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⑫ 서민의 술 소주, 너마저 오른다고?

입력 2016.07.07 (17:19) 수정 2016.07.0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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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고 크게 공감이 되시는 분은 주당입니다. 이 시를 읽고 술이 그렇게까지 좋을리야? 하고 고개를 저으신다면 아직 당신은 주당은 아니시로군요. 이 시가 쓰여진 정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저는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단 돈 천원의 유혹

삼겹살집이나 감자탕집, 순대국집 같이 음식을 먹으면서 으레 손님들이 소주 한 병을 곁들이는 식당들은 사실 소주를 많이 팔아야 하지요. 소주 한 병의 출고 값은 천원 안팎인데 식당에서는 자꾸 오르고 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달 물가 동향을 보면 식당에서 소줏값이 무려 12%나 올랐습니다. 물가 상승의 주범이었다네요. 그러고 보니 정말 한 병 3,000원에서 4,000원으로 오른 음식점이 많습니다.

전날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신 시인은 이제 술을 좀 적게 먹겠다고 단단히 결심합니다. 그런데 작심삼일! 단골로 가는 감자탕 집에 써 붙인 매혹적인 글귀를 그만 보고 말았습니다.



감자탕을 시키면 소주가 공짜라니! 쓰리던 속은 어디로 가고 술 생각이 마음을 뒤흔듭니다. 남자들은 흔히 사람들과 만날 약속을 하거나 식사 한번 하자는 약속을 '소주 한 잔 하자'고 합니다. 그러니까 소주는 단순히 술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수단이고 상징 기호인 셈이지요.

당연히 술을 끊는다는 것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니 시인은 소주를 끊는다면 끊어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라고 걱정합니다. 독한 소주만큼이나 독하게 먹었던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호락호락 무장해제된 자신을 오히려 호탕하게 격려합니다. 무슨 소주하고 원수가 졌다고 모질게 끊느냐고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 다음 장면은 안 봐도 훤합니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한 병!" 호락호락 넘어가는 불혹의 뚝심이 도리어 유쾌합니다.

즐거워 마실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소주는 사람들에게 극한의 행복을 안겨줍니다. 슬프고 우울할 때도 소주 한 잔 마시고 나면 우리는 툭툭 털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서민들의 가벼운 호주머니를 알아주는 기특한 술, 집에서 마신다면 단 돈 1,000원으로도 하루 종일 무지개를 하늘에 걸어주는 마법의 음식이 소주 말고 어디 있을지요?

그러나 소주는 그 싼 값과 달착지근한 목넘김 때문에 어떤 술보다 과음하기도 쉽습니다. 하여 속이 쓰리고 뒷골이 묵직한 숙취로 애를 먹을 때면 누구나 이제 술을 즐이거나 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렇지만 다짐은 깨지고 되다짐 하기를 시지푸스의 바위처럼 반복합니다. 술을 좋아하는 이 시인의 고백에 저는 웃음이 빵! 터집니다.




술을 마셔서 혼곤한 상태에서도 술을 많이 먹는 자신이 미웠는지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고 수첩에다가 써 놓았군요. 그런데 정작 술이 깨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니 지렁이 기어가듯 쓴 글자가 안 보였겠군요. 다시 술이 취하니 그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는 얘기지요.

아마도 시인은 맨 정신으로는 절대로 영원히 수첩을 해독할 수 없을 듯합니다. 어쩌면 해독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요? 이 수수께끼 같은 문자를 해독해야 정말로 오장육부 구석구석에 스민 독, 마음에 깊이 침전돼 있는 영혼의 독까지 해독할 수 있을 텐데요

순해지는 술…줄어드는 소주 소비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이 즐겨 먹은 순은 청주와 탁주였습니다. 농경문화이면서 쌀을 주로 재배했던 우리 민족은 삼한시대부터 귀족 집안에서는 맑은 술인 청주를, 서민들은 탁한 술인 막걸리를 즐겨 먹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고려 시대 몽골 군의 잦은 침입 이후 끓이는 술, 즉 소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고려 때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을 갔던 안동에서 소주가 만들어진 것도 유사한 이유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2010년 이후 소주 소비량은 약간씩 줄고, 대신 순한 맥주 소비량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층으로 갈수록 맥주나 와인 선호도가 높고, 소주 중에서도 리큐르 같은 순한 과일소주가 인기입니다. 소득이 높아지고 이른바 웰빙 바람이 불면 독주보다는 순한 술을 찾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 와인 바람이 거세게 부는 것이나, 맥주 수입량이 급증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맥주 수입액은 2009년 3,700만 달러 정도였는데 2014년에는 1억 1,000만 달러를 넘어 무려 3배 이상 늘었습니다.

