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은 왜 오바마를 거부했나

입력 2016.06.19 (15:26) 수정 2016.06.1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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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바마 정권이 종국점에 다다르면서 북한 핵문제 해결을 진전시키지 못한 데 대한 미국 정부 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들이 비등하다. 오바마 정권이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는 허울 좋은 구호만 내세운 채 아까운 세월을 흘려보냈고 그 결과로 북한의 명실상부한 핵무장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은 북한과 대화를 통해 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창해왔던 인사들이 더욱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북핵 방기했다" 오바마 책임론

독일 통일 과정을 되짚어 보며 한반도 문제를 탐구하는 저술을 최근에 낸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도 같은 선상에 서있다. ‘2016년의 시점에서 보면 오바마 정부는 전략적 인내라는, 모호한 정책 아닌 정책으로 9년을 허송했다’('베를린 장벽의 서사-독일 통일을 다시 본다' 364P)고 비판하고 있다.

주미 한국대사를 역임한 이태식 대사도 ‘미국이 전략적 인내라는 정책만 내세운 채 북핵 문제 해결을 사실상 방기했다는 책임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최근 한 토론장에서 강조했다. 북한 핵문제와 미국에 대해 전문적 식견을 과시해온 이들 인사들을 포함해서 ‘오바마 정권이 북한 핵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오지 않았다’는 비판적 인식은 한국 지식인 사회에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과 백악관 등 미국 정부의 움직임을 근접 거리에서 지켜봐온 입장에서는 이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대화를 거부한 책임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끈질긴 구애를 발로 걷어찬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라는 물밑 진실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밖으로 공표되지 않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과 적지 않은 협상을 시도했다. 실패로 끝난 2012년 2월 29일의 협상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는 밖으로 드러난 한 단면일 뿐 오바마 정부 기간 실제 중요한 협상 시도는 모두 물밑에서 시도된 것들이었다.

오바마의 구애를 걷어찬 건 김정은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에 여러 번 손을 내밀었다. 취임 일성처럼 밝혔던 2009년 4월 5일 ‘핵 없는 세상을 향한 프라하 선언’은 당시 핵확산을 추구하던 가장 중요한 근심거리, 북한을 우선적 목표로 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바마 대통령의 공개 선언 이후 이를 실행으로 옮기기 위한 미국 정부의 의미 있는 협상 계획이 있었음을 확인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프라하 선언 전후에 협상 분위기를 지속할 수 없는 대량살상무기 관련 북한의 도발(프라하 선언 직전인 2009년 4월 5일 미사일 발사시험, 5월 25일 핵실험)이 있었지만 끝내 2012년의 2.29합의가 발표나마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바마 정권의 강력한 협상 의지 때문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시 협상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줄타기를 하던 때였고 그 영향으로 사후에도 협상이 진행돼서 그 정도나마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김정은 위원장 체제가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부터다. 김정은 체제는 오바마 정권의 협상 시도 자체를 봉쇄했다. 협상 분위기를 만들려는 미국 정부의 시도를 그때그때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시험으로 차단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성안한 2.29 합의를 보란 듯이 깬 것은 취임 직후 김정은의 첫 대외 과시였다.

오바마 정부의 북핵 정책을 실무적으로 관장해온 메데로이스 전 백악관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은 자신의 직책을 그만 두기 직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미국이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자 "미국 대통령은 여론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한국 쪽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맞받았다. ‘대국(大國)인 미국이 북한에 통 크게 접근하라’든지 ‘북한 김정은이 약속을 어긴들 오바마 대통령이 입을 타격은 크지 않으니 협상에 적극 나서라는 얘기는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바마, 북한과 비밀협상 추진했다

공개적인 접근이 실패하면서 미국 정부가 택한 전략이 북한과의 비밀 협상이다. 실제로 비밀 협상은 오바마 정권이 문제 해결을 위해 채택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과의 핵협상 과정에서 비밀리에 서신 교환과 물밑 접촉을 진행해서 핵심적인 돌파구를 마련한 뒤에 공개 협상으로 전환했다.

쿠바와의 수교를 성사시키는 과정에서도 오바마 정부는 비밀 협상을 진전시킨 후 공개 협상으로 전환해서 수교 작업을 마무리했다. 북한 핵문제처럼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인 경우 비밀 협상의 필요성은 더욱 긴요하다. 북한 핵문제에 정통한 고위 관리는 "오바마 정부가 시도했던 북한과의 비밀 협상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 멀지 않은 시기에 오바마 정권 관계자들의 증언들이 나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 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 그 시기는 더욱 빨라질 수도 있다고 했다.

