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최순실-삼성-국민연금?’ 정말 국민을 배신했나

입력 2016.11.12 (10:01) 수정 2016.11.23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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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은 국민들 돈으로 삼성 손들어주고, 삼성은 최순실 말 사주는 구조가 옳은 거냐?" 지난달 말 국회에서 한 야당 의원이 법무부 장관에게 질책하듯 꺼낸 말입니다. '삼성-국민연금-최순실(박근혜 대통령)' 간에 부적절한 거래 의혹을 제기하는 야권의 목소리는 이번 주 들어 더 커졌습니다.

'최순실 게이트'가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최상단에 있는 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을 둘러싼 의혹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고 있는 건데요. 소송과 고발까지 얽혀 현재 진행형인 이 사안을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중요했던 이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옛 에버랜드)의 합병은, 3년 전부터 이어져 온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에서 핵심에 해당합니다. 이 합병을 통해 탄생한 (뉴)삼성물산에서 이재용 씨를 비롯한 일가는 지분 30.4%를 보유하게 됐고, 이재용 씨는 최대주주(17.08%)가 됐습니다.

이재용 씨가 최대주주인 '뉴 삼성물산'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삼성그룹 핵심 계열사들의 지배구조를 표로 그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뉴 삼성물산을 통해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들에 대한 확실한 지배력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러니 이재용 씨 일가 입장에서는 이 합병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과제였지요.

합병 비율, 왜 논란 일었나?

삼성은 이런 그림을 그려놓고 2015년 5월 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계획을 공시합니다. 주주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을 1 대 0.3500885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이 합병 비율을 놓고 큰 논란이 벌어집니다. 제일모직 1주의 가치를 삼성물산 3주와 비슷하게 쳐준다는 합병 비율이 제일모직에 지나치게 유리하게 산정됐다는 비판이 불거졌습니다.

당시 이재용 씨 일가는 제일모직 주식(지분율 42.2%)을 삼성물산 주식(지분율 1.4%)보다 훨씬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대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삼성물산의 가치를 일부러 낮게 매긴 게 아니냐는 겁니다.
삼성 측은 합병 비율을 산정할 때 두 회사의 5월 22일 주식 가격을 기준으로 '객관적으로' 계산했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는 당시 삼성물산이 보유한 계열사 주식의 가치만 13조 원인데, 삼성물산 주식의 시가총액이 이보다 적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자산과 수익 가치로 따지면 삼성물산이 제일모직보다 가치가 더 높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삼성물산 주가가 크게 저평가된 상황에서 당시 주가만 가지고 합병 비율을 결정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겁니다.

한발 더 나아가, 증시에서는 삼성물산의 주가가 낮았던 이유를 놓고 '음모론'까지 불거졌습니다. 2015년 상반기에 건설 경기가 좋아져 주요 건설사들의 주가가 상승했는데 삼성물산 주가는 하락했다는 게 그 근거였습니다. 삼성물산이 합병 비율 산정 시점에서 주가를 낮추려고 일부러 영업을 확대하지 않고 해외 수주를 숨겼으며 계열사로 실적을 빼돌리기도 했다는 의혹들이 제기됐습니다.

합병 비율에 대한 논란이 커지며 삼성물산 주식을 갖고 있는 주주 가운데 상당수가 반발했습니다. 지분 7%가량을 보유한 외국계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합병에 반대한다고 밝히면서 이에 동조하는 외국인 지분이 27%까지 늘었습니다. 합병에 찬성하는 삼성 쪽 우호 지분은 20%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합병 여부를 결정하는 열쇠를 쥐게 됐습니다. 증시에서는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지난해 7월 10일 합병에 찬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민연금의 지원에 힘입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은 주주총회에서 과반 득표에 성공했습니다.

국민연금이 의심받는 이유 ① "SK 합병 때와 달랐다"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할 거라는 시각이 우세했던 이유는 뭘까요? 국민연금이 제일모직 지분(4.8%)보다 삼성물산 지분(11.2%)을 두 배 넘게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성물산 주주에게 더 불리한 합병 비율에 반대하는 것이 국민연금이 가진 지분 가치를 극대화하는 합리적 선택이라고 본 겁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비율 논란이 한창인 지난해 6월 24일 국민연금이 (주)SK와 SK C&C의 합병 건에 대해 내린 결정은 시장 참가자들의 이런 판단에 무게를 더 실어줬습니다. 당시 국민연금은 (주)SK와 SK C&C의 합병 비율을 문제 삼아 합병에 반대했습니다.

