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플러스] 한글 창제, 진짜 산파 누구였나?

입력 2016.10.11 (10:24) 수정 2016.10.1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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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고 있는 우리 글, 한글이 반포된 지 올해로 570년이 됐다. 우리는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우리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사랑하자고 다짐한다. 올해도 정부와 공공기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글날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열렸다.

570돌 한글날 기념행사  570돌 한글날 기념행사

우리는 역사교육을 통해 세종대왕이 문자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겨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 한글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기 위해 먼저 궁중에 정음청을 설치하고, 정인지·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이를 연구하게 하여, 1443년에 한글을 창제했다.

이후 3년간 한자가 아닌 새로 만들어진 우리 글로 용비어천가 등을 지어 스스로 사용의 모범을 보인 뒤 1446년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글을 백성에게 선보였다.

(좌) 훈민정음 해례본 속지 (우) 훈민정음 해례본 표지(좌) 훈민정음 해례본 속지 (우) 훈민정음 해례본 표지

불교계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공헌"

그러나 여기에 대해 불교계는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불교계의 공헌이 컸다고 주장한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정인지·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 이상으로 세종·문종·세조 3대에 걸쳐 왕사 역할을 했던 신미 대사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신미 대사의 영정. 법주사 복천암에 모셔져 있다.신미 대사의 영정. 법주사 복천암에 모셔져 있다.

문헌에 따르면 신미 대사(1403-1480)는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영산 김 씨, 김훈의 장남으로 충북 영동군 용산면 오얏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유교경전을 빨리 익혔으며 과거에 합격해 집현전의 학사가 됐다.

그러나 벼슬에는 뜻이 없고 불교경전에 심취해 출가했다. 출가 후 대장경에 심취한 신미 대사는 한문경전이 불법을 이해하는 데 미흡함을 느끼고, 몽골 팔사문자와 티베트어, 범어를 직접 익혀 경전을 공부했다고 한다.

범어로 불리는 인도의 고대글자 산스크리티어범어로 불리는 인도의 고대글자 산스크리티어

불교계에서는 신미 대사가 한자뿐 아니라 몽골 팔사문자와 티베트어, 범어 등 주변 6개 나라의 언어와 문자에도 능통해 한글 창제에 도움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세종대왕이 아무리 영명했더라도 한글을 만드는 데는 언어학과 자학, 음성학, 기호학 분야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을 올렸다.최만리 등이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 비선라인?

당시 집현전에는 실무책임자인 부제학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학사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또 조선이 떠받들고 있던 명나라의 눈을 피해, 한자가 아닌 조선의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고 음운 체계를 세우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세종으로서는 공식적인 집현전 학사 이외에 한글 창제를 연구하고 도와주는 비선 라인이 필요했고, 그 비선라인의 책임자가 신미 대사라는 게 불교계의 주장이다.

법주사 복천암법주사 복천암

그리고 신미 대사를 비롯한 비선라인에 있는 연구자들은 집현전이 아니라 신미 대사가 주석했던 법주사 복천암 등 비밀한 곳에서 세종대왕이 부여한 비밀 프로젝트 즉 한글 창제 연구를 수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세종대왕은 죽기 몇 달 전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신하로서가 아니라 스승을 대하는 예로 신미대사를 접견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신미대사가 주석하던 법주사 복천암 불사를 후원하고 미리 준비한 법호를 내린다. 당시 내린 법호는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다

이 법호를 보면 신미 대사의 스님으로서의 높은 법력과 도의 경지를 칭송하면서, 대중적 공적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하는 문구도 보인다. 바로 '우국이세'다. 즉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한글 창제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받든 것으로 풀이된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간송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됐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간송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됐다.

불교계 "상주본은 광흥사 복장유물"

한글의 창제와 발음 등을 적은 것이 '훈민정음 해례본'인데, 현재 간송본과 상주본 두 권이 있다. 이 가운데 간송본은 간송 전형필이 1940년 일본으로 밀반출 직전에 구입한 것으로 안동시 와룡면 이 씨 가문에서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흥사. 경북 안동에 있다.광흥사. 경북 안동에 있다.

현재 상주의 배 모 씨가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상주본도 원래는 안동에 있는 광흥사 복장유물이었다는 것이 불교계의 주장이다. 광흥사는 신미 대사와 더불어 훈민정음 창제 이후 불경언해에 공을 세운 학조 대사가 있었던 곳이다.

 학조 대사 영정. 광흥사에 주석하며 불경언해에 힘썼다. 학조 대사 영정. 광흥사에 주석하며 불경언해에 힘썼다.