지난 2014년 11월 8일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장은 북한을 방문해 억류 중이던 미국인 케네스 배와 매튜 토드 밀러를 데리고 나왔다. 사진은 당시 CNN 보도 영상.지난 2014년 11월 8일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장은 북한을 방문해 억류 중이던 미국인 케네스 배와 매튜 토드 밀러를 데리고 나왔다. 사진은 당시 CNN 보도 영상.


오바마 정권 관계자들의 증언이 시작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추가 취재를 통해 얻어낼 수 있었다. 핵심 메시지는 앞에서 기자가 언급했던 바와 일맥상통했다. ‘판을 깬 것은 김정은 위원장이었고 오바마 대통령은 할 만큼 했다’는 것이었다. ‘이란이나 쿠바 지도자에게 친서 같은 직접 메시지를 보낸 것 이상으로 김정은 위원장에게 구애를 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북한 간에 사전 예고되지 않은 접촉이 진행되다 일부 언론에 노출된 것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구체적으로 해명되지 않은 사례들이 있다. 2012년 미국의 대선이 진행 중이던 초여름 무렵 미국 군용기가 한국에 공식 통보 없이 북한으로 갔다가 온 적이 있다. 당시 북한에 다녀온 일행으로 확인된 디트라니 국무부 대북 조정관이나 사일러 백악관 국장 등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그 사안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는 여전히 보안이 걸려 있다는 의미이다.

그 후에도 직접 방문이 몇 차례 시도됐다. 오바마 정부 최고 정보 책임자인 클래퍼 국가정보국장도 북한에 직접 다녀왔다. 만일 당시에 김정은 위원장이 클래퍼 국장을 직접 만났을 경우 오바마 대통령은 구두로든 문서로든 친서를 보냈을 것이지만 북한은 이런 기회를 외면했다. 성김 북한 문제 전담 대사의 방북이 성사 직전 단계에서 무산된 것 등은 오히려 잔가지로 간주될 만큼 오바마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을 직접 연결시키려던 시도는 오바마 정권하에서 비중 있게 시도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큰 가닥을 잡은 다음에 6자회담으로 틀을 옮겨 북핵 문제를 마무리하려 했던 것이다.



미, '비밀협상 뒤 6자회담서 최종타결'

김정은 위원장이 오바마 대통령의 구애를 뿌리친 것은 그 나름대로 전략 때문이었음도 분명하다. 김정은 위원장은 ‘핵무장을 유일 노선으로 추구했고 이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거부한 것’이다. 이런 김정은 위원장의 결심에는 중국의 핵무장 과정이 선례가 됐다. 이른바 ‘2탄 1성’(원자탄. 수소폭탄. 인공위성) 전략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중국은 1950년대 말과 60년대 핵무장을 완성한다(1964년 10월 16일 첫 원폭실험 성공). 원자탄과 수소폭탄이라는‘2탄’으로 무장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보유라는‘1성’에 성공했다. 중국이 이렇게 핵대국이 되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고 미국이 중미 수교에 나섰고 중소 분쟁도 해결됐고 바야흐로 등소평이 나서서 경제 건설에 매진할 수 있게 됐다’면서 ‘2탄 1성’만이 북한의 살 길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김정은 위원장을 사로잡았다고 할 수 있다.

북한 매체도 ‘2탄 1성이 살 길’이라는 보도를 낸 바 있고 북한 정권이 핵무장 단계를 '핵보유국 → 핵강국 → 핵대국'으로 격상시키면서 이제는 자신들을 핵대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핵대국 지위를 부여받은 중국을 그대로 본 뜬 것일 뿐이다.



'2탄 1성’포기하고 비핵화 유훈 내세워야

'2탄 1성’이 중국의 성공 사례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도 아닐뿐더러 북한의 ‘2탄 1성’ 전략이 성공될 수 없음은 현재 국제정세 아래서 명백하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엄중한 제재는 날이 갈수록 위력을 발휘하게 돼 있다. 여기에 북한의 나이 어린 지도자 김정은 위원장이 반발해서 5차 핵실험 같은 추가 도발을 하게 될 경우 북한 옥죄기는 더욱 가혹해진다.