1대 0.73 정도인 SK C&C와 SK의 합병 비율이 자산과 수익 가치에 비춰 SK C&C에 유리하게 책정됐고, 이는 SK C&C의 지분율이 높은 최태원 회장 일가의 이익을 위해 SK 주주들의 이익을 훼손한 것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당시 국민연금은 SK와 SK C&C의 지분을 각각 7.2%와 6.9%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SK 지분을 더 많이 보유한 만큼 SK 주주에게 불리한 합병 비율에 반대한 것입니다.

국민연금이 SK 합병 건을 반대한 사실이 알려지자, 당일 증시에서 삼성물산 주가가 급등하고 제일모직 주가가 급락했습니다. 시장 참가자들이 SK-SK C&C 합병에 대해 보여준 국민연금의 판단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기대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건을 찬성한 데 대해 지난해 9월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에 출석한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은 "삼성물산 합병 건은 SK와는 달랐다. 충분한 가치 평가를 거쳐 결정했다"고 해명했습니다.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가운데)과 최치훈 삼성물산 대표(왼쪽)가 2015년 9월14일 금융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질문을 받고 있다.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가운데)과 최치훈 삼성물산 대표(왼쪽)가 2015년 9월14일 금융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질문을 받고 있다.

국민연금이 의심받는 이유 ② "자문기구는 반대했다"

국민연금의 운용 지침을 보면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은 '주주 가치와 국민연금의 이익'으로 돼 있습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세계 1위와 2위의 의결권 자문회사인 ISS와 글라스루이스가 불합리한 합병 비율 때문에 주주 가치가 훼손됐다는 이유로 합병에 반대하는 권고 의견을 냈습니다. 국내에서도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을 맡고 있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CGS)과 서스틴베스트 등이 반대를 권고했습니다.

공식 자문기구와 세계적인 자문업체들의 반대 권고와 다른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 국민연금은 영업비밀에 해당한다며 구체적인 이유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책임자인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은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내부적으로 충분한 가치 평가를 거쳐 결정한 결과"라고만 밝혔습니다.

국민연금이 의심받는 이유 ③ "전문위원회 거치지 않았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결정은 내부 인사들로 구성된 투자위원회에서 이뤄지지만,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를 거쳐 결정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식적인 의결권 행사 지침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당시 증시에서는 삼성물산 합병 건과 관련해 합병 비율 논란이 뜨거운 점, 국민연금이 합병 성사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점, 자문업체들이 반대 권고를 한 점 등을 두루 감안할 때 국민연금이 결정을 전문위원회에 맡길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전문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투자위원회'에서 찬성 결정을 내렸습니다. 불과 한 달 전, SK-SK C&C 합병 건에 대해 의사 결정을 할 때는 전문위원회를 거쳤기 때문에 그보다 논란이 더 큰 삼성물산 합병 건을 내부 인사끼리 결정한 것은 더욱 시장을 납득시키기 어려웠습니다.

'SK C&C 합병에 반대표를 던진 전문위원회가 삼성물산 합병에도 반대할까 봐 맡기지 않았다'는 의혹까지 제기됐습니다.

이에 대해 홍완선 본부장은 앞선 국정감사에서 "삼성물산 합병 건은 사안 자체가 중대해 내부적인 의결권 행사 지침과 법리적 협의를 거쳐 결정했다"고 해명했습니다.

국민연금이 의심받는 이유 ④ "비밀리에 이재용 만났다"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합병 건을 어떻게 판단할지에 큰 관심이 쏠리던 지난해 7월 초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열어 합병 찬성을 결정합니다. 이 사실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이 밝히면서 드러났습니다.

홍 본부장은 "투자와 관련된 의견을 듣기 위해 만났다"고 했지만, 홍 본부장의 상급자인 최광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나도 몰랐다. 부적절한 처신이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사안"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 합병 비율이 왜곡됐다는 논란이 뜨거운 상황에서 합병 주체인 삼성물산 경영진이 아니라 합병의 최대 수혜자가 될 이재용 씨를 만났다는 사실은 더 큰 논란을 불렀습니다.

