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⑱ 낳고 싶은 욕망, 낳을 수 없는 현실

입력 2016.08.25 (17:03) 수정 2016.08.25 (17:05)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 가장 기쁜 일 아가의 탄생

아기의 탄생! 세상에 이보다 더 가슴 벅차고 황홀한 사건이 있을까요?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을 기다리던 아기는 용감하게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이때 아기가 터뜨리는 크나큰 울음은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세상에 '데뷔'하는 위대한 실존의 몸짓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아기가 첫 울음을 터뜨릴 때 다른 곳에서 아가의 반쪽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린다고 말합니다. 그렇겠지요. 부부가 사랑을 하고 그 결실로 아기가 잉태되고, 뱃속에서 자랄 때 어머니는 그야말로 노심초사! 행여 아기에게 무슨 일이 있을세라 살얼음판을 걷듯 합니다.

옛 조상들은 아기를 가진 산모에게는 흉사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고, 과일도 모양이 예쁜 것 골라 먹였습니다. 태교라고 해서 요즘도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준다든지, 아름다운 그림과 미담으로 엮은 책만을 읽기도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출산의 고통은 또 어떻습니까?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을 이어지는 아픔을 딛고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났을 때 산모와 가족들이 느끼는 기쁨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지요? 그러니 아기가 태어날 때 반쪽인 산모도 울음이 나올 수밖에요.


그러므로 출산은 니체식 표현을 빈다면 아기라는 한 생명의 탄생인 동시에,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다른 생명이 스스로를 복제해내는 영원회귀, 무한 반복이기도 합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 아이가 출산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실체가 드러난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이다. 아이의 출산으로 나는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 운동에서 벗어나고,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 고 말합니다. (장석주 인문학 산책)

좀 풀어서 얘기하자면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언제까지나 모든 관심과 욕망이 자기 자신을 향해있는 이기적 존재에 머문다는 것이지요.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았으며, 세상이 무수한 타자와 타자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지요.

흔히 어른들이 '자식을 낳아 봐야 어른이 된다'든지, "자식을 길러봐야 세상을 이해한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유사한 맥락이 아닐까 합니다. 그 고통이 아무리 크고, 때로는 목숨과 맞바꾸는 위험이 따라도 출산을 마다하지 않는 모성은 그래서 강한 것이고 위대합니다.

한 시인은 아기의 손이 열개인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중력과 시간의 마모를 견디기 어렵습니다. 때가 되면 늙고 병들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 중력의 운명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함으로써, 자신을 닮은 자손을 만듦으로써 이 유한의 운명에 맞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기의 탄생은 우주의 빅뱅에 비견됩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의 탄생을 밤하늘에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 것에 비유하는 것은 낯설지 않습니다.


낸시 틸먼이 쓴 "네가 태어난 날엔 곰도 춤을 추었지" 라는 에세이의 한 대목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곰과 토끼 강아지와 사슴 같은 온갖 동물들, 참나무와 벚나무 나팔꽃과 봉숭아 같은 온갖 식물들, 그리고 바람과 물, 달과 별 같은 우주의 삼라만상도 축하대열에 동참합니다.

하여 음악가들이 고뇌를 거듭하다 오선지를 메워 멋진 곡을 작곡한다든지, 화가들이 막막하기만 한 캔버스를 칠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대작을 완성한다든지, 시인이나 소설가가 작품을 완성할 때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고통을 산모의 고통에 비유하고, 작품의 탄생을 출산에 비유하는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방실방실 웃은 아기의 얼굴, 꼼지락거리는 손과 발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모든 평화의 근원은 바로 아기의 작은 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평화뿐이겠어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도 아기의 발그레한 볼, 하품할 때 나는 젖내, 무어라 옹알거리는 소리일 겁니다. 하여 정연복 시인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밭은 아기의 볼이라고 찬탄합니다.


사라진 아이 울음소리, 세계 최저 출산율

그러나 아기를 출산하고 기르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임신 기간도 포유동물 가운데 가장 긴 편에 속하지만, 직립하고 말을 하고 또 사람 구실을 할 때까지 다른 동물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긴 세월 동안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자연인으로서 성장시키는 것도 어렵거니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개체가 될 때까지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과 경제적 지원이 뒤따라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기 위해 부모가 들여야 하는 사랑, 희생, 걱정 같은 계산하기 어려운 무형의 비용은 빼고라도, 먹이고 가르치는 비용만 해도 천문학적입니다. 지난 2012년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전국 남녀 1만 3,38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자녀 한 명을 출산해 대학 졸업까지 드는 총 양육비는 무려 3억 896만 원! 입이 딱 벌어지는 금액입니다.

