 다른 화가 변월룡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미술사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분이기도 하거니와 북한과의 연계가 있기 때문에 남북 미술의 연결고리로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가라 판단했던 거지요.

변월룡변월룡


국내에 전혀 생소한 화가를 어떻게 일반 관객들에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점도 상당한 고민거리였을 겁니다. 원체 알려지지 않은 화가였으니 대표작들 위주로 소개하는 것보다는 변월룡이라는 한 인물의 삶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들과 자료들이 필요했던 거지요. 게다가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20세기 소련 미술이라는 배경지식까지 소개해야 하니 작품을 빌려오는 것부터 만만치 않았겠지요.

이번 전시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의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유족을 간곡하게 설득해서 풍경화와 전쟁 중에 제작된 포스터, 역사를 주제로 한 에칭 동판화, 어머니 초상, 소련 잡지와 카탈로그 등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특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변월룡의 레핀 아카데미 졸업 작품인 1947년 작 <조선의 어부들>을 직접 본 순간 정말 감격스러웠다고 하더군요. 이 그림은 심지어 유족조차도 처음 봤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전시에는 오지 못했습니다. (전시 도록에 아주 작은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국립러시아박물관을 비롯해 곳곳에 소장된 변월룡 화백의 역사화들도 안타깝지만, 이번에는 볼 수가 없게 됐습니다.

[연관 기사] ☞ 냉전에 가려진 ‘숨은 거장’ 변월룡을 만나다 (2016.3.4)

전시는 관람객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변월룡은 우리 미술사에서 상대적으로 비어 있는 공간인 해방 후 – 6·25 전쟁 전후를 메워줄 수 있는 훌륭한 연결고리일 뿐 아니라, 작품 자체만 놓고 봐도 당시 최상급에 올라 있었던 러시아 근대미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내에 본격적으로 처음 소개되는 화가이니만큼 전시 기획자로서도 고민이 참 많았을 거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방송용 취재를 한 뒤 별도로 전시를 기획한 박혜성 학예연구사를 추가로 인터뷰했습니다. 내용 일부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기자> 지금까지 기획한 전시와는 분명히 다른 점들도 있었을 텐데, 특별히 이번 전시에서 신경이 쓰였거나 고민이 됐던 부분은 어떤 건가요?

학예연구사> 변월룡을 소개하는 첫 전시이다 보니 가급적 큐레이터의 색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이 분에 대해 입체적인 조망을 가능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첫 전시인 이번 전시를 계기로 변월룡 연구의 물꼬를 트게 될 터이니 가급적 이 분 예술의 다층적인 면모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변월룡은 기본적으로 러시아 미술이라는 요람에서 성장하고 돌아가신 분이므로 성급하게 "한국화가"로 규정하기보다는 '우선' 러시아 미술의 자장 속에서 이 분을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낯선, 그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어딘가 친근한 그 묘함이 이분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기자> 전시를 직접 기획하신 입장에서 본 변월룡이라는 화가는 어떤 분입니까?

학예연구사>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삶과 예술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인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체제 순응적인 미술가라거나 혹은 기계적으로 제작한 예술일 뿐 창의성을 논할 수 없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물과 기름처럼 쉽게 구분되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전체주의 체제 아래 소수민족으로서 주류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은 이 분의 삶과 예술을 평가하는 데 양날의 칼과도 같지만, 실제로 사회주의는 한반도의 많은 지식인에게 유토피아와도 같지 않았습니까. 변월룡 선생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이 분의 경우는 선택의 여지라는 게 없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소수민족으로서 가족과 이웃들이 강제이주를 당했기 때문에 완전한 헌신은 불가능했을 테고, 원주민(native)과는 또 다른 층위의 질문을 항상 내적으로 던지셨을 겁니다. 이 분이 중앙아시아의 또 다른 한인 화가들과 다른 지점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 집단과 개인의 경계, 제국주의와 국제주의의 경계… 완전한 이분법적 가름이 불가능한 경계에 계셨던 분이고, 이 점이야말로 변월룡 예술의 중요한 점이라고 봅니다.

