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입니다

입력 2016.08.27 (10:00) 수정 2016.08.2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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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직원 수가 5명이 채 안되는 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상에서 자주 저를 보게 되죠. 출근길 편의점, 점심 때 들르는 커피전문점, 퇴근길 동네 음식점, 뒷골목의 작은 철공소나 주택가 출판사 등에서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족,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일 겁니다. 또, 현재의 일터에서 퇴직한 뒤의 여러분은 저를 고용하는 사업주일 수도 있지만, 바로 저 일수도 있습니다.

퀴즈 하나 드릴까요? 다음은 근로기준법에 들어있는 조항들입니다. 이 가운데 제게 적용되는 건 몇 가지일까요?


눈치 빠른 분은 벌써 알아차리셨겠지만, 5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게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제 법적 근로 조건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물론, 5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 가운데도 '나도 저런데'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업종에 따라서는 5인 이상 사업장이라도 일부 조항에서 저처럼 차별을 받기도 하고, 사업주가 대놓고 부당 노동행위를 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합법적으로' 저렇게 많은 차별을 받는 건 저밖에 없답니다.

부당해고 당해도 구제 못 받는 근로자, 158만 명

'저'는 몇 명이나 될까요? 사회적으로 존재감이 없는 탓인지 몇 년 전까지도 저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통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2011년 통계청이 산재보험과 국민연금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임금근로일자리 행정통계'라는 걸 만들면서 비로소 제가 몇 명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됐답니다.

첫 조사 때인 2011년 12월 당시 저는 135만 명이었습니다. 그 뒤로 계속 늘어 2014년 12월에는 158만 명이 됐네요. 같은 조사에서 민간부문의 임금근로자가 1천 437만 명이니 11%에 해당하지요.


'근로자 수' 기준으로 기본권 배제...다른 나라는?

우리나라 노동자 10명 가운데 1명은 휴가를 받을 권리도, 휴일수당을 받을 권리도, 부당한 해고에서 구제받을 권리도 없는 겁니다. 다른 나라들도 이럴까요? 고용노동부에 전화해 물어봤습니다.


그러니까, 근로자 수를 기준으로 삼아 우리처럼 광범위하게 근로기준법 적용을 배제한 나라는 없다는 얘기죠.

국가인권위 "근로기준법 개정하라"...귀 닫은 노동부

이런 현실을 바꿔보려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8년 전 국가인권위원회가 노동부 장관에게 5인 미만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을 다음과 같이 확대 적용하도록 권고했습니다.


당시 인권위가 사업자의 부담을 고려하면서도 가산임금 조항 등을 즉시 적용하도록 권고한 것은 저임금 문제만큼은 더 방치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인 당시(2007년) 월평균 임금이 136만 원이었는데요, 8년이 지난 지난해 임금도 161만 원에 불과합니다. 8년간 18% 정도 올랐으니, 물가도 못 따라잡은 것 아닌가요?


하지만, 인권위의 이런 권고를 노동부는 아직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개선 요구가 이어질 때마다 정부의 답변은 "고민해보겠다" "검토해보겠다" "실태를 파악해보겠다"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이런 태도를 놓고 노동법 전문가인 이철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2014년 4월 국회에 출석해 "정부가 (5인 미만 사업장의) 문제를 인식했으면서도 20년째 (근로기준법 개정에) 아무런 진전이 없다"고 질타하기도 했지요.

지난해 9월에는 한 가닥 희망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에 5인 미만 사업장 얘기도 살짝 한 줄 들어간 거지요.


그런데, 노사정 합의가 실행에 옮겨지지 않으면서 올해 5월까지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일정도 '없던 일'로 되고 말았습니다.

20대 국회가 시작됐지만, 여당은 이른바 '노동개혁 4법'에 열을 올리고, 야당은 '비정규직 살리기 5대 법안' 등으로 맞서면서 제 열악한 근로 조건은 다시 뒷전에 묻히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5인 미만 사업장 가운데는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운영하는 것도 상당수 있고, 그 분들한테는 휴일수당을 추가 지급하는 것도 힘에 부칠 수 있겠지요. 주변을 둘러보면 영업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근로자들을 법정 기준보다 더 챙겨주는 '착한 업주'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임을 이용해 근로 조건을 열악하게 유지하는 경우도 꽤 있더라구요. 8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도 그런 고민을 다각도로 한 끝에 나온 거라고 합니다.

다른 나라들은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없어서 우리처럼 예외를 두지 않았을까요? 그런 영세 자영업자들에 대해서는 정부가 세제 상의 지원을 하든지 해서라도 최소한의 노동 조건을 만들어주도록 도와줄 수는 없나요? 5인 미만 사업장이라도 매출 규모나 업종에 따라 휴일수당 등의 적용을 달리하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태 조사라도 한번 제대로 해보셨는지 정말 묻고 싶지 말입니다.

근로기준법 =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한 법??

'근로기준법'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근로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한 법'이라고 나오는군요. 하지만, 현행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 저는 오히려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1970년 청년노동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지만, 저는 '이런 근로기준법은 준수하지 말라'고 외쳐야 하는 걸까요?

