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통신사 대리점에 지적장애인은 봉?

입력 2016.10.25 (16:52) 수정 2016.10.2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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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사전에 나와 있는 뜻은 '당사자 간의 의사표시 합치에 의한 법률행위'입니다. 계약에는 항상 당사자 간에 일정한 권리와 의무 등이 발생하게 되죠. 그래서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의했다는 것을 표시하는 당사자들의 '자필 서명'입니다.

하지만 계약을 할 때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미성년자는 부모님, 성인도 법률 대리인과 함께합니다. 계약 당사자가 지적장애인이라면 어떨까요?

지적장애 3급은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지능은 개인차가 있기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정도라고 합니다. 이 지적장애인이, 그것도 다른 휴대전화를 이미 갖고 있는데도, 보호자도 없이 또 새로운 휴대전화 단말기 개통 계약을 했다면 정상적인 계약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연관기사] ☞ 지적장애인 상대로 잇속 챙기는 이통사

모든 일은 '서명'에서 시작됐다.


지적장애 3급인 20살 김 모양. 지난달 28일 휴대전화 두 대를 개통했습니다. 이미 다른 휴대전화가 있는데도 말이죠. 당시 동행한 사람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한 남자입니다. 김 양은 이 남자와 통신사 대리점을 다섯 곳 넘게 돌아다녔습니다. 그 남자가 맛있는 것을 사줄 테니 김 양의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대리점 몇 군데에서는 김 양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취재진이 거절한 대리점을 찾아가 봤습니다. 직원은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남자친구 휴대전화를 개통해준다고 불쑥 찾아 왔는데, 상담을 해보니 느낌이 이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상품이 없다고 핑계를 대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심 없이 개통해준 대리점들은 말을 맞춘 듯 전혀 이상한 점이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심지어 자사에 개통된 단말기가 이미 있었지만 조회 한 번 해보지 않았습니다.



폐지된 계좌로도 개통, 심지어 명의도용까지

계좌를 도용해서라도 일단 가입시키고 보는 대리점도 있습니다. 지난달 한 주부는 통장에서 휴대전화 관련 요금 20만 원이 빠져나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지적장애 3급인 언니가 덜컥 휴대폰을 개통한 겁니다.


해당 요금 납부 계좌는 2년 전, 자신이 언니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할 때 신청서에서 쓴 은행 계좌였습니다. 그런데 가입신청서에는 이미 폐지된 언니 명의의 다른 통장 계좌가 버젓이 등록돼 있었습니다. 해당 대리점에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개통 과정에서 언니 계좌가 폐지된 계좌인 걸 확인하고 다른 계좌를 달라고 했더니 언니가 자신의 통장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 주부는 대리점으로부터 동의를 구하는 어떤 연락도 받은 적 없다고 다시 압박했습니다. 그랬더니 통장을 가져온 게 아니라 휴대전화로 계좌번호를 보여줬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대리점 측은 CCTV에 지적장애인인 계약 당사자가 휴대전화로 통장 계좌 번호를 보여주는 장면까지 있다며 자신들의 계약을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가족들에게는 CCTV화면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도의적 책임을 인정해 할부금 지원 정도는 해주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추후 회사 측의 조치를 지켜봐야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자신의 전화번호조차 외우지 못해 휴대전화 기능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언니는 최고가 요금제를 그대로 떠안고 있습니다. 가입한 요금제에 대해서는 다른 조치를 해줄 수 없다고 대리점을 밝혔습니다.

장애가 있지만 '성인'이니까 책임은 '스스로'

취재진이 대리점을 찾거나 통신사 측에 문의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성인이고 자필 서명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였습니다. 한 발 더 나가 취재를 하며 만난 한 통신사 대리점 직원은 장애인처럼 보인다고 손님에게 "장애인 복지카드 있느냐고 묻는 게 오히려 인권 침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통신사들도 할 말은 있습니다. 한 통신사에는 '지적장애 1·2급은 가입 시 보호자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5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의 '장애인의 휴대전화 가입 등에 대한 개선공고'가 나온 뒤로 장애인 스스로 가입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렇게 지적 장애인의 가입이 가능해지자 통신사들은 이들을 고려한 전용 요금제까지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본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가입했기 때문에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통신사 책임이 아닌 이상 보상도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난해 한 통신사를 상대로 낸 계약 무효 소송에서 법원은 지적 장애인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재판부는 "계약 체결 당시 지능지수가 35 미만인 지적 1급 장애인이며 가출로 인해 보호자 보호를 받을 수 없었고, 여러 개의 이동통신 단말기와 이동통신서비스를 이용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음에도 단기간에 계약을 체결한 상황 등을 들어 계약의 법률적인 의미 및 효과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적 압박이 낳는 악순환...규정도 없는 사각지대

대리점의 이런 영업 행태의 근본적 원인은 '실적 압박'입니다. 몇 달 전, 대리점 취재를 하면서 본사 측의 지원금 차감 정책 등에 못 이겨 고객에게도 고가 요금제나 부가 서비스 가입을 시킬 수밖에 없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통신사 3사 모두 지적장애인의 가입 절차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습니다. 실제 한 장애인인권단체에 접수되는 휴대폰 가입과 관련한 피해 상담 건수는 매달 5건 정도로 꾸준합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김영희 대표는 강제적인 규정이 없어 피해를 입고도 입증하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고 모든 피해는 장애인이 떠안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때문에 통신사 측에서 장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통신사 측에서는 뒷짐, 대리점에서는 지적장애인을 실적을 올려주는 '봉'으로 보는 이상 유사 피해는 끊이지 않을 겁니다.