그나마 여기에는 아이가 재수를 한다던지, 요즘은 흔해 빠진 해외 어학연수 같은 이른바 스펙 쌓기 비용은 뺀 것이라고 하니 실제로는 더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지난 1960~80년대에는 농촌에서 소 팔고 논 팔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장이 '우골탑(牛骨塔)'이라는 탄식이 나올 만도 했고요, 사정은 요즘이라고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사교육 경쟁과 스펙쌓기, 취업 경쟁 때문에 부모들의 허리는 휠 대로 휩니다.

텅빈 병원의 신생아실텅빈 병원의 신생아실

돈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일자리를 갖는 여성이 늘어나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가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지만, 결혼 이후 출산과 육아는 결정적으로 여성의 직장생활과 자기 계발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입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결혼한 여성의 퇴직 사유 가운데 육아는 언제나 1,2위를 차지합니다. 국가와 기업에서도 출산과 보육 지원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확충하고는 있지만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모성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낳지 않는 나라, 이른바 저출산 국가라는 딱지를 2000년 이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출생통계를 보년 우리나라의 합계 출산율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은 1.24명, 37개 OECD 국가 가운데 36위였습니다. 출생한 아이도 43만 8,400명에 그쳤습니다.
이 가운데 24%인 9만 2,000명은 산모의 나이가 35살을 넘는 이른바 고령 출산이었습니다. 이 숫자가 29살 미만의 젊은 산모의 비율 22%를 넘어섰으니 저출산과 함께 고령 출산의 문제도 심각한 셈입니다.

제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불과 반세기 만에 상상도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해방과 6.25 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이른바 베이비 붐이 불면서 각 가정마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제가 다니던 학교는 한 학급의 숫자가 80명을 넘었고, 1부제 수업으로는 교실이 모자라 오전과 오후로 나눠 2부제 수업을 받기도 했습니다. 골목골목마다 아이들은 부산하게 뛰어다녔고, 갓난아기들의 울음소리는 늘 담장을 넘었습니다.


실제로 통계를 보면 1971년 출산율은 무려 4.54명이나 됐습니다. 이 해 태어난 아이는 무려 102만 4,077명이었습니다. 급격한 인구 증가를 우려한 정부는 부랴부랴 인구 억제책을 강력히 시행하고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흔히 들었던 구호가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가 어느새인가 ' 아들 딸 구별말고 하나 낳아 잘기르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적극적인 산아제한에 힘입었는지 1981년에는 출산율이 2.57명으로 떨어졌고, 1990년에는 1.57명, 2000년부터는 1.5명 이하로 떨어져 저출산국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줄잡아 한 집에 네 명이 넘었던 아이가 불과 30년 만에 한 명으로 줄었다는 얘깁니다.

소득이 높아지고 영양 상태가 좋아져 수명이 늘어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돼가고 있습니다. 급격한 고령화와 저출산, 이 두 가지가 맞물리면서 우리나라는 성장엔진이 빠르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갓난 아이들의 울음은 끊기고, 동네 산부인과는 줄줄이 문을 닫고, 온통 거리에는 노인들만 넘쳐나는 우울한 풍경이 예리한 시인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을 리 없습니다.


흔히 보는 광경이지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이 유모차를 돌돌돌 밀고 거리를 다니시는 장면 말입니다. 노인이 되면 생각이나 말이나 거동이 모두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아기는 없는 텅 빈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들의 모습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입니다.

OECD는 국가가 존립하기 위한 저출산의 마지노선을 1.3명이라고 제시합니다. 연구기관들의 장기 예측을 보면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우리나라는 100년 안에 인구가 반토막으로 줄고, 2500년에는 인구가 33만 명까지 줄어들어 한민족이 소멸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다급해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출산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백조 원을 쏟아붓고 있지만 좀처럼 아이를 낳겠다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질의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드는 데다, 내 집 마련은 그야말로 꿈에서나 가능하고, 노후 준비는 막연하기만 하고, 치열한 교육 경쟁에서 살아남을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출산과 양육 수당 몇 푼, 무료 보육시설과 의료 혜택 확충 같은 몇 가지 혜택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땜질식 처방이나 중구난방식 복지정책을 지양하고 이제라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적 지혜와 역량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출산과 육아 제도뿐 아니라, 일자리, 복지 후생, 교육여건과 같은 거시 경제적 요소는 물론 문화와 환경, 종교와 철학과 같은 보다 근원적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성찰하는 노력도 병행돼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생물학적 행위가 도대체 무슨 삶의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와 국가 인류라는 공동체에 어떤 기여를 하는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래도 낳아야 하는 자식

3포 세대니 N포 세대니 헬조선이니 하는 우울한 말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이런 자조적인 표현으로 야속한 세태와 자신들이 처한 암울한 처지에 분노하는 젊은이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닙니다. 이런 세상을 물려주고 있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또 아이를 낳아 기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개인의 철학적 신념으로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젊은 부부는 논외로 하고 아이를 낳고 싶지만 이런저런 여건이 어려워 낳기를 망설이는 젊은 부부들은 한번 용기를 내보시기 바랍니다.

