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라우스와 겨뤘던 ‘영웅’ 아널드 파머

입력 2016.09.26 (11:35) 수정 2016.09.2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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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 파머(왼쪽)와 잭 니클라우스는 위대한 골프 선수이자 필생의 라이벌이었다. 1965년 마스터스 대회에서 우승자 잭 니클라우스에게 전년도 우승자 아널드 파머가 그린 재킷을 입혀주고 있다.아널드 파머(왼쪽)와 잭 니클라우스는 위대한 골프 선수이자 필생의 라이벌이었다. 1965년 마스터스 대회에서 우승자 잭 니클라우스에게 전년도 우승자 아널드 파머가 그린 재킷을 입혀주고 있다.

'아듀, 더 킹(the King)'

미국 언론들은 그의 타계 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애칭 '더킹'으로 불리는 골프선수 아널드 파머가 26일(한국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

미국 골프 전문매체인 골프채널은 파머가 심장질환으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파머는 최근 수일간 노환에 따른 쇠약과 심혈관 이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미국골프협회(USGA)는 파머의 별세 소식에 대해 "가장 위대한 '골프 대사'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화려했던 아널드 파머의 골프 인생은 라이벌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퍼로 평가받는 잭 니클라우스(76)와의 경쟁 관계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세계 골프계를 주름잡던 대 스타였다.

1962년부터 4년 동안 그와 잭 니클라우스가 번갈아 그린재킷을 입은 치열한 우승 경쟁은 전세계 골프팬을 열광시켰다. 1962년 US오픈에서 두 사람이 동타를 이룬 뒤 연장 혈투 끝에 니클라우스가 우승컵을 차지했고, 이후 두 사람의 라이벌 승부는 최고의 볼거리였다.

파머가 메이저 7회 우승을 포함해 통산 62승을 거뒀고, 니클라우스는 메이저 대회 18승을 포함해 통산 73승을 차지했다.

골프 성적은 니클라우스가 앞섰지만, 두 사람은 은퇴 후 비슷한 삶의 행적을 이어가며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각각 프로 대회를 창설했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의류 브랜드를 출시했다.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골프장 디자인에 공을 들이는 등 삶의 여정은 비슷했다.

잭 니클라우스와 아널드 파머(오른쪽)의 노년 모습. 잭 니클라우스와 아널드 파머(오른쪽)의 노년 모습.

경쟁 관계에서도 자연스럽게 갈등도 생겼다.

1966년 니클라우스가 마스터스 우승 직후 자신의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메모리얼토너먼트'라는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 대회를 만들었다.

그러자 3년 뒤 파머는 아널드파머인비테이셔널을 신설했고, 두 사람은 매년 타이거 우즈 같은 빅스타 출전과 메이저 대회 승격 등을 놓고 서로를 견제했다.


파머의 골프 인생은 때어날 때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29년 9월 1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에서 골프장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4년 US아마추어 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 후 1954년 프로로 전향했다.

1958년 마스터스 골프 대회에서 우승하여 두각을 나타낸 이래 수많은 경기에서 우승했다. 메이저대회에서는 마스터스 4회, US오픈 1회, 브리티시 오픈 2회 등 총 7번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PGA챔피언십을 제패하지 못해 그랜드 슬램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프로 통산 전적으로는 95승을 올렸고,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는 총 62승을 쌓았다. PGA투어 62회 우승 기록은 샘 스니드(미국)와 타이거 우즈, 잭 니클라우스, 벤 호건에 이어 5번째로 많은 것이다.

아널드 파머는 마스터스에 강했고, 마스터스를 사랑했다. 1955년부터 2004년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마스터스에 참가했다. 총 4회 우승했고, 12 차례 톱10에 올랐다.

2004년에 그는 마스터스에서 고별전을 갖고 은퇴했고, 2007년부터 매해 마스터스에서 시타를 해왔다. 올해에는 어깨 부상을 이유로 10년 만에 시타에 나서지 못했다. 그의 호쾌한 스윙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널드 파머는 골프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골프용품과 의류로 사업을 해 성공했다.