홍 본부장이 현 정부의 실세로 불리는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와 대구고 동기동창이라는 점까지 부각되며 '부적절한 처신'의 배경을 놓고 여러 추측이 돌았습니다.

끝나지 않은 논란...법원 "삼성물산 가치 산정 잘못"

국민연금의 지원으로 합병은 성사됐지만, 이런 의혹과 논란들은 결국 법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지난 5월 서울고등법원은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판결을 냈습니다. 일성신약과 소액주주 등이 '옛 삼성물산이 합병 때 제시한 주식 매수청구 가격(합병에 반대하는 주주가 인정받는 주식 가격)이 너무 낮다'며 이의를 제기한 사건에서 1심을 뒤집고 삼성 측이 제시한 가격보다 16%가량 높은 6만 6,602원이 적정하다고 결정한 겁니다.

재판부는 나아가 삼성물산이 대주주 일가를 위해 의도적으로 주가를 낮게 관리하고,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주식을 팔아 주가 관리를 도와줬을 개연성이 있다는 지적까지 결정문에 담았습니다.


시민단체인 '내가만드는복지국가'의 계산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이 적정하다고 결정한 삼성물산 주가에 근거해 합병 비율을 재산정하면 1:0.35는 1:0.414 정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 비율로 합병이 결정됐다면, 국민연금이 보유하는 통합 삼성물산 주식은 현재보다 1백 10만 주가량 늘어납니다.

국민연금이 합병 비율에 대해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고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연금 자산을 788억 원가량(내가만드는복지국가 추산치) 손해봤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다른 소액주주들도 큰 손해를 본 반면, 이재용 씨 일가는 4천7백억 원가량의 이득을 본 것으로 추산됩니다.

삼성물산은 법원 판결을 납득하기 어렵다며 재항고했고, 소액주주들 또한 삼성물산의 가치가 더 높게 평가돼야 한다며 재항고했습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자체를 무효로 해달라는 소송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긴 홍완선 전 국민연금 본부장을 삼성물산 경영진과 함께 배임 등의 혐의로 지난 6월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지난 6월 16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관련 배임·주가조작 혐의 고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지난 6월 16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관련 배임·주가조작 혐의 고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설마'론 잠재운 '최순실 게이트'...검찰 수사 주목

국민연금이 국민이 맡겨놓은 자산을 훼손하면서까지 특정 재벌의 경영권 승계를 지원했다는 의혹은 종종 반론에 부딪혀왔습니다. 합병 후 '시너지' 효과로 얻을 이익을 더 크게 본 것 아니겠느냐는 '장기적 관점의 판단'론과 더불어 국민연금이 그렇게까지 무리수를 둘 까닭이 없지 않느냐는 '설마'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삼성이 최순실 씨 회사로 많은 돈을 직접 보낸 사실이 밝혀지면서 '설마'론이 무색해졌습니다.

삼성이 최순실 씨 회사인 비덱스포츠(당시 코레스포츠)로 35억 원을 보낸 게 지난해 9월쯤입니다. 공교롭게도 국민연금의 지원으로 삼성물산 합병을 성사시킨 지 두 달가량 지난 시점이죠. 이 돈은 최 씨의 딸 정유라 씨의 훈련과 말 구입 등에 쓰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삼성은 승마협회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180억 원대 자금을 더 지원하기로 예정해뒀습니다.

최 씨 측에 돈을 직접 준 것으로 확인된 기업은 현재까지 삼성뿐입니다. 왜 삼성만 수십억 원을 직접 건넸는지, 그 시점이 삼성물산 합병이 성사된 직후인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인지 등은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대목입니다.