장애인을 상대로 얼룩덜룩 엉망인 염색을 해주고 수십만 원의 바가지요금을 받았던 한 미용실 업주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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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5 16:52:44
    • 수정2016-10-25 17:39:36
    취재후·사건후
'계약'. 사전에 나와 있는 뜻은 '당사자 간의 의사표시 합치에 의한 법률행위'입니다. 계약에는 항상 당사자 간에 일정한 권리와 의무 등이 발생하게 되죠. 그래서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의했다는 것을 표시하는 당사자들의 '자필 서명'입니다.

하지만 계약을 할 때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미성년자는 부모님, 성인도 법률 대리인과 함께합니다. 계약 당사자가 지적장애인이라면 어떨까요?

지적장애 3급은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지능은 개인차가 있기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정도라고 합니다. 이 지적장애인이, 그것도 다른 휴대전화를 이미 갖고 있는데도, 보호자도 없이 또 새로운 휴대전화 단말기 개통 계약을 했다면 정상적인 계약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연관기사] ☞ 지적장애인 상대로 잇속 챙기는 이통사

모든 일은 '서명'에서 시작됐다.


지적장애 3급인 20살 김 모양. 지난달 28일 휴대전화 두 대를 개통했습니다. 이미 다른 휴대전화가 있는데도 말이죠. 당시 동행한 사람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한 남자입니다. 김 양은 이 남자와 통신사 대리점을 다섯 곳 넘게 돌아다녔습니다. 그 남자가 맛있는 것을 사줄 테니 김 양의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대리점 몇 군데에서는 김 양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취재진이 거절한 대리점을 찾아가 봤습니다. 직원은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남자친구 휴대전화를 개통해준다고 불쑥 찾아 왔는데, 상담을 해보니 느낌이 이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상품이 없다고 핑계를 대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심 없이 개통해준 대리점들은 말을 맞춘 듯 전혀 이상한 점이 없었다고 답했습니다. 심지어 자사에 개통된 단말기가 이미 있었지만 조회 한 번 해보지 않았습니다.



폐지된 계좌로도 개통, 심지어 명의도용까지

계좌를 도용해서라도 일단 가입시키고 보는 대리점도 있습니다. 지난달 한 주부는 통장에서 휴대전화 관련 요금 20만 원이 빠져나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지적장애 3급인 언니가 덜컥 휴대폰을 개통한 겁니다.


해당 요금 납부 계좌는 2년 전, 자신이 언니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할 때 신청서에서 쓴 은행 계좌였습니다. 그런데 가입신청서에는 이미 폐지된 언니 명의의 다른 통장 계좌가 버젓이 등록돼 있었습니다. 해당 대리점에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개통 과정에서 언니 계좌가 폐지된 계좌인 걸 확인하고 다른 계좌를 달라고 했더니 언니가 자신의 통장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 주부는 대리점으로부터 동의를 구하는 어떤 연락도 받은 적 없다고 다시 압박했습니다. 그랬더니 통장을 가져온 게 아니라 휴대전화로 계좌번호를 보여줬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대리점 측은 CCTV에 지적장애인인 계약 당사자가 휴대전화로 통장 계좌 번호를 보여주는 장면까지 있다며 자신들의 계약을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가족들에게는 CCTV화면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도의적 책임을 인정해 할부금 지원 정도는 해주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추후 회사 측의 조치를 지켜봐야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자신의 전화번호조차 외우지 못해 휴대전화 기능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언니는 최고가 요금제를 그대로 떠안고 있습니다. 가입한 요금제에 대해서는 다른 조치를 해줄 수 없다고 대리점을 밝혔습니다.

장애가 있지만 '성인'이니까 책임은 '스스로'

취재진이 대리점을 찾거나 통신사 측에 문의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성인이고 자필 서명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였습니다. 한 발 더 나가 취재를 하며 만난 한 통신사 대리점 직원은 장애인처럼 보인다고 손님에게 "장애인 복지카드 있느냐고 묻는 게 오히려 인권 침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통신사들도 할 말은 있습니다. 한 통신사에는 '지적장애 1·2급은 가입 시 보호자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5년 전, 국가인권위원회의 '장애인의 휴대전화 가입 등에 대한 개선공고'가 나온 뒤로 장애인 스스로 가입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렇게 지적 장애인의 가입이 가능해지자 통신사들은 이들을 고려한 전용 요금제까지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본인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가입했기 때문에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통신사 책임이 아닌 이상 보상도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난해 한 통신사를 상대로 낸 계약 무효 소송에서 법원은 지적 장애인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재판부는 "계약 체결 당시 지능지수가 35 미만인 지적 1급 장애인이며 가출로 인해 보호자 보호를 받을 수 없었고, 여러 개의 이동통신 단말기와 이동통신서비스를 이용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음에도 단기간에 계약을 체결한 상황 등을 들어 계약의 법률적인 의미 및 효과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적 압박이 낳는 악순환...규정도 없는 사각지대

대리점의 이런 영업 행태의 근본적 원인은 '실적 압박'입니다. 몇 달 전, 대리점 취재를 하면서 본사 측의 지원금 차감 정책 등에 못 이겨 고객에게도 고가 요금제나 부가 서비스 가입을 시킬 수밖에 없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통신사 3사 모두 지적장애인의 가입 절차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습니다. 실제 한 장애인인권단체에 접수되는 휴대폰 가입과 관련한 피해 상담 건수는 매달 5건 정도로 꾸준합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김영희 대표는 강제적인 규정이 없어 피해를 입고도 입증하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고 모든 피해는 장애인이 떠안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때문에 통신사 측에서 장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통신사 측에서는 뒷짐, 대리점에서는 지적장애인을 실적을 올려주는 '봉'으로 보는 이상 유사 피해는 끊이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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