(이 기사는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의 1인칭 시점으로 작성됐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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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는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입니다
    • 입력 2016-08-27 10:00:10
    • 수정2016-08-27 17:56:36
    취재K
저는 직원 수가 5명이 채 안되는 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상에서 자주 저를 보게 되죠. 출근길 편의점, 점심 때 들르는 커피전문점, 퇴근길 동네 음식점, 뒷골목의 작은 철공소나 주택가 출판사 등에서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족,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일 겁니다. 또, 현재의 일터에서 퇴직한 뒤의 여러분은 저를 고용하는 사업주일 수도 있지만, 바로 저 일수도 있습니다.

퀴즈 하나 드릴까요? 다음은 근로기준법에 들어있는 조항들입니다. 이 가운데 제게 적용되는 건 몇 가지일까요?


눈치 빠른 분은 벌써 알아차리셨겠지만, 5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게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제 법적 근로 조건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물론, 5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 가운데도 '나도 저런데'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업종에 따라서는 5인 이상 사업장이라도 일부 조항에서 저처럼 차별을 받기도 하고, 사업주가 대놓고 부당 노동행위를 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합법적으로' 저렇게 많은 차별을 받는 건 저밖에 없답니다.

부당해고 당해도 구제 못 받는 근로자, 158만 명

'저'는 몇 명이나 될까요? 사회적으로 존재감이 없는 탓인지 몇 년 전까지도 저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통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2011년 통계청이 산재보험과 국민연금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임금근로일자리 행정통계'라는 걸 만들면서 비로소 제가 몇 명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됐답니다.

첫 조사 때인 2011년 12월 당시 저는 135만 명이었습니다. 그 뒤로 계속 늘어 2014년 12월에는 158만 명이 됐네요. 같은 조사에서 민간부문의 임금근로자가 1천 437만 명이니 11%에 해당하지요.


'근로자 수' 기준으로 기본권 배제...다른 나라는?

우리나라 노동자 10명 가운데 1명은 휴가를 받을 권리도, 휴일수당을 받을 권리도, 부당한 해고에서 구제받을 권리도 없는 겁니다. 다른 나라들도 이럴까요? 고용노동부에 전화해 물어봤습니다.


그러니까, 근로자 수를 기준으로 삼아 우리처럼 광범위하게 근로기준법 적용을 배제한 나라는 없다는 얘기죠.

국가인권위 "근로기준법 개정하라"...귀 닫은 노동부

이런 현실을 바꿔보려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8년 전 국가인권위원회가 노동부 장관에게 5인 미만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을 다음과 같이 확대 적용하도록 권고했습니다.


당시 인권위가 사업자의 부담을 고려하면서도 가산임금 조항 등을 즉시 적용하도록 권고한 것은 저임금 문제만큼은 더 방치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인 당시(2007년) 월평균 임금이 136만 원이었는데요, 8년이 지난 지난해 임금도 161만 원에 불과합니다. 8년간 18% 정도 올랐으니, 물가도 못 따라잡은 것 아닌가요?


하지만, 인권위의 이런 권고를 노동부는 아직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개선 요구가 이어질 때마다 정부의 답변은 "고민해보겠다" "검토해보겠다" "실태를 파악해보겠다"는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이런 태도를 놓고 노동법 전문가인 이철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2014년 4월 국회에 출석해 "정부가 (5인 미만 사업장의) 문제를 인식했으면서도 20년째 (근로기준법 개정에) 아무런 진전이 없다"고 질타하기도 했지요.

지난해 9월에는 한 가닥 희망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문'에 5인 미만 사업장 얘기도 살짝 한 줄 들어간 거지요.


그런데, 노사정 합의가 실행에 옮겨지지 않으면서 올해 5월까지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일정도 '없던 일'로 되고 말았습니다.

20대 국회가 시작됐지만, 여당은 이른바 '노동개혁 4법'에 열을 올리고, 야당은 '비정규직 살리기 5대 법안' 등으로 맞서면서 제 열악한 근로 조건은 다시 뒷전에 묻히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5인 미만 사업장 가운데는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운영하는 것도 상당수 있고, 그 분들한테는 휴일수당을 추가 지급하는 것도 힘에 부칠 수 있겠지요. 주변을 둘러보면 영업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근로자들을 법정 기준보다 더 챙겨주는 '착한 업주'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임을 이용해 근로 조건을 열악하게 유지하는 경우도 꽤 있더라구요. 8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도 그런 고민을 다각도로 한 끝에 나온 거라고 합니다.

다른 나라들은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없어서 우리처럼 예외를 두지 않았을까요? 그런 영세 자영업자들에 대해서는 정부가 세제 상의 지원을 하든지 해서라도 최소한의 노동 조건을 만들어주도록 도와줄 수는 없나요? 5인 미만 사업장이라도 매출 규모나 업종에 따라 휴일수당 등의 적용을 달리하는 방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태 조사라도 한번 제대로 해보셨는지 정말 묻고 싶지 말입니다.

근로기준법 =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한 법??

'근로기준법'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근로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근로조건의 최저기준을 정한 법'이라고 나오는군요. 하지만, 현행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면 저는 오히려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1970년 청년노동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지만, 저는 '이런 근로기준법은 준수하지 말라'고 외쳐야 하는 걸까요?

(이 기사는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의 1인칭 시점으로 작성됐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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