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플러스] “개·돼지”가 불러온 ‘욕망’의 민얼굴

입력 2016.07.12 (17:23) 수정 2016.07.2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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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만 있다면 그 뇌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겠다. 누구라도... 정말 궁금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백 번을 인정해 설사 취했다 하더라도, 본인 주장대로 과로에 지쳤다 하더라도, 폭언이나 망언조차 넘어선 그 끔찍한 말이 어떻게 튀어나왔을까? 이조차도 우리 사회는 '아주 특수한 개인의 우연한 일탈행위'로 넘겨버릴 만큼 너그러울 수 있을까?



파면에 직면한 '때늦은 후회'

기획관은 뒤늦게 죽을죄를 지었다며 사죄했다. 장관이 지켜보며 으름장 놓는 의원들 앞에서, 감정을 못 이긴 듯 울먹였다. 애처롭기까지 했다. 발언 이후 나흘을 지켜왔던 그 완강한 소신이 여야의 한결같은 파면 요구 앞에 백기 항복한 것이다.

초라하게 움츠러든 신념이란 이름의 그 무모함이 덧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왜 그랬단 말인가? 고시 출신으로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장관비서실과 청와대에서도 일했다. 그런 그가 공직사회의 사형선고라 할 파면상황에 몰렸다. 도대체 왜 곧 '죽을 자리'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단 말인가?

자못 똑똑하다고 자부했을 경력을 갖고 있던 그가 아무 생각 없이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개돼지 발언은 돌연변이로 불쑥 나오기 어렵다. 그럴만한 맥락과 조건이 있던 건 아닐까? 합리적 의심은 항상 진실에 접근하는 수단이다.

누가 취했던가? 누가 꺼냈던가?

기획관은 문제발언을 터뜨린 그 자리에서 술에 많이 취했고 과로로 피곤한 상태였다고 했다. 대체로 취중 실언은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에 술을 많이 마신 상태에서 나온다. 상대는 기자였고 중견 여기자도 있었다. 처음 만난 일종의 상견례 자리였단다.

상식적으로 기자가 공직자에게 편한 상대일 리 없다.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다. 서로 단합을 외치며 술을 많이 나눠 마실 사이가 아니다. 아예 안 마신 참석자도 있다니 그 누구도 홀로 술에 취해 횡설수설할 분위기가 아니었음 직하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의 발언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느닷없이 스스로 신분제와 개돼지 발언을 꺼내 들었다. 기자들로선 워낙 황당해서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고 한다. 확인성 질문과 해명기회를 여러 차례 줬지만, 한사코 말과 뜻을 꿋꿋하게 고집했다고 한다.

문제가 되더라도 괜찮다는 인식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엄청난 뒤끝이 당연할 발언을 터뜨린 것이다. (동석 기자들 표현대로라면) 그것도 차분하게 설득하듯이 얘기했다니 온전히 자신의 의지가 작동해 말 폭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그 심리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었던 걸까? 설사 문제가 될지라도 별거 아닌 것으로 여겼을 수 있다. 오히려 무엇이든 논쟁을 마다 않는 저돌적인 추진력을 인정받는 기회라는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례도 많았다. 이른바 지도층 인사들의 막말이나 막장 행동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잠깐 떠들썩해도 시간이 지나면 곧 묻히고 또 잊혀졌다. 불과 얼마 전 한 기관장급 인사가 '천황폐하만세'를
공공연히 외쳤다는데도 대충 넘어가고 자리를 지키는 현실이다. 지도층인사가 부끄러운 행태를 보이고 말실수를 저질러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회에서는 그 구성원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밖에 없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 곧 잊혀질거야 ~~" 나 기획관이 혹시 그런 순진한(?) 기대를 품었던 건 아닐까?

은폐와 축소, 비호가 낳은 '욕망의 전차'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는 인간의 덕목이지만 홀로 닦여지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 저마다가 서로를 의식하며 공적 윤리를 지키고 법적 정의가 실현된다는 믿음을 공유할 때 함께 자라난다. 곧 염치지수가 높을수록 선진사회다.

정부기관 등 공공영역은 부끄러움에 가장 민감해야 할 곳이다. 가장 높은 도덕으로 비춰지고 감시돼야 할 그곳들이 혹시 스스로에게 가장 너그럽지는 않았던가? 사법정의를 의심케 하는 전관예우 법조비리는 늘 터져 나온다. 국가안보에 직결된 방산비리 의혹들도 쉴 새 없다.

정치권과 관련된 여러 의혹은 또 어떻든가? 속 시원히 해결된 경우가 얼마나 있었던가? 문제가 덮어지는 자리에선 더 큰 문제가 불거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느 곳에서든 부끄러움을 제대로 인식하기가 힘들다.

잠시 부끄럽더라도 그 순간만 지나면 그만이다. 부끄러움이 잊혀진 자리에는 오로지 1%를 향한 욕망만이 가득하다. 출세와 영달을 위해선 무엇이든 버리고 앞장설 수 있다는 소신을 빙자한 위험한 각오들이 곳곳에서 넘실댄다.

마침내 욕망의 민낯은 봉인을 풀고 너나없이 광장으로 뛰쳐나오고 있다. 바야흐로 1%를 향한 벌건 욕망이 질주하는 세상이다. 99%와 함께하는 공존공생의 가냘픈 희망은 그 욕망을 따라잡지 못한다.

