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플러스] ‘직지’ 환수 외국인에게만 맡겨서야
입력 2016.09.03 (16:57)
수정 2016.09.06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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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문화유산은 한글과 불교문화·고려청자·거북선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인쇄술'도 빼 놓을 수 없다.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무구 정광 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목판 인쇄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금속활자도 마찬가지다. 독일인 구텐베르크가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것이 15세기 중반인데 우리는 이보다 200여 년 앞선 13세기에 이미 금속활자로 책을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후기 문장가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 『상정예문』이란 책을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전하고 있다. 아깝게도 이 책은 현재 실물이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 앞서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심체요절』이 있다.
더욱이 구텐베르크가 당시 조선의 금속인쇄기술을 배워 서양 최초 금속활자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우리를 더욱 자랑스럽게 한다.
"교황 사절단 방한 후 금속인쇄술 얻어"
2005년 5월 중순 서울에서 미래의 정보기술(IT) 문화를 전망하는 '서울디지털 포럼 2005'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 전 미국 부통령 엘 고어가 참석했는데 그는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금속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은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교황의 사절단을 만났고 그 사절단 가운데는 한국을 방문하고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가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당시 언론은 전하고 있다. 아울러 언론은 엘 고어 부통령은 이 같은 말을 스웨덴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당시 이동식 전 KBS 기자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구텐베르크가 한국을 방문한 친구들(교황의 사절단)로부터 인쇄술을 배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구텐베르크가 처음으로 인쇄술 개량을 시작한 것이 1434년에서 1444년 사이이고, 구텐베르크의 첫 성서발행이 1452년쯤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그가 한국을 다녀온 친구를 만난 것은 1430년에서 1440년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1430년은 조선왕조 세종 12년, 1440년은 세종 22년이다. 이 당시에 가장 주목할 사건은 태종 3년인 1403년에 이뤄진 계미자의 주조와 이에 따른 서적의 대량 인쇄이다.
계미자 주조는 고려 시대 금속활자가 발명된 이후 170년 뒤의 일이지만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대량으로 서적을 간행 보급한 사건으로서, 이때 간행된 서적들은 여전히 구텐베르크를 앞서는 것이다. 이후 세종은 계미자를 개량해 1434년에는 글자체가 아름답다고 평가 받는 갑인자를 만들었다.
구텐베르크 친구들이 교황 사절단으로 한국을 방문했다면 바로 이 무렵이다. 조선왕조 초기 태종과 세종에 의해 활자 혁명, 인쇄 혁명이 일어난 때다. 교황 사절단이 인쇄분야의 이 새로운 움직임을 보고 듣고 놀라 인쇄 관련 책자와 물품들을 가지고 갔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 세계문명사를 새로 써야 할 정도의 폭발력을 가진 엘 고어 부통령의 말을 듣고도 언론이나 정부기관에서 이를 확인하는 후속보도나 조치를 취하지 않아 이 말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직지심체요절'은 충북 청주에 있는 흥덕사에서 1377년에 찍어낸 책이다. 이 책은 백운이란 호를 가진 경한 스님이 부처님과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고승, 대덕들의 말씀이나 편지 등에서 뽑은 내용을 수록해 놓은 것이다. 당시 50에서 100부 정도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현재는 하권 한 책만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된 '직지심체'는 '직지인심견성성불'에서 따온 말로 '참선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보면,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라는 뜻이다. 본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인데 너무 길어서 『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직지』등으로 줄여서 부르는데 『직지심체요절』이 가장 널리 불리는 이름이다.
직지 형상의 책 설치물 ‘직지 파빌리온’
'직지'가 발간된 흥덕사가 있는 청주에서는 수년 전부터 직지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직지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우리의 우수한 인쇄문화를 자랑하는 축제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부터는 국제행사로 승격돼 예년보다 볼거리와 체험행사가 다양하고 풍성해졌다.
