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⑬ 최저임금 논란, 내 노동의 정당한 값은 얼마인가?

입력 2016.07.1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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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편의 값은 얼마인가?

안정적인 직장을 마다하고 넓은 갯벌이 펼쳐진 강화도에서 사는 시인 함민복의 시가 가슴을 따뜻하게 합니다. 밤새 졸린 눈 부릅뜨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갯벌만큼이나 넓어 보이는 원고지를 한 칸 한 칸 메워 완성한 시 한편의 가격이 3만 원이라니, 염전에서 말라가는 소금만큼이나 짜디짠 '시장'이라는 구두쇠가 야속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내 그 서운함을 거두고 자신보다 더 어렵게 노동을 하면서 그 댓가는 더욱 야박한 다른 이들의 노동을 떠올립니다. 쌀 두말을 생산하기 위해 일년 내내 얼굴을 그을렸어야 할 농부, 새벽부터 일어나 커다란 무쇠솥에 불을 지피고 절절 끓는 국밥을 바라보며 마음도 끓여야 했을 해장국집 주인, 굵은 소금 한 됫박을 만들기 위해 아득한 염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하염없이 쓰린 발로 오가야 했을 염부, 그들에 비하면 시 한편 삼만원이 결코 적지 않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어떠신가요? 시 한 편의 값이 3만 원이라면 많은가요? 적은가요? 아니, 도대체 시 한 편의 값이라는 게 시장의 물건 값처럼 매길 수 있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한국인이 애송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같은 시의 값은 얼마여야 할까요?

또 쌀 두말을 수확하기까지 흘린 농부의 땀방울의 값은 누가 무슨 근거로 3만 원으로 매기고, 국밥을 끓이는 상인의 인건비는 3만 원 국밥에서 얼마를 차지하고, 염부가 흘린 짠 땀방울은 굵은 소금에 얼만큼 녹아 있을지요?

서구의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이론에 따르면, 가격은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곳에서 결정됩니다. 이 그래프 안에 노동자나 제 3자가 노동에 부여하는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그러니까 계량 불가능한 가치, 철학, 눈물, 아름다움, 추억 등은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임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의 대가를 임금이라고 한다면 그 노동은 시간, 생산량, 이윤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일 뿐 계량화되지 않는 노동자의 주관적 요소들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흔히 중국의 천재 시인들은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붓만 들면 일필휘지로 명시를 써 내려갔을 것으로 상상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고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 고통의 산물이었다고 한양대 정민교수는 설명합니다.

"구양수는 글을 지으면 벽에다 붙여놓고 이를 고쳤는데, 마지막 완성되고 나면 처음의 것은 한 글자도 남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소동파가 적벽부(赤璧賦)를 지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단숨에 이를 지은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를 짓느라 버린 초고(草稿)가 수레 석 대에 가득하였다 했으니 그간의 고초를 헤아려 무엇하랴."
- 정민 한양대 교수 / 한시미학산책

가령 한 시인이 시 한 편을 쓸 때 어떤 시는 영감이 떠오르고, 표현도 머릿속에서 술술 국수 가락처럼 뽑아져 나와 30분 만에 쓸 수도 있고, 어떤 시는 한 달 내내 낑낑대도 변비 걸린 뇌가 좀처럼 배설하지 못해 몇 년 만에 완성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를 의뢰한 잡지사나 출판사에서는 모두 한 편의 시로 간주합니다.



시에 들어간 시인의 공력과 시간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시장에서 이 시를 포함해 다수의 창작물들을 한데 묶어 팔 수 있는 책의 양과 매출액을 계산하고 이를 출판에 들어가는 비용을 공제한 뒤 적정한 회사의 이윤을 붙여 역산한 금액을 줄 뿐입니다.

그러니 소동파의 시도 보들레르의 시도 정지용의 시도 모두 시장에 나오면 무차별적인 한 편의 시로 취급되겠지요. 쌀값도 그렇고, 국밥도 그렇게 소금도 마찬가집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가격이 결정되는 원론적인 메커니즘에는 따뜻한 심장이 없습니다.