불교계는 신미 대사와 더불어 불경언해에 힘을 기울인 학조대사가 주석했던 광흥사 복장유물 가운데 하나가 훈민정음 상주본이고(불교계 주장) 광흥사 인근 민가에서 훈민정음 간송본이 나온 것도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세종 때부터 연산군 때까지 한글로 발간된 문헌의 65% 이상이 불교경전이며, 유교 서적은 5%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불교계의 한글 창제 관련설에 힘을 더하는 대목이다.

석보상절. 석가모니 일대기를 한글로 적은 책이다. 석보상절. 석가모니 일대기를 한글로 적은 책이다.

대표적인 것이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적은 '석보상절'이다. 이 책은 세종 28년 소헌왕후가 죽자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이 신미 대사의 동생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발간한 것이다.

석보상절을 읽어본 세종은 석가여래의 행적에 큰 감동을 받고 장편의 서사시를 읊었고 그것을 받아적은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부처님이 백억세계에 화신을 나투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마치 하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석가여래의 행적을 서사시로 찬탄한 대표적인 불전 문학이다.

훈민정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불교의 법수가 표현돼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모두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이 모두 28자로 이루어져 있다.

33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을 상징하며, 28은 욕계.색계.무색계 등 삼계 28천을 나타내는 법수다. '나라 말싸미 듕귁과 달라...'로 시작되는 세종의 한글어지는 정확히 108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문으로 적은 어지는 108의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한글 창제, 진짜 산파는 누구였을까

한글의 근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예부터 불교계에서 주장하는 범어 기원설을 비롯해 단군조선의 고대문자설, 일본 신대문자 변용설, 그리고 몽골제국의 파스파 문자설 등 여러 가설이 제기돼 왔다.

그런데 한글이 "사람의 혀와 이, 목구멍 등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한글은 다른 글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독창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훈민정음과 불교 세미나.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 (10월 5일)훈민정음과 불교 세미나.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 (10월 5일)

하지만 불교계는 세종의 스승으로서 한자를 비롯해 주변국 여러 문자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신미 대사가 불경언해 때처럼 한글 창제 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과 한국불교학회는 지난 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훈민정음과 불교'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에서 불교의 역할을 되돌아봤다.

작가 박해진(좌)과 ‘훈민정음의 길’(우) 작가 박해진(좌)과 ‘훈민정음의 길’(우)

이 자리에서 '훈민정음의 길'을 쓴 박해진 작가는 "세종대왕이 혜각존자 신미를 통해 산스크리트어 음성학의 요체를 파악하고 있었고, 훈민정음에 불심을 반영했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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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6-10-11 10: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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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고 있는 우리 글, 한글이 반포된 지 올해로 570년이 됐다. 우리는 매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우리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사랑하자고 다짐한다. 올해도 정부와 공공기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글날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열렸다.

570돌 한글날 기념행사
우리는 역사교육을 통해 세종대왕이 문자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겨 우리나라 고유의 문자, 한글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기 위해 먼저 궁중에 정음청을 설치하고, 정인지·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이를 연구하게 하여, 1443년에 한글을 창제했다.

이후 3년간 한자가 아닌 새로 만들어진 우리 글로 용비어천가 등을 지어 스스로 사용의 모범을 보인 뒤 1446년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글을 백성에게 선보였다.

(좌) 훈민정음 해례본 속지 (우) 훈민정음 해례본 표지
불교계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공헌"

그러나 여기에 대해 불교계는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불교계의 공헌이 컸다고 주장한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정인지·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 이상으로 세종·문종·세조 3대에 걸쳐 왕사 역할을 했던 신미 대사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신미 대사의 영정. 법주사 복천암에 모셔져 있다.
문헌에 따르면 신미 대사(1403-1480)는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영산 김 씨, 김훈의 장남으로 충북 영동군 용산면 오얏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유교경전을 빨리 익혔으며 과거에 합격해 집현전의 학사가 됐다.

그러나 벼슬에는 뜻이 없고 불교경전에 심취해 출가했다. 출가 후 대장경에 심취한 신미 대사는 한문경전이 불법을 이해하는 데 미흡함을 느끼고, 몽골 팔사문자와 티베트어, 범어를 직접 익혀 경전을 공부했다고 한다.

범어로 불리는 인도의 고대글자 산스크리티어
불교계에서는 신미 대사가 한자뿐 아니라 몽골 팔사문자와 티베트어, 범어 등 주변 6개 나라의 언어와 문자에도 능통해 한글 창제에 도움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세종대왕이 아무리 영명했더라도 한글을 만드는 데는 언어학과 자학, 음성학, 기호학 분야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 비선라인?