기자> 이번 전시는 앞으로 변월룡이라는 화가에 대해 많은 과제를 던져주는 계기가 될 텐데요. 앞으로 우선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학예연구사> 당에서 주문한 작품들의 경우, 러시아 전역의 국공립미술관 및 기관에 소장돼 있는데 때로는 기록이 유족에게 전해지지 않았거나 기관에 남아있지 않은 채 순회 되어 그 소장처를 찾아내는 작업이 더 이뤄져야 합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변월룡 선생이 살아생전 제작한 작품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모두를 모으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앞으로 변월룡이란 작가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작품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조망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북한에서의 소련파 숙청 이후 소련의 영향이 의식적으로 소각되면서 그 영향의 흔적들이 남지 않게 되었지만, 변월룡을 매개로 실질적으로 일어났던 북한 화가들의 양식적 변화, 그 영향력을 구체적으로 찾아보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문학계에서는 해방 후 북한에 미친 소련의 영향에 대해 연구가 이미 시작됐지만, 미술계에서는 이제 시작돼야 합니다.

오랜 기간 단절된 북한미술을 이해하는 실마리로서 변월룡 선생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형식은 민족주의적, 내용은 사회주의적"이라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주문을 변월룡이 어떻게 실현하고자 했는지, 이를 위해 북한의 화가들과 한국의 전통에 대해 어떤 논의를 했는지, 역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화론에 대해 뜨겁게 논의했던 북한 화가들과의 교류의 결과가 러시아로 돌아간 변월룡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논의될 수 있을 겁니다.