다시 불붙은 최저임금제 논쟁

노동이 내재하고 있는 이런 소중한 주관적, 감정적, 비계량적 요소까지는 언감생심이라고 하더라도, 계량화할 수 있는 노동에 대한 임금만이라도 좀 제대로 받아보자는 것이 노동자들의 소망입니다.

만일 임금을 시장의 원리에 맡겨 둔다면 요즘처럼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실업자가 많은 세상에서는 한없이 임금이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산업혁명기에 영국이나 유럽에서 하루 16시간씩 일해야 했던 노동자들이나 어린아이들이 겨우 빵 몇 조각 살 돈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7월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최저임금 인상 촉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합동 기자회견에서 참가자가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7월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최저임금 인상 촉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합동 기자회견에서 참가자가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그래서 세계 120여 개 나라에서는 '최저임금제도'라는 것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노동자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임금의 최저 수준을 정해서 각 기업에서 그 이하로는 임금을 책정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지요. 이 제도는 1894년 뉴질랜드에서 처음 시행됐고, 우리나라는 28년 전인 1988년부터 시행됐습니다. 매년 노사 공익 대표 9명으로 구성된 최저임금위원회가 논의를 거쳐 합의로 결정하는데 지금 노사 간의 팽팽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4년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시간당 5210원, 2015년에는 5580원, 올해는 6030원이었습니다. 노동계에서는 이 돈으로는 최저생계도 꾸릴 수 없으니 올해는 만원으로 대폭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용자측은 어려운 경제 여건을 감안해 올해 수준으로 동결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양측의 논리는 모두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우선 노동계는 현재의 최저임금을 월급으로 환산하면 126만 원인데, 이 금액은 4인 가족을 기준으로 도시에서 생활하기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서울시 연구원이 지난해 조사한 설문 결과를 보면,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4인 기준으로 310만 원이 있어야 한 달 생활이 가능하다고 응답했습니다. 1인 가구일 경우도 164만 원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습니다.

노동계는 또 시급 단위로만 책정하는 최저임금을 월급으로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근로기준법상 일주일을 일하면 하루를 주게 돼 있는 주휴 수당 등이 시간당 임금만으로는 계산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더 일하고 제대로 받지 못하는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업 측은 전혀 생각이 다릅니다. 이미 임금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한계기업이 속출하고 있어 임금을 더 올릴 경우, 문 닫는 기업이 늘어나고 결국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또 갈수록 치열해지는 중국 등과의 경쟁을 감안할 때 기업들이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용자들은 또 모든 직종에 동일하게 적용하는 최저임금제를 직종이나 지역에 따라 차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존이 어려운 직종은 좀 최저임금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지요.

청년유니온과 패션노조 회원들이 2015년 1월 7일 ‘2014 청년착취대상’을 시상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청년유니온과 패션노조 회원들이 2015년 1월 7일 ‘2014 청년착취대상’을 시상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노동과 자본의 적정한 이윤 배분 비율은 얼마인지, 우리 경제 규모와 소득수준, 경쟁력 등을 감안할 때 적정한 최저임금은 얼마가 되어야 하는지 모두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최저임금이 OECD 34개 나라 중에서 27위로 매우 낮다는 것이고, 그나마 이 최저임금도 못받는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12%나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청소년 알바를 상대로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열정페이' 운운하는 못된 기업주나 상점주 때문에 선진국 문턱에 다다랐다는 이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야만적 착취가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 임금이 내려가는 세상도 와서는 안되겠지만, 노동자가 원하는 만큼 임금이 올라가는 세상도 쉽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한때 꿈꾸었던 철학자들과 이론들은 현실의 가혹한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있지 않나 합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같은 대원칙 아래 여성과 남성, 세대 간의 임금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이나, 가능한 한 정신노동과 육체 노동 간의 임금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줄이려는 노력,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 등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합니다. 전 지구적으로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임금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미국 노동자 한 사람의 임금이 인도 노동자 80명 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다 이뤄진다고 해도 임금 간의 격차를 완전히 줄일 수는 없고, 또 노동자가 원하는 임금 인상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시인은 아주 기발한 발상을 합니다. 임금을 사용자에게 올려달라고 하는 것과 별개로, 자신이 스스로에게 임금을 올려주었다고 생각하자는 것이지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아마도 1년 단위로 계약을 해야 일자리를 보전하는 비정규직 보일러 공인 시인은 몇 년째 오르지 않는 임금에다, 걸어서 출근해서 절약하는 교통비, 아이들 과외를 직접 지도해 아끼는 돈, 재능을 발휘해 봉사하고 대접받는 점심 비용 등을 보태 스스로 임금을 올립니다.

