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한국은 로켓 선진국이었다

입력 2016.04.22 (10:16) 수정 2016.04.2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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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0월 4일 구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다. 한 달 뒤에는 '라이카'라는 이름의 실험용 개를 '스푸트니크 2호'에 태워 보냈다. 전세계는 엄청난 충격 즉 '스푸트니크 쇼크'에 빠지게 된다.

한 발 늦은 미국은 1958년 1월에 부랴부랴 '익스플로러 1호' 위성을 발사하고 미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해 구소련과 우주개발 전쟁에 뛰어든다. 그때가 1950년대 말이다.

1950년대 말, 한국은 6.25 전쟁을 치르고 아직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때였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이 로켓 개발에,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추진했다는 믿기지 않은 사실이 확인됐다. 관련 논문을 입수했다.



논문에는 1959년 3월 9일 발행된 미국의 로켓 전문지(missiles and rockets)의 기사가 실려있었다. '급격하게 늘고 있는 세계의 미사일 발사장'이라는 기사에 우리나라의 첫 로켓 발사 소식과 함께 인천을 '세계 미사일/우주 로켓 시험 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당시 시험 발사가 이뤄진 곳은 미국과 유럽, 구소련, 일본 정도였다. 우주 발사장이라면 전남 고흥에 있는 나로 우주센터만 떠올랐다.




실제로 대한뉴스 영상에는 1959년 인천에서 실시된 로켓 발사 장면이 남아있었다. 1958년 10월 이뤄진 로켓 7기의 비공개 시험 발사 1년 뒤인 1959년 7월에는 1,2,3단 로켓 5기를 공개 발사했고 이 뉴스가 전파를 탔다.

이승만 대통령과 유엔 사령관을 비롯해 시민 2만 여 명이 몰려든 가운데 발사는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특히 '566호'라는 이름의 3단 로켓 1기는 단이 분리되는 모습도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었고 101초간 비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로켓의 과학적인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우리나라의 우주개발사를 연구한 논문으로 이번 취재에 도움을 준 안형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박사는 "처음 연구를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로켓의 궤도 등을 측정할 수 있는 텔레메트리, 즉 송수신 장치 정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대기 관측 목적을 지니는 사운딩 로켓(Sounding Rocket) 수준은 아니지만 566호의 경우 길이 3.7미터에 무게 141kg, 최대고도 40km, 사정거리 81km에 달하는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닌' 로켓이었다는 얘기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자주 국방을 위한 로켓 발사를 꿈꾸며 국방부 과학연구소를 만들었고 "땅을 팔아서라도 로켓 개발을 해야 한다."고 연구자들을 겪려했다고 전한다.




1950년대 태동한 로켓 개발 붐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1960년 4.19 혁명을 시작으로 5.16 쿠데타 등 정치적 불안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국가 주도의 연구는 사그라들게 된다. 다행히 인하공대 학생들로 구성된 로켓반에서는 1960년대 중반까지 11기의 로켓을 개발해 발사 시험을 진행했다. 이전 발사에서 미군의 로켓포에서 분리한 고체 연료를 사용한 것과 달리 인하대 로켓반은 직접 추진제(연료와 산화제 혼합)를 만들어 사용했다.

1964년 발사한 3단 로켓은 최대고도 50km 높이로 비행 가능하고 사정거리가 인천에서 강릉에 이를 정도로 진화했다. 또 최초로 과학 탑재체를 실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북한지역까지 촬영 가능한 35mm 카메라와 함께 실험용 쥐(기니피그)를 실어 중력 변화에 따른 심전도 변화를 관측하려 했다.

인하공대의 로켓 발사를 이끌었던 최상혁 박사는 당시의 발사에 대해 열정이 없었다면 결코 다시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인하공대의 로켓 발사를 이끌었던 최상혁 박사는 당시의 발사에 대해 열정이 없었다면 결코 다시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인하공대 로켓반을 이끌었던 최상혁 박사(현재 美 NASA 랭글리연구소 재직)는 "강풍이 몰려오는 등 궂은 날씨 때문에 발사는 성공했지만 카메라 회수에는 실패했다."고 회상했다. 최 박사는 "인천 고잔동에 있던 발사장까지 가는데 차편이 없어서 트럭 뒤에 타고 갔다. 충격을 줄이려고 1단 로켓을 무릎에 얹고 갔는데, 폭발이라도 했으면 큰 사고가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0년 11월 발사된 인하공대 개발 최초의 로켓. [사진=인하대]1960년 11월 발사된 인하공대 개발 최초의 로켓. [사진=인하대]


목숨을 걸 정도로 로켓 개발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 안팎의 지원은 끊겼고 학생들도 흩어지고 말았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인 1955년 일본의 이토가와 히데오 도쿄대 교수는 최초로 연필 크기만한 펜슬 로켓을 개발했다. 꾸준한 연구와 지원으로 일본은 15년만인 1970년 자력 발사체로 위성을 쏘아올린 세계 4번째 국가가 됐다. 지금은 금성과 소행성까지 탐사하는 우주 강국으로 진입했다.

1955년 일본 이토가와 히데오 도쿄대 교수가 개발한 연필 크기의 펜슬 로켓.1955년 일본 이토가와 히데오 도쿄대 교수가 개발한 연필 크기의 펜슬 로켓.


