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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24) 영화, 시네마 천국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입력 2016.10.19 (20:45) | 수정 2016.10.20 (11:46)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24) 영화, 시네마 천국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누구나 영화의 주인공을 꿈꾼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흔히 느끼는 감정입니다. 영화가 뻔히 허구와 가상의 현실인 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영화에 감정이 몰입돼 마치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 혹은 특정인물처럼 생각되는 것이지요. 소설이나 연극, 음악과 춤 등 다른 문학과 예술도 감정이입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강력한 이입이 되는 장르는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압도적인 스크린의 크기와 강렬한 영상, 웅장한 음향, 그리고 어두운 공간이 주는 묘한 설렘과 흥분, 마치 블랙홀 처럼 인간의 감정을 빨아들이는 영화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한국 서정시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 신석정 선생님께서도 아마 5-60년대 흔히 유행했던 신파조 영화를 보셨나 봅니다. 흔히 눈물을 짜내는 순정영화가 그렇듯, 여주인공은 실연의 상처를 입고 생활고까지 겪으면서 유리창에 기대어 흐느껴 웁니다. 때마침 창밖으로는 비가 주룩주룩 내려 비련의 농도를 더욱 짙게 만듭니다. 전형적인 신파 영화에서 설정하는 장면입니다.

바람까지 거세게 불면 더욱 스산해집니다. 어두운 객석에서는 여기저기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서 시인은 여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에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다 문득 영화 속 여주인공과 다를 바 없는 고달픈 자신의 현실을 떠올립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짓 표정과 몸짓도 서슴지 않아야 하는 현실, 자신도 영화속 배우처럼 연기를 하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서툴고 곤혹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고 주인공이 되어 한바탕 울거나 웃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문학과 예술의 가장 큰 효용은 이런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억압된 현실에서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사는 약자와 타자일수록, 영화 속 힘세고 잘 생긴 주인공이 악당 혹은 악당으로 상징되는 권력과 부를 거머쥔 사회적 강자를 응징하는 장면에서 오장육부가 시원해집니다.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고백 한번 하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이거나, 번번히 실연의 쓴 잔을 마시기 일쑤인 사람이라면, 영화 속 멋진 주인공이 되어 뭇 여성 혹은 남성의 구애를 받는다거나, 보란듯이 연애에 성공하는 장면에서는 짜릿한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혹은 자신보다 더 쓰라린 사랑의 시련과 상처를 입는 주인공을 보면서 슬쩍 위로를 받을 때도 있을 테구요.


더러는 유한한 육체와, 시간, 공간을 벗어나 광대무변한 우주의 신비와 환상속에서 뒹굴어 보기도 하고, 시간을 거슬러 유토피아의 세상이나 흥미진진한 역사 속에서 몽환적인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우디앨런이 만들었던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말이지요.

영화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정여울은 영화의 이런 마력을 '그리워하는 힘' 혹은 '집단적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영화를 보고 훌쩍이거나 파안대소하거나 분노를 터뜨리거나 잔잔한 감동에 몸을 떨어보지 않은 분들이 있을지요?


지금이야 디지털 시대이니 필름이 끊기는 일이 있을 수 없고, 상영시간을 줄이기 위해 내용의 일부를 삭제하는 일은 없지만, 아날로그 필름을 감은 영사기가 돌아가던 90년대까지는 흔히 있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UIP 직배 시스템이 들어오기 전에는, 극장에도 등급이 있어 개봉관과 재개봉관 그리고 이 시인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자주 이용했던 3류 극장이 있었습니다.


3류 극장에서는 걸핏하면 필름이 끊겼고, 껌이 붙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가 낭패를 보는 일도 흔했습니다. '동시상영'이라는 이름으로 턱없이 끊겨 스토리도 이어지지 않는 짧아진 영화를 두 세편 보는 일도 흔했습니다.