2012년 미 의회는 아널드 파머가 스포츠맨십을 통해 나라에 기여한 부분이 크다고 인정해 운동선수로는 6번째로 의회 금메달을 수여했다. 전 세계에 300개 이상의 골프 코스를 설계했고 플로리다에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아널드 파머 메디컬 센터'를 설립했다. 미국에서 가장 사랑 받았던 골퍼인 파머는 '더 킹(the King)'이라는 애칭과 함께 영원히 팬들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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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니클라우스와 겨뤘던 ‘영웅’ 아널드 파머
    • 입력 2016-09-26 11:35:19
    • 수정2016-09-26 11:5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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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 파머(왼쪽)와 잭 니클라우스는 위대한 골프 선수이자 필생의 라이벌이었다. 1965년 마스터스 대회에서 우승자 잭 니클라우스에게 전년도 우승자 아널드 파머가 그린 재킷을 입혀주고 있다.
'아듀, 더 킹(the King)'

미국 언론들은 그의 타계 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애칭 '더킹'으로 불리는 골프선수 아널드 파머가 26일(한국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

미국 골프 전문매체인 골프채널은 파머가 심장질환으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파머는 최근 수일간 노환에 따른 쇠약과 심혈관 이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미국골프협회(USGA)는 파머의 별세 소식에 대해 "가장 위대한 '골프 대사'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화려했던 아널드 파머의 골프 인생은 라이벌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퍼로 평가받는 잭 니클라우스(76)와의 경쟁 관계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세계 골프계를 주름잡던 대 스타였다.

1962년부터 4년 동안 그와 잭 니클라우스가 번갈아 그린재킷을 입은 치열한 우승 경쟁은 전세계 골프팬을 열광시켰다. 1962년 US오픈에서 두 사람이 동타를 이룬 뒤 연장 혈투 끝에 니클라우스가 우승컵을 차지했고, 이후 두 사람의 라이벌 승부는 최고의 볼거리였다.

파머가 메이저 7회 우승을 포함해 통산 62승을 거뒀고, 니클라우스는 메이저 대회 18승을 포함해 통산 73승을 차지했다.

골프 성적은 니클라우스가 앞섰지만, 두 사람은 은퇴 후 비슷한 삶의 행적을 이어가며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각각 프로 대회를 창설했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의류 브랜드를 출시했다.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골프장 디자인에 공을 들이는 등 삶의 여정은 비슷했다.

잭 니클라우스와 아널드 파머(오른쪽)의 노년 모습.
경쟁 관계에서도 자연스럽게 갈등도 생겼다.

1966년 니클라우스가 마스터스 우승 직후 자신의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메모리얼토너먼트'라는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 대회를 만들었다.

그러자 3년 뒤 파머는 아널드파머인비테이셔널을 신설했고, 두 사람은 매년 타이거 우즈 같은 빅스타 출전과 메이저 대회 승격 등을 놓고 서로를 견제했다.


파머의 골프 인생은 때어날 때부터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29년 9월 1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에서 골프장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4년 US아마추어 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 후 1954년 프로로 전향했다.

1958년 마스터스 골프 대회에서 우승하여 두각을 나타낸 이래 수많은 경기에서 우승했다. 메이저대회에서는 마스터스 4회, US오픈 1회, 브리티시 오픈 2회 등 총 7번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PGA챔피언십을 제패하지 못해 그랜드 슬램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프로 통산 전적으로는 95승을 올렸고,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는 총 62승을 쌓았다. PGA투어 62회 우승 기록은 샘 스니드(미국)와 타이거 우즈, 잭 니클라우스, 벤 호건에 이어 5번째로 많은 것이다.

아널드 파머는 마스터스에 강했고, 마스터스를 사랑했다. 1955년부터 2004년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마스터스에 참가했다. 총 4회 우승했고, 12 차례 톱10에 올랐다.

2004년에 그는 마스터스에서 고별전을 갖고 은퇴했고, 2007년부터 매해 마스터스에서 시타를 해왔다. 올해에는 어깨 부상을 이유로 10년 만에 시타에 나서지 못했다. 그의 호쾌한 스윙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널드 파머는 골프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골프용품과 의류로 사업을 해 성공했다.

2012년 미 의회는 아널드 파머가 스포츠맨십을 통해 나라에 기여한 부분이 크다고 인정해 운동선수로는 6번째로 의회 금메달을 수여했다. 전 세계에 300개 이상의 골프 코스를 설계했고 플로리다에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아널드 파머 메디컬 센터'를 설립했다. 미국에서 가장 사랑 받았던 골퍼인 파머는 '더 킹(the King)'이라는 애칭과 함께 영원히 팬들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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