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저는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입력 2016.08.28 (22:51) 수정 2016.08.2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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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인터뷰> 조용섭(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 "(탄광) 직원들이 도망간 사람들을 잡아와서 운동장에 세워놓고 채찍으로 두들겨 팼어... 도망갔다고..."

<인터뷰> 엄옥순(사할린 한인 2세) : "어머니 나이가 많아요. 시간이 없어서 한국에 못 가고 자주 못 봐요. 좀 가슴 아파요..."

<인터뷰> 윤상철(사할린 한인2세) : "한국으로 살러 안 가도, 여기 남아도 어느 나라 국민이냐 하면 여권을 보여주면서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오프닝>

이곳은 러시아 사할린 섬 남쪽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끌려와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조선인 수 만 명이 해방과 함께 바로 이곳에서 조국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배는 오지 않았고, 그들은 반세기 가까이 이곳에 버려졌습니다.

올해로 광복 71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사할린 한인들의 고통과 기다림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사할린 한인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있는 러시아 사할린 주.

유즈노사할린스크는 사할린 남부에 위치한 주돕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3시간 남짓 걸립니다.

이른 아침, 재래시장을 찾아갔습니다.

장사 준비에 바쁜 상인들.

동양인으로 보이는 상인들이 많습니다.

<인터뷰> 지달시(한인2세) : "(한인이시죠? 한국말 하실 수 있으세요?) 조금 (매일 일찍 나오세요?) 7시 (장사는 좀 되는 편이세요?) 예,좀 되죠"

주변 러시아 상인들은 한국 상인들을 최고로 칩니다.

<인터뷰> 따지아나(러시아 상인) : "한국 아주머니들 부지런하고 아침에 러시아 사람들보다 더 일찍 나오고요, 그리고 제일 늦게 갑니다"

이곳 상인인 강수자 씨도 해방 직전 러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인터뷰> 강수자(한인2세) : "(한인들이 왜 이렇게 부지런해요?) 부지런해야 살지요. 자식들한테 뭣하러 손 벌리겠어요"

강씨는 부지런함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을 거 같다고 했습니다.

<인터뷰> 강수자(한인2세) : "어머니 정말 부지런했죠. 농사짓고 아이들 도와주며...(아버지는) 일본 사람들이 (일본으로) 데려갔는데요 간 다음에 다시 안 돌아왔어요. 그래서 갈라져 있다가 어머니는 여기서 시집가고 아버지는 거기서 장가가셔가지고..."

강씨는 일제강점기 이곳으로 강제징용된 한인의 후손입니다.

사할린에는 강씨와 같은 한인 후손이 2만 5천명 가량 살고 있습니다.

전체 사할린 인구 50만명 중 5%가 한인 후손들입니다.

야채를 팔아 아들 둘을 가르쳤다는 김춘자씨.

<인터뷰> 김춘자(한인 2세) : "(며느님은 한인이세요?) 조선 며느립니다. (둘 다요?) 네 (착해요?) 착합니다, 내가 말했지요, 소련 여자면 우리집에 발걸음도 하지 말랬어요. 조선음식 좋아한단 말이에요. 우리 아이들은.."

70살, 해방 직후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 2세 변호사 윤상철씨를 만났습니다.

윤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도 강제 징용된 다른 조선인처럼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인터뷰> 윤상철(한인 2세 변호사) : "1942년도에 저희 아버지가 17살 때 경상북도 와촌면 덕천에 사셨는데요. 거기서 실제로 모집을 왔습니다. 17살에. 그 때 모집 온 사람들 대부분 다 탄광으로 정해져서 왔지요. 노예생활을 했지요. 아무데도 못 가고요. 자의로 나온 사람들은 경찰에 잡히면 당하고요, 그 탄광으로 되돌려 보내졌지요"

윤 씨와 함께 강제징용 위령비를 찾았습니다.

위령비에는 사할린으로 끌려온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다시 일본 탄광으로 징용되는 이른바 '이중징용'을 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패전 직후에도 일본군은 그냥 퇴각하지 않았습니다.

윤씨가 안내한 사할린 남부, 미즈호 촌이라고 불렸던 포자르스코예.

조선인 20여명이 일본군의 분풀이 대상으로 무참히 학살된 곳입니다.

<녹취> 윤상철(한인 2세 변호사) : "'이놈들 스파이짓 하고 러시아 사람들한테 우리(일본)를 반대해서 도우고 있다. 그럼 저놈들 다 죽이자' 그래가지고 대나무로 창을 만들어서..."