잘 풀리지 않는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시인은, 조잡한 설계 탓에 앞 사람의 머리통이 스크린을 가리고 툭하면 필름이 끊기는 3류극장에 앉았나 봅니다. 돈은 없고 애인도 떠나간 자신의 3류 인생을 자조적으로 넋두리합니다. 슬그머니 세상에 부아가 치민 시인은 의자 밑에 씹던 껌을 붙입니다.

단물이 다 빠져 뱉어버리고 싶지만 껌이라도 씹어야 허전한 가슴을 달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비루한 삶을 강요하는 세상을 껌으로 생각하고 마구 씹어봅니다. 아니면 시인은 질겅거리면서 없어지지는 않는 껌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껌은 오늘날 흙수저라고 비하되는 삼류인생의 상징일까요?

세계에서 제일 영화를 많이 보는 한국인

1885년 12월 28일 세계 최초로 상영된 영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85년 12월 28일 세계 최초로 상영된 영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

188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열차의 도착>이라는 짧은 영화가 세계 최초로 상영됐습니다. 사람들은 실제 기차가 오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르고 극장을 뛰쳐나가기도 했다지요.

이후 130년, 영화는 전 세계에서 대중들의 사랑을 압도적으로 받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루 20편 이상, 연간 6,000편 이상의 영화들이 새로 탄생하고 상영되면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혹은 상상을 뛰어넘는 환타지의 세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때는 일제가 을사늑약을 통해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직전인 1903년이었습니다. 서울 동대문의 한 전기회사 기계창고를 개조해 단편영화가 상영됐습니다. 이후 1908년 영화를 상영하는 최초 극장인 <단성사>가 설립됐고, <협률사>와 <우미관> <조선극장>이 잇달아 생겨났습니다.

영화 ‘아리랑’ (나운규 감독, 1926년) 영화 ‘아리랑’ (나운규 감독, 1926년)

주로 쿼바디스나 잔다르크, 부활 등 외화를 상영했습니다. 국내영화로는 1919년 김도산이 만든 <의리적 구토>가 최초로 상영됐고, <월하의 맹서>와 <심청전>에 이어, 1926년 영화사에 빛나는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이 만들어졌습니다. 1935년에는 음성을 동시녹음한 이영우의 <춘향전>이 만들어져 무성영화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해방과 6.25로 서민들의 생활은 황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때 변변한 오락 수단이 없었던 나라에 영화는 한가닥 위안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작품성과 개성으로 영화계의 큰 족적을 남긴 김기영 감독과 신상옥 감독, 이만희 감독 등 걸출한 제작자가 나타나 <마부> <춘향전> <만추> 등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영화 ‘별들의 고향’ (이장호 감독,1974년) 영화 ‘별들의 고향’ (이장호 감독,1974년)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연간 극장 관객 수는 천만 명 정도에 그쳤지만 69년에는 무려 1억7천만 명까지 늘었다니, 영화의 성장세는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특히 1970년대는 암울했던 정치적 탄압과, 성개방과 물질만능,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등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등이 맞물려 <별들의 고향>과 <겨울 여자>로 대표되는 로맨스 영화 들이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80년대 전격적인 컬러 TV의 시대가 열리면서 관객을 안방극장에 빼앗겼던 영화는 한 때 연간 관객 수가 4천만명 선까지 곤두박질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영화 산업에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고, 영화의 제작과 배급 유통에 이르기까지 수직계열화가 이뤄지는 등 변화에 힘입어 영화산업은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1998년 시작된 멀티플렉스 상영관은 순식간에 많은 관람객들을 스크린으로 다시 끌어들여 다시 '영화 왕국'을 구축했습니다.