회사 돌아가는 모양새나 나라 경제를 생각해볼 때 월급이 올라가기는커녕, 깎이지 않으면 다행인 우리 모두 이 시인처럼 임금을 올려볼까요? 퇴근길 동료들과 술 한잔 꺾지 않아 아끼는 돈, 머리를 집에서 직접 잘라 아끼는 돈, 카페의 커피 한 잔 대신 회사 커피 한 잔으로 아끼는 돈, 사우나 대신 집에서 샤워하며 아끼는 돈..... 임금은 순식간에 두 자릿수로 올라갈 테지요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예술가의 노동

그래도 국가와 사회, 그리고 미디어가 나서서 임금에 관심이라도 가져주는 임금 노동자는 좀 나은 편일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살펴본 시인을 비롯한 문인들, 음악과 미술, 연극과 무용 등을 하는 예술인들은 이런 최저임금이라는 보호막도 없는 사각지대에 있으니까요.

가장 고양된 형태의 진선미를 통해 우리가 동물과 같은 본능의 삶에 안주하지 않도록 해주는 예술과 인문, 삶의 외연과 내포를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인문과 예술의 주역들이 정작 자신들은 노동의 소외와 착취, 혹은 철저한 무관심과 방치 속에 척박하기 그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작 논란’에 휩싸인 조영남 씨‘대작 논란’에 휩싸인 조영남 씨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명 가수의 대작 논란은 예술에서의 위작과 표절, 창의성의 한계 등과 같은 예술 내적인 논쟁보다, 오히려 대신 그리게 하면서 이 힘없는 화가에게 지급한 터무니없는 액수의 돈 때문에 더욱 대중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작품 하나를 그리는 데 적어도 일주일, 혹은 그 이상 걸리기도 하는데 고작 10만 원, 위에서 살펴본 최저임금제를 적용해도 일주일을 그린다면 적어도 33만 6천 원은 주어야 합니다. 예술의 창의성과 부가가치를 다 제외하고 단순히 완구제품을 조립하는 수준으로 이 화가의 노동력을 평가절하해도 말입니다.

지난 2011년 먹을 것이 없어 자취방에서 굶어죽은 것으로 보이는 한 시나리오 작가의 비극이 세상의 공분과 동정을 사면서 예술인 복지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열악한 생존조건이 좋아졌다는 징후는 좀처럼 찾을 수 없습니다.



올 3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술가와 문인 5천여 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연평균 소득은 미술 분야가 614만 원, 문학 분야는 고작 214만 원에 그쳤습니다. 문인은 한 달에 20만 원도 못 번셈입니다. 그러니 전업으로 먹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고, 편의점 알바나 막노동을 해야 하는 문인과 예술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2015년 한국 예술복지재단의 조사 결과도 대동소이합니다. 예술인들의 연평균 소득은 977만 원 정도, 이 가운데 순수하게 예술 활동으로 번 돈은 520만 원이었습니다. 한 달에 40만 원이 채 안됩니다. 정규직 근로자의 비중은 7.1%에 불과했습니다. 산재보험에 든 예술인은 9.5%, 고용보험에 든 예술인도 33% 정도니까, 예술인들은 현실과 미래 모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에 살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우리는 21세기를 문화가 경쟁력인 시대, 창의성이 무기인 시대라고 말하면서, 정작 그 경쟁력과 창의력의 원천인 예술인과 문인들의 이 비참한 현실을 외면합니다. 인문, 예술 분야의 노동자를 비롯해, 자영업자, 임금근로자 모두 최소한의 경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아야겠습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인건비나 생활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다운 존엄을 잃지 않을 생존권적 자유인 동시에 인권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추석이 다가올 무렵 저는 주말 등산길에 나섰다 가슴 아픈 장면을 목격하고 이런 시를 썼습니다. 세상의 모든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세상의 모든 노동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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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⑬ 최저임금 논란, 내 노동의 정당한 값은 얼마인가?
    • 입력 2016-07-14 16:16:25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시 한편의 값은 얼마인가?