[연관기사] 현존 최고(最古) 금속활자 ‘직지’ 재조명
독일 마인츠 구텐베르크 박물관은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직지코리아 주제 전시관에 공개했다. 이 인쇄기는 1455년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인 구텐베르크 성서를 찍은 인쇄기를 17세기에 다시 만든 것이다.
직지 페스티벌에 공개된 구텐베르크 인쇄기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엘 고어 전 부통령의 말이 맞다면 이 인쇄기의 원형은 조선시대 우리 인쇄기와 닮은 것일 거다. 직지페스티벌을 찾는 관람객은 누구나 현장에서 『직지심체요절』을 볼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애절한 마음으로 이 바람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외국인이 있어 눈길을 끈다.
직지 반환 앞장서는 미국인
이 외국인은 미국인 패닝턴 씨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서울의 한 국제특허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패닝턴 씨는 2013년 직지가 발간된 옛 흥덕사 자리에 세워진 고인쇄박물관을 방문한 뒤 직지 반환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7천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고 한다.
직지 페스티벌이 개막한 9월 1일 패닝턴 씨는 축제장에 'Bring Jikji back to korea'라는 현수막을 걸고 관람객들의 서명을 받았다. 패닝턴 씨는 "중요한 문화유산인 '직지'가 제작된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직지 반환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태도는 너무 소극적이다. 직지가 '강탈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콜랭 드 플랑시 대사가 '구입한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지'의 역사적 중요성과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해 볼 때 직지가 '거래된 문화재'라는 사실이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플랑시가 '직지'를 구매했다는 증거도 불충분하다며 압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패닝턴 씨는 머지않아 환수운동 서명부를 탄원서 형식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나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 제출할 계획이다.
'직지'는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초대 공사와 3대 공사를 지낸 콜랭 드 플랑시가 1880년 대 말 우리나라 고서점에서 수집해 갔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직지'는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이름없이 보관돼 있다가 2011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공을 세운 박병선 박사에 의해 1967년 발견됐다.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 전시회'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70여 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발간된 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2001년 9월 '직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정부는 『직지심체요절』반환에 대해 소극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프랑스가 강탈해간 문화재가 아닌데다 2011년 외규장각 도서를 대여해 준 것도 고마운데 무리하게 요구할 경우 외교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청주시가 프랑스 정부에수차례 대여를 요청했지만 "직지는 한 번도 외부로 반출된 사례가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민간 차원에서 문화재 반환운동을 펴고 있는 경북대학교 이상규 교수는 "프랑스 공사가 직지를 구매한 것으로 알려 졌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지 않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며, 문화재는 고국의 품에 안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관점에서 정부는 긴 안목으로 반환 요구를 공식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규 교수에 따르면 우리 문화재 가운데 해외로 유출돼 환수하지 못하고 있는 문화재가 세계 17개 국에 7만 6천여 점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일본이 45%, 미국이 22.2%, 프랑스가 4%정도 소장하고 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문화유산들
일본에 가 있는 문화재가 많은 것은 임진왜란을 통한 침탈에다, 일제가 우리를 식민지로 합방하면서 우리 문화재를 강탈해갔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는 '직지심체요절', 외규장각 도서, 고려의 불화, 고서 등이 있으며, 일본으로 유출된 것 중에는 수월관음도와 몽유도원도도 있다.
이들 문화재에 대해 정부는 반환 요구는 물론이고 '직지'처럼 거래된 문화재에 대해서도 '문화재는 고국에 있는 것이 가치 구현과 보존에 가장 이상적이다'는 보편적 정서에 입각해 반환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문화재적 가치가 있고, 우리문화의 품격과민족적 긍지를 높일 수 있는 문화재는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서라도 환수하는 방안을강구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교묘하게 밀반출되는 문화재가 허다한만큼 문화재 보호 관련법규를 정비할 것도 요구된다.
