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과로자살’…‘일시키는 방식’의 잔인함

입력 2016.10.28 (19:05) 수정 2016.10.3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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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직장인의 상징은 성실성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실제로 성실한 노동자, 성실한 근로자의 모습은 곳곳에 있다.

좁고 낡은 책상에서 서류 더미에 쌓여 도시락을 먹으며 일하는 신입사원, 혹은 건설공사장에서 하루종일 큰소리로 중장비 운행을 안내하는 늙은 노무자, 또는 늦은 밤까지 불 켜진 사무실에서 곰처럼 웅크리고 앉아 PC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중년의 사무직 종사자, 아니면 좁은 주방에서 묵묵히 밀가루 반죽을 빚고 있는 초로의 우동집 사장 모습이나, 공작 기계를 돌리며 주문품을 만들고 있는 반백의 기술자도 떠올릴 수있다.

자발적 성실함은 분명히 미덕이다. 그러나 생존을 볼모로 강요된 성실함은 폭력이다.

최근 일본사회에서 '과로 자살'이라는 생경한 어휘가 주목받고 있다. '과로'와 '자살'의 조합이 만들어낸 어휘는 직관적으로 슬픔과 분노를 전달한다. 이처럼 '생존경쟁의 슬픔'을 절실히 담아내는 단어가 또 있을까?

2016년 4월 일본 간사이 전력의 40대 과장 A 씨가 도쿄 출장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발단은 가동 40년을 넘어 수명이 이미 지난 다카하마 원전 1·2호기였다. A 과장은 노후 원전의 재심사를 준비하는 중요 업무를 맡았다. 1월부터 노동강도와 시간이 급증했고 2월에는 시간외 근무가 200시간을 넘어섰다. 자살 직전 19일 동안 초과 근무는 150시간에 이른 것으로 조사됐다.


시간외 근무가 아무리 많아도 어영부영 노든 듯 일하는 듯 시간을 때우는 사람은 결코 지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커피 마시며 수다 떨고, 신문 보고, 왜 하는지 모를 회의를 열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점심 먹고, 산보 하다 들어와 잠시 졸다가, 어려운 일은 부하직원들에게 시키고, 자신은 쉬운 일이나 골라서 하면서 결재서류에 사인이나 하고, 그러다 저녁 먹으며 반주하고 들어와 졸다가 밤늦게 퇴근하며 시간외 근무 입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이런 부류의 사람, 혹은 이런 부류의 사람이 출세하는 직장을 우리는 최소한 1명 혹은 1개 이상 알고 있다.)

A 과장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여느 성실한 중견 직장인처럼 근무시간에 최선을 다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의 죽음 이후 회사는 노후 원전 가동연장 허가를 받는데 성공했다. 정작 주인공은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난 뒤 '비극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숨진 과장은 관리 감독자였다. 노동기준법상의 근로시간 제한 대상이 아니었다. 일본의 노동감독기관은 A 과장의 죽음이 과로 자살이라고 결론 내렸다. 회사 측이 초과근무 시간과 건강상태 등을 점검할 의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2015년 12월, 일본 최대 광고회사 덴쓰의 신입사원 '다카하시 마쓰리(여성,24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음 직전까지 업무 과다에 따른 고통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달에 100시간 이상의 시간외 근무. 회사 측이 신고한 시간외 근무의 두 배 이상 근무한 정황이 드러났다. 지난한 법적 공방을 거쳐 2016년 가을에야 업무상 재해, 즉 과로자살로 인정됐다.


사망자 유족이 이례적으로 공개 입장 표명에 나섰다. 기업의 고용 관행에 변화가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기업의 노무 관리가 개혁돼야 하고, 정부도 기업이 고용 관행을 바꾸도록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아베 총리도 입장을 표명했다.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일하는 방식의 개혁'을 반드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이른바 '일하는 방식의 개혁'을 표방하면서, 근무 시간을 줄이면서 업무효율을 높일 것을 주문해왔다.