6.25 한국전쟁 피난 행렬 6.25 한국전쟁 피난 행렬

언제 이 땅의 부모들이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완벽하게 자식을 기를 제반 여건을 갖추고 아이를 낳았나요? 베이비 붐 세대에 태어난 중장년 세대도 그렇고, 전쟁과 일제 강점기를 겪은 더 위 세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두 힘겨운 가운데 아이를 낳았습니다.

가난과 추위, 질병과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도 꿋꿋하게 아이를 길렀습니다. 자신을 닮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기른다는 것은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기쁨과 보람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산의 후유증으로 찬 기운이 도는 몸에 이불처럼 착 달라붙는 아들 녀석을 안고서 그 온기에 가슴이 쩌릿쩌릿해 온다는 이 시인의 고백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그 어떤 어려움도 장애물로 감히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자식과 부모의 거리, 시인의 표현대로 이 <고밀도>의 거리, 둘 사이의 사랑이 지펴올린 세상 가장 따뜻한 온기가 있다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후끈하지 않을까요? 어떤 배고픔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대낮의 절간 같은 마을마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녹슨 제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공원의 미끄럼틀과 시소에 다시 개구쟁이들이 매달리고, 거리 거리마다 할머니 대신 천사 같은 아기들이 의젓하게 앉아 있는 유모차들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몇 해 전으로 기억합니다. 경복궁에 갔다가 한 젊은 부부가 밀고 오는 유모차를 마주했습니다. 그때의 눈부심으로 시 한 편 지었습니다. 더 많은 유모차들과 마주치고 싶습니다. 그 빛나던 부모들의 얼굴과 한없이 성스러운 아기들의 행렬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감탄과 웃음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연관 기사]☞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 시리즈 바로가기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⑱ 낳고 싶은 욕망, 낳을 수 없는 현실
    • 입력 2016-08-25 17:03:16
    • 수정2016-08-25 17:05:12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세상 가장 기쁜 일 아가의 탄생

아기의 탄생! 세상에 이보다 더 가슴 벅차고 황홀한 사건이 있을까요?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을 기다리던 아기는 용감하게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이때 아기가 터뜨리는 크나큰 울음은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세상에 '데뷔'하는 위대한 실존의 몸짓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아기가 첫 울음을 터뜨릴 때 다른 곳에서 아가의 반쪽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린다고 말합니다. 그렇겠지요. 부부가 사랑을 하고 그 결실로 아기가 잉태되고, 뱃속에서 자랄 때 어머니는 그야말로 노심초사! 행여 아기에게 무슨 일이 있을세라 살얼음판을 걷듯 합니다.

옛 조상들은 아기를 가진 산모에게는 흉사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고, 과일도 모양이 예쁜 것 골라 먹였습니다. 태교라고 해서 요즘도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준다든지, 아름다운 그림과 미담으로 엮은 책만을 읽기도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출산의 고통은 또 어떻습니까?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을 이어지는 아픔을 딛고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났을 때 산모와 가족들이 느끼는 기쁨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지요? 그러니 아기가 태어날 때 반쪽인 산모도 울음이 나올 수밖에요.


그러므로 출산은 니체식 표현을 빈다면 아기라는 한 생명의 탄생인 동시에,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다른 생명이 스스로를 복제해내는 영원회귀, 무한 반복이기도 합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 아이가 출산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실체가 드러난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이다. 아이의 출산으로 나는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 운동에서 벗어나고,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 고 말합니다. (장석주 인문학 산책)

좀 풀어서 얘기하자면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언제까지나 모든 관심과 욕망이 자기 자신을 향해있는 이기적 존재에 머문다는 것이지요.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았으며, 세상이 무수한 타자와 타자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지요.

흔히 어른들이 '자식을 낳아 봐야 어른이 된다'든지, "자식을 길러봐야 세상을 이해한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유사한 맥락이 아닐까 합니다. 그 고통이 아무리 크고, 때로는 목숨과 맞바꾸는 위험이 따라도 출산을 마다하지 않는 모성은 그래서 강한 것이고 위대합니다.

