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무녀…명성황후 홀린 ‘신령군’

입력 2016.10.28 (09:04) 수정 2016.10.2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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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6월 성난 군민들이 명성황후를 죽이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에 난입했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날카로운 가운데 일어난 구식군대의 병란, 임오군란이 터진 것이다.

다급해진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을 입고 가까스로 탈출해 충주 장호원에 있는 먼 친척 집으로 도망쳤다.

고종의 친정 이후 실각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했고 정적 관계였던 황후는 벼랑 끝으로 몰린 신세가 됐다. 대원군은 행방불명된 황후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아예 장례식까지 치러버렸다.

하지만 신분을 숨긴 채 숨어 살던 황후는 곧 한줄기 서광을 보게 된다. 친척 집 여종으로부터 한 무녀를 소개받으면서부터다.

이름은 박창렬, 가난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나 남편을 여의고 궁여지책으로 무당이 된 여자였다. 그녀는 관왕(삼국지의 관우)을 모셨다. 수완이 좋아 단골도 많았다. 여종도 그들 중 하나였다.

KBS드라마 ‘장사의 신’에서 진령군(신령군) 역할을 맡은 배우 김민정KBS드라마 ‘장사의 신’에서 진령군(신령군) 역할을 맡은 배우 김민정

무녀 박 씨는 황후를 보자마자 ‘쓸모 있는’ 귀부인임을 직감하고 황후에게 귀인의 관상이 있음을 고한다. 그러면서 두 달 뒤 한양으로 올라가 귀한 자리에 오를 것임을 예언했다.

절망에 빠져있던 황후는 단박에 박 씨에게 매료됐고, 만남을 거듭하면서 둘은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는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제거하고 한양으로 돌아가 권력을 되찾게 된다. 환궁한 시점은 무녀 박 씨가 예언한 날짜와 비슷했다. 이 일을 계기로 황후는 박 씨를 수호 신령으로 여기게 된다.

황후는 박 씨를 궁으로 데려와 일이 있을 때마다 속내를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했다. 자신의 주치의 역할도 맡겼다.

명성황후 초상화명성황후 초상화

황후의 신임이 깊어지면서 고종도 박 씨를 신뢰하게 됐다. 궁에 머물던 박 씨를 위해 한양 북쪽(지금의 종로구 명륜동)에 관우 사당을 지어주고 그를 수호령이라는 뜻의 ‘신령군’ 또는 ‘진령군’으로 불렀다. 군(君)은 왕자급에 해당하는 고위급 작위다. 일개 무녀가 공신들이나 받는 작위를 받은 것이다.

서울 동관왕묘에 있는 관우상. 명륜동에 있던 북관왕묘는 1913년 동묘에 병합됐다서울 동관왕묘에 있는 관우상. 명륜동에 있던 북관왕묘는 1913년 동묘에 병합됐다

신령군에 대한 황후와 고종의 신뢰는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더욱 커졌다.

1884년 12월,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은 친청파인 명성황후 일파를 제거하려 하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했는데, 그 과정에서 고종과 황후가 관우 사당으로 피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명성황후와 고종은 신령군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랐다. 그런 만큼 신령군의 권력도 커졌다. 작위만 있을 뿐 공식적인 직책이 없었지만, 그는 정치 문제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영향력이 커질수록 신령군의 주변에 빌붙으려는 자들이 줄을 섰다. 사람이 꼬이는 만큼 돈도 오갔다. 돈으로 관직을 사는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신령군은 심지어 건달 출신의 이유인이란 자를 아들로 삼아 고관대작을 시키는 등 국정 농단을 일삼았다.

명성황후와 고종은 신령군이 추천한 자들을 모두 등용했다. 이들 대부분은 신령군에게 뇌물을 줬거나 각별한 친분이 있는 자들이었다.

신령군은 막대한 재물이 들어가는 대형 굿판을 여러 차례 벌이면서 국고를 탕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하지 않던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황후와 고종은 사실상 일본의 포로가 됐고 신령군은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투옥됐다. 이듬해인 1895년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됐고 조선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역사가들은 신령군을 조선 말엽의 실정을 대표하는 ‘요무(妖巫)’로 기록했다.

비선 실세 최순실, '현대판 신령군' 되나?


130여 년 전 신령군 일화는 누구의 말처럼 ‘봉건시대에나 있을 법한 얘기’인 걸까?

최근 ‘비선 실세’로 지목되고 있는 최순실 씨가 민간인 신분으로 광범위하게 국정을 농단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종교적 배경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들이 사실이라면, 최 씨가 자행한 일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최순실 씨가 국정 운영 전반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이 같은 의혹은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친분이 아무리 각별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국정을 농단할 순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관련 의혹은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고구마 줄기처럼 각종 의혹이 엮여 나오는데도 납득할만한 해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국민은 ‘최순실 파동’을 ‘현대판 신령군 사태’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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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속 무녀…명성황후 홀린 ‘신령군’
    • 입력 2016-10-28 09:04:19
    • 수정2016-10-28 10:04:45
    취재K
1882년 6월 성난 군민들이 명성황후를 죽이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에 난입했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날카로운 가운데 일어난 구식군대의 병란, 임오군란이 터진 것이다.

