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막말과 ‘정치적 올바름’

입력 2016.11.10 (18:18) 수정 2016.11.11 (09:37)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이슬람교 출신들이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일으키고 있는데도 단 한 차례도 '극단적 이슬람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클린턴 후보는 미국 내에서, 그리고 국경에서 잘못된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클린턴 후보는 우리의 적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주저할 정도로 정말 약합니다. 나는 앞으로 잘못된 걸 바로잡기 위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거부하고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공화당 예비 경선이 진행되던 지난 6월 중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자신이 내건 이슬람교도에 대한 일시 입국 금지 공약을 놓고 '이슬람 혐오'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주: '정치적 올바름'은 엄밀히 말하면 정확한 번역은 아니며 '정치적으로 적절한'또는 '정치적으로 유리한' 정도로 번역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으로 주로 번역돼 그냥 쓰기로 한다. 참고로 메리엄-웹스터 사전 온라인 판은 'politically correct'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politically correct: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은 삼가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함/politically correct: agreeing with the idea that people should be careful to not use language or behave in a way that could offend a particular group of people)


미국 문화에 뿌리 박힌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미국 사회에서 생겨난 '정치적 올바름'은 처음에는 정치인 등 공인들이 인종, 성별, 성, 종교, 이민자 등과 관련된 미국의 소수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정치적인 고려가 있는 언어나 행위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정치적 올바름'은 일반 사람들의 삶에도 엄청난 영향을 줄 만큼 미국 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위 그림은 미국의 유명한 신문 연재만화다. 흑인 어린이가 "나는 흑인이라서 좋다”고 말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백인 어린이가 "나는 백인이라서 좋다”라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받을 수 있는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백인 어린이 말이 미국 사회의 소수인 흑인을 배려하지 않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은 상대방 입장을 고려해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참고 점잖게 말을 하거나 행동하는 경우에 따라 다분히 위선적인 언행을 가리키기도 한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때문에 여론 조사 빗나갔다?

8일(현지시각)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모든 여론 조사 기관의 예상을 깨고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돼 세계 곳곳에 충격을 줬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여론조사 결과가 뒤집힌 이유로 '정치적 올바름'을 꼽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저학력 백인 노동자와 달리 고학력 부유층 백인 유권자들이 여론조사에서는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여성이나 이슬람교에 대한 비하 발언을 일삼은 트럼프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히지 못했지만 투표장에서는 트럼프를 찍었다"고 분석했다.

즉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미국 사회의 주인은 여전히 백인이다."라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투표장에서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사실상 이를 공약으로 내건 트럼프 후보에게 몰표를 몰아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언론의 사후 분석 또한 일면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선거기간 내내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트럼프의 발언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기준으로 재단해 막말만을 부각했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트럼프가 오늘은 어떤 말실수 또는 막말을 할까?" 기다리다가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트럼프 후보를 비판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해주는 트럼프 후보에 '속으로'는 환호한 유권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정치적 올바름'과 정치적 담론

미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정치적 올바름'은 소수자를 배려한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지적 또한 있다. 일반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인 담론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광범위하게 용인돼왔던 생각도 한순간에 부적절한 말이나 행위로 낙인을 찍기 때문이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으로 보면 미국을 위해 안전한 국경을 만들라고 주장하면 인종 차별주의자나 외국인 혐오자라는 딱지가 붙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또 한세대전에는 일반적으로 널리 용인됐던 전통적인 결혼에 대한 견해를 나타내면 극단주의자 또는 지독한 편견을 갖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와 외교 정책' 저자인 로버트 메리는 한 언론 기고문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나타나기 전까지 미국의 많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얼마나 많은 불만을 품고 속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면서 "도널드 트럼프는 '정치적 올바름'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사람들을 후련하게 해줬다'고 분석했다.