역사상 최초로 대북한 다자 제재에 동참하며 자신의 손을 묶은 중국은 석탄 무역 금지를 넘어 원유 통제에 까지 나설 수 있다. 북한 정권이 한계 선상에 이를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은 핵무장했다는 북한에 협상하자며 굴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군사제재에도 나설 수 있다. 북한에 대한 무력 공격이 아니라 해상 봉쇄나 한미연합훈련 상시화 조치 등은 북한이 오래 버티기 힘든 강력한 군사조치이다.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정부도 미구(未久)에 닥칠 수 있는 엄중한 사태에 대비해 제 할 일을 찾아야 할 때다. 무엇보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핵무장으로는 북한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할아버지의 유훈’이라는 말만 하고 나오면 북핵 외교의 주도권이 다시 북한에게 넘어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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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바마 정권이 종국점에 다다르면서 북한 핵문제 해결을 진전시키지 못한 데 대한 미국 정부 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들이 비등하다. 오바마 정권이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는 허울 좋은 구호만 내세운 채 아까운 세월을 흘려보냈고 그 결과로 북한의 명실상부한 핵무장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은 북한과 대화를 통해 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창해왔던 인사들이 더욱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북핵 방기했다" 오바마 책임론

독일 통일 과정을 되짚어 보며 한반도 문제를 탐구하는 저술을 최근에 낸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도 같은 선상에 서있다. ‘2016년의 시점에서 보면 오바마 정부는 전략적 인내라는, 모호한 정책 아닌 정책으로 9년을 허송했다’('베를린 장벽의 서사-독일 통일을 다시 본다' 364P)고 비판하고 있다.

주미 한국대사를 역임한 이태식 대사도 ‘미국이 전략적 인내라는 정책만 내세운 채 북핵 문제 해결을 사실상 방기했다는 책임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최근 한 토론장에서 강조했다. 북한 핵문제와 미국에 대해 전문적 식견을 과시해온 이들 인사들을 포함해서 ‘오바마 정권이 북한 핵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오지 않았다’는 비판적 인식은 한국 지식인 사회에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과 백악관 등 미국 정부의 움직임을 근접 거리에서 지켜봐온 입장에서는 이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대화를 거부한 책임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끈질긴 구애를 발로 걷어찬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라는 물밑 진실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밖으로 공표되지 않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과 적지 않은 협상을 시도했다. 실패로 끝난 2012년 2월 29일의 협상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는 밖으로 드러난 한 단면일 뿐 오바마 정부 기간 실제 중요한 협상 시도는 모두 물밑에서 시도된 것들이었다.

오바마의 구애를 걷어찬 건 김정은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에 여러 번 손을 내밀었다. 취임 일성처럼 밝혔던 2009년 4월 5일 ‘핵 없는 세상을 향한 프라하 선언’은 당시 핵확산을 추구하던 가장 중요한 근심거리, 북한을 우선적 목표로 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바마 대통령의 공개 선언 이후 이를 실행으로 옮기기 위한 미국 정부의 의미 있는 협상 계획이 있었음을 확인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프라하 선언 전후에 협상 분위기를 지속할 수 없는 대량살상무기 관련 북한의 도발(프라하 선언 직전인 2009년 4월 5일 미사일 발사시험, 5월 25일 핵실험)이 있었지만 끝내 2012년의 2.29합의가 발표나마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바마 정권의 강력한 협상 의지 때문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시 협상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줄타기를 하던 때였고 그 영향으로 사후에도 협상이 진행돼서 그 정도나마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김정은 위원장 체제가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부터다. 김정은 체제는 오바마 정권의 협상 시도 자체를 봉쇄했다. 협상 분위기를 만들려는 미국 정부의 시도를 그때그때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시험으로 차단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성안한 2.29 합의를 보란 듯이 깬 것은 취임 직후 김정은의 첫 대외 과시였다.

오바마 정부의 북핵 정책을 실무적으로 관장해온 메데로이스 전 백악관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은 자신의 직책을 그만 두기 직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미국이 너무 소극적인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자 "미국 대통령은 여론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한국 쪽 시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맞받았다. ‘대국(大國)인 미국이 북한에 통 크게 접근하라’든지 ‘북한 김정은이 약속을 어긴들 오바마 대통령이 입을 타격은 크지 않으니 협상에 적극 나서라는 얘기는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바마, 북한과 비밀협상 추진했다

공개적인 접근이 실패하면서 미국 정부가 택한 전략이 북한과의 비밀 협상이다. 실제로 비밀 협상은 오바마 정권이 문제 해결을 위해 채택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과의 핵협상 과정에서 비밀리에 서신 교환과 물밑 접촉을 진행해서 핵심적인 돌파구를 마련한 뒤에 공개 협상으로 전환했다.

쿠바와의 수교를 성사시키는 과정에서도 오바마 정부는 비밀 협상을 진전시킨 후 공개 협상으로 전환해서 수교 작업을 마무리했다. 북한 핵문제처럼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인 경우 비밀 협상의 필요성은 더욱 긴요하다. 북한 핵문제에 정통한 고위 관리는 "오바마 정부가 시도했던 북한과의 비밀 협상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 멀지 않은 시기에 오바마 정권 관계자들의 증언들이 나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 정책’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 그 시기는 더욱 빨라질 수도 있다고 했다.

