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가난과 불결의 상징이던 ‘40년 전 청계천’

입력 2016.05.30 (14:15) 수정 2016.05.3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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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방 위에서 바라본 청계촌 판자촌둑방 위에서 바라본 청계촌 판자촌


지금은 도심 속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 공간인 청계천. 하지만 40여 년 전만 해도 청계천은 빈민들의 터전이었습니다.

도시화 개발 바람에 밀려나거나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이들은 청계천에 터를 잡고 판자촌을 형성했는데요. 폐지를 팔아 생활을 이어가며 질병과 빈곤에 그대로 노출된 판자촌 사람들의 일상은 처참했습니다.

야학교사 제정구야학교사 제정구


이 빈민들의 친구이자 대변자였던 고 제정구씨.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시절 청계천의 처참한 실상을 목격한 제씨는 청계천 활빈교회의 배달학당 야학교사로 일하며 1973년 판자촌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빈민 구호 활동을 펼쳤습니다. 제씨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으며 14대 국회의원도 지냈습니다.

다음 달 26일까지 청계천 박물관에서는 제씨의 유품 등을 공개하는 전시회 '제정구의 청계천 1972 - 1976'이 열립니다.

그와 함께 구호 활동을 했던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촬영한 당시 청계천 사진 90여 점도 함께 전시 중인데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고단한 삶들의 터전이었던 청계천의 모습을 함께 만나보시죠.

청계천 변 제방을 파서 지은 개미굴청계천 변 제방을 파서 지은 개미굴


 판자촌 앞 공동화장실 판자촌 앞 공동화장실


넝마주이넝마주이


판자촌의 아이들판자촌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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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토] 가난과 불결의 상징이던 ‘40년 전 청계천’
    • 입력 2016-05-30 14:15:42
    • 수정2016-05-30 14:25:29
    사회
둑방 위에서 바라본 청계촌 판자촌 지금은 도심 속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 공간인 청계천. 하지만 40여 년 전만 해도 청계천은 빈민들의 터전이었습니다. 도시화 개발 바람에 밀려나거나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이들은 청계천에 터를 잡고 판자촌을 형성했는데요. 폐지를 팔아 생활을 이어가며 질병과 빈곤에 그대로 노출된 판자촌 사람들의 일상은 처참했습니다. 야학교사 제정구 이 빈민들의 친구이자 대변자였던 고 제정구씨.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시절 청계천의 처참한 실상을 목격한 제씨는 청계천 활빈교회의 배달학당 야학교사로 일하며 1973년 판자촌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빈민 구호 활동을 펼쳤습니다. 제씨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으며 14대 국회의원도 지냈습니다. 다음 달 26일까지 청계천 박물관에서는 제씨의 유품 등을 공개하는 전시회 '제정구의 청계천 1972 - 1976'이 열립니다. 그와 함께 구호 활동을 했던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촬영한 당시 청계천 사진 90여 점도 함께 전시 중인데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고단한 삶들의 터전이었던 청계천의 모습을 함께 만나보시죠. 청계천 변 제방을 파서 지은 개미굴  판자촌 앞 공동화장실 넝마주이 판자촌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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