우리 정부가 확인한 당시 구소련 정부의 기록입니다.

당시 집단 학살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터뷰> 윤상철(한인2세 변호사) : "한인들을 업신여겨 보고요,더 낮춰 보고요. 부려먹으려고 강제로 끌고와서 그것도 모자라서 전쟁 지고 나서 분풀이를 하기 위해서 또 한인들을 죽이고요...오늘날까지 일본 정부에서는 책임을 안 지고 있습니다."

사할린에 남겨진 윤 씨의 아버지는 숨을 거둘 때까지 끝내 러시아 국적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윤상철(한인 2세 변호사) : "여기 한인들 인생을 고치는 그런 결정이 생길 수 있을 거라고... 첫번째로, 제일 먼저 갈 사람은 그래도 아무래도 국적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뽑힐 거라고..."

구 소련을 거쳐 러시아에서 국적 없는 한인으로 사는 것은 어떤 생활이었을까.

<녹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건축가로 성공해 지금은 은퇴한 70살 권창식 씨는 산증인입니다.

자신이 직접 지은 집에서 아들 며느리 손자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 권씨지만, 지난 시간은 고통으로 기억됩니다.

<인터뷰> 권창식(한인 2세 건축가) : "차별이 심했습니다 아주. 일을 아무리 잘 해도 저희들은 아무것도 혜택 받는 것이 없었습니다. 저 대학 졸업했어도 전문학교 끝나면 러시아 사람들 밑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권 씨 아버지 역시 강제징용을 당했고 권 씨 아버지를 쫓아 어머니와 조부모까지 사할린으로 왔다고 합니다.

<인터뷰> 권창식(한인 2세 건축가) : "아버님은 1953년도에 돌아가셨고 저 6살 때, 할아버님은 56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이나 할머님은 계속 한국을 그리워했었습니다. 진짜 말하자면 (저는)분노만 있었습니다. 어째서 저들은 이런 처지에 처해 있는가..."

한인 1세대 였던 권씨의 장인과 장모는 한국으로 영주귀국했습니다.

24년 전인 1989년 시작된 한일 양국의 '사할린 한인지원 공동사업'을 통해섭니다.

정부가 영주귀국 자격을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로 제한했고, 그래서 후손들은 지금까지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권창식 씨는 '제2의 이산' 이라고 표현합니다.

<인터뷰> 권창식(한인 2세 건축가) : "나이 많은 분들이 (한국으로)가면 그 자식들도 같이 따라갈 수 있게 이산가족을 안 만들었으면 합니다. 제생각으론 일본도 이산가족 안 만들고, 독일도 안 만들고 이스라엘도 안 만듭니다. 이산가족이란 걸.. 딱 한국 하나만 지금 이산가족을 만들고 있어요."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권 씨의 장모 87살 최온가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사할린동포를 위해 마련된 영구 임대 아파트입니다.

최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입주한 15년 전을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최온가(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대) : "참 좋았어요. 오고 싶어서 조선.. 여기 왔지요. 오고 싶어서 자꾸... 다른데는 가기 싫고.."

하지만 몇 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이제는 할머니 혼자 남았습니다.

<인터뷰> 최온가(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대) : "아무것도 안해요. 집에서 이거(TV)나 보고 있고.."

함께 입주한 1세대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할아버지처럼 세상을 등진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인터뷰> 최온가(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대) : "드문드문 놀러야 갑니다. 가기야 가지만도 많이 안 가요. (여기(사진 속)계시는 분들 다 여기 계세요?) 없어요. 다 돌아가셔 가지고 여기 사람들.."

사할린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명절에나 한번 씩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 최온가(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대) : "머리가 어찌나 좋은지요. 얘(손자)는 말도 못해요."

<인터뷰> 최온가(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대) : "((증손자)보여 드릴게요) 많이 컸다. 이야~ 막심(손자)하고 조금 닮았다."

그래도 최 할머니는 사할린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인터뷰> 최온가(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대) : "나는 조선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고 싶어요. 다른 데 가기 싫어요."

사할린에는 이렇게 부모가 영주귀국 하고 남은 한인 2세들이 많습니다.

취재진이 만난 임옥순 씨도 걱정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인터뷰> 엄옥순(한인 2세) : "혼자 계세요. 인천에서... 걱정돼요. 나의 어머니, 어머니 나이가 많아요. 시간이 없어서 자주 못 봐요. 가슴 아파요.."