'최순실 게이트' 수사와 삼성물산 합병 건을 둘러싼 소송과 고발 건이 복합적으로 진행되면서 '국민연금이 정말 삼성을 위해 국민을 배신했는지'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검찰과 법원이 퍼즐을 제대로 짜맞추지 않으면 진실이 가려지지 않은 채 잊혀질 수도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국민 대다수의 노후 버팀목이죠. 이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이야기에 우리가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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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최순실-삼성-국민연금?’ 정말 국민을 배신했나
    • 입력 2016-11-12 10:01:21
    • 수정2016-11-23 17:46:39
    취재후·사건후
"국민연금은 국민들 돈으로 삼성 손들어주고, 삼성은 최순실 말 사주는 구조가 옳은 거냐?" 지난달 말 국회에서 한 야당 의원이 법무부 장관에게 질책하듯 꺼낸 말입니다. '삼성-국민연금-최순실(박근혜 대통령)' 간에 부적절한 거래 의혹을 제기하는 야권의 목소리는 이번 주 들어 더 커졌습니다.

'최순실 게이트'가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최상단에 있는 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을 둘러싼 의혹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고 있는 건데요. 소송과 고발까지 얽혀 현재 진행형인 이 사안을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중요했던 이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옛 에버랜드)의 합병은, 3년 전부터 이어져 온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에서 핵심에 해당합니다. 이 합병을 통해 탄생한 (뉴)삼성물산에서 이재용 씨를 비롯한 일가는 지분 30.4%를 보유하게 됐고, 이재용 씨는 최대주주(17.08%)가 됐습니다.

이재용 씨가 최대주주인 '뉴 삼성물산'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삼성그룹 핵심 계열사들의 지배구조를 표로 그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뉴 삼성물산을 통해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들에 대한 확실한 지배력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러니 이재용 씨 일가 입장에서는 이 합병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과제였지요.

합병 비율, 왜 논란 일었나?

삼성은 이런 그림을 그려놓고 2015년 5월 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계획을 공시합니다. 주주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을 1 대 0.3500885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이 합병 비율을 놓고 큰 논란이 벌어집니다. 제일모직 1주의 가치를 삼성물산 3주와 비슷하게 쳐준다는 합병 비율이 제일모직에 지나치게 유리하게 산정됐다는 비판이 불거졌습니다.

당시 이재용 씨 일가는 제일모직 주식(지분율 42.2%)을 삼성물산 주식(지분율 1.4%)보다 훨씬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대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삼성물산의 가치를 일부러 낮게 매긴 게 아니냐는 겁니다.
삼성 측은 합병 비율을 산정할 때 두 회사의 5월 22일 주식 가격을 기준으로 '객관적으로' 계산했다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는 당시 삼성물산이 보유한 계열사 주식의 가치만 13조 원인데, 삼성물산 주식의 시가총액이 이보다 적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자산과 수익 가치로 따지면 삼성물산이 제일모직보다 가치가 더 높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삼성물산 주가가 크게 저평가된 상황에서 당시 주가만 가지고 합병 비율을 결정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겁니다.

한발 더 나아가, 증시에서는 삼성물산의 주가가 낮았던 이유를 놓고 '음모론'까지 불거졌습니다. 2015년 상반기에 건설 경기가 좋아져 주요 건설사들의 주가가 상승했는데 삼성물산 주가는 하락했다는 게 그 근거였습니다. 삼성물산이 합병 비율 산정 시점에서 주가를 낮추려고 일부러 영업을 확대하지 않고 해외 수주를 숨겼으며 계열사로 실적을 빼돌리기도 했다는 의혹들이 제기됐습니다.

합병 비율에 대한 논란이 커지며 삼성물산 주식을 갖고 있는 주주 가운데 상당수가 반발했습니다. 지분 7%가량을 보유한 외국계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합병에 반대한다고 밝히면서 이에 동조하는 외국인 지분이 27%까지 늘었습니다. 합병에 찬성하는 삼성 쪽 우호 지분은 20%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합병 여부를 결정하는 열쇠를 쥐게 됐습니다. 증시에서는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지난해 7월 10일 합병에 찬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민연금의 지원에 힘입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은 주주총회에서 과반 득표에 성공했습니다.

국민연금이 의심받는 이유 ① "SK 합병 때와 달랐다"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할 거라는 시각이 우세했던 이유는 뭘까요? 국민연금이 제일모직 지분(4.8%)보다 삼성물산 지분(11.2%)을 두 배 넘게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성물산 주주에게 더 불리한 합병 비율에 반대하는 것이 국민연금이 가진 지분 가치를 극대화하는 합리적 선택이라고 본 겁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비율 논란이 한창인 지난해 6월 24일 국민연금이 (주)SK와 SK C&C의 합병 건에 대해 내린 결정은 시장 참가자들의 이런 판단에 무게를 더 실어줬습니다. 당시 국민연금은 (주)SK와 SK C&C의 합병 비율을 문제 삼아 합병에 반대했습니다.