우리 역시 우주개발에서 결코 '후발주자'는 아니었지만 꾸준한 연구가 불가능하게 했던 정치적인 배경이 아쉽기만 하다. 지금부터라도 지속적인 투자와 개발로 2020년 한국형 발사체에 의한 달 착륙을 이룰 수 있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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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4-22 10:16:43
    • 수정2016-04-22 10:17:37
    취재K
1957년 10월 4일 구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다. 한 달 뒤에는 '라이카'라는 이름의 실험용 개를 '스푸트니크 2호'에 태워 보냈다. 전세계는 엄청난 충격 즉 '스푸트니크 쇼크'에 빠지게 된다. 한 발 늦은 미국은 1958년 1월에 부랴부랴 '익스플로러 1호' 위성을 발사하고 미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해 구소련과 우주개발 전쟁에 뛰어든다. 그때가 1950년대 말이다. 1950년대 말, 한국은 6.25 전쟁을 치르고 아직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때였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이 로켓 개발에,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추진했다는 믿기지 않은 사실이 확인됐다. 관련 논문을 입수했다. 논문에는 1959년 3월 9일 발행된 미국의 로켓 전문지(missiles and rockets)의 기사가 실려있었다. '급격하게 늘고 있는 세계의 미사일 발사장'이라는 기사에 우리나라의 첫 로켓 발사 소식과 함께 인천을 '세계 미사일/우주 로켓 시험 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당시 시험 발사가 이뤄진 곳은 미국과 유럽, 구소련, 일본 정도였다. 우주 발사장이라면 전남 고흥에 있는 나로 우주센터만 떠올랐다. 실제로 대한뉴스 영상에는 1959년 인천에서 실시된 로켓 발사 장면이 남아있었다. 1958년 10월 이뤄진 로켓 7기의 비공개 시험 발사 1년 뒤인 1959년 7월에는 1,2,3단 로켓 5기를 공개 발사했고 이 뉴스가 전파를 탔다. 이승만 대통령과 유엔 사령관을 비롯해 시민 2만 여 명이 몰려든 가운데 발사는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특히 '566호'라는 이름의 3단 로켓 1기는 단이 분리되는 모습도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었고 101초간 비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로켓의 과학적인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우리나라의 우주개발사를 연구한 논문으로 이번 취재에 도움을 준 안형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박사는 "처음 연구를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로켓의 궤도 등을 측정할 수 있는 텔레메트리, 즉 송수신 장치 정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대기 관측 목적을 지니는 사운딩 로켓(Sounding Rocket) 수준은 아니지만 566호의 경우 길이 3.7미터에 무게 141kg, 최대고도 40km, 사정거리 81km에 달하는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닌' 로켓이었다는 얘기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자주 국방을 위한 로켓 발사를 꿈꾸며 국방부 과학연구소를 만들었고 "땅을 팔아서라도 로켓 개발을 해야 한다."고 연구자들을 겪려했다고 전한다. 1950년대 태동한 로켓 개발 붐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1960년 4.19 혁명을 시작으로 5.16 쿠데타 등 정치적 불안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국가 주도의 연구는 사그라들게 된다. 다행히 인하공대 학생들로 구성된 로켓반에서는 1960년대 중반까지 11기의 로켓을 개발해 발사 시험을 진행했다. 이전 발사에서 미군의 로켓포에서 분리한 고체 연료를 사용한 것과 달리 인하대 로켓반은 직접 추진제(연료와 산화제 혼합)를 만들어 사용했다. 1964년 발사한 3단 로켓은 최대고도 50km 높이로 비행 가능하고 사정거리가 인천에서 강릉에 이를 정도로 진화했다. 또 최초로 과학 탑재체를 실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북한지역까지 촬영 가능한 35mm 카메라와 함께 실험용 쥐(기니피그)를 실어 중력 변화에 따른 심전도 변화를 관측하려 했다. 인하공대의 로켓 발사를 이끌었던 최상혁 박사는 당시의 발사에 대해 열정이 없었다면 결코 다시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인하공대 로켓반을 이끌었던 최상혁 박사(현재 美 NASA 랭글리연구소 재직)는 "강풍이 몰려오는 등 궂은 날씨 때문에 발사는 성공했지만 카메라 회수에는 실패했다."고 회상했다. 최 박사는 "인천 고잔동에 있던 발사장까지 가는데 차편이 없어서 트럭 뒤에 타고 갔다. 충격을 줄이려고 1단 로켓을 무릎에 얹고 갔는데, 폭발이라도 했으면 큰 사고가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0년 11월 발사된 인하공대 개발 최초의 로켓. [사진=인하대] 목숨을 걸 정도로 로켓 개발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 안팎의 지원은 끊겼고 학생들도 흩어지고 말았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인 1955년 일본의 이토가와 히데오 도쿄대 교수는 최초로 연필 크기만한 펜슬 로켓을 개발했다. 꾸준한 연구와 지원으로 일본은 15년만인 1970년 자력 발사체로 위성을 쏘아올린 세계 4번째 국가가 됐다. 지금은 금성과 소행성까지 탐사하는 우주 강국으로 진입했다. 1955년 일본 이토가와 히데오 도쿄대 교수가 개발한 연필 크기의 펜슬 로켓. 우리 역시 우주개발에서 결코 '후발주자'는 아니었지만 꾸준한 연구가 불가능하게 했던 정치적인 배경이 아쉽기만 하다. 지금부터라도 지속적인 투자와 개발로 2020년 한국형 발사체에 의한 달 착륙을 이룰 수 있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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