고국을 떠나 프랑스 도서관에 외롭게 있는 『직지심체요절』이 이 모든 것이 절실하다는 걸 웅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외국인이 환수운동을 먼저해 겸연쩍긴 하지만 우리정부와 민간도 다각도로 환수 방안을 강구해 세계 최고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이 고국으로 속히 금의환향하기를 기원한다.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무구 정광 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목판 인쇄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금속활자도 마찬가지다. 독일인 구텐베르크가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것이 15세기 중반인데 우리는 이보다 200여 년 앞선 13세기에 이미 금속활자로 책을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후기 문장가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 『상정예문』이란 책을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전하고 있다. 아깝게도 이 책은 현재 실물이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 앞서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심체요절』이 있다.
더욱이 구텐베르크가 당시 조선의 금속인쇄기술을 배워 서양 최초 금속활자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우리를 더욱 자랑스럽게 한다.
"교황 사절단 방한 후 금속인쇄술 얻어"
2005년 5월 중순 서울에서 미래의 정보기술(IT) 문화를 전망하는 '서울디지털 포럼 2005'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 전 미국 부통령 엘 고어가 참석했는데 그는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금속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은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교황의 사절단을 만났고 그 사절단 가운데는 한국을 방문하고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가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당시 언론은 전하고 있다. 아울러 언론은 엘 고어 부통령은 이 같은 말을 스웨덴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당시 이동식 전 KBS 기자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구텐베르크가 한국을 방문한 친구들(교황의 사절단)로부터 인쇄술을 배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구텐베르크가 처음으로 인쇄술 개량을 시작한 것이 1434년에서 1444년 사이이고, 구텐베르크의 첫 성서발행이 1452년쯤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그가 한국을 다녀온 친구를 만난 것은 1430년에서 1440년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1430년은 조선왕조 세종 12년, 1440년은 세종 22년이다. 이 당시에 가장 주목할 사건은 태종 3년인 1403년에 이뤄진 계미자의 주조와 이에 따른 서적의 대량 인쇄이다.
계미자 (좌) 갑인자 (우)
계미자 주조는 고려 시대 금속활자가 발명된 이후 170년 뒤의 일이지만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대량으로 서적을 간행 보급한 사건으로서, 이때 간행된 서적들은 여전히 구텐베르크를 앞서는 것이다. 이후 세종은 계미자를 개량해 1434년에는 글자체가 아름답다고 평가 받는 갑인자를 만들었다.
구텐베르크 친구들이 교황 사절단으로 한국을 방문했다면 바로 이 무렵이다. 조선왕조 초기 태종과 세종에 의해 활자 혁명, 인쇄 혁명이 일어난 때다. 교황 사절단이 인쇄분야의 이 새로운 움직임을 보고 듣고 놀라 인쇄 관련 책자와 물품들을 가지고 갔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 세계문명사를 새로 써야 할 정도의 폭발력을 가진 엘 고어 부통령의 말을 듣고도 언론이나 정부기관에서 이를 확인하는 후속보도나 조치를 취하지 않아 이 말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직지심체요절'은 충북 청주에 있는 흥덕사에서 1377년에 찍어낸 책이다. 이 책은 백운이란 호를 가진 경한 스님이 부처님과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고승, 대덕들의 말씀이나 편지 등에서 뽑은 내용을 수록해 놓은 것이다. 당시 50에서 100부 정도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현재는 하권 한 책만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된 '직지심체'는 '직지인심견성성불'에서 따온 말로 '참선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보면,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라는 뜻이다. 본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인데 너무 길어서 『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직지』등으로 줄여서 부르는데 『직지심체요절』이 가장 널리 불리는 이름이다.
직지 형상의 책 설치물 ‘직지 파빌리온’
'직지'가 발간된 흥덕사가 있는 청주에서는 수년 전부터 직지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직지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우리의 우수한 인쇄문화를 자랑하는 축제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부터는 국제행사로 승격돼 예년보다 볼거리와 체험행사가 다양하고 풍성해졌다.
[연관기사] 현존 최고(最古) 금속활자 ‘직지’ 재조명
독일 마인츠 구텐베르크 박물관은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직지코리아 주제 전시관에 공개했다. 이 인쇄기는 1455년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인 구텐베르크 성서를 찍은 인쇄기를 17세기에 다시 만든 것이다.