안정적인 직장을 마다하고 넓은 갯벌이 펼쳐진 강화도에서 사는 시인 함민복의 시가 가슴을 따뜻하게 합니다. 밤새 졸린 눈 부릅뜨고 머리를 쥐어짜면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갯벌만큼이나 넓어 보이는 원고지를 한 칸 한 칸 메워 완성한 시 한편의 가격이 3만 원이라니, 염전에서 말라가는 소금만큼이나 짜디짠 '시장'이라는 구두쇠가 야속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내 그 서운함을 거두고 자신보다 더 어렵게 노동을 하면서 그 댓가는 더욱 야박한 다른 이들의 노동을 떠올립니다. 쌀 두말을 생산하기 위해 일년 내내 얼굴을 그을렸어야 할 농부, 새벽부터 일어나 커다란 무쇠솥에 불을 지피고 절절 끓는 국밥을 바라보며 마음도 끓여야 했을 해장국집 주인, 굵은 소금 한 됫박을 만들기 위해 아득한 염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하염없이 쓰린 발로 오가야 했을 염부, 그들에 비하면 시 한편 삼만원이 결코 적지 않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어떠신가요? 시 한 편의 값이 3만 원이라면 많은가요? 적은가요? 아니, 도대체 시 한 편의 값이라는 게 시장의 물건 값처럼 매길 수 있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한국인이 애송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같은 시의 값은 얼마여야 할까요?

또 쌀 두말을 수확하기까지 흘린 농부의 땀방울의 값은 누가 무슨 근거로 3만 원으로 매기고, 국밥을 끓이는 상인의 인건비는 3만 원 국밥에서 얼마를 차지하고, 염부가 흘린 짠 땀방울은 굵은 소금에 얼만큼 녹아 있을지요?

서구의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이론에 따르면, 가격은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곳에서 결정됩니다. 이 그래프 안에 노동자나 제 3자가 노동에 부여하는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그러니까 계량 불가능한 가치, 철학, 눈물, 아름다움, 추억 등은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임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의 대가를 임금이라고 한다면 그 노동은 시간, 생산량, 이윤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일 뿐 계량화되지 않는 노동자의 주관적 요소들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흔히 중국의 천재 시인들은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붓만 들면 일필휘지로 명시를 써 내려갔을 것으로 상상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고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 고통의 산물이었다고 한양대 정민교수는 설명합니다.

"구양수는 글을 지으면 벽에다 붙여놓고 이를 고쳤는데, 마지막 완성되고 나면 처음의 것은 한 글자도 남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소동파가 적벽부(赤璧賦)를 지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단숨에 이를 지은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를 짓느라 버린 초고(草稿)가 수레 석 대에 가득하였다 했으니 그간의 고초를 헤아려 무엇하랴."
- 정민 한양대 교수 / 한시미학산책

가령 한 시인이 시 한 편을 쓸 때 어떤 시는 영감이 떠오르고, 표현도 머릿속에서 술술 국수 가락처럼 뽑아져 나와 30분 만에 쓸 수도 있고, 어떤 시는 한 달 내내 낑낑대도 변비 걸린 뇌가 좀처럼 배설하지 못해 몇 년 만에 완성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를 의뢰한 잡지사나 출판사에서는 모두 한 편의 시로 간주합니다.



시에 들어간 시인의 공력과 시간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시장에서 이 시를 포함해 다수의 창작물들을 한데 묶어 팔 수 있는 책의 양과 매출액을 계산하고 이를 출판에 들어가는 비용을 공제한 뒤 적정한 회사의 이윤을 붙여 역산한 금액을 줄 뿐입니다.

그러니 소동파의 시도 보들레르의 시도 정지용의 시도 모두 시장에 나오면 무차별적인 한 편의 시로 취급되겠지요. 쌀값도 그렇고, 국밥도 그렇게 소금도 마찬가집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가격이 결정되는 원론적인 메커니즘에는 따뜻한 심장이 없습니다.