" '정치적 올바름'은 많은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들을 바꿀 수는 없다." 로버트 메리의 기고문 결론이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트럼프의 막말과 ‘정치적 올바름’
    • 입력 2016-11-10 18:18:01
    • 수정2016-11-11 09:37:59
    취재K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이슬람교 출신들이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일으키고 있는데도 단 한 차례도 '극단적 이슬람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클린턴 후보는 미국 내에서, 그리고 국경에서 잘못된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클린턴 후보는 우리의 적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주저할 정도로 정말 약합니다. 나는 앞으로 잘못된 걸 바로잡기 위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거부하고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공화당 예비 경선이 진행되던 지난 6월 중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자신이 내건 이슬람교도에 대한 일시 입국 금지 공약을 놓고 '이슬람 혐오'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주: '정치적 올바름'은 엄밀히 말하면 정확한 번역은 아니며 '정치적으로 적절한'또는 '정치적으로 유리한' 정도로 번역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으로 주로 번역돼 그냥 쓰기로 한다. 참고로 메리엄-웹스터 사전 온라인 판은 'politically correct'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politically correct: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은 삼가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함/politically correct: agreeing with the idea that people should be careful to not use language or behave in a way that could offend a particular group of people) 미국 문화에 뿌리 박힌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미국 사회에서 생겨난 '정치적 올바름'은 처음에는 정치인 등 공인들이 인종, 성별, 성, 종교, 이민자 등과 관련된 미국의 소수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정치적인 고려가 있는 언어나 행위를 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정치적 올바름'은 일반 사람들의 삶에도 엄청난 영향을 줄 만큼 미국 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위 그림은 미국의 유명한 신문 연재만화다. 흑인 어린이가 "나는 흑인이라서 좋다”고 말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백인 어린이가 "나는 백인이라서 좋다”라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받을 수 있는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백인 어린이 말이 미국 사회의 소수인 흑인을 배려하지 않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 올바름'은 상대방 입장을 고려해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참고 점잖게 말을 하거나 행동하는 경우에 따라 다분히 위선적인 언행을 가리키기도 한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때문에 여론 조사 빗나갔다? 8일(현지시각)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모든 여론 조사 기관의 예상을 깨고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돼 세계 곳곳에 충격을 줬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여론조사 결과가 뒤집힌 이유로 '정치적 올바름'을 꼽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저학력 백인 노동자와 달리 고학력 부유층 백인 유권자들이 여론조사에서는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여성이나 이슬람교에 대한 비하 발언을 일삼은 트럼프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히지 못했지만 투표장에서는 트럼프를 찍었다"고 분석했다. 즉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미국 사회의 주인은 여전히 백인이다."라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투표장에서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사실상 이를 공약으로 내건 트럼프 후보에게 몰표를 몰아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언론의 사후 분석 또한 일면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선거기간 내내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트럼프의 발언을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기준으로 재단해 막말만을 부각했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트럼프가 오늘은 어떤 말실수 또는 막말을 할까?" 기다리다가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트럼프 후보를 비판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해주는 트럼프 후보에 '속으로'는 환호한 유권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정치적 올바름'과 정치적 담론 미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정치적 올바름'은 소수자를 배려한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지적 또한 있다. 일반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인 담론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광범위하게 용인돼왔던 생각도 한순간에 부적절한 말이나 행위로 낙인을 찍기 때문이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으로 보면 미국을 위해 안전한 국경을 만들라고 주장하면 인종 차별주의자나 외국인 혐오자라는 딱지가 붙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또 한세대전에는 일반적으로 널리 용인됐던 전통적인 결혼에 대한 견해를 나타내면 극단주의자 또는 지독한 편견을 갖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미국의 역사와 외교 정책' 저자인 로버트 메리는 한 언론 기고문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나타나기 전까지 미국의 많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얼마나 많은 불만을 품고 속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면서 "도널드 트럼프는 '정치적 올바름'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사람들을 후련하게 해줬다'고 분석했다. " '정치적 올바름'은 많은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들을 바꿀 수는 없다." 로버트 메리의 기고문 결론이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