영화 ‘겨울여자’ (김호선 감독, 1997년) 영화 ‘겨울여자’ (김호선 감독, 1997년)

영화 관람객 수의 폭발적인 증가는 영화가 얼마나 한국인들의 눈과 귀, 여가생활을 사로잡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지난 1977년 상영됐던 영화 <겨울여자>는 당시까지 영화를 통틀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조해일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신성일과 장미희가 주연을 했고, 김호선 감독이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통속 멜로 영화의 전형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개봉관은 하나였는데 이 영화는 <단성사>에서 개봉돼 장장 133일간 상영됐고 무려 58만 5,775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이었는데 당시에도 연일 단성사 앞에서 창덕궁까지 길게 늘어선 인파의 사진과 기사가 연일 화제였습니다. 물론 미성년자 관람불가였으니 저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이 흥행 기록은 13년 동안 깨지지 않다가, 1990년 임권택 감독이 만든 액션 영화 <장군의 아들>이 67만 9,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흥행 대기록도 지금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멀티플렉스가 대세가 된 이후, 흥행이 예상되는 영화들은 전국에서 동시에 10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개봉될 정도니 관람객 숫자도 7-80년대 단일 개봉관 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모든 극장에서 상영한다면 하루 최대 3백만명이 볼 수 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사상 최대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 (김한민 감독, 2014년) 사상 최대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 (김한민 감독, 2014년)

지난 2014년 7월 충무공의 장엄한 일대기를 그린 <명량>은 무려 1,765만명이 관람했습니다. 지금까지 사상 최대 관객입니다. 이제 천만을 넘는 영화는 흔해졌습니다. 올들어서만 <내부자들> <암살> <밀정> 등이 천만 이상을 동원했고, 2000년 이후에도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국제시장> < 괴물> <해운대> <변호인> <광해> 등이 천만을 넘겼습니다.

실제로 영화진흥위원회가 올해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5년말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영화를 보는 나라가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한 사람당 연간 4.22편의 영화를 봅니다. 미국의 3.88편, 호주의 3.75편, 프랑스의 3.44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극장 입장권 매출액 1조7천154억원을 포함해 영화산업 매출액도 2조 1,131억 원이었습니다. 관객 수는 연간 누계로 2억1,729만 명으로 3년 연속 2억 명을 돌파했습니다.

국내영화의 약진도 두드러집니다. 2015년 국내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52%로 외화 관객 점유율 48%를 눌렀습니다. 한미 FTA 협상이 한창이던 10년 전만 해도 국내영화에 미칠 타격을 우려해 국산영화의 의무 상영 비율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이른바 '스크린 쿼터' 논란이 당시 최대 현안 가운데 하나였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숫자도 직접 영화관을 찾은 인원일 뿐, 최근 IP TV나 케이블, 유튜브나 인터넷 등을 통해 관람하는 숫자를 합하면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돕니다.

가히 영화왕국이 된 우리나라를 겨냥해 헐리우드와 유럽은 물론 중국 자본이 몰려오고, 한국의 영화배우와 감독도 글로벌 무대로 앞다퉈 진출하고 있습니다. 탁월한 한국 영화들은 이미 베를린과 베니스, 칸느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주연상 작품상 등을 수시로 받고 있고 한류 붐을 타고 해외로 수출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에 열광하는 현상들은 정말 좋기만 한 걸까요?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시네마 천국으로 사람들이 달려가는 사이, 다른 장르의 예술은 가뭄에 타들어가는 작물 신세가 됐습니다. 연극과 무용, 오페라, 클래식 연주회 장은 썰렁하고, 종사자들은 생존의 벼랑에 몰리고 있습니다. 책방은 줄줄이 문을 닫고 인문학과 예술은 영화와 뮤지컬 편식 현상으로 질식하고 있습니다.

영화만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영화와 TV 같은 영상매체로의 압도적인 쏠림 현상은 문화와 예술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문화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다양하고 다양한 예술과 오락,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고된 노동과 넉넉치 않은 호주머니 사정때문에 만만한 것이 값싼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세계 1위 영화 왕국이라는 타이틀은 결코 반갑지 않습니다.

시네마 천국인가, 시네마 지옥인가


시와 시인의 시대는 어쩌면 로마의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 이후에 끝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압도적인 영화의 위력 앞에서 시인은 자괴감과 자조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스펙타클하고 현란한 영상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원작의 제목과 전혀 관계가 없는 기발하고 매혹적인 제목이 붙은 영화를 보고 시인은 개탄합니다.