부모에 대한 기억을 묻는 질문에 엄 씨는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로 답했습니다.

<인터뷰> 엄옥순(한인 2세) : "노~란 샤쓰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 맘에들어"

사할린 시내 곳곳엔 지난 70년 간 한인과 그 후손들이 살아남기 위해 쏟아부은 땀과 노력의 결실이 있습니다.

사할린에서도 손에 꼽히는 9층짜리 고급 호텔.

이 호텔 사장 권행자 씨는 한인 2세입니다.

원유개발사업이 한창이던 1999년.

외국인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호텔사업을 시작해 불과 2~3년 만에 성공궤도에 올려놨습니다.

<인터뷰> 권행자(한인 2세 호텔 사장) : "(당시)외국 손님들이 완전히 우리 호텔에 2년을 살았죠. 빈 방이 없었어요. 100% 차서.."

<인터뷰> 권행자(한인 2세 호텔 사장) : "한국 사람은 뭔가 있잖아요, 민족 근성이 있다 싶어요. 시장 같은데 가보면 전체 한국사람들이고 가끔 러시아 사람들이 보이는 거에요. 그 정도로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거죠."

시내에서도 한 눈에 띄는 아파트, 현지 한국 기업가 현덕수 씨가 지은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아파트는 6년 전 지은 이 아파트를 러시아인들이 따라 지은 것이라며 현 사장은 자랑스러워 합니다.

<인터뷰> 현덕수(건설사 사장) : "이쪽은 240세대, (새로짓는) 이쪽은 320세대 (일대에서)제일 고급입니다. 75% 분양됐고 올 10월이면 준공입니다."

차별받고 멸시받던 조선인을 러시아인들은 비아냥거림을 담아 '까레이스키'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한인을 보는 눈도 이제는 바뀌었습니다.

<인터뷰> 임용군(사할린주 한인협회 회장) : "호텔의 80%를 다 우리 동포들이 합니다. 2,3세들은 공부를 많이 하고 또 머리도 더 좋고 그러니까 사업도 잘 합니다.(러시아인들이) '어이구 너네 까레이스키' 이런 말 이제 안 합니다."

70년이 넘는 긴 시간은 한인 1,2세들에게 또다른 고민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인터뷰> 김춘자(사할린 우리말방송국 국장) : "3,4세가 우리 역사를 잘 몰라요. 2세들마저 우리말을 제대로 못 배웠죠. 저도 사실은 4년맊에 우리말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4세대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한국의 말과 문화, 정서를 지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은 현지 한인방송과 신문.

그러나 이것 만으론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춘자(사할린 우리말방송국 국장) : "한국정부의 대책이 시급합니다. 사할린 동포들을 한민족으로 여겨서 교육을, 한국어를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고..."

구성진 노래로 어머니를 기억했던 엄옥순 씨.

한국의 한 종교 행사를 찾았습니다.

<녹취>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전세계 해외 한인 동포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한국에서 만나는 자리, 엄 씨는 4년째 이 행사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 엄옥순(사할린 한인 2세) : "다른 나라의 한국사람들이 왔어요. 나는 한국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도 한국사람이에요. 피는 한가지에요.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요.."

일제강점기 침탈과 오욕의 역사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사할린 한인 1세대의 삶.

그 후손들에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안타까움입니다.

<인터뷰> 권행자(한인 2세 호텔사장) : "제가 거기(한국)가면 제 고향 같아요. 우리 부모의 고향이지만 제 고향 같고...우리 부모님들이 끝까지 (고향에 가서) 살지 못하고 여기서 돌아가신게 정말 아쉽고 그래요."

그리고 한인 1세대 후손들은 아직도 부모가 끌려온 곳에서 돌아가지 못하고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터뷰> 윤상철(한인 2세 변호사) : "시간이 없습니다. 2세가 벌써 70살이 넘었습니다. 여권을 꺼내서 이것을 보라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인터뷰> 김춘자(한인2세 우리말방송국 국장) : "우리가 선택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 남아있는 한인 동포들에 한해서는 (대한민국이) 모국이 되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터뷰> 권창식(한인 2세 건축가) : "저희들 세대가 영주귀국할 수 있도록 좀 노렸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임용군(사할린주 한인협회 회장) : "한국 정부는 사할린 1세대에게 생활비를 지원해야 됩니다. 일본 정부는 사과 보상하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번 돈을 돌려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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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할린 한인 ‘저는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 입력 2016-08-28 23:46:09
    • 수정2016-08-29 17:44:38
    취재파일K
<프롤로그>

<인터뷰> 조용섭(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 "(탄광) 직원들이 도망간 사람들을 잡아와서 운동장에 세워놓고 채찍으로 두들겨 팼어... 도망갔다고..."