직지 페스티벌에 공개된 구텐베르크 인쇄기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엘 고어 전 부통령의 말이 맞다면 이 인쇄기의 원형은 조선시대 우리 인쇄기와 닮은 것일 거다. 직지페스티벌을 찾는 관람객은 누구나 현장에서 『직지심체요절』을 볼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애절한 마음으로 이 바람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외국인이 있어 눈길을 끈다.
직지 반환 앞장서는 미국인
이 외국인은 미국인 패닝턴 씨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서울의 한 국제특허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패닝턴 씨는 2013년 직지가 발간된 옛 흥덕사 자리에 세워진 고인쇄박물관을 방문한 뒤 직지 반환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7천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고 한다.
직지 페스티벌이 개막한 9월 1일 패닝턴 씨는 축제장에 'Bring Jikji back to korea'라는 현수막을 걸고 관람객들의 서명을 받았다. 패닝턴 씨는 "중요한 문화유산인 '직지'가 제작된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직지 반환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태도는 너무 소극적이다. 직지가 '강탈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콜랭 드 플랑시 대사가 '구입한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지'의 역사적 중요성과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해 볼 때 직지가 '거래된 문화재'라는 사실이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플랑시가 '직지'를 구매했다는 증거도 불충분하다며 압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패닝턴 씨는 머지않아 환수운동 서명부를 탄원서 형식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나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 제출할 계획이다.
'직지'는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초대 공사와 3대 공사를 지낸 콜랭 드 플랑시가 1880년 대 말 우리나라 고서점에서 수집해 갔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직지'는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이름없이 보관돼 있다가 2011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공을 세운 박병선 박사에 의해 1967년 발견됐다.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 전시회'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70여 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발간된 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2001년 9월 '직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인정서
정부는 『직지심체요절』반환에 대해 소극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프랑스가 강탈해간 문화재가 아닌데다 2011년 외규장각 도서를 대여해 준 것도 고마운데 무리하게 요구할 경우 외교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청주시가 프랑스 정부에수차례 대여를 요청했지만 "직지는 한 번도 외부로 반출된 사례가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민간 차원에서 문화재 반환운동을 펴고 있는 경북대학교 이상규 교수는 "프랑스 공사가 직지를 구매한 것으로 알려 졌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지 않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며, 문화재는 고국의 품에 안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관점에서 정부는 긴 안목으로 반환 요구를 공식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규 교수에 따르면 우리 문화재 가운데 해외로 유출돼 환수하지 못하고 있는 문화재가 세계 17개 국에 7만 6천여 점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일본이 45%, 미국이 22.2%, 프랑스가 4%정도 소장하고 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문화유산들
안견의 몽유도원도
일본에 가 있는 문화재가 많은 것은 임진왜란을 통한 침탈에다, 일제가 우리를 식민지로 합방하면서 우리 문화재를 강탈해갔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는 '직지심체요절', 외규장각 도서, 고려의 불화, 고서 등이 있으며, 일본으로 유출된 것 중에는 수월관음도와 몽유도원도도 있다.
이들 문화재에 대해 정부는 반환 요구는 물론이고 '직지'처럼 거래된 문화재에 대해서도 '문화재는 고국에 있는 것이 가치 구현과 보존에 가장 이상적이다'는 보편적 정서에 입각해 반환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문화재적 가치가 있고, 우리문화의 품격과민족적 긍지를 높일 수 있는 문화재는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서라도 환수하는 방안을강구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교묘하게 밀반출되는 문화재가 허다한만큼 문화재 보호 관련법규를 정비할 것도 요구된다.