실제로 1인당 연간 소비량을 보면 맥주는 2010년 140병에서 2015년에는 150병 정도로 늘었지만, 소주는 66병에서 63병 정도로 약간 줄었습니다. 줄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에 속합니다.

소주는 한류 열풍을 타고 해외로도 많이 팔려나갑니다. 최근에는 일본에 부는 혐한 바람에 약간 주춤하고 있지만, 지난 2010년에는 일본과 중국 동남아 등지로 팔려나간 소주가 무려 1억 2,300만 달러어치나 됐습니다. 2015년에는 1억 달러 밑으로 떨어졌지만 필리핀이나 태국 등 한류 열풍이 거센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소주 수출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소주가 대중주로 자리잡은 것은 1924년 일제 강점기입니다. 설탕을 뽑아내고 남은 사탕무 찌꺼기로 주정을 만들어 물에 타는 희석식 소주가 등장했습니다.

국세청기술연구소가 공개한 ‘옛날 소주’국세청기술연구소가 공개한 ‘옛날 소주’



해방 이후 1965년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정부는 아예 쌀을 원료로 하는 청주와 막걸리 등의 제조를 금지시켰고, 소주는 서민들이 마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술로 자리잡았습니다. 한 소주 회사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두꺼비'는 그야말로 '서민의 벗'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생산된 소주는 몇 도였을까요? 1924년 시판된 소주는 무려 35도, 41년간 이 독한 술이 유지돼오다 1965년 30도로 내려갑니다.

1973년에는 25도짜리가 나왔고, 1988올림픽을 전후해서는 23도, 드디어 2000년에는 20도짜리가 나왔습니다. 2014년에는 17.5도까지 내려오더니, 지난해에는 과일즙을 섞은 이른바 '리큐르'라는 혼합식 소주는 13도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40년 동안 소주 값은 얼마나 올랐을까요? 1975년 소주의 출고값은 85원이었습니다. 1980년에는 190원, 1990년에는 300원을 넘었고, 2000년에는 640원, 2015년에는 960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40년 만에 약 12배가 오른 셈입니다. 같은 기간 짜장면 값이 26배, 지하철 요금은 32배나 올랐으니 다른 물가에 비하면 안 오른 것이지요.

1975년 4인 가족의 월 평균 소득이 6만원 정도였는데 지난 2015년은 320만 원 정도니까 54배나 오른 셈입니다. 소주가 서민의 술로 사랑 받아왔다는 것이 통계로도 입증되지요?

병주고 약주는 소주…치명적 질병의 원인

소주는 우리나라 음식과도 궁합이 아주 잘 맞습니다. 기름진 삼겹살이 그렇고 얼큰한 김치찌개, 생선회와 매운탕, 구이와 수육 등 어떤 음식과도 소주는 잘 어울립니다.

그래서 벌이가 시원찮는 일용직 노동자도, 가난한 예술인도, 오직 사랑하는 마음뿐인 연인들도, 휴가 나온 군인도, 취업이 막막한 실업자도 그날의 기쁨과 근심, 앞날의 불안을 모두 소주 한 잔에 녹였습니다. 여유가 없는 날은 소주를, 좀 호기를 부리는 날에는 맥주에 섞은 이른바 '소폭'으로 술판은 풍성해집니다.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술꾼들의 보금자리 포장마차에서는 단연 소주였습니다. 서리에 취해 붉어진 낙엽이 뚝뚝 떨어지는 가을날, 어둠을 몰고 온 바람이 때에 절은 비닐을 사정없이 할퀴는 밤이면, 소주를 못하는 사람들도 불현듯 장막을 밀고 포장마차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무들은 단풍잎으로 붉어지고, 포장마차의 손님들은 소주로 붉어집니다. 단풍은 가을비에 흔들리고, 가을비보다 더 차가운 세파에 흔들리는 서민들은 소주 한 잔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아보려 애씁니다.

나무도 풀리고 사람도 풀리고 참새 굽는 주모의 눈도 풀리고, 풀리는 것들끼리 그렇게 힘겨운 가을밤을 넘어갑니다. 서로 다독여가며......

이 시인도 그렇지만 특히 비가 내리는 날에는 소주 생각이 더 간절해지는가 봅니다. 바람이 불고 가랑비가 내려 대지와 공기가 축축해지는 분위기를 소주에 비유하는 시인도 있으니까요



하긴 평소에는 뻣뻣하던 몸이 소주 한 잔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흐느적대니 바람이 부는 것과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픔도 환희가 되고, 마음의 문이란 문은 모두 열리는 해방의 느낌, 소주를 마신 기분이로군요

그러나 소주는 때로 부조리와 모순과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난무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독한 저항의 결기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1

980년대 엄혹했던 독재시절, 문단과 노동계에 큰 충격을 안겼던 노동문학의 상징,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에서 소주는 더 이상 낭만의 묘약이 아니었습니다.