다시 불붙은 최저임금제 논쟁

노동이 내재하고 있는 이런 소중한 주관적, 감정적, 비계량적 요소까지는 언감생심이라고 하더라도, 계량화할 수 있는 노동에 대한 임금만이라도 좀 제대로 받아보자는 것이 노동자들의 소망입니다.

만일 임금을 시장의 원리에 맡겨 둔다면 요즘처럼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실업자가 많은 세상에서는 한없이 임금이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산업혁명기에 영국이나 유럽에서 하루 16시간씩 일해야 했던 노동자들이나 어린아이들이 겨우 빵 몇 조각 살 돈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7월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최저임금 인상 촉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합동 기자회견에서 참가자가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그래서 세계 120여 개 나라에서는 '최저임금제도'라는 것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노동자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임금의 최저 수준을 정해서 각 기업에서 그 이하로는 임금을 책정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지요. 이 제도는 1894년 뉴질랜드에서 처음 시행됐고, 우리나라는 28년 전인 1988년부터 시행됐습니다. 매년 노사 공익 대표 9명으로 구성된 최저임금위원회가 논의를 거쳐 합의로 결정하는데 지금 노사 간의 팽팽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4년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시간당 5210원, 2015년에는 5580원, 올해는 6030원이었습니다. 노동계에서는 이 돈으로는 최저생계도 꾸릴 수 없으니 올해는 만원으로 대폭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용자측은 어려운 경제 여건을 감안해 올해 수준으로 동결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양측의 논리는 모두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우선 노동계는 현재의 최저임금을 월급으로 환산하면 126만 원인데, 이 금액은 4인 가족을 기준으로 도시에서 생활하기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서울시 연구원이 지난해 조사한 설문 결과를 보면,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4인 기준으로 310만 원이 있어야 한 달 생활이 가능하다고 응답했습니다. 1인 가구일 경우도 164만 원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습니다.

노동계는 또 시급 단위로만 책정하는 최저임금을 월급으로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근로기준법상 일주일을 일하면 하루를 주게 돼 있는 주휴 수당 등이 시간당 임금만으로는 계산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더 일하고 제대로 받지 못하는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업 측은 전혀 생각이 다릅니다. 이미 임금을 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한계기업이 속출하고 있어 임금을 더 올릴 경우, 문 닫는 기업이 늘어나고 결국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또 갈수록 치열해지는 중국 등과의 경쟁을 감안할 때 기업들이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용자들은 또 모든 직종에 동일하게 적용하는 최저임금제를 직종이나 지역에 따라 차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존이 어려운 직종은 좀 최저임금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지요.

청년유니온과 패션노조 회원들이 2015년 1월 7일 ‘2014 청년착취대상’을 시상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노동과 자본의 적정한 이윤 배분 비율은 얼마인지, 우리 경제 규모와 소득수준, 경쟁력 등을 감안할 때 적정한 최저임금은 얼마가 되어야 하는지 모두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최저임금이 OECD 34개 나라 중에서 27위로 매우 낮다는 것이고, 그나마 이 최저임금도 못받는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12%나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청소년 알바를 상대로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열정페이' 운운하는 못된 기업주나 상점주 때문에 선진국 문턱에 다다랐다는 이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야만적 착취가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 임금이 내려가는 세상도 와서는 안되겠지만, 노동자가 원하는 만큼 임금이 올라가는 세상도 쉽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한때 꿈꾸었던 철학자들과 이론들은 현실의 가혹한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있지 않나 합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같은 대원칙 아래 여성과 남성, 세대 간의 임금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이나, 가능한 한 정신노동과 육체 노동 간의 임금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줄이려는 노력,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 등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합니다. 전 지구적으로는 선진국과 개도국의 임금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미국 노동자 한 사람의 임금이 인도 노동자 80명 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다 이뤄진다고 해도 임금 간의 격차를 완전히 줄일 수는 없고, 또 노동자가 원하는 임금 인상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시인은 아주 기발한 발상을 합니다. 임금을 사용자에게 올려달라고 하는 것과 별개로, 자신이 스스로에게 임금을 올려주었다고 생각하자는 것이지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아마도 1년 단위로 계약을 해야 일자리를 보전하는 비정규직 보일러 공인 시인은 몇 년째 오르지 않는 임금에다, 걸어서 출근해서 절약하는 교통비, 아이들 과외를 직접 지도해 아끼는 돈, 재능을 발휘해 봉사하고 대접받는 점심 비용 등을 보태 스스로 임금을 올립니다.