수많은 전시회를 취재하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깨달은 게 있습니다. 좋은 전시는 작품으로 말합니다. 제가 연초에 '올해 놓치면 안 될 미술전 9선'이란 글에도 변월룡 전을 올해 주목할 만한 전시로 소개한 바 있는데, 직접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그런 예상과 기대를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좋은 작품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걸 잘 엮어서 한 화가의 삶과 예술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제대로 꾸미지 않으면 안 되죠.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기획'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주었습니다. 작품과 전시 못지않게 잘 만들어진 전시 도록도 소장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저 또한 그동안 몰랐던, 한 세기 가까이 잊혔던 변월룡이란 낯선 화가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행복한 만남에 많은 분이 동참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방송 인터뷰에 이어 긴 서면 인터뷰에 기꺼이 응해주신 국립현대미술관 박혜성 학예연구사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시 정보
제목: 변월룡 1916~1990
기간: 5월 8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문의: 02-2022-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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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인 화가’ 변월룡의 삶과 숨은 이야기들
    • 입력 2016-03-26 09:02:11
    • 수정2016-03-26 13:51:09
    컬처 스토리
변월룡의 ‘자화상’ 척박한 연해주 땅의 쉬코토프스키 구(區)에 있는 어느 유랑촌. 아버지의 아버지가 정든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궜을 머나먼 이역 땅에서 1916년 9월 29일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이름은 변월룡.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아이는 러시아 국적을 지닌 고려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재주가 남달랐습니다. 한인 자녀들만 다니는 블라디보스토크 8호 모범 10년제 학교에 입학하면서 화가로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지요. 이를 눈여겨본 어른들이 멀리 반대편에 있는 시베리아 철도의 서쪽 종착지 스베르들로프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에 있는 미술학교로 보냅니다. 여기서 난생처음 체계적인 미술교육을 받게 되지요. 아이의 남다른 재능을 발견한 담당 교수는 더 큰 무대로 가라고 권유합니다. 1940년, 청년 변월룡은 고려인으론 사상 최초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당대 최고의 예술학교인 레핀 예술대학에 입학합니다. 이때부터는 탄탄대로였습니다. 1951년에는 예술학 박사 학위를 따내고 이 대학의 조교수가 됩니다. 정식 화가가 된 건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이 모두가 고려인으로는 '최초'의 기록이었습니다. ‘식민주의의 족쇄를 끊어버려라’(왼쪽)와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A. S. 한슈라의 초상’(오른쪽) 동서 진영이 날카롭게 대립했던 냉전 시대의 러시아에서 화가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이념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절이었지요.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예술적 이념에 부합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 시절이었습니다. 위의 왼쪽 그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인 1945년에 완성한 정치 선전 포스터입니다. 그림 아래 큰 글씨로 새겨진 구호 <식민주의의 족쇄를 끊어버려라!>가 곧 제목이 됐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사회주의가 한껏 떠받들었던 노동자의 모습을 묘사한 1969년 작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A. S. 한슈라의 초상>입니다. 노동 영웅처럼 화면 중앙을 큼지막하게 차지한 이 여인은 얼굴 생김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자녀를 많이 출산해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은 고려인이라 합니다. 이념이라는 프리즘을 걷어내면 후덕한 여인의 건강한 미소를 따뜻하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그리고자 했던 화가의 마음이 우러납니다.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초상’ 그러던 어느 날, 화가이자 미술대학 교수인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북한으로 가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북한 미술을 재건하라! 자신의 의지도 아닌 소련 문화성의 지시로 난생처음 고국 땅을 밟게 된 겁니다. 1953년 6월, 변월룡은 러시아 레핀 예술대학 부교수 자격으로 북한을 공식 방문해 북한 최고의 미술대학인 평양미술대학의 학장 겸 고문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평양미술대학을 재건하고 체계적인 미술 교육의 틀을 다져나갑니다. 15개월 남짓 북한에 머무르면서 그가 남긴 업적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습니다. 북녘의 화가들은 그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따랐다고 합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인간성에 깊이 매료된 거지요. 그가 북한을 떠나 러시아로 돌아간 뒤에 어느 북한 화가는 변월룡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 자신은 선생에게서 배운 것이 이론과 기술보다도 예술가로서의 진지한 태도, 정신력 등 인간으로서의 '휴-머니티'를 감동깊이 배웠습니다." ‘무용가 최승희’(왼쪽)와 ‘조선의 모내기’(오른쪽) 그런 바쁜 나날들 속에서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월북 문인과 화가, 예술가들이 변월룡의 화폭 안에 남은 건 그 때문입니다. 위의 왼쪽 그림은 월북한 천재 무용가 최승희의 40대 모습입니다. 최승희라는 무용가의 40대 시절을 볼 수 있는 대단히 희귀한 작품이지요. 초상화뿐만 아닙니다. 변월룡은 틈틈이 북한 땅 곳곳을 다니며 그 시절 북한 사람들과 산천초목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들 역시 6·25 전쟁이 끝난 직후 북한의 생활상과 풍경을 다채롭게 담고 있어 미술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위의 오른쪽 그림은 변월룡이 북한에서 귀국한 직후인 1955년에 그린 <조선의 모내기>란 작품입니다. 옷차림을 봐도 모 심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표정을 봐도 이 목가적인 그림에서 전쟁이나 이념 대립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변월룡이 북한 현대미술의 초석을 다진 대단한 인물로 북한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거라 여겨지죠.