언어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시인이 정작 영화 제목만큼도 말을 부릴 줄 모르니, 시를 그만 쓸 수 밖에 없겠다는 지독한 역설이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그러고 보니 폴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했던 '내일을 향해 쏴라'는 상투적인 서부 활극 제목치고는 그럴듯합니다.

화려한 영상매체가 대중을 온통 사로잡는 시대에 정직한 언어, 진정성을 갖춘 시어들이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으니 시인들이 영화를 보는 시선은 대체로 착잡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인들이 영화를 싸구려 통속문화라고 폄하하고, 인문학자들이 영화를 감각적 쾌락의 추구를 통해 대중을 탈정치화시키는 위험한 매체라고 경고해도 영화는 대중들의삶의 일부가 되었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오락이 되었습니다. 김성곤 교수는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사를 분석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좋고 싫음을 떠나서 영화에는 개인 차원을 넘어 한 집단의 꿈과 신화, 동 시대 현실의 문제와 가치관 등이 다 녹아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영화라는 장르를 피해갈 수 없다면 어떻게 영화를 즐겨야 할까요? 영화를 단순히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읽어야겠습니다.

김성곤 교수의 지적대로 영화를 하나의 문화 텍스트로 보고 그 텍스트들의 의미와 상징, 혹은 그 영상이라는 텍스트 속에 감추어진 기호들을 해독해보면 좋겠습니다. 물론 모든 영화를 다 그렇게 볼 수는 없겠지만,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한 오락일변도의 영화에만 함몰되지 말고 음미할 가치가 있는 영화를 봄으로써 오락성과 교양, 지식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면 영화에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이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할리우드가 엄청난 달러를 투하하고 온갖 테크놀로지를 동원해 만드는 블록버스터가 난무하는 영화관이지만, 잘 찾아보면 예술성과 감동을 주면서도 재미를 잃지 않는 보석같은 영화도 많이 있습니다.


앞서 예로 들었던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 같은 영화는 한 편의 잘 쓰여진 장편소설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역사에 있어서, 혹은 한 개인에 있어서 과연 황금기란 어떤 시기일까? 도대체 그런 시기는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묵직한 주제를 풀어나가면서도, 현대와 1920년대와 19세기말 벨 에포크 시대의 유럽을 넘나들면서 유려하고 흥미진진하게 풀어 나가는 솜씨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기억이 있습니다.

또 무절제한 욕이나 저속한 표현이 난무하는 영화를 보면 혀를 차게 되지만, 좋은 영화들을 보노라면 시의 언어에 뒤지지 않는 수준 높은 은유와 상징을 구사하는 명대사들에 놀라기도 합니다. 지금은 앙숙이 돼 버린 시와 영화가 화해할 수 있는 접점이기도 합니다. 혹은 아름답고 밀도 높은 영상은 그 자체가 문자로 표현되는 언어를 뛰어넘는 시어이기도 합니다.