회사 돌아가는 모양새나 나라 경제를 생각해볼 때 월급이 올라가기는커녕, 깎이지 않으면 다행인 우리 모두 이 시인처럼 임금을 올려볼까요? 퇴근길 동료들과 술 한잔 꺾지 않아 아끼는 돈, 머리를 집에서 직접 잘라 아끼는 돈, 카페의 커피 한 잔 대신 회사 커피 한 잔으로 아끼는 돈, 사우나 대신 집에서 샤워하며 아끼는 돈..... 임금은 순식간에 두 자릿수로 올라갈 테지요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예술가의 노동

그래도 국가와 사회, 그리고 미디어가 나서서 임금에 관심이라도 가져주는 임금 노동자는 좀 나은 편일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살펴본 시인을 비롯한 문인들, 음악과 미술, 연극과 무용 등을 하는 예술인들은 이런 최저임금이라는 보호막도 없는 사각지대에 있으니까요.

가장 고양된 형태의 진선미를 통해 우리가 동물과 같은 본능의 삶에 안주하지 않도록 해주는 예술과 인문, 삶의 외연과 내포를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인문과 예술의 주역들이 정작 자신들은 노동의 소외와 착취, 혹은 철저한 무관심과 방치 속에 척박하기 그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작 논란’에 휩싸인 조영남 씨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명 가수의 대작 논란은 예술에서의 위작과 표절, 창의성의 한계 등과 같은 예술 내적인 논쟁보다, 오히려 대신 그리게 하면서 이 힘없는 화가에게 지급한 터무니없는 액수의 돈 때문에 더욱 대중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작품 하나를 그리는 데 적어도 일주일, 혹은 그 이상 걸리기도 하는데 고작 10만 원, 위에서 살펴본 최저임금제를 적용해도 일주일을 그린다면 적어도 33만 6천 원은 주어야 합니다. 예술의 창의성과 부가가치를 다 제외하고 단순히 완구제품을 조립하는 수준으로 이 화가의 노동력을 평가절하해도 말입니다.

지난 2011년 먹을 것이 없어 자취방에서 굶어죽은 것으로 보이는 한 시나리오 작가의 비극이 세상의 공분과 동정을 사면서 예술인 복지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열악한 생존조건이 좋아졌다는 징후는 좀처럼 찾을 수 없습니다.



올 3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술가와 문인 5천여 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연평균 소득은 미술 분야가 614만 원, 문학 분야는 고작 214만 원에 그쳤습니다. 문인은 한 달에 20만 원도 못 번셈입니다. 그러니 전업으로 먹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고, 편의점 알바나 막노동을 해야 하는 문인과 예술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2015년 한국 예술복지재단의 조사 결과도 대동소이합니다. 예술인들의 연평균 소득은 977만 원 정도, 이 가운데 순수하게 예술 활동으로 번 돈은 520만 원이었습니다. 한 달에 40만 원이 채 안됩니다. 정규직 근로자의 비중은 7.1%에 불과했습니다. 산재보험에 든 예술인은 9.5%, 고용보험에 든 예술인도 33% 정도니까, 예술인들은 현실과 미래 모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에 살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우리는 21세기를 문화가 경쟁력인 시대, 창의성이 무기인 시대라고 말하면서, 정작 그 경쟁력과 창의력의 원천인 예술인과 문인들의 이 비참한 현실을 외면합니다. 인문, 예술 분야의 노동자를 비롯해, 자영업자, 임금근로자 모두 최소한의 경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아야겠습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인건비나 생활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다운 존엄을 잃지 않을 생존권적 자유인 동시에 인권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추석이 다가올 무렵 저는 주말 등산길에 나섰다 가슴 아픈 장면을 목격하고 이런 시를 썼습니다. 세상의 모든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세상의 모든 노동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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