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변월룡은 북한이 내부 정치 노선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숙청 대상으로 분류돼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됩니다. ‘금강산 소나무’ 화가로서, 미술 교육자로서 변월룡의 삶은 순탄했습니다. 소수민족 출신으로 러시아 최고의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대학원까지 나와 교수가 되었으며, 미술가동맹 회원으로 개인 화실까지 배정받아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으니 성공적인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시절에 두루 해외여행까지 다닌 걸 두고 안톤 우스벤스키 국립러시아미술관 큐레이터는 "그가 정치적으로 신뢰받는 인물이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변월룡은 1961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거의 해마다 자신이 태어난 연해주 지방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 틈틈이 주변 인물들의 얼굴을 끊임없이 화폭에 그려 남기기도 했지요. 1990년 5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화가라는 직업은 그에게 천직이었던 것 같습니다. 위 그림은 변월룡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그린 <금강산 소나무>입니다. 생의 만년에 화가의 시선은, 멀리 두고 다시는 갈 수 없는 고국의 산천으로 줄곧 달음질하고 있었습니다. 화면 한가운데 고고하게 서 있는 소나무가 꼭 화가를 닮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금강산(만물상)’ ‘바람’ 변월룡은 모든 그림을 다 잘 그렸습니다. 특히 초상화와 풍경화가 높은 평가를 받지요. 회화뿐 아니라 에칭 동판화에서도 발군의 성취를 보여줬습니다. 위 동판화 두 점은 나란히 1959년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유채 물감으로 캔버스에 그린 회화와는 또 다른 화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작품들입니다. 안톤 우스벤스키는 특히 변월룡의 동판화를 두고 "수많은 테마 가운데 일상을 주제로 한 것이 많았지만 뛰어난 재능 덕에 진부하지 않았다."고 평가했습니다. 핵심을 꿰뚫는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전시회를 취재하다 보면 간혹 이 화가는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였구나 싶어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주제넘은 얘기인지도 모르지만 모든 화가가 그림을 다 잘 그리는 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변월룡의 작품은 일단 작품으로만 봐도 대번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단지 그동안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숨은 화가'였을 뿐이지요. 그런 시대였습니다. 러시아와 조선이라는 두 개의 조국이 있었고,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고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에도, 북에도 그가 깃들 자리는 없었습니다. ‘풍경’ 풍경 부분 확대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죽는 날까지 우리말 이름 '변월룡'을 그대로 썼지요. 그림을 완성한 뒤에도 곳곳에 우리말로 흔적을 남겼습니다. 위 동판화 작품은 1960년 작품인 <풍경: 독수리를 부리는 사람>입니다. 왼쪽 위에 화가가 직접 글씨를 써놓았습니다. 아주 단정한 글씨로 그림 제목과 그린 장소, 시기까지 우리말로 써놓은 걸 볼 수 있습니다. 전시장에서 이런 작품을 만나면 우리 핏줄이 그린 우리 그림이란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게 되지요. 사실 러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라 러시아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러시아 화가인 변월룡을 대뜸 한국 미술사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전시회 한 번으로 그게 그렇게 선뜻 될 리도 없고요. 도리어 우리는 이번 변월룡 회고전을 하나의 의미 있는 출발점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냉전에 가려 지금껏 단 한 번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한 화가를 역사의 무대로, 대중의 앞으로 불러내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보여줬으니까요. 그만큼 변월룡이란 화가를 우리 시선으로 마주하는 게 그동안은 쉽지 않았던 겁니다. 전시 도록 북한 예술가들로부터의 서신 이번 전시의 출발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국내에 변월룡이란 낯선 화가를 처음 소개한 분은 미술평론가 문영대 선생입니다. 문 선생이 2004년에 <러시아 한인 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의 책을 낸 바 있는데,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에 변월룡 전시를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었다고 합니다. 국내의 모 방송사도 흥미를 느껴 다큐멘터리 제작을 추진하기도 했다는데, 북한과의 관계 등 녹록지 않은 사정 때문에 결국 좌절되고 말았답니다. 그러다 한참 시간이 지나 2013년에 변월룡 화백의 유족이 북한 예술가들이 보낸 서신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면서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옵니다. 마침 미술관 측이 올해 2016년 내내 탄생 100주년을 맞은 화가들의 전시를 연중 기획하고 있던 차에, 이중섭, 유영국과 같은 해인 1916년에 태어난 또 다른 화가 변월룡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한국 미술사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분이기도 하거니와 북한과의 연계가 있기 때문에 남북 미술의 연결고리로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가라 판단했던 거지요. 변월룡 국내에 전혀 생소한 화가를 어떻게 일반 관객들에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점도 상당한 고민거리였을 겁니다. 원체 알려지지 않은 화가였으니 대표작들 위주로 소개하는 것보다는 변월룡이라는 한 인물의 삶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들과 자료들이 필요했던 거지요. 게다가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20세기 소련 미술이라는 배경지식까지 소개해야 하니 작품을 빌려오는 것부터 만만치 않았겠지요. 이번 전시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의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유족을 간곡하게 설득해서 풍경화와 전쟁 중에 제작된 포스터, 역사를 주제로 한 에칭 동판화, 어머니 초상, 소련 잡지와 카탈로그 등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특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변월룡의 레핀 아카데미 졸업 작품인 1947년 작 <조선의 어부들>을 직접 본 순간 정말 감격스러웠다고 하더군요. 