<인터뷰> 엄옥순(사할린 한인 2세) : "어머니 나이가 많아요. 시간이 없어서 한국에 못 가고 자주 못 봐요. 좀 가슴 아파요..."

<인터뷰> 윤상철(사할린 한인2세) : "한국으로 살러 안 가도, 여기 남아도 어느 나라 국민이냐 하면 여권을 보여주면서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오프닝>

이곳은 러시아 사할린 섬 남쪽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끌려와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조선인 수 만 명이 해방과 함께 바로 이곳에서 조국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배는 오지 않았고, 그들은 반세기 가까이 이곳에 버려졌습니다.

올해로 광복 71년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사할린 한인들의 고통과 기다림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사할린 한인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있는 러시아 사할린 주.

유즈노사할린스크는 사할린 남부에 위치한 주돕니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3시간 남짓 걸립니다.

이른 아침, 재래시장을 찾아갔습니다.

장사 준비에 바쁜 상인들.

동양인으로 보이는 상인들이 많습니다.

<인터뷰> 지달시(한인2세) : "(한인이시죠? 한국말 하실 수 있으세요?) 조금 (매일 일찍 나오세요?) 7시 (장사는 좀 되는 편이세요?) 예,좀 되죠"

주변 러시아 상인들은 한국 상인들을 최고로 칩니다.

<인터뷰> 따지아나(러시아 상인) : "한국 아주머니들 부지런하고 아침에 러시아 사람들보다 더 일찍 나오고요, 그리고 제일 늦게 갑니다"

이곳 상인인 강수자 씨도 해방 직전 러시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인터뷰> 강수자(한인2세) : "(한인들이 왜 이렇게 부지런해요?) 부지런해야 살지요. 자식들한테 뭣하러 손 벌리겠어요"

강씨는 부지런함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을 거 같다고 했습니다.

<인터뷰> 강수자(한인2세) : "어머니 정말 부지런했죠. 농사짓고 아이들 도와주며...(아버지는) 일본 사람들이 (일본으로) 데려갔는데요 간 다음에 다시 안 돌아왔어요. 그래서 갈라져 있다가 어머니는 여기서 시집가고 아버지는 거기서 장가가셔가지고..."

강씨는 일제강점기 이곳으로 강제징용된 한인의 후손입니다.

사할린에는 강씨와 같은 한인 후손이 2만 5천명 가량 살고 있습니다.

전체 사할린 인구 50만명 중 5%가 한인 후손들입니다.

야채를 팔아 아들 둘을 가르쳤다는 김춘자씨.

<인터뷰> 김춘자(한인 2세) : "(며느님은 한인이세요?) 조선 며느립니다. (둘 다요?) 네 (착해요?) 착합니다, 내가 말했지요, 소련 여자면 우리집에 발걸음도 하지 말랬어요. 조선음식 좋아한단 말이에요. 우리 아이들은.."

70살, 해방 직후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 2세 변호사 윤상철씨를 만났습니다.

윤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도 강제 징용된 다른 조선인처럼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인터뷰> 윤상철(한인 2세 변호사) : "1942년도에 저희 아버지가 17살 때 경상북도 와촌면 덕천에 사셨는데요. 거기서 실제로 모집을 왔습니다. 17살에. 그 때 모집 온 사람들 대부분 다 탄광으로 정해져서 왔지요. 노예생활을 했지요. 아무데도 못 가고요. 자의로 나온 사람들은 경찰에 잡히면 당하고요, 그 탄광으로 되돌려 보내졌지요"

윤 씨와 함께 강제징용 위령비를 찾았습니다.

위령비에는 사할린으로 끌려온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다시 일본 탄광으로 징용되는 이른바 '이중징용'을 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패전 직후에도 일본군은 그냥 퇴각하지 않았습니다.

윤씨가 안내한 사할린 남부, 미즈호 촌이라고 불렸던 포자르스코예.

조선인 20여명이 일본군의 분풀이 대상으로 무참히 학살된 곳입니다.

<녹취> 윤상철(한인 2세 변호사) : "'이놈들 스파이짓 하고 러시아 사람들한테 우리(일본)를 반대해서 도우고 있다. 그럼 저놈들 다 죽이자' 그래가지고 대나무로 창을 만들어서..."