소주는 그 유익함 만큼이나 치명적인 해악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숱한 사람들이 소주로 인한 알코올성 질환으로 폐인이 되거나 숨지기도 합니다.

서울의대 예방의학교실 박수경, 유근영 교수팀은 1993년부터 2004년까지 일반인 1만 8,863명을 대상으로 위암 위험도를 평균 8.4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한자리에서 20도짜리 소주 1병 이상을 마시는 사람의 위암 위험이 정상인의 3.3배나 됐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우리나라가 알코올 치료를 위해 쓰인 비용이 줄잡아 20조 원이 넘었다고 합니다. 암 환자의 진료 비용이 4조 5,000억 원이었으니까 5배가 넘는 셈입니다.

물론 모두 소주 탓은 아니겠지만, 서민들이 가장 즐겨 먹는 술이 소주이고, 맥주에 비해 도수가 높은 만큼 원인의 비중도 가장 크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소주 잔 대신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서민의 벗 소주는 그야말로 약주고 병주는 애증의 벗입니다. 벗은 고달픈 인생의 등불이고 위로이기도 하지만, 때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나를 몰아넣습니다.

소주를 마시되,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즐기는 절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늘 적당히 마신다고 다짐하지만, 이성의 고삐가 풀리고 감성의 들불이 번지기 시작하면 '적당히'는 '왕창'이 되기 일쑵니다.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2004)의 한 장면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2004)의 한 장면


그래서 말입니다. 술자리의 격이나 함께 술 마시는 사람이 중요하지 않나 합니다. 다짜고짜 술과 원수나 진 듯, 누가 누가 빨리 취하는지 내기라도 하는 듯 광분하는 술자리 말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두런두런 하고 좋은 예술과 인문의 경험과 추억도 나누면서 천천히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술이 목적이 아니라, 향기로운 자리를 위한, 사랑과 우정이 넘치는 교류의 자리를 한층 북돋워주는 수단이 되는 자리를 많이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 시인의 소망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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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⑫ 서민의 술 소주, 너마저 오른다고?
    • 입력 2016-07-07 17:19:37
    • 수정2016-07-07 17:32:03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이 시를 읽고 크게 공감이 되시는 분은 주당입니다. 이 시를 읽고 술이 그렇게까지 좋을리야? 하고 고개를 저으신다면 아직 당신은 주당은 아니시로군요. 이 시가 쓰여진 정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저는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단 돈 천원의 유혹

삼겹살집이나 감자탕집, 순대국집 같이 음식을 먹으면서 으레 손님들이 소주 한 병을 곁들이는 식당들은 사실 소주를 많이 팔아야 하지요. 소주 한 병의 출고 값은 천원 안팎인데 식당에서는 자꾸 오르고 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달 물가 동향을 보면 식당에서 소줏값이 무려 12%나 올랐습니다. 물가 상승의 주범이었다네요. 그러고 보니 정말 한 병 3,000원에서 4,000원으로 오른 음식점이 많습니다.

전날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신 시인은 이제 술을 좀 적게 먹겠다고 단단히 결심합니다. 그런데 작심삼일! 단골로 가는 감자탕 집에 써 붙인 매혹적인 글귀를 그만 보고 말았습니다.



감자탕을 시키면 소주가 공짜라니! 쓰리던 속은 어디로 가고 술 생각이 마음을 뒤흔듭니다. 남자들은 흔히 사람들과 만날 약속을 하거나 식사 한번 하자는 약속을 '소주 한 잔 하자'고 합니다. 그러니까 소주는 단순히 술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수단이고 상징 기호인 셈이지요.

당연히 술을 끊는다는 것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니 시인은 소주를 끊는다면 끊어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라고 걱정합니다. 독한 소주만큼이나 독하게 먹었던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호락호락 무장해제된 자신을 오히려 호탕하게 격려합니다. 무슨 소주하고 원수가 졌다고 모질게 끊느냐고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 다음 장면은 안 봐도 훤합니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한 병!" 호락호락 넘어가는 불혹의 뚝심이 도리어 유쾌합니다.

즐거워 마실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소주는 사람들에게 극한의 행복을 안겨줍니다. 슬프고 우울할 때도 소주 한 잔 마시고 나면 우리는 툭툭 털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서민들의 가벼운 호주머니를 알아주는 기특한 술, 집에서 마신다면 단 돈 1,000원으로도 하루 종일 무지개를 하늘에 걸어주는 마법의 음식이 소주 말고 어디 있을지요?