고국을 떠나 프랑스 도서관에 외롭게 있는 『직지심체요절』이 이 모든 것이 절실하다는 걸 웅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외국인이 환수운동을 먼저해 겸연쩍긴 하지만 우리정부와 민간도 다각도로 환수 방안을 강구해 세계 최고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이 고국으로 속히 금의환향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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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플러스] ‘직지’ 환수 외국인에게만 맡겨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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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6-09-03 16:57:00
- 수정2016-09-06 10:16:00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문화유산은 한글과 불교문화·고려청자·거북선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인쇄술'도 빼 놓을 수 없다.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무구 정광 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목판 인쇄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금속활자도 마찬가지다. 독일인 구텐베르크가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것이 15세기 중반인데 우리는 이보다 200여 년 앞선 13세기에 이미 금속활자로 책을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후기 문장가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 『상정예문』이란 책을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전하고 있다. 아깝게도 이 책은 현재 실물이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 앞서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심체요절』이 있다.
더욱이 구텐베르크가 당시 조선의 금속인쇄기술을 배워 서양 최초 금속활자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우리를 더욱 자랑스럽게 한다.
"교황 사절단 방한 후 금속인쇄술 얻어"
2005년 5월 중순 서울에서 미래의 정보기술(IT) 문화를 전망하는 '서울디지털 포럼 2005'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 전 미국 부통령 엘 고어가 참석했는데 그는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금속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은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교황의 사절단을 만났고 그 사절단 가운데는 한국을 방문하고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가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당시 언론은 전하고 있다. 아울러 언론은 엘 고어 부통령은 이 같은 말을 스웨덴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당시 이동식 전 KBS 기자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구텐베르크가 한국을 방문한 친구들(교황의 사절단)로부터 인쇄술을 배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구텐베르크가 처음으로 인쇄술 개량을 시작한 것이 1434년에서 1444년 사이이고, 구텐베르크의 첫 성서발행이 1452년쯤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그가 한국을 다녀온 친구를 만난 것은 1430년에서 1440년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1430년은 조선왕조 세종 12년, 1440년은 세종 22년이다. 이 당시에 가장 주목할 사건은 태종 3년인 1403년에 이뤄진 계미자의 주조와 이에 따른 서적의 대량 인쇄이다.
계미자 주조는 고려 시대 금속활자가 발명된 이후 170년 뒤의 일이지만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대량으로 서적을 간행 보급한 사건으로서, 이때 간행된 서적들은 여전히 구텐베르크를 앞서는 것이다. 이후 세종은 계미자를 개량해 1434년에는 글자체가 아름답다고 평가 받는 갑인자를 만들었다.
구텐베르크 친구들이 교황 사절단으로 한국을 방문했다면 바로 이 무렵이다. 조선왕조 초기 태종과 세종에 의해 활자 혁명, 인쇄 혁명이 일어난 때다. 교황 사절단이 인쇄분야의 이 새로운 움직임을 보고 듣고 놀라 인쇄 관련 책자와 물품들을 가지고 갔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 세계문명사를 새로 써야 할 정도의 폭발력을 가진 엘 고어 부통령의 말을 듣고도 언론이나 정부기관에서 이를 확인하는 후속보도나 조치를 취하지 않아 이 말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직지심체요절'은 충북 청주에 있는 흥덕사에서 1377년에 찍어낸 책이다. 이 책은 백운이란 호를 가진 경한 스님이 부처님과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고승, 대덕들의 말씀이나 편지 등에서 뽑은 내용을 수록해 놓은 것이다. 당시 50에서 100부 정도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현재는 하권 한 책만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된 '직지심체'는 '직지인심견성성불'에서 따온 말로 '참선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보면,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라는 뜻이다. 본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인데 너무 길어서 『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직지』등으로 줄여서 부르는데 『직지심체요절』이 가장 널리 불리는 이름이다.
직지 형상의 책 설치물 ‘직지 파빌리온’
'직지'가 발간된 흥덕사가 있는 청주에서는 수년 전부터 직지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직지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우리의 우수한 인쇄문화를 자랑하는 축제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부터는 국제행사로 승격돼 예년보다 볼거리와 체험행사가 다양하고 풍성해졌다.
[연관기사] 현존 최고(最古) 금속활자 ‘직지’ 재조명
독일 마인츠 구텐베르크 박물관은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직지코리아 주제 전시관에 공개했다. 이 인쇄기는 1455년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인 구텐베르크 성서를 찍은 인쇄기를 17세기에 다시 만든 것이다.