우리 정부가 확인한 당시 구소련 정부의 기록입니다.

당시 집단 학살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터뷰> 윤상철(한인2세 변호사) : "한인들을 업신여겨 보고요,더 낮춰 보고요. 부려먹으려고 강제로 끌고와서 그것도 모자라서 전쟁 지고 나서 분풀이를 하기 위해서 또 한인들을 죽이고요...오늘날까지 일본 정부에서는 책임을 안 지고 있습니다."

사할린에 남겨진 윤 씨의 아버지는 숨을 거둘 때까지 끝내 러시아 국적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윤상철(한인 2세 변호사) : "여기 한인들 인생을 고치는 그런 결정이 생길 수 있을 거라고... 첫번째로, 제일 먼저 갈 사람은 그래도 아무래도 국적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뽑힐 거라고..."

구 소련을 거쳐 러시아에서 국적 없는 한인으로 사는 것은 어떤 생활이었을까.

<녹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건축가로 성공해 지금은 은퇴한 70살 권창식 씨는 산증인입니다.

자신이 직접 지은 집에서 아들 며느리 손자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 권씨지만, 지난 시간은 고통으로 기억됩니다.

<인터뷰> 권창식(한인 2세 건축가) : "차별이 심했습니다 아주. 일을 아무리 잘 해도 저희들은 아무것도 혜택 받는 것이 없었습니다. 저 대학 졸업했어도 전문학교 끝나면 러시아 사람들 밑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권 씨 아버지 역시 강제징용을 당했고 권 씨 아버지를 쫓아 어머니와 조부모까지 사할린으로 왔다고 합니다.

<인터뷰> 권창식(한인 2세 건축가) : "아버님은 1953년도에 돌아가셨고 저 6살 때, 할아버님은 56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이나 할머님은 계속 한국을 그리워했었습니다. 진짜 말하자면 (저는)분노만 있었습니다. 어째서 저들은 이런 처지에 처해 있는가..."

한인 1세대 였던 권씨의 장인과 장모는 한국으로 영주귀국했습니다.

24년 전인 1989년 시작된 한일 양국의 '사할린 한인지원 공동사업'을 통해섭니다.

정부가 영주귀국 자격을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로 제한했고, 그래서 후손들은 지금까지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권창식 씨는 '제2의 이산' 이라고 표현합니다.

<인터뷰> 권창식(한인 2세 건축가) : "나이 많은 분들이 (한국으로)가면 그 자식들도 같이 따라갈 수 있게 이산가족을 안 만들었으면 합니다. 제생각으론 일본도 이산가족 안 만들고, 독일도 안 만들고 이스라엘도 안 만듭니다. 이산가족이란 걸.. 딱 한국 하나만 지금 이산가족을 만들고 있어요."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권 씨의 장모 87살 최온가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사할린동포를 위해 마련된 영구 임대 아파트입니다.

최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입주한 15년 전을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최온가(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대) : "참 좋았어요. 오고 싶어서 조선.. 여기 왔지요. 오고 싶어서 자꾸... 다른데는 가기 싫고.."

하지만 몇 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이제는 할머니 혼자 남았습니다.

<인터뷰> 최온가(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대) : "아무것도 안해요. 집에서 이거(TV)나 보고 있고.."

함께 입주한 1세대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할아버지처럼 세상을 등진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인터뷰> 최온가(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대) : "드문드문 놀러야 갑니다. 가기야 가지만도 많이 안 가요. (여기(사진 속)계시는 분들 다 여기 계세요?) 없어요. 다 돌아가셔 가지고 여기 사람들.."

사할린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명절에나 한번 씩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 최온가(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대) : "머리가 어찌나 좋은지요. 얘(손자)는 말도 못해요."

<인터뷰> 최온가(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대) : "((증손자)보여 드릴게요) 많이 컸다. 이야~ 막심(손자)하고 조금 닮았다."

그래도 최 할머니는 사할린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인터뷰> 최온가(영주귀국 사할린 한인 1세대) : "나는 조선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고 싶어요. 다른 데 가기 싫어요."

사할린에는 이렇게 부모가 영주귀국 하고 남은 한인 2세들이 많습니다.

취재진이 만난 임옥순 씨도 걱정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인터뷰> 엄옥순(한인 2세) : "혼자 계세요. 인천에서... 걱정돼요. 나의 어머니, 어머니 나이가 많아요. 시간이 없어서 자주 못 봐요. 가슴 아파요.."