'개돼지 발언'은 바로 그 슬픈 현주소다. 불쑥 수면 위로 떠오른 그 불편한 현실이 그저 아득하다. 저 깊은 강을 도대체 어떻게 건넌단 말인가? 더 미뤄서도, 미룰 수도 없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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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7-12 17:23:08
    • 수정2016-07-20 16: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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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만 있다면 그 뇌 속을 들여다보고 싶었겠다. 누구라도... 정말 궁금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백 번을 인정해 설사 취했다 하더라도, 본인 주장대로 과로에 지쳤다 하더라도, 폭언이나 망언조차 넘어선 그 끔찍한 말이 어떻게 튀어나왔을까? 이조차도 우리 사회는 '아주 특수한 개인의 우연한 일탈행위'로 넘겨버릴 만큼 너그러울 수 있을까?



파면에 직면한 '때늦은 후회'

기획관은 뒤늦게 죽을죄를 지었다며 사죄했다. 장관이 지켜보며 으름장 놓는 의원들 앞에서, 감정을 못 이긴 듯 울먹였다. 애처롭기까지 했다. 발언 이후 나흘을 지켜왔던 그 완강한 소신이 여야의 한결같은 파면 요구 앞에 백기 항복한 것이다.

초라하게 움츠러든 신념이란 이름의 그 무모함이 덧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왜 그랬단 말인가? 고시 출신으로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장관비서실과 청와대에서도 일했다. 그런 그가 공직사회의 사형선고라 할 파면상황에 몰렸다. 도대체 왜 곧 '죽을 자리'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단 말인가?

자못 똑똑하다고 자부했을 경력을 갖고 있던 그가 아무 생각 없이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개돼지 발언은 돌연변이로 불쑥 나오기 어렵다. 그럴만한 맥락과 조건이 있던 건 아닐까? 합리적 의심은 항상 진실에 접근하는 수단이다.

누가 취했던가? 누가 꺼냈던가?

기획관은 문제발언을 터뜨린 그 자리에서 술에 많이 취했고 과로로 피곤한 상태였다고 했다. 대체로 취중 실언은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에 술을 많이 마신 상태에서 나온다. 상대는 기자였고 중견 여기자도 있었다. 처음 만난 일종의 상견례 자리였단다.

상식적으로 기자가 공직자에게 편한 상대일 리 없다.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다. 서로 단합을 외치며 술을 많이 나눠 마실 사이가 아니다. 아예 안 마신 참석자도 있다니 그 누구도 홀로 술에 취해 횡설수설할 분위기가 아니었음 직하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의 발언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느닷없이 스스로 신분제와 개돼지 발언을 꺼내 들었다. 기자들로선 워낙 황당해서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고 한다. 확인성 질문과 해명기회를 여러 차례 줬지만, 한사코 말과 뜻을 꿋꿋하게 고집했다고 한다.

문제가 되더라도 괜찮다는 인식

술에 취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먼저 엄청난 뒤끝이 당연할 발언을 터뜨린 것이다. (동석 기자들 표현대로라면) 그것도 차분하게 설득하듯이 얘기했다니 온전히 자신의 의지가 작동해 말 폭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그 심리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었던 걸까? 설사 문제가 될지라도 별거 아닌 것으로 여겼을 수 있다. 오히려 무엇이든 논쟁을 마다 않는 저돌적인 추진력을 인정받는 기회라는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례도 많았다. 이른바 지도층 인사들의 막말이나 막장 행동들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잠깐 떠들썩해도 시간이 지나면 곧 묻히고 또 잊혀졌다. 불과 얼마 전 한 기관장급 인사가 '천황폐하만세'를
공공연히 외쳤다는데도 대충 넘어가고 자리를 지키는 현실이다. 지도층인사가 부끄러운 행태를 보이고 말실수를 저질러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회에서는 그 구성원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밖에 없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 곧 잊혀질거야 ~~" 나 기획관이 혹시 그런 순진한(?) 기대를 품었던 건 아닐까?

은폐와 축소, 비호가 낳은 '욕망의 전차'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는 인간의 덕목이지만 홀로 닦여지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 저마다가 서로를 의식하며 공적 윤리를 지키고 법적 정의가 실현된다는 믿음을 공유할 때 함께 자라난다. 곧 염치지수가 높을수록 선진사회다.

정부기관 등 공공영역은 부끄러움에 가장 민감해야 할 곳이다. 가장 높은 도덕으로 비춰지고 감시돼야 할 그곳들이 혹시 스스로에게 가장 너그럽지는 않았던가? 사법정의를 의심케 하는 전관예우 법조비리는 늘 터져 나온다. 국가안보에 직결된 방산비리 의혹들도 쉴 새 없다.

정치권과 관련된 여러 의혹은 또 어떻든가? 속 시원히 해결된 경우가 얼마나 있었던가? 문제가 덮어지는 자리에선 더 큰 문제가 불거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느 곳에서든 부끄러움을 제대로 인식하기가 힘들다.

잠시 부끄럽더라도 그 순간만 지나면 그만이다. 부끄러움이 잊혀진 자리에는 오로지 1%를 향한 욕망만이 가득하다. 출세와 영달을 위해선 무엇이든 버리고 앞장설 수 있다는 소신을 빙자한 위험한 각오들이 곳곳에서 넘실댄다.

마침내 욕망의 민낯은 봉인을 풀고 너나없이 광장으로 뛰쳐나오고 있다. 바야흐로 1%를 향한 벌건 욕망이 질주하는 세상이다. 99%와 함께하는 공존공생의 가냘픈 희망은 그 욕망을 따라잡지 못한다.

'개돼지 발언'은 바로 그 슬픈 현주소다. 불쑥 수면 위로 떠오른 그 불편한 현실이 그저 아득하다. 저 깊은 강을 도대체 어떻게 건넌단 말인가? 더 미뤄서도, 미룰 수도 없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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