그러나 소주는 그 싼 값과 달착지근한 목넘김 때문에 어떤 술보다 과음하기도 쉽습니다. 하여 속이 쓰리고 뒷골이 묵직한 숙취로 애를 먹을 때면 누구나 이제 술을 즐이거나 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렇지만 다짐은 깨지고 되다짐 하기를 시지푸스의 바위처럼 반복합니다. 술을 좋아하는 이 시인의 고백에 저는 웃음이 빵! 터집니다.




술을 마셔서 혼곤한 상태에서도 술을 많이 먹는 자신이 미웠는지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고 수첩에다가 써 놓았군요. 그런데 정작 술이 깨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니 지렁이 기어가듯 쓴 글자가 안 보였겠군요. 다시 술이 취하니 그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는 얘기지요.

아마도 시인은 맨 정신으로는 절대로 영원히 수첩을 해독할 수 없을 듯합니다. 어쩌면 해독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요? 이 수수께끼 같은 문자를 해독해야 정말로 오장육부 구석구석에 스민 독, 마음에 깊이 침전돼 있는 영혼의 독까지 해독할 수 있을 텐데요

순해지는 술…줄어드는 소주 소비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이 즐겨 먹은 순은 청주와 탁주였습니다. 농경문화이면서 쌀을 주로 재배했던 우리 민족은 삼한시대부터 귀족 집안에서는 맑은 술인 청주를, 서민들은 탁한 술인 막걸리를 즐겨 먹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고려 시대 몽골 군의 잦은 침입 이후 끓이는 술, 즉 소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고려 때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을 갔던 안동에서 소주가 만들어진 것도 유사한 이유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2010년 이후 소주 소비량은 약간씩 줄고, 대신 순한 맥주 소비량이 크게 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층으로 갈수록 맥주나 와인 선호도가 높고, 소주 중에서도 리큐르 같은 순한 과일소주가 인기입니다. 소득이 높아지고 이른바 웰빙 바람이 불면 독주보다는 순한 술을 찾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 와인 바람이 거세게 부는 것이나, 맥주 수입량이 급증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맥주 수입액은 2009년 3,700만 달러 정도였는데 2014년에는 1억 1,000만 달러를 넘어 무려 3배 이상 늘었습니다.

실제로 1인당 연간 소비량을 보면 맥주는 2010년 140병에서 2015년에는 150병 정도로 늘었지만, 소주는 66병에서 63병 정도로 약간 줄었습니다. 줄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에 속합니다.

소주는 한류 열풍을 타고 해외로도 많이 팔려나갑니다. 최근에는 일본에 부는 혐한 바람에 약간 주춤하고 있지만, 지난 2010년에는 일본과 중국 동남아 등지로 팔려나간 소주가 무려 1억 2,300만 달러어치나 됐습니다. 2015년에는 1억 달러 밑으로 떨어졌지만 필리핀이나 태국 등 한류 열풍이 거센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소주 수출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소주가 대중주로 자리잡은 것은 1924년 일제 강점기입니다. 설탕을 뽑아내고 남은 사탕무 찌꺼기로 주정을 만들어 물에 타는 희석식 소주가 등장했습니다.

국세청기술연구소가 공개한 ‘옛날 소주’


해방 이후 1965년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정부는 아예 쌀을 원료로 하는 청주와 막걸리 등의 제조를 금지시켰고, 소주는 서민들이 마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술로 자리잡았습니다. 한 소주 회사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두꺼비'는 그야말로 '서민의 벗'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생산된 소주는 몇 도였을까요? 1924년 시판된 소주는 무려 35도, 41년간 이 독한 술이 유지돼오다 1965년 30도로 내려갑니다.

1973년에는 25도짜리가 나왔고, 1988올림픽을 전후해서는 23도, 드디어 2000년에는 20도짜리가 나왔습니다. 2014년에는 17.5도까지 내려오더니, 지난해에는 과일즙을 섞은 이른바 '리큐르'라는 혼합식 소주는 13도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40년 동안 소주 값은 얼마나 올랐을까요? 1975년 소주의 출고값은 85원이었습니다. 1980년에는 190원, 1990년에는 300원을 넘었고, 2000년에는 640원, 2015년에는 960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니까 40년 만에 약 12배가 오른 셈입니다. 같은 기간 짜장면 값이 26배, 지하철 요금은 32배나 올랐으니 다른 물가에 비하면 안 오른 것이지요.