1대 0.73 정도인 SK C&C와 SK의 합병 비율이 자산과 수익 가치에 비춰 SK C&C에 유리하게 책정됐고, 이는 SK C&C의 지분율이 높은 최태원 회장 일가의 이익을 위해 SK 주주들의 이익을 훼손한 것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당시 국민연금은 SK와 SK C&C의 지분을 각각 7.2%와 6.9%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SK 지분을 더 많이 보유한 만큼 SK 주주에게 불리한 합병 비율에 반대한 것입니다.

국민연금이 SK 합병 건을 반대한 사실이 알려지자, 당일 증시에서 삼성물산 주가가 급등하고 제일모직 주가가 급락했습니다. 시장 참가자들이 SK-SK C&C 합병에 대해 보여준 국민연금의 판단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기대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건을 찬성한 데 대해 지난해 9월 국회 정무위 국정감사에 출석한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은 "삼성물산 합병 건은 SK와는 달랐다. 충분한 가치 평가를 거쳐 결정했다"고 해명했습니다.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가운데)과 최치훈 삼성물산 대표(왼쪽)가 2015년 9월14일 금융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질문을 받고 있다.
국민연금이 의심받는 이유 ② "자문기구는 반대했다"

국민연금의 운용 지침을 보면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은 '주주 가치와 국민연금의 이익'으로 돼 있습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세계 1위와 2위의 의결권 자문회사인 ISS와 글라스루이스가 불합리한 합병 비율 때문에 주주 가치가 훼손됐다는 이유로 합병에 반대하는 권고 의견을 냈습니다. 국내에서도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을 맡고 있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CGS)과 서스틴베스트 등이 반대를 권고했습니다.

공식 자문기구와 세계적인 자문업체들의 반대 권고와 다른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 국민연금은 영업비밀에 해당한다며 구체적인 이유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책임자인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은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내부적으로 충분한 가치 평가를 거쳐 결정한 결과"라고만 밝혔습니다.

국민연금이 의심받는 이유 ③ "전문위원회 거치지 않았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결정은 내부 인사들로 구성된 투자위원회에서 이뤄지지만,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회'를 거쳐 결정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식적인 의결권 행사 지침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당시 증시에서는 삼성물산 합병 건과 관련해 합병 비율 논란이 뜨거운 점, 국민연금이 합병 성사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점, 자문업체들이 반대 권고를 한 점 등을 두루 감안할 때 국민연금이 결정을 전문위원회에 맡길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전문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투자위원회'에서 찬성 결정을 내렸습니다. 불과 한 달 전, SK-SK C&C 합병 건에 대해 의사 결정을 할 때는 전문위원회를 거쳤기 때문에 그보다 논란이 더 큰 삼성물산 합병 건을 내부 인사끼리 결정한 것은 더욱 시장을 납득시키기 어려웠습니다.

'SK C&C 합병에 반대표를 던진 전문위원회가 삼성물산 합병에도 반대할까 봐 맡기지 않았다'는 의혹까지 제기됐습니다.

이에 대해 홍완선 본부장은 앞선 국정감사에서 "삼성물산 합병 건은 사안 자체가 중대해 내부적인 의결권 행사 지침과 법리적 협의를 거쳐 결정했다"고 해명했습니다.

국민연금이 의심받는 이유 ④ "비밀리에 이재용 만났다"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합병 건을 어떻게 판단할지에 큰 관심이 쏠리던 지난해 7월 초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열어 합병 찬성을 결정합니다. 이 사실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이 밝히면서 드러났습니다.

홍 본부장은 "투자와 관련된 의견을 듣기 위해 만났다"고 했지만, 홍 본부장의 상급자인 최광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나도 몰랐다. 부적절한 처신이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사안"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대주주의 이익을 위해 합병 비율이 왜곡됐다는 논란이 뜨거운 상황에서 합병 주체인 삼성물산 경영진이 아니라 합병의 최대 수혜자가 될 이재용 씨를 만났다는 사실은 더 큰 논란을 불렀습니다.