일본의 장시간 근무 관행은 한국 못지 않게 뿌리 깊다. 문제가 된 광고회사 덴쓰에서는 3년 전에도 과로와 관련된 죽음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병사로 알려진 죽음은 사실상 과로사였다. 노동 당국은 2014년과 2015년에 이미 노사협약 한도를 넘는 시간외 근무를 시키지 말라는 시정권고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장시간 근무는 기업의 규모를 가리지 않는다. 2014년 주물 공장에서 일하던 20대 필리핀 기능실습생이 기숙사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한 달 시간외 근무가 100시간. 2016년 8월이 돼서야 과로사로 판정이 났다.

후생노동성 집계를 보면, 장시간의 노동이나 스트레스에 견디다 못해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한 사례가 1년 동안 100건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도한 시간외 근무를 막겠다면서 후생노동성이 2015년 4월∼12월까지 8,530개 사업장을 방문 조사한 결과, 4,790곳에서 불법 초과근무 사례를 적발했다. 시정 권고를 내렸는데, '권고'가 얼마만큼 효과가 있는지는 쉽게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덴쓰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사무실 강제 소등이라는, 나름대로 극약 처방을 내놓았다. 시간외 근무 상한선도 월 70시간에서 65시간으로 줄이기로 했다. 다짐대로 될까?

인건비 삭감에 급급한 기업들이 해묵은 고용 관행을 바꾸기는 어렵다. 게다가 '관리직이 쓸데없이 많다' '창가에서 신문이나 읽고 있는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 등의 불만은 그대로 둔 채, 중하위급 직원들만 옥죈다면 고용 관행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시간외 근무를 줄이는 핵심은 시간 제한이 아니라 업무량 제한이다. 살인적인 업무량은 그대로인데 사무실에서 나가라고 하면, 일감을 들고 퇴근해 '기록되지 않는' 시간외 근무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여기에 '노동 자체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대가는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대로 일이나 하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면, 이것은 횡포이고 폭력이다. 노동자를 과로자살로 내모는 기업문화 이면에는 '노동의 기회'에 감사하라는 무언의 압력이 있다.

과로자살 문제의 핵심이자 출발점은 바로 '일시키는 방식'의 잔인함이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방식'의 비효율이 아니다. '일시키는 방식'의 개혁은 '경영개혁'의 다른 이름이다. 

[연관기사] ☞ [뉴스광장][지금 세계는] 月 초과근무 200시간…日 잇단 '과로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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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8 19:05:48
    • 수정2016-10-31 20:03:16
    취재후·사건후
일본 직장인의 상징은 성실성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실제로 성실한 노동자, 성실한 근로자의 모습은 곳곳에 있다.

좁고 낡은 책상에서 서류 더미에 쌓여 도시락을 먹으며 일하는 신입사원, 혹은 건설공사장에서 하루종일 큰소리로 중장비 운행을 안내하는 늙은 노무자, 또는 늦은 밤까지 불 켜진 사무실에서 곰처럼 웅크리고 앉아 PC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중년의 사무직 종사자, 아니면 좁은 주방에서 묵묵히 밀가루 반죽을 빚고 있는 초로의 우동집 사장 모습이나, 공작 기계를 돌리며 주문품을 만들고 있는 반백의 기술자도 떠올릴 수있다.

자발적 성실함은 분명히 미덕이다. 그러나 생존을 볼모로 강요된 성실함은 폭력이다.

최근 일본사회에서 '과로 자살'이라는 생경한 어휘가 주목받고 있다. '과로'와 '자살'의 조합이 만들어낸 어휘는 직관적으로 슬픔과 분노를 전달한다. 이처럼 '생존경쟁의 슬픔'을 절실히 담아내는 단어가 또 있을까?

2016년 4월 일본 간사이 전력의 40대 과장 A 씨가 도쿄 출장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발단은 가동 40년을 넘어 수명이 이미 지난 다카하마 원전 1·2호기였다. A 과장은 노후 원전의 재심사를 준비하는 중요 업무를 맡았다. 1월부터 노동강도와 시간이 급증했고 2월에는 시간외 근무가 200시간을 넘어섰다. 자살 직전 19일 동안 초과 근무는 150시간에 이른 것으로 조사됐다.