이 그림은 심지어 유족조차도 처음 봤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전시에는 오지 못했습니다. (전시 도록에 아주 작은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국립러시아박물관을 비롯해 곳곳에 소장된 변월룡 화백의 역사화들도 안타깝지만, 이번에는 볼 수가 없게 됐습니다. [연관 기사] ☞ 냉전에 가려진 ‘숨은 거장’ 변월룡을 만나다 (2016.3.4) 전시는 관람객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변월룡은 우리 미술사에서 상대적으로 비어 있는 공간인 해방 후 – 6·25 전쟁 전후를 메워줄 수 있는 훌륭한 연결고리일 뿐 아니라, 작품 자체만 놓고 봐도 당시 최상급에 올라 있었던 러시아 근대미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내에 본격적으로 처음 소개되는 화가이니만큼 전시 기획자로서도 고민이 참 많았을 거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방송용 취재를 한 뒤 별도로 전시를 기획한 박혜성 학예연구사를 추가로 인터뷰했습니다. 내용 일부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기자> 지금까지 기획한 전시와는 분명히 다른 점들도 있었을 텐데, 특별히 이번 전시에서 신경이 쓰였거나 고민이 됐던 부분은 어떤 건가요? 학예연구사> 변월룡을 소개하는 첫 전시이다 보니 가급적 큐레이터의 색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이 분에 대해 입체적인 조망을 가능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첫 전시인 이번 전시를 계기로 변월룡 연구의 물꼬를 트게 될 터이니 가급적 이 분 예술의 다층적인 면모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변월룡은 기본적으로 러시아 미술이라는 요람에서 성장하고 돌아가신 분이므로 성급하게 "한국화가"로 규정하기보다는 '우선' 러시아 미술의 자장 속에서 이 분을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낯선, 그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어딘가 친근한 그 묘함이 이분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기자> 전시를 직접 기획하신 입장에서 본 변월룡이라는 화가는 어떤 분입니까? 학예연구사>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삶과 예술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인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체제 순응적인 미술가라거나 혹은 기계적으로 제작한 예술일 뿐 창의성을 논할 수 없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물과 기름처럼 쉽게 구분되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전체주의 체제 아래 소수민족으로서 주류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은 이 분의 삶과 예술을 평가하는 데 양날의 칼과도 같지만, 실제로 사회주의는 한반도의 많은 지식인에게 유토피아와도 같지 않았습니까. 변월룡 선생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이 분의 경우는 선택의 여지라는 게 없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소수민족으로서 가족과 이웃들이 강제이주를 당했기 때문에 완전한 헌신은 불가능했을 테고, 원주민(native)과는 또 다른 층위의 질문을 항상 내적으로 던지셨을 겁니다. 이 분이 중앙아시아의 또 다른 한인 화가들과 다른 지점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 집단과 개인의 경계, 제국주의와 국제주의의 경계… 완전한 이분법적 가름이 불가능한 경계에 계셨던 분이고, 이 점이야말로 변월룡 예술의 중요한 점이라고 봅니다. 기자> 이번 전시는 앞으로 변월룡이라는 화가에 대해 많은 과제를 던져주는 계기가 될 텐데요. 앞으로 우선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학예연구사> 당에서 주문한 작품들의 경우, 러시아 전역의 국공립미술관 및 기관에 소장돼 있는데 때로는 기록이 유족에게 전해지지 않았거나 기관에 남아있지 않은 채 순회 되어 그 소장처를 찾아내는 작업이 더 이뤄져야 합니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변월룡 선생이 살아생전 제작한 작품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모두를 모으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앞으로 변월룡이란 작가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작품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조망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북한에서의 소련파 숙청 이후 소련의 영향이 의식적으로 소각되면서 그 영향의 흔적들이 남지 않게 되었지만, 변월룡을 매개로 실질적으로 일어났던 북한 화가들의 양식적 변화, 그 영향력을 구체적으로 찾아보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문학계에서는 해방 후 북한에 미친 소련의 영향에 대해 연구가 이미 시작됐지만, 미술계에서는 이제 시작돼야 합니다. 오랜 기간 단절된 북한미술을 이해하는 실마리로서 변월룡 선생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형식은 민족주의적, 내용은 사회주의적"이라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주문을 변월룡이 어떻게 실현하고자 했는지, 이를 위해 북한의 화가들과 한국의 전통에 대해 어떤 논의를 했는지, 역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화론에 대해 뜨겁게 논의했던 북한 화가들과의 교류의 결과가 러시아로 돌아간 변월룡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논의될 수 있을 겁니다. 수많은 전시회를 취재하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깨달은 게 있습니다. 좋은 전시는 작품으로 말합니다. 제가 연초에 '올해 놓치면 안 될 미술전 9선'이란 글에도 변월룡 전을 올해 주목할 만한 전시로 소개한 바 있는데, 직접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그런 예상과 기대를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좋은 작품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걸 잘 엮어서 한 화가의 삶과 예술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제대로 꾸미지 않으면 안 되죠.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기획'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주었습니다. 작품과 전시 못지않게 잘 만들어진 전시 도록도 소장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저 또한 그동안 몰랐던, 한 세기 가까이 잊혔던 변월룡이란 낯선 화가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행복한 만남에 많은 분이 동참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방송 인터뷰에 이어 긴 서면 인터뷰에 기꺼이 응해주신 국립현대미술관 박혜성 학예연구사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시 정보 제목: 변월룡 1916~1990 기간: 5월 8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문의: 02-2022-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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