홍 본부장이 현 정부의 실세로 불리는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와 대구고 동기동창이라는 점까지 부각되며 '부적절한 처신'의 배경을 놓고 여러 추측이 돌았습니다.

끝나지 않은 논란...법원 "삼성물산 가치 산정 잘못"

국민연금의 지원으로 합병은 성사됐지만, 이런 의혹과 논란들은 결국 법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지난 5월 서울고등법원은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판결을 냈습니다. 일성신약과 소액주주 등이 '옛 삼성물산이 합병 때 제시한 주식 매수청구 가격(합병에 반대하는 주주가 인정받는 주식 가격)이 너무 낮다'며 이의를 제기한 사건에서 1심을 뒤집고 삼성 측이 제시한 가격보다 16%가량 높은 6만 6,602원이 적정하다고 결정한 겁니다.

재판부는 나아가 삼성물산이 대주주 일가를 위해 의도적으로 주가를 낮게 관리하고, 국민연금이 삼성물산 주식을 팔아 주가 관리를 도와줬을 개연성이 있다는 지적까지 결정문에 담았습니다.


시민단체인 '내가만드는복지국가'의 계산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이 적정하다고 결정한 삼성물산 주가에 근거해 합병 비율을 재산정하면 1:0.35는 1:0.414 정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 비율로 합병이 결정됐다면, 국민연금이 보유하는 통합 삼성물산 주식은 현재보다 1백 10만 주가량 늘어납니다.

국민연금이 합병 비율에 대해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고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연금 자산을 788억 원가량(내가만드는복지국가 추산치) 손해봤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다른 소액주주들도 큰 손해를 본 반면, 이재용 씨 일가는 4천7백억 원가량의 이득을 본 것으로 추산됩니다.

삼성물산은 법원 판결을 납득하기 어렵다며 재항고했고, 소액주주들 또한 삼성물산의 가치가 더 높게 평가돼야 한다며 재항고했습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자체를 무효로 해달라는 소송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긴 홍완선 전 국민연금 본부장을 삼성물산 경영진과 함께 배임 등의 혐의로 지난 6월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지난 6월 16일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관련 배임·주가조작 혐의 고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설마'론 잠재운 '최순실 게이트'...검찰 수사 주목

국민연금이 국민이 맡겨놓은 자산을 훼손하면서까지 특정 재벌의 경영권 승계를 지원했다는 의혹은 종종 반론에 부딪혀왔습니다. 합병 후 '시너지' 효과로 얻을 이익을 더 크게 본 것 아니겠느냐는 '장기적 관점의 판단'론과 더불어 국민연금이 그렇게까지 무리수를 둘 까닭이 없지 않느냐는 '설마'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삼성이 최순실 씨 회사로 많은 돈을 직접 보낸 사실이 밝혀지면서 '설마'론이 무색해졌습니다.

삼성이 최순실 씨 회사인 비덱스포츠(당시 코레스포츠)로 35억 원을 보낸 게 지난해 9월쯤입니다. 공교롭게도 국민연금의 지원으로 삼성물산 합병을 성사시킨 지 두 달가량 지난 시점이죠. 이 돈은 최 씨의 딸 정유라 씨의 훈련과 말 구입 등에 쓰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삼성은 승마협회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180억 원대 자금을 더 지원하기로 예정해뒀습니다.

최 씨 측에 돈을 직접 준 것으로 확인된 기업은 현재까지 삼성뿐입니다. 왜 삼성만 수십억 원을 직접 건넸는지, 그 시점이 삼성물산 합병이 성사된 직후인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인지 등은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할 대목입니다.

'최순실 게이트' 수사와 삼성물산 합병 건을 둘러싼 소송과 고발 건이 복합적으로 진행되면서 '국민연금이 정말 삼성을 위해 국민을 배신했는지'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검찰과 법원이 퍼즐을 제대로 짜맞추지 않으면 진실이 가려지지 않은 채 잊혀질 수도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국민 대다수의 노후 버팀목이죠. 이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이야기에 우리가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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