시간외 근무가 아무리 많아도 어영부영 노든 듯 일하는 듯 시간을 때우는 사람은 결코 지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커피 마시며 수다 떨고, 신문 보고, 왜 하는지 모를 회의를 열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점심 먹고, 산보 하다 들어와 잠시 졸다가, 어려운 일은 부하직원들에게 시키고, 자신은 쉬운 일이나 골라서 하면서 결재서류에 사인이나 하고, 그러다 저녁 먹으며 반주하고 들어와 졸다가 밤늦게 퇴근하며 시간외 근무 입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이런 부류의 사람, 혹은 이런 부류의 사람이 출세하는 직장을 우리는 최소한 1명 혹은 1개 이상 알고 있다.)

A 과장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여느 성실한 중견 직장인처럼 근무시간에 최선을 다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그의 죽음 이후 회사는 노후 원전 가동연장 허가를 받는데 성공했다. 정작 주인공은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난 뒤 '비극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숨진 과장은 관리 감독자였다. 노동기준법상의 근로시간 제한 대상이 아니었다. 일본의 노동감독기관은 A 과장의 죽음이 과로 자살이라고 결론 내렸다. 회사 측이 초과근무 시간과 건강상태 등을 점검할 의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2015년 12월, 일본 최대 광고회사 덴쓰의 신입사원 '다카하시 마쓰리(여성,24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음 직전까지 업무 과다에 따른 고통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달에 100시간 이상의 시간외 근무. 회사 측이 신고한 시간외 근무의 두 배 이상 근무한 정황이 드러났다. 지난한 법적 공방을 거쳐 2016년 가을에야 업무상 재해, 즉 과로자살로 인정됐다.


사망자 유족이 이례적으로 공개 입장 표명에 나섰다. 기업의 고용 관행에 변화가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기업의 노무 관리가 개혁돼야 하고, 정부도 기업이 고용 관행을 바꾸도록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아베 총리도 입장을 표명했다.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일하는 방식의 개혁'을 반드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이른바 '일하는 방식의 개혁'을 표방하면서, 근무 시간을 줄이면서 업무효율을 높일 것을 주문해왔다.

일본의 장시간 근무 관행은 한국 못지 않게 뿌리 깊다. 문제가 된 광고회사 덴쓰에서는 3년 전에도 과로와 관련된 죽음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병사로 알려진 죽음은 사실상 과로사였다. 노동 당국은 2014년과 2015년에 이미 노사협약 한도를 넘는 시간외 근무를 시키지 말라는 시정권고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장시간 근무는 기업의 규모를 가리지 않는다. 2014년 주물 공장에서 일하던 20대 필리핀 기능실습생이 기숙사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한 달 시간외 근무가 100시간. 2016년 8월이 돼서야 과로사로 판정이 났다.

후생노동성 집계를 보면, 장시간의 노동이나 스트레스에 견디다 못해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한 사례가 1년 동안 100건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도한 시간외 근무를 막겠다면서 후생노동성이 2015년 4월∼12월까지 8,530개 사업장을 방문 조사한 결과, 4,790곳에서 불법 초과근무 사례를 적발했다. 시정 권고를 내렸는데, '권고'가 얼마만큼 효과가 있는지는 쉽게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덴쓰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사무실 강제 소등이라는, 나름대로 극약 처방을 내놓았다. 시간외 근무 상한선도 월 70시간에서 65시간으로 줄이기로 했다. 다짐대로 될까?

인건비 삭감에 급급한 기업들이 해묵은 고용 관행을 바꾸기는 어렵다. 게다가 '관리직이 쓸데없이 많다' '창가에서 신문이나 읽고 있는 사람이 젊은 사람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다' 등의 불만은 그대로 둔 채, 중하위급 직원들만 옥죈다면 고용 관행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시간외 근무를 줄이는 핵심은 시간 제한이 아니라 업무량 제한이다. 살인적인 업무량은 그대로인데 사무실에서 나가라고 하면, 일감을 들고 퇴근해 '기록되지 않는' 시간외 근무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여기에 '노동 자체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대가는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대로 일이나 하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면, 이것은 횡포이고 폭력이다. 노동자를 과로자살로 내모는 기업문화 이면에는 '노동의 기회'에 감사하라는 무언의 압력이 있다.

과로자살 문제의 핵심이자 출발점은 바로 '일시키는 방식'의 잔인함이다. '노동자들이 일하는 방식'의 비효율이 아니다. '일시키는 방식'의 개혁은 '경영개혁'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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