직지 페스티벌에 공개된 구텐베르크 인쇄기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엘 고어 전 부통령의 말이 맞다면 이 인쇄기의 원형은 조선시대 우리 인쇄기와 닮은 것일 거다. 직지페스티벌을 찾는 관람객은 누구나 현장에서 『직지심체요절』을 볼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애절한 마음으로 이 바람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외국인이 있어 눈길을 끈다.
직지 반환 앞장서는 미국인
이 외국인은 미국인 패닝턴 씨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서울의 한 국제특허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패닝턴 씨는 2013년 직지가 발간된 옛 흥덕사 자리에 세워진 고인쇄박물관을 방문한 뒤 직지 반환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7천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고 한다.
직지 페스티벌이 개막한 9월 1일 패닝턴 씨는 축제장에 'Bring Jikji back to korea'라는 현수막을 걸고 관람객들의 서명을 받았다. 패닝턴 씨는 "중요한 문화유산인 '직지'가 제작된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직지 반환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태도는 너무 소극적이다. 직지가 '강탈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콜랭 드 플랑시 대사가 '구입한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지'의 역사적 중요성과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해 볼 때 직지가 '거래된 문화재'라는 사실이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플랑시가 '직지'를 구매했다는 증거도 불충분하다며 압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패닝턴 씨는 머지않아 환수운동 서명부를 탄원서 형식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나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 제출할 계획이다.
'직지'는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초대 공사와 3대 공사를 지낸 콜랭 드 플랑시가 1880년 대 말 우리나라 고서점에서 수집해 갔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직지'는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이름없이 보관돼 있다가 2011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공을 세운 박병선 박사에 의해 1967년 발견됐다.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 전시회'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70여 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발간된 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2001년 9월 '직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정부는 『직지심체요절』반환에 대해 소극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프랑스가 강탈해간 문화재가 아닌데다 2011년 외규장각 도서를 대여해 준 것도 고마운데 무리하게 요구할 경우 외교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청주시가 프랑스 정부에수차례 대여를 요청했지만 "직지는 한 번도 외부로 반출된 사례가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민간 차원에서 문화재 반환운동을 펴고 있는 경북대학교 이상규 교수는 "프랑스 공사가 직지를 구매한 것으로 알려 졌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지 않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며, 문화재는 고국의 품에 안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관점에서 정부는 긴 안목으로 반환 요구를 공식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규 교수에 따르면 우리 문화재 가운데 해외로 유출돼 환수하지 못하고 있는 문화재가 세계 17개 국에 7만 6천여 점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일본이 45%, 미국이 22.2%, 프랑스가 4%정도 소장하고 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문화유산들
일본에 가 있는 문화재가 많은 것은 임진왜란을 통한 침탈에다, 일제가 우리를 식민지로 합방하면서 우리 문화재를 강탈해갔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는 '직지심체요절', 외규장각 도서, 고려의 불화, 고서 등이 있으며, 일본으로 유출된 것 중에는 수월관음도와 몽유도원도도 있다.
이들 문화재에 대해 정부는 반환 요구는 물론이고 '직지'처럼 거래된 문화재에 대해서도 '문화재는 고국에 있는 것이 가치 구현과 보존에 가장 이상적이다'는 보편적 정서에 입각해 반환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문화재적 가치가 있고, 우리문화의 품격과민족적 긍지를 높일 수 있는 문화재는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서라도 환수하는 방안을강구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교묘하게 밀반출되는 문화재가 허다한만큼 문화재 보호 관련법규를 정비할 것도 요구된다.