정윤수 작가의 표현대로 극장은 '과거나 지금이나 도시 문화의 꽃이며 당대 유행의 집합처' 입니다. 그리고 '최첨단의 감각이 팽팽하게 몸을 뒤트는 곳' 입니다. 결코 거대한 영화산업을 굴러가게 하는 먹잇감으로 인간의 시간과 재화가 소비되지 않고, 인간이 영화를 건강하고 능동적으로 소비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일정 부분 영화 소비자들의 몫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랑 받았던 이탈리아 감독 주세테 토르나토레가 만든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처럼, 영화가 단순히 시간을 죽이는 오락이 아니라, 타자와의 소통과 공감의 장, 그리고 개인의 삶과 사유를 풍요롭게 하는 문화와 예술적 향기 가득한 매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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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24) 영화, 시네마 천국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 입력 2016.10.19 (20:45)
    • 수정 2016.10.20 (11:46)
    임병걸의 시로 보는 경제
[시로 읽는 경제이야기] (24) 영화, 시네마 천국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누구나 영화의 주인공을 꿈꾼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흔히 느끼는 감정입니다. 영화가 뻔히 허구와 가상의 현실인 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영화에 감정이 몰입돼 마치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 혹은 특정인물처럼 생각되는 것이지요. 소설이나 연극, 음악과 춤 등 다른 문학과 예술도 감정이입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강력한 이입이 되는 장르는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압도적인 스크린의 크기와 강렬한 영상, 웅장한 음향, 그리고 어두운 공간이 주는 묘한 설렘과 흥분, 마치 블랙홀 처럼 인간의 감정을 빨아들이는 영화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한국 서정시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 신석정 선생님께서도 아마 5-60년대 흔히 유행했던 신파조 영화를 보셨나 봅니다. 흔히 눈물을 짜내는 순정영화가 그렇듯, 여주인공은 실연의 상처를 입고 생활고까지 겪으면서 유리창에 기대어 흐느껴 웁니다. 때마침 창밖으로는 비가 주룩주룩 내려 비련의 농도를 더욱 짙게 만듭니다. 전형적인 신파 영화에서 설정하는 장면입니다.

바람까지 거세게 불면 더욱 스산해집니다. 어두운 객석에서는 여기저기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서 시인은 여주인공의 기구한 운명에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다 문득 영화 속 여주인공과 다를 바 없는 고달픈 자신의 현실을 떠올립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짓 표정과 몸짓도 서슴지 않아야 하는 현실, 자신도 영화속 배우처럼 연기를 하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서툴고 곤혹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고 주인공이 되어 한바탕 울거나 웃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문학과 예술의 가장 큰 효용은 이런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합니다. 특히 억압된 현실에서 기 한번 펴지 못하고 사는 약자와 타자일수록, 영화 속 힘세고 잘 생긴 주인공이 악당 혹은 악당으로 상징되는 권력과 부를 거머쥔 사회적 강자를 응징하는 장면에서 오장육부가 시원해집니다.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고백 한번 하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이거나, 번번히 실연의 쓴 잔을 마시기 일쑤인 사람이라면, 영화 속 멋진 주인공이 되어 뭇 여성 혹은 남성의 구애를 받는다거나, 보란듯이 연애에 성공하는 장면에서는 짜릿한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혹은 자신보다 더 쓰라린 사랑의 시련과 상처를 입는 주인공을 보면서 슬쩍 위로를 받을 때도 있을 테구요.


더러는 유한한 육체와, 시간, 공간을 벗어나 광대무변한 우주의 신비와 환상속에서 뒹굴어 보기도 하고, 시간을 거슬러 유토피아의 세상이나 흥미진진한 역사 속에서 몽환적인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우디앨런이 만들었던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말이지요.

영화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정여울은 영화의 이런 마력을 '그리워하는 힘' 혹은 '집단적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영화를 보고 훌쩍이거나 파안대소하거나 분노를 터뜨리거나 잔잔한 감동에 몸을 떨어보지 않은 분들이 있을지요?


지금이야 디지털 시대이니 필름이 끊기는 일이 있을 수 없고, 상영시간을 줄이기 위해 내용의 일부를 삭제하는 일은 없지만, 아날로그 필름을 감은 영사기가 돌아가던 90년대까지는 흔히 있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UIP 직배 시스템이 들어오기 전에는, 극장에도 등급이 있어 개봉관과 재개봉관 그리고 이 시인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자주 이용했던 3류 극장이 있었습니다.


3류 극장에서는 걸핏하면 필름이 끊겼고, 껌이 붙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가 낭패를 보는 일도 흔했습니다. '동시상영'이라는 이름으로 턱없이 끊겨 스토리도 이어지지 않는 짧아진 영화를 두 세편 보는 일도 흔했습니다.