지난 2014년 11월 8일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장은 북한을 방문해 억류 중이던 미국인 케네스 배와 매튜 토드 밀러를 데리고 나왔다. 사진은 당시 CNN 보도 영상.

오바마 정권 관계자들의 증언이 시작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추가 취재를 통해 얻어낼 수 있었다. 핵심 메시지는 앞에서 기자가 언급했던 바와 일맥상통했다. ‘판을 깬 것은 김정은 위원장이었고 오바마 대통령은 할 만큼 했다’는 것이었다. ‘이란이나 쿠바 지도자에게 친서 같은 직접 메시지를 보낸 것 이상으로 김정은 위원장에게 구애를 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과 북한 간에 사전 예고되지 않은 접촉이 진행되다 일부 언론에 노출된 것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구체적으로 해명되지 않은 사례들이 있다. 2012년 미국의 대선이 진행 중이던 초여름 무렵 미국 군용기가 한국에 공식 통보 없이 북한으로 갔다가 온 적이 있다. 당시 북한에 다녀온 일행으로 확인된 디트라니 국무부 대북 조정관이나 사일러 백악관 국장 등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그 사안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는 여전히 보안이 걸려 있다는 의미이다.

그 후에도 직접 방문이 몇 차례 시도됐다. 오바마 정부 최고 정보 책임자인 클래퍼 국가정보국장도 북한에 직접 다녀왔다. 만일 당시에 김정은 위원장이 클래퍼 국장을 직접 만났을 경우 오바마 대통령은 구두로든 문서로든 친서를 보냈을 것이지만 북한은 이런 기회를 외면했다. 성김 북한 문제 전담 대사의 방북이 성사 직전 단계에서 무산된 것 등은 오히려 잔가지로 간주될 만큼 오바마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을 직접 연결시키려던 시도는 오바마 정권하에서 비중 있게 시도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큰 가닥을 잡은 다음에 6자회담으로 틀을 옮겨 북핵 문제를 마무리하려 했던 것이다.



미, '비밀협상 뒤 6자회담서 최종타결'

김정은 위원장이 오바마 대통령의 구애를 뿌리친 것은 그 나름대로 전략 때문이었음도 분명하다. 김정은 위원장은 ‘핵무장을 유일 노선으로 추구했고 이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거부한 것’이다. 이런 김정은 위원장의 결심에는 중국의 핵무장 과정이 선례가 됐다. 이른바 ‘2탄 1성’(원자탄. 수소폭탄. 인공위성) 전략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중국은 1950년대 말과 60년대 핵무장을 완성한다(1964년 10월 16일 첫 원폭실험 성공). 원자탄과 수소폭탄이라는‘2탄’으로 무장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보유라는‘1성’에 성공했다. 중국이 이렇게 핵대국이 되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고 미국이 중미 수교에 나섰고 중소 분쟁도 해결됐고 바야흐로 등소평이 나서서 경제 건설에 매진할 수 있게 됐다’면서 ‘2탄 1성’만이 북한의 살 길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김정은 위원장을 사로잡았다고 할 수 있다.

북한 매체도 ‘2탄 1성이 살 길’이라는 보도를 낸 바 있고 북한 정권이 핵무장 단계를 '핵보유국 → 핵강국 → 핵대국'으로 격상시키면서 이제는 자신들을 핵대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핵대국 지위를 부여받은 중국을 그대로 본 뜬 것일 뿐이다.



'2탄 1성’포기하고 비핵화 유훈 내세워야

'2탄 1성’이 중국의 성공 사례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도 아닐뿐더러 북한의 ‘2탄 1성’ 전략이 성공될 수 없음은 현재 국제정세 아래서 명백하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엄중한 제재는 날이 갈수록 위력을 발휘하게 돼 있다. 여기에 북한의 나이 어린 지도자 김정은 위원장이 반발해서 5차 핵실험 같은 추가 도발을 하게 될 경우 북한 옥죄기는 더욱 가혹해진다.

역사상 최초로 대북한 다자 제재에 동참하며 자신의 손을 묶은 중국은 석탄 무역 금지를 넘어 원유 통제에 까지 나설 수 있다. 북한 정권이 한계 선상에 이를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은 핵무장했다는 북한에 협상하자며 굴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군사제재에도 나설 수 있다. 북한에 대한 무력 공격이 아니라 해상 봉쇄나 한미연합훈련 상시화 조치 등은 북한이 오래 버티기 힘든 강력한 군사조치이다.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정부도 미구(未久)에 닥칠 수 있는 엄중한 사태에 대비해 제 할 일을 찾아야 할 때다. 무엇보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핵무장으로는 북한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할아버지의 유훈’이라는 말만 하고 나오면 북핵 외교의 주도권이 다시 북한에게 넘어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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