1975년 4인 가족의 월 평균 소득이 6만원 정도였는데 지난 2015년은 320만 원 정도니까 54배나 오른 셈입니다. 소주가 서민의 술로 사랑 받아왔다는 것이 통계로도 입증되지요?

병주고 약주는 소주…치명적 질병의 원인

소주는 우리나라 음식과도 궁합이 아주 잘 맞습니다. 기름진 삼겹살이 그렇고 얼큰한 김치찌개, 생선회와 매운탕, 구이와 수육 등 어떤 음식과도 소주는 잘 어울립니다.

그래서 벌이가 시원찮는 일용직 노동자도, 가난한 예술인도, 오직 사랑하는 마음뿐인 연인들도, 휴가 나온 군인도, 취업이 막막한 실업자도 그날의 기쁨과 근심, 앞날의 불안을 모두 소주 한 잔에 녹였습니다. 여유가 없는 날은 소주를, 좀 호기를 부리는 날에는 맥주에 섞은 이른바 '소폭'으로 술판은 풍성해집니다.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술꾼들의 보금자리 포장마차에서는 단연 소주였습니다. 서리에 취해 붉어진 낙엽이 뚝뚝 떨어지는 가을날, 어둠을 몰고 온 바람이 때에 절은 비닐을 사정없이 할퀴는 밤이면, 소주를 못하는 사람들도 불현듯 장막을 밀고 포장마차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나무들은 단풍잎으로 붉어지고, 포장마차의 손님들은 소주로 붉어집니다. 단풍은 가을비에 흔들리고, 가을비보다 더 차가운 세파에 흔들리는 서민들은 소주 한 잔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아보려 애씁니다.

나무도 풀리고 사람도 풀리고 참새 굽는 주모의 눈도 풀리고, 풀리는 것들끼리 그렇게 힘겨운 가을밤을 넘어갑니다. 서로 다독여가며......

이 시인도 그렇지만 특히 비가 내리는 날에는 소주 생각이 더 간절해지는가 봅니다. 바람이 불고 가랑비가 내려 대지와 공기가 축축해지는 분위기를 소주에 비유하는 시인도 있으니까요



하긴 평소에는 뻣뻣하던 몸이 소주 한 잔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흐느적대니 바람이 부는 것과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픔도 환희가 되고, 마음의 문이란 문은 모두 열리는 해방의 느낌, 소주를 마신 기분이로군요

그러나 소주는 때로 부조리와 모순과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난무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독한 저항의 결기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1

980년대 엄혹했던 독재시절, 문단과 노동계에 큰 충격을 안겼던 노동문학의 상징,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에서 소주는 더 이상 낭만의 묘약이 아니었습니다.



소주는 그 유익함 만큼이나 치명적인 해악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숱한 사람들이 소주로 인한 알코올성 질환으로 폐인이 되거나 숨지기도 합니다.

서울의대 예방의학교실 박수경, 유근영 교수팀은 1993년부터 2004년까지 일반인 1만 8,863명을 대상으로 위암 위험도를 평균 8.4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한자리에서 20도짜리 소주 1병 이상을 마시는 사람의 위암 위험이 정상인의 3.3배나 됐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우리나라가 알코올 치료를 위해 쓰인 비용이 줄잡아 20조 원이 넘었다고 합니다. 암 환자의 진료 비용이 4조 5,000억 원이었으니까 5배가 넘는 셈입니다.

물론 모두 소주 탓은 아니겠지만, 서민들이 가장 즐겨 먹는 술이 소주이고, 맥주에 비해 도수가 높은 만큼 원인의 비중도 가장 크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소주 잔 대신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서민의 벗 소주는 그야말로 약주고 병주는 애증의 벗입니다. 벗은 고달픈 인생의 등불이고 위로이기도 하지만, 때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나를 몰아넣습니다.

소주를 마시되,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즐기는 절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늘 적당히 마신다고 다짐하지만, 이성의 고삐가 풀리고 감성의 들불이 번지기 시작하면 '적당히'는 '왕창'이 되기 일쑵니다.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2004)의 한 장면

그래서 말입니다. 술자리의 격이나 함께 술 마시는 사람이 중요하지 않나 합니다. 다짜고짜 술과 원수나 진 듯, 누가 누가 빨리 취하는지 내기라도 하는 듯 광분하는 술자리 말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두런두런 하고 좋은 예술과 인문의 경험과 추억도 나누면서 천천히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술이 목적이 아니라, 향기로운 자리를 위한, 사랑과 우정이 넘치는 교류의 자리를 한층 북돋워주는 수단이 되는 자리를 많이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 시인의 소망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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