한 시인은 아기의 손이 열개인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중력과 시간의 마모를 견디기 어렵습니다. 때가 되면 늙고 병들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 중력의 운명을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함으로써, 자신을 닮은 자손을 만듦으로써 이 유한의 운명에 맞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기의 탄생은 우주의 빅뱅에 비견됩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의 탄생을 밤하늘에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 것에 비유하는 것은 낯설지 않습니다.


낸시 틸먼이 쓴 "네가 태어난 날엔 곰도 춤을 추었지" 라는 에세이의 한 대목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곰과 토끼 강아지와 사슴 같은 온갖 동물들, 참나무와 벚나무 나팔꽃과 봉숭아 같은 온갖 식물들, 그리고 바람과 물, 달과 별 같은 우주의 삼라만상도 축하대열에 동참합니다.

하여 음악가들이 고뇌를 거듭하다 오선지를 메워 멋진 곡을 작곡한다든지, 화가들이 막막하기만 한 캔버스를 칠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대작을 완성한다든지, 시인이나 소설가가 작품을 완성할 때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고통을 산모의 고통에 비유하고, 작품의 탄생을 출산에 비유하는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방실방실 웃은 아기의 얼굴, 꼼지락거리는 손과 발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모든 평화의 근원은 바로 아기의 작은 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평화뿐이겠어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도 아기의 발그레한 볼, 하품할 때 나는 젖내, 무어라 옹알거리는 소리일 겁니다. 하여 정연복 시인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밭은 아기의 볼이라고 찬탄합니다.


사라진 아이 울음소리, 세계 최저 출산율

그러나 아기를 출산하고 기르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임신 기간도 포유동물 가운데 가장 긴 편에 속하지만, 직립하고 말을 하고 또 사람 구실을 할 때까지 다른 동물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긴 세월 동안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자연인으로서 성장시키는 것도 어렵거니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개체가 될 때까지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과 경제적 지원이 뒤따라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기 위해 부모가 들여야 하는 사랑, 희생, 걱정 같은 계산하기 어려운 무형의 비용은 빼고라도, 먹이고 가르치는 비용만 해도 천문학적입니다. 지난 2012년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전국 남녀 1만 3,38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자녀 한 명을 출산해 대학 졸업까지 드는 총 양육비는 무려 3억 896만 원! 입이 딱 벌어지는 금액입니다.

그나마 여기에는 아이가 재수를 한다던지, 요즘은 흔해 빠진 해외 어학연수 같은 이른바 스펙 쌓기 비용은 뺀 것이라고 하니 실제로는 더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지난 1960~80년대에는 농촌에서 소 팔고 논 팔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장이 '우골탑(牛骨塔)'이라는 탄식이 나올 만도 했고요, 사정은 요즘이라고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사교육 경쟁과 스펙쌓기, 취업 경쟁 때문에 부모들의 허리는 휠 대로 휩니다.

텅빈 병원의 신생아실
돈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일자리를 갖는 여성이 늘어나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가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지만, 결혼 이후 출산과 육아는 결정적으로 여성의 직장생활과 자기 계발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입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결혼한 여성의 퇴직 사유 가운데 육아는 언제나 1,2위를 차지합니다. 국가와 기업에서도 출산과 보육 지원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확충하고는 있지만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모성을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낳지 않는 나라, 이른바 저출산 국가라는 딱지를 2000년 이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출생통계를 보년 우리나라의 합계 출산율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은 1.24명, 37개 OECD 국가 가운데 36위였습니다. 출생한 아이도 43만 8,400명에 그쳤습니다.
이 가운데 24%인 9만 2,000명은 산모의 나이가 35살을 넘는 이른바 고령 출산이었습니다. 이 숫자가 29살 미만의 젊은 산모의 비율 22%를 넘어섰으니 저출산과 함께 고령 출산의 문제도 심각한 셈입니다.

제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불과 반세기 만에 상상도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해방과 6.25 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이른바 베이비 붐이 불면서 각 가정마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제가 다니던 학교는 한 학급의 숫자가 80명을 넘었고, 1부제 수업으로는 교실이 모자라 오전과 오후로 나눠 2부제 수업을 받기도 했습니다. 골목골목마다 아이들은 부산하게 뛰어다녔고, 갓난아기들의 울음소리는 늘 담장을 넘었습니다.