잘 풀리지 않는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시인은, 조잡한 설계 탓에 앞 사람의 머리통이 스크린을 가리고 툭하면 필름이 끊기는 3류극장에 앉았나 봅니다. 돈은 없고 애인도 떠나간 자신의 3류 인생을 자조적으로 넋두리합니다. 슬그머니 세상에 부아가 치민 시인은 의자 밑에 씹던 껌을 붙입니다.

단물이 다 빠져 뱉어버리고 싶지만 껌이라도 씹어야 허전한 가슴을 달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비루한 삶을 강요하는 세상을 껌으로 생각하고 마구 씹어봅니다. 아니면 시인은 질겅거리면서 없어지지는 않는 껌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껌은 오늘날 흙수저라고 비하되는 삼류인생의 상징일까요?

세계에서 제일 영화를 많이 보는 한국인

1885년 12월 28일 세계 최초로 상영된 영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85년 12월 28일 세계 최초로 상영된 영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

188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열차의 도착>이라는 짧은 영화가 세계 최초로 상영됐습니다. 사람들은 실제 기차가 오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르고 극장을 뛰쳐나가기도 했다지요.

이후 130년, 영화는 전 세계에서 대중들의 사랑을 압도적으로 받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루 20편 이상, 연간 6,000편 이상의 영화들이 새로 탄생하고 상영되면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혹은 상상을 뛰어넘는 환타지의 세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때는 일제가 을사늑약을 통해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직전인 1903년이었습니다. 서울 동대문의 한 전기회사 기계창고를 개조해 단편영화가 상영됐습니다. 이후 1908년 영화를 상영하는 최초 극장인 <단성사>가 설립됐고, <협률사>와 <우미관> <조선극장>이 잇달아 생겨났습니다.

영화 ‘아리랑’ (나운규 감독, 1926년) 영화 ‘아리랑’ (나운규 감독, 1926년)

주로 쿼바디스나 잔다르크, 부활 등 외화를 상영했습니다. 국내영화로는 1919년 김도산이 만든 <의리적 구토>가 최초로 상영됐고, <월하의 맹서>와 <심청전>에 이어, 1926년 영화사에 빛나는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이 만들어졌습니다. 1935년에는 음성을 동시녹음한 이영우의 <춘향전>이 만들어져 무성영화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해방과 6.25로 서민들의 생활은 황폐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때 변변한 오락 수단이 없었던 나라에 영화는 한가닥 위안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작품성과 개성으로 영화계의 큰 족적을 남긴 김기영 감독과 신상옥 감독, 이만희 감독 등 걸출한 제작자가 나타나 <마부> <춘향전> <만추> 등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영화 ‘별들의 고향’ (이장호 감독,1974년) 영화 ‘별들의 고향’ (이장호 감독,1974년)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연간 극장 관객 수는 천만 명 정도에 그쳤지만 69년에는 무려 1억7천만 명까지 늘었다니, 영화의 성장세는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특히 1970년대는 암울했던 정치적 탄압과, 성개방과 물질만능,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등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등이 맞물려 <별들의 고향>과 <겨울 여자>로 대표되는 로맨스 영화 들이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80년대 전격적인 컬러 TV의 시대가 열리면서 관객을 안방극장에 빼앗겼던 영화는 한 때 연간 관객 수가 4천만명 선까지 곤두박질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영화 산업에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고, 영화의 제작과 배급 유통에 이르기까지 수직계열화가 이뤄지는 등 변화에 힘입어 영화산업은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1998년 시작된 멀티플렉스 상영관은 순식간에 많은 관람객들을 스크린으로 다시 끌어들여 다시 '영화 왕국'을 구축했습니다.