고국을 떠나 프랑스 도서관에 외롭게 있는 『직지심체요절』이 이 모든 것이 절실하다는 걸 웅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외국인이 환수운동을 먼저해 겸연쩍긴 하지만 우리정부와 민간도 다각도로 환수 방안을 강구해 세계 최고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이 고국으로 속히 금의환향하기를 기원한다.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무구 정광 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목판 인쇄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금속활자도 마찬가지다. 독일인 구텐베르크가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것이 15세기 중반인데 우리는 이보다 200여 년 앞선 13세기에 이미 금속활자로 책을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후기 문장가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 『상정예문』이란 책을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전하고 있다. 아깝게도 이 책은 현재 실물이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 앞서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심체요절』이 있다.
더욱이 구텐베르크가 당시 조선의 금속인쇄기술을 배워 서양 최초 금속활자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우리를 더욱 자랑스럽게 한다.
"교황 사절단 방한 후 금속인쇄술 얻어"
2005년 5월 중순 서울에서 미래의 정보기술(IT) 문화를 전망하는 '서울디지털 포럼 2005'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 전 미국 부통령 엘 고어가 참석했는데 그는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금속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은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교황의 사절단을 만났고 그 사절단 가운데는 한국을 방문하고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가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당시 언론은 전하고 있다. 아울러 언론은 엘 고어 부통령은 이 같은 말을 스웨덴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당시 이동식 전 KBS 기자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구텐베르크가 한국을 방문한 친구들(교황의 사절단)로부터 인쇄술을 배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구텐베르크가 처음으로 인쇄술 개량을 시작한 것이 1434년에서 1444년 사이이고, 구텐베르크의 첫 성서발행이 1452년쯤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그가 한국을 다녀온 친구를 만난 것은 1430년에서 1440년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1430년은 조선왕조 세종 12년, 1440년은 세종 22년이다. 이 당시에 가장 주목할 사건은 태종 3년인 1403년에 이뤄진 계미자의 주조와 이에 따른 서적의 대량 인쇄이다.
계미자 주조는 고려 시대 금속활자가 발명된 이후 170년 뒤의 일이지만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대량으로 서적을 간행 보급한 사건으로서, 이때 간행된 서적들은 여전히 구텐베르크를 앞서는 것이다. 이후 세종은 계미자를 개량해 1434년에는 글자체가 아름답다고 평가 받는 갑인자를 만들었다.
구텐베르크 친구들이 교황 사절단으로 한국을 방문했다면 바로 이 무렵이다. 조선왕조 초기 태종과 세종에 의해 활자 혁명, 인쇄 혁명이 일어난 때다. 교황 사절단이 인쇄분야의 이 새로운 움직임을 보고 듣고 놀라 인쇄 관련 책자와 물품들을 가지고 갔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 세계문명사를 새로 써야 할 정도의 폭발력을 가진 엘 고어 부통령의 말을 듣고도 언론이나 정부기관에서 이를 확인하는 후속보도나 조치를 취하지 않아 이 말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직지심체요절'은 충북 청주에 있는 흥덕사에서 1377년에 찍어낸 책이다. 이 책은 백운이란 호를 가진 경한 스님이 부처님과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고승, 대덕들의 말씀이나 편지 등에서 뽑은 내용을 수록해 놓은 것이다. 당시 50에서 100부 정도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현재는 하권 한 책만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된 '직지심체'는 '직지인심견성성불'에서 따온 말로 '참선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보면,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라는 뜻이다. 본래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인데 너무 길어서 『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요절』『직지심체』『직지』등으로 줄여서 부르는데 『직지심체요절』이 가장 널리 불리는 이름이다.
직지 형상의 책 설치물 ‘직지 파빌리온’
'직지'가 발간된 흥덕사가 있는 청주에서는 수년 전부터 직지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직지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우리의 우수한 인쇄문화를 자랑하는 축제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부터는 국제행사로 승격돼 예년보다 볼거리와 체험행사가 다양하고 풍성해졌다.
[연관기사] 현존 최고(最古) 금속활자 ‘직지’ 재조명
독일 마인츠 구텐베르크 박물관은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직지코리아 주제 전시관에 공개했다. 이 인쇄기는 1455년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인 구텐베르크 성서를 찍은 인쇄기를 17세기에 다시 만든 것이다.