다급해진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을 입고 가까스로 탈출해 충주 장호원에 있는 먼 친척 집으로 도망쳤다.

고종의 친정 이후 실각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했고 정적 관계였던 황후는 벼랑 끝으로 몰린 신세가 됐다. 대원군은 행방불명된 황후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아예 장례식까지 치러버렸다.

하지만 신분을 숨긴 채 숨어 살던 황후는 곧 한줄기 서광을 보게 된다. 친척 집 여종으로부터 한 무녀를 소개받으면서부터다.

이름은 박창렬, 가난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나 남편을 여의고 궁여지책으로 무당이 된 여자였다. 그녀는 관왕(삼국지의 관우)을 모셨다. 수완이 좋아 단골도 많았다. 여종도 그들 중 하나였다.

KBS드라마 ‘장사의 신’에서 진령군(신령군) 역할을 맡은 배우 김민정
무녀 박 씨는 황후를 보자마자 ‘쓸모 있는’ 귀부인임을 직감하고 황후에게 귀인의 관상이 있음을 고한다. 그러면서 두 달 뒤 한양으로 올라가 귀한 자리에 오를 것임을 예언했다.

절망에 빠져있던 황후는 단박에 박 씨에게 매료됐고, 만남을 거듭하면서 둘은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후는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제거하고 한양으로 돌아가 권력을 되찾게 된다. 환궁한 시점은 무녀 박 씨가 예언한 날짜와 비슷했다. 이 일을 계기로 황후는 박 씨를 수호 신령으로 여기게 된다.

황후는 박 씨를 궁으로 데려와 일이 있을 때마다 속내를 털어놓으며 조언을 구했다. 자신의 주치의 역할도 맡겼다.

명성황후 초상화
황후의 신임이 깊어지면서 고종도 박 씨를 신뢰하게 됐다. 궁에 머물던 박 씨를 위해 한양 북쪽(지금의 종로구 명륜동)에 관우 사당을 지어주고 그를 수호령이라는 뜻의 ‘신령군’ 또는 ‘진령군’으로 불렀다. 군(君)은 왕자급에 해당하는 고위급 작위다. 일개 무녀가 공신들이나 받는 작위를 받은 것이다.

서울 동관왕묘에 있는 관우상. 명륜동에 있던 북관왕묘는 1913년 동묘에 병합됐다
신령군에 대한 황후와 고종의 신뢰는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더욱 커졌다.

1884년 12월,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은 친청파인 명성황후 일파를 제거하려 하지만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했는데, 그 과정에서 고종과 황후가 관우 사당으로 피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명성황후와 고종은 신령군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랐다. 그런 만큼 신령군의 권력도 커졌다. 작위만 있을 뿐 공식적인 직책이 없었지만, 그는 정치 문제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영향력이 커질수록 신령군의 주변에 빌붙으려는 자들이 줄을 섰다. 사람이 꼬이는 만큼 돈도 오갔다. 돈으로 관직을 사는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신령군은 심지어 건달 출신의 이유인이란 자를 아들로 삼아 고관대작을 시키는 등 국정 농단을 일삼았다.

명성황후와 고종은 신령군이 추천한 자들을 모두 등용했다. 이들 대부분은 신령군에게 뇌물을 줬거나 각별한 친분이 있는 자들이었다.

신령군은 막대한 재물이 들어가는 대형 굿판을 여러 차례 벌이면서 국고를 탕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하지 않던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황후와 고종은 사실상 일본의 포로가 됐고 신령군은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투옥됐다. 이듬해인 1895년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됐고 조선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역사가들은 신령군을 조선 말엽의 실정을 대표하는 ‘요무(妖巫)’로 기록했다.

비선 실세 최순실, '현대판 신령군' 되나?


130여 년 전 신령군 일화는 누구의 말처럼 ‘봉건시대에나 있을 법한 얘기’인 걸까?

최근 ‘비선 실세’로 지목되고 있는 최순실 씨가 민간인 신분으로 광범위하게 국정을 농단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종교적 배경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들이 사실이라면, 최 씨가 자행한 일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최순실 씨가 국정 운영 전반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이 같은 의혹은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친분이 아무리 각별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국정을 농단할 순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관련 의혹은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고구마 줄기처럼 각종 의혹이 엮여 나오는데도 납득할만한 해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국민은 ‘최순실 파동’을 ‘현대판 신령군 사태’로 받아들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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