영화 ‘겨울여자’ (김호선 감독, 1997년) 영화 ‘겨울여자’ (김호선 감독, 1997년)

영화 관람객 수의 폭발적인 증가는 영화가 얼마나 한국인들의 눈과 귀, 여가생활을 사로잡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지난 1977년 상영됐던 영화 <겨울여자>는 당시까지 영화를 통틀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조해일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신성일과 장미희가 주연을 했고, 김호선 감독이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통속 멜로 영화의 전형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개봉관은 하나였는데 이 영화는 <단성사>에서 개봉돼 장장 133일간 상영됐고 무려 58만 5,775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이었는데 당시에도 연일 단성사 앞에서 창덕궁까지 길게 늘어선 인파의 사진과 기사가 연일 화제였습니다. 물론 미성년자 관람불가였으니 저는 볼 수 없었습니다. 이 흥행 기록은 13년 동안 깨지지 않다가, 1990년 임권택 감독이 만든 액션 영화 <장군의 아들>이 67만 9,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흥행 대기록도 지금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멀티플렉스가 대세가 된 이후, 흥행이 예상되는 영화들은 전국에서 동시에 1000개 이상의 스크린에서 개봉될 정도니 관람객 숫자도 7-80년대 단일 개봉관 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모든 극장에서 상영한다면 하루 최대 3백만명이 볼 수 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사상 최대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 (김한민 감독, 2014년) 사상 최대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 (김한민 감독, 2014년)

지난 2014년 7월 충무공의 장엄한 일대기를 그린 <명량>은 무려 1,765만명이 관람했습니다. 지금까지 사상 최대 관객입니다. 이제 천만을 넘는 영화는 흔해졌습니다. 올들어서만 <내부자들> <암살> <밀정> 등이 천만 이상을 동원했고, 2000년 이후에도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국제시장> < 괴물> <해운대> <변호인> <광해> 등이 천만을 넘겼습니다.

실제로 영화진흥위원회가 올해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5년말 기준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영화를 보는 나라가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한 사람당 연간 4.22편의 영화를 봅니다. 미국의 3.88편, 호주의 3.75편, 프랑스의 3.44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극장 입장권 매출액 1조7천154억원을 포함해 영화산업 매출액도 2조 1,131억 원이었습니다. 관객 수는 연간 누계로 2억1,729만 명으로 3년 연속 2억 명을 돌파했습니다.

국내영화의 약진도 두드러집니다. 2015년 국내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52%로 외화 관객 점유율 48%를 눌렀습니다. 한미 FTA 협상이 한창이던 10년 전만 해도 국내영화에 미칠 타격을 우려해 국산영화의 의무 상영 비율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이른바 '스크린 쿼터' 논란이 당시 최대 현안 가운데 하나였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숫자도 직접 영화관을 찾은 인원일 뿐, 최근 IP TV나 케이블, 유튜브나 인터넷 등을 통해 관람하는 숫자를 합하면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돕니다.

가히 영화왕국이 된 우리나라를 겨냥해 헐리우드와 유럽은 물론 중국 자본이 몰려오고, 한국의 영화배우와 감독도 글로벌 무대로 앞다퉈 진출하고 있습니다. 탁월한 한국 영화들은 이미 베를린과 베니스, 칸느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주연상 작품상 등을 수시로 받고 있고 한류 붐을 타고 해외로 수출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에 열광하는 현상들은 정말 좋기만 한 걸까요?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시네마 천국으로 사람들이 달려가는 사이, 다른 장르의 예술은 가뭄에 타들어가는 작물 신세가 됐습니다. 연극과 무용, 오페라, 클래식 연주회 장은 썰렁하고, 종사자들은 생존의 벼랑에 몰리고 있습니다. 책방은 줄줄이 문을 닫고 인문학과 예술은 영화와 뮤지컬 편식 현상으로 질식하고 있습니다.

영화만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영화와 TV 같은 영상매체로의 압도적인 쏠림 현상은 문화와 예술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문화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다양하고 다양한 예술과 오락,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고된 노동과 넉넉치 않은 호주머니 사정때문에 만만한 것이 값싼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세계 1위 영화 왕국이라는 타이틀은 결코 반갑지 않습니다.