부모에 대한 기억을 묻는 질문에 엄 씨는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로 답했습니다.

<인터뷰> 엄옥순(한인 2세) : "노~란 샤쓰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 맘에들어"

사할린 시내 곳곳엔 지난 70년 간 한인과 그 후손들이 살아남기 위해 쏟아부은 땀과 노력의 결실이 있습니다.

사할린에서도 손에 꼽히는 9층짜리 고급 호텔.

이 호텔 사장 권행자 씨는 한인 2세입니다.

원유개발사업이 한창이던 1999년.

외국인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호텔사업을 시작해 불과 2~3년 만에 성공궤도에 올려놨습니다.

<인터뷰> 권행자(한인 2세 호텔 사장) : "(당시)외국 손님들이 완전히 우리 호텔에 2년을 살았죠. 빈 방이 없었어요. 100% 차서.."

<인터뷰> 권행자(한인 2세 호텔 사장) : "한국 사람은 뭔가 있잖아요, 민족 근성이 있다 싶어요. 시장 같은데 가보면 전체 한국사람들이고 가끔 러시아 사람들이 보이는 거에요. 그 정도로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거죠."

시내에서도 한 눈에 띄는 아파트, 현지 한국 기업가 현덕수 씨가 지은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아파트는 6년 전 지은 이 아파트를 러시아인들이 따라 지은 것이라며 현 사장은 자랑스러워 합니다.

<인터뷰> 현덕수(건설사 사장) : "이쪽은 240세대, (새로짓는) 이쪽은 320세대 (일대에서)제일 고급입니다. 75% 분양됐고 올 10월이면 준공입니다."

차별받고 멸시받던 조선인을 러시아인들은 비아냥거림을 담아 '까레이스키'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한인을 보는 눈도 이제는 바뀌었습니다.

<인터뷰> 임용군(사할린주 한인협회 회장) : "호텔의 80%를 다 우리 동포들이 합니다. 2,3세들은 공부를 많이 하고 또 머리도 더 좋고 그러니까 사업도 잘 합니다.(러시아인들이) '어이구 너네 까레이스키' 이런 말 이제 안 합니다."

70년이 넘는 긴 시간은 한인 1,2세들에게 또다른 고민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인터뷰> 김춘자(사할린 우리말방송국 국장) : "3,4세가 우리 역사를 잘 몰라요. 2세들마저 우리말을 제대로 못 배웠죠. 저도 사실은 4년맊에 우리말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4세대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한국의 말과 문화, 정서를 지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은 현지 한인방송과 신문.

그러나 이것 만으론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춘자(사할린 우리말방송국 국장) : "한국정부의 대책이 시급합니다. 사할린 동포들을 한민족으로 여겨서 교육을, 한국어를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고..."

구성진 노래로 어머니를 기억했던 엄옥순 씨.

한국의 한 종교 행사를 찾았습니다.

<녹취>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전세계 해외 한인 동포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한국에서 만나는 자리, 엄 씨는 4년째 이 행사를 찾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 엄옥순(사할린 한인 2세) : "다른 나라의 한국사람들이 왔어요. 나는 한국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도 한국사람이에요. 피는 한가지에요.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요.."

일제강점기 침탈과 오욕의 역사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사할린 한인 1세대의 삶.

그 후손들에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안타까움입니다.

<인터뷰> 권행자(한인 2세 호텔사장) : "제가 거기(한국)가면 제 고향 같아요. 우리 부모의 고향이지만 제 고향 같고...우리 부모님들이 끝까지 (고향에 가서) 살지 못하고 여기서 돌아가신게 정말 아쉽고 그래요."

그리고 한인 1세대 후손들은 아직도 부모가 끌려온 곳에서 돌아가지 못하고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터뷰> 윤상철(한인 2세 변호사) : "시간이 없습니다. 2세가 벌써 70살이 넘었습니다. 여권을 꺼내서 이것을 보라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인터뷰> 김춘자(한인2세 우리말방송국 국장) : "우리가 선택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 남아있는 한인 동포들에 한해서는 (대한민국이) 모국이 되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터뷰> 권창식(한인 2세 건축가) : "저희들 세대가 영주귀국할 수 있도록 좀 노렸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임용군(사할린주 한인협회 회장) : "한국 정부는 사할린 1세대에게 생활비를 지원해야 됩니다. 일본 정부는 사과 보상하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번 돈을 돌려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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