당시 집현전에는 실무책임자인 부제학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학사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또 조선이 떠받들고 있던 명나라의 눈을 피해, 한자가 아닌 조선의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고 음운 체계를 세우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세종으로서는 공식적인 집현전 학사 이외에 한글 창제를 연구하고 도와주는 비선 라인이 필요했고, 그 비선라인의 책임자가 신미 대사라는 게 불교계의 주장이다.

법주사 복천암
그리고 신미 대사를 비롯한 비선라인에 있는 연구자들은 집현전이 아니라 신미 대사가 주석했던 법주사 복천암 등 비밀한 곳에서 세종대왕이 부여한 비밀 프로젝트 즉 한글 창제 연구를 수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세종대왕은 죽기 몇 달 전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신하로서가 아니라 스승을 대하는 예로 신미대사를 접견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신미대사가 주석하던 법주사 복천암 불사를 후원하고 미리 준비한 법호를 내린다. 당시 내린 법호는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다

이 법호를 보면 신미 대사의 스님으로서의 높은 법력과 도의 경지를 칭송하면서, 대중적 공적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하는 문구도 보인다. 바로 '우국이세'다. 즉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한글 창제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받든 것으로 풀이된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간송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됐다.
불교계 "상주본은 광흥사 복장유물"

한글의 창제와 발음 등을 적은 것이 '훈민정음 해례본'인데, 현재 간송본과 상주본 두 권이 있다. 이 가운데 간송본은 간송 전형필이 1940년 일본으로 밀반출 직전에 구입한 것으로 안동시 와룡면 이 씨 가문에서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흥사. 경북 안동에 있다.
현재 상주의 배 모 씨가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상주본도 원래는 안동에 있는 광흥사 복장유물이었다는 것이 불교계의 주장이다. 광흥사는 신미 대사와 더불어 훈민정음 창제 이후 불경언해에 공을 세운 학조 대사가 있었던 곳이다.

 학조 대사 영정. 광흥사에 주석하며 불경언해에 힘썼다.
불교계는 신미 대사와 더불어 불경언해에 힘을 기울인 학조대사가 주석했던 광흥사 복장유물 가운데 하나가 훈민정음 상주본이고(불교계 주장) 광흥사 인근 민가에서 훈민정음 간송본이 나온 것도 신미 대사가 한글 창제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세종 때부터 연산군 때까지 한글로 발간된 문헌의 65% 이상이 불교경전이며, 유교 서적은 5%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불교계의 한글 창제 관련설에 힘을 더하는 대목이다.

석보상절. 석가모니 일대기를 한글로 적은 책이다.
대표적인 것이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적은 '석보상절'이다. 이 책은 세종 28년 소헌왕후가 죽자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이 신미 대사의 동생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발간한 것이다.

석보상절을 읽어본 세종은 석가여래의 행적에 큰 감동을 받고 장편의 서사시를 읊었고 그것을 받아적은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부처님이 백억세계에 화신을 나투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마치 하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석가여래의 행적을 서사시로 찬탄한 대표적인 불전 문학이다.

훈민정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불교의 법수가 표현돼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모두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이 모두 28자로 이루어져 있다.

33은 불교의 우주관인 33천을 상징하며, 28은 욕계.색계.무색계 등 삼계 28천을 나타내는 법수다. '나라 말싸미 듕귁과 달라...'로 시작되는 세종의 한글어지는 정확히 108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문으로 적은 어지는 108의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한글 창제, 진짜 산파는 누구였을까

한글의 근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예부터 불교계에서 주장하는 범어 기원설을 비롯해 단군조선의 고대문자설, 일본 신대문자 변용설, 그리고 몽골제국의 파스파 문자설 등 여러 가설이 제기돼 왔다.

그런데 한글이 "사람의 혀와 이, 목구멍 등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한글은 다른 글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독창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훈민정음과 불교 세미나.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 (10월 5일)
하지만 불교계는 세종의 스승으로서 한자를 비롯해 주변국 여러 문자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신미 대사가 불경언해 때처럼 한글 창제 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과 한국불교학회는 지난 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훈민정음과 불교'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에서 불교의 역할을 되돌아봤다.

작가 박해진(좌)과 ‘훈민정음의 길’(우)
이 자리에서 '훈민정음의 길'을 쓴 박해진 작가는 "세종대왕이 혜각존자 신미를 통해 산스크리트어 음성학의 요체를 파악하고 있었고, 훈민정음에 불심을 반영했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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