시네마 천국인가, 시네마 지옥인가


시와 시인의 시대는 어쩌면 로마의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 이후에 끝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압도적인 영화의 위력 앞에서 시인은 자괴감과 자조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스펙타클하고 현란한 영상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원작의 제목과 전혀 관계가 없는 기발하고 매혹적인 제목이 붙은 영화를 보고 시인은 개탄합니다.

언어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시인이 정작 영화 제목만큼도 말을 부릴 줄 모르니, 시를 그만 쓸 수 밖에 없겠다는 지독한 역설이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그러고 보니 폴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했던 '내일을 향해 쏴라'는 상투적인 서부 활극 제목치고는 그럴듯합니다.

화려한 영상매체가 대중을 온통 사로잡는 시대에 정직한 언어, 진정성을 갖춘 시어들이 발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으니 시인들이 영화를 보는 시선은 대체로 착잡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인들이 영화를 싸구려 통속문화라고 폄하하고, 인문학자들이 영화를 감각적 쾌락의 추구를 통해 대중을 탈정치화시키는 위험한 매체라고 경고해도 영화는 대중들의삶의 일부가 되었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오락이 되었습니다. 김성곤 교수는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사를 분석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좋고 싫음을 떠나서 영화에는 개인 차원을 넘어 한 집단의 꿈과 신화, 동 시대 현실의 문제와 가치관 등이 다 녹아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영화라는 장르를 피해갈 수 없다면 어떻게 영화를 즐겨야 할까요? 영화를 단순히 눈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읽어야겠습니다.

김성곤 교수의 지적대로 영화를 하나의 문화 텍스트로 보고 그 텍스트들의 의미와 상징, 혹은 그 영상이라는 텍스트 속에 감추어진 기호들을 해독해보면 좋겠습니다. 물론 모든 영화를 다 그렇게 볼 수는 없겠지만, 그저 시간을 죽이기 위한 오락일변도의 영화에만 함몰되지 말고 음미할 가치가 있는 영화를 봄으로써 오락성과 교양, 지식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면 영화에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이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할리우드가 엄청난 달러를 투하하고 온갖 테크놀로지를 동원해 만드는 블록버스터가 난무하는 영화관이지만, 잘 찾아보면 예술성과 감동을 주면서도 재미를 잃지 않는 보석같은 영화도 많이 있습니다.


앞서 예로 들었던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 같은 영화는 한 편의 잘 쓰여진 장편소설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역사에 있어서, 혹은 한 개인에 있어서 과연 황금기란 어떤 시기일까? 도대체 그런 시기는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묵직한 주제를 풀어나가면서도, 현대와 1920년대와 19세기말 벨 에포크 시대의 유럽을 넘나들면서 유려하고 흥미진진하게 풀어 나가는 솜씨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기억이 있습니다.

또 무절제한 욕이나 저속한 표현이 난무하는 영화를 보면 혀를 차게 되지만, 좋은 영화들을 보노라면 시의 언어에 뒤지지 않는 수준 높은 은유와 상징을 구사하는 명대사들에 놀라기도 합니다. 지금은 앙숙이 돼 버린 시와 영화가 화해할 수 있는 접점이기도 합니다. 혹은 아름답고 밀도 높은 영상은 그 자체가 문자로 표현되는 언어를 뛰어넘는 시어이기도 합니다.


정윤수 작가의 표현대로 극장은 '과거나 지금이나 도시 문화의 꽃이며 당대 유행의 집합처' 입니다. 그리고 '최첨단의 감각이 팽팽하게 몸을 뒤트는 곳' 입니다. 결코 거대한 영화산업을 굴러가게 하는 먹잇감으로 인간의 시간과 재화가 소비되지 않고, 인간이 영화를 건강하고 능동적으로 소비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일정 부분 영화 소비자들의 몫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랑 받았던 이탈리아 감독 주세테 토르나토레가 만든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처럼, 영화가 단순히 시간을 죽이는 오락이 아니라, 타자와의 소통과 공감의 장, 그리고 개인의 삶과 사유를 풍요롭게 하는 문화와 예술적 향기 가득한 매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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