직지 페스티벌에 공개된 구텐베르크 인쇄기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엘 고어 전 부통령의 말이 맞다면 이 인쇄기의 원형은 조선시대 우리 인쇄기와 닮은 것일 거다. 직지페스티벌을 찾는 관람객은 누구나 현장에서 『직지심체요절』을 볼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 애절한 마음으로 이 바람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외국인이 있어 눈길을 끈다.
직지 반환 앞장서는 미국인
이 외국인은 미국인 패닝턴 씨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서울의 한 국제특허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패닝턴 씨는 2013년 직지가 발간된 옛 흥덕사 자리에 세워진 고인쇄박물관을 방문한 뒤 직지 반환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7천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고 한다.
직지 페스티벌이 개막한 9월 1일 패닝턴 씨는 축제장에 'Bring Jikji back to korea'라는 현수막을 걸고 관람객들의 서명을 받았다. 패닝턴 씨는 "중요한 문화유산인 '직지'가 제작된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직지 반환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태도는 너무 소극적이다. 직지가 '강탈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콜랭 드 플랑시 대사가 '구입한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지'의 역사적 중요성과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해 볼 때 직지가 '거래된 문화재'라는 사실이 중요해 보이진 않는다. 플랑시가 '직지'를 구매했다는 증거도 불충분하다며 압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패닝턴 씨는 머지않아 환수운동 서명부를 탄원서 형식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나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 제출할 계획이다.
'직지'는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 이후 초대 공사와 3대 공사를 지낸 콜랭 드 플랑시가 1880년 대 말 우리나라 고서점에서 수집해 갔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직지'는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이름없이 보관돼 있다가 2011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공을 세운 박병선 박사에 의해 1967년 발견됐다.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 전시회'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70여 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발간된 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2001년 9월 '직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정부는 『직지심체요절』반환에 대해 소극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프랑스가 강탈해간 문화재가 아닌데다 2011년 외규장각 도서를 대여해 준 것도 고마운데 무리하게 요구할 경우 외교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청주시가 프랑스 정부에수차례 대여를 요청했지만 "직지는 한 번도 외부로 반출된 사례가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민간 차원에서 문화재 반환운동을 펴고 있는 경북대학교 이상규 교수는 "프랑스 공사가 직지를 구매한 것으로 알려 졌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지 않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며, 문화재는 고국의 품에 안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관점에서 정부는 긴 안목으로 반환 요구를 공식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규 교수에 따르면 우리 문화재 가운데 해외로 유출돼 환수하지 못하고 있는 문화재가 세계 17개 국에 7만 6천여 점에 이르고 있다. 이 가운데 일본이 45%, 미국이 22.2%, 프랑스가 4%정도 소장하고 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문화유산들
일본에 가 있는 문화재가 많은 것은 임진왜란을 통한 침탈에다, 일제가 우리를 식민지로 합방하면서 우리 문화재를 강탈해갔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는 '직지심체요절', 외규장각 도서, 고려의 불화, 고서 등이 있으며, 일본으로 유출된 것 중에는 수월관음도와 몽유도원도도 있다.
이들 문화재에 대해 정부는 반환 요구는 물론이고 '직지'처럼 거래된 문화재에 대해서도 '문화재는 고국에 있는 것이 가치 구현과 보존에 가장 이상적이다'는 보편적 정서에 입각해 반환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아울러 문화재적 가치가 있고, 우리문화의 품격과민족적 긍지를 높일 수 있는 문화재는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서라도 환수하는 방안을강구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교묘하게 밀반출되는 문화재가 허다한만큼 문화재 보호 관련법규를 정비할 것도 요구된다.
고국을 떠나 프랑스 도서관에 외롭게 있는 『직지심체요절』이 이 모든 것이 절실하다는 걸 웅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외국인이 환수운동을 먼저해 겸연쩍긴 하지만 우리정부와 민간도 다각도로 환수 방안을 강구해 세계 최고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이 고국으로 속히 금의환향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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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태 기자 jimi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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