실제로 통계를 보면 1971년 출산율은 무려 4.54명이나 됐습니다. 이 해 태어난 아이는 무려 102만 4,077명이었습니다. 급격한 인구 증가를 우려한 정부는 부랴부랴 인구 억제책을 강력히 시행하고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흔히 들었던 구호가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가 어느새인가 ' 아들 딸 구별말고 하나 낳아 잘기르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적극적인 산아제한에 힘입었는지 1981년에는 출산율이 2.57명으로 떨어졌고, 1990년에는 1.57명, 2000년부터는 1.5명 이하로 떨어져 저출산국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줄잡아 한 집에 네 명이 넘었던 아이가 불과 30년 만에 한 명으로 줄었다는 얘깁니다.

소득이 높아지고 영양 상태가 좋아져 수명이 늘어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돼가고 있습니다. 급격한 고령화와 저출산, 이 두 가지가 맞물리면서 우리나라는 성장엔진이 빠르게 식어가고 있습니다. 갓난 아이들의 울음은 끊기고, 동네 산부인과는 줄줄이 문을 닫고, 온통 거리에는 노인들만 넘쳐나는 우울한 풍경이 예리한 시인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을 리 없습니다.


흔히 보는 광경이지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이 유모차를 돌돌돌 밀고 거리를 다니시는 장면 말입니다. 노인이 되면 생각이나 말이나 거동이 모두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아기는 없는 텅 빈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들의 모습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한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입니다.

OECD는 국가가 존립하기 위한 저출산의 마지노선을 1.3명이라고 제시합니다. 연구기관들의 장기 예측을 보면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우리나라는 100년 안에 인구가 반토막으로 줄고, 2500년에는 인구가 33만 명까지 줄어들어 한민족이 소멸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다급해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출산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백조 원을 쏟아붓고 있지만 좀처럼 아이를 낳겠다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질의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드는 데다, 내 집 마련은 그야말로 꿈에서나 가능하고, 노후 준비는 막연하기만 하고, 치열한 교육 경쟁에서 살아남을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출산과 양육 수당 몇 푼, 무료 보육시설과 의료 혜택 확충 같은 몇 가지 혜택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땜질식 처방이나 중구난방식 복지정책을 지양하고 이제라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적 지혜와 역량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출산과 육아 제도뿐 아니라, 일자리, 복지 후생, 교육여건과 같은 거시 경제적 요소는 물론 문화와 환경, 종교와 철학과 같은 보다 근원적으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성찰하는 노력도 병행돼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생물학적 행위가 도대체 무슨 삶의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와 국가 인류라는 공동체에 어떤 기여를 하는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래도 낳아야 하는 자식

3포 세대니 N포 세대니 헬조선이니 하는 우울한 말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이런 자조적인 표현으로 야속한 세태와 자신들이 처한 암울한 처지에 분노하는 젊은이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닙니다. 이런 세상을 물려주고 있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또 아이를 낳아 기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개인의 철학적 신념으로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젊은 부부는 논외로 하고 아이를 낳고 싶지만 이런저런 여건이 어려워 낳기를 망설이는 젊은 부부들은 한번 용기를 내보시기 바랍니다.

6.25 한국전쟁 피난 행렬
언제 이 땅의 부모들이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완벽하게 자식을 기를 제반 여건을 갖추고 아이를 낳았나요? 베이비 붐 세대에 태어난 중장년 세대도 그렇고, 전쟁과 일제 강점기를 겪은 더 위 세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두 힘겨운 가운데 아이를 낳았습니다.

가난과 추위, 질병과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도 꿋꿋하게 아이를 길렀습니다. 자신을 닮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기른다는 것은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기쁨과 보람과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산의 후유증으로 찬 기운이 도는 몸에 이불처럼 착 달라붙는 아들 녀석을 안고서 그 온기에 가슴이 쩌릿쩌릿해 온다는 이 시인의 고백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그 어떤 어려움도 장애물로 감히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는 자식과 부모의 거리, 시인의 표현대로 이 <고밀도>의 거리, 둘 사이의 사랑이 지펴올린 세상 가장 따뜻한 온기가 있다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후끈하지 않을까요? 어떤 배고픔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대낮의 절간 같은 마을마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고, 녹슨 제 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공원의 미끄럼틀과 시소에 다시 개구쟁이들이 매달리고, 거리 거리마다 할머니 대신 천사 같은 아기들이 의젓하게 앉아 있는 유모차들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몇 해 전으로 기억합니다. 경복궁에 갔다가 한 젊은 부부가 밀고 오는 유모차를 마주했습니다. 그때의 눈부심으로 시 한 편 지었습니다. 더 많은 유모차들과 마주치고 싶습니다. 그 빛나던 부모들의 얼굴과 한없이 성스러운 아기들의 행렬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감탄과 웃음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연관 기사]☞ ‘시로 읽는 경